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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65 일개 살리기

by 윤영진 posted Jan 02,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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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앰프 다른 부분은 다 마음에 맞게 튜닝이 되었는데, 결국 아쉬운 것은 초단관인 6SN7이다. 이것이 관이 바뀔 때마다 너무 크게 음질과 음색이 바뀐다.
GE관은 매끄럽고 예쁜 소리기는 하지만 옆에서 대역 밸런스를 보면 마치 통마늘 모양으로 중저역이 너무 부풀어 버린다.
RCA관이나 실바니아 관은 대역 밸런스가 코카콜라 병모양이 된다.
혹시나 껴 본 소브택 관은 에펠탑 모양으로 중역대가 허전해 버린다.

남는 게 힘과 시간이라고, 스글 지글거리는 B65를 고문했다. 우선 핀의 표면을 잘 닦고, 핀 끝의 납땜을 다시 했다. 그리고 테스터를 이용해서 히터만 5볼트 걸고, 플레이트 전압을 걸지 않고 하루 밤낮을 지졌다.
노력의 성과인지 지글거림이 많이 줄었다. 스피커 앞 70CM 쯤 가야 들릴 정도로.... 혹시 노이즈가 줄기를 바라는 나의 염원이 나의 청각 신경을 마비시켰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제야 소리가 제대로 난다. 내가 원했던 소리다.

일본의 스가노씨는 자신의 전공인 피아노 녹음과 관련해서, "피아노도 현악기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한 일이 있다. 피아노는 타건 악기이지만 다른 직접 타악기와는 달리 현을 건으로 울려서 소리를 내는 악기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녹음에서나 재생에서나, 지나치게 초동음의 강직함을 내세워서는 안 된다는 의미이다. 더 나아가 타건의 초기의 강한 펄스 이후의 여음의 중요성을 중시한 말이다. 그러나 머리로는 그 말을 이해했지만 귀로나 가슴으로 이해하지는 못했었다.

B65로 인해 소리가 마음을 잡자, 갑자기 평소 잘 듣지 않던 피아노가 듣고 싶어졌다. 스가노씨가 말한 의미가 자꾸 뇌리를 파고들었다.

부조니의 샤콘, 브람스의 카프리치오, 프로코피에프의 소나타 등등을 두서 없이 들었다. 이제야 스가노씨의 느낌을 조금 이해한 기분이다. 초동 펄스의 각이 상당히 완만해지고 여음이 매우 아름답게 들린다.
관 하나 제대로 튜닝된 결과로는 놀랄만한 경험이다.

오디오 튜닝을 하면서 자꾸 '붓'과 '와인'이 머리에 맴돌았다. 오디오는 이 두 가지 기호품(붓도 애호가에게는 일종의 기호품화 된다)은 오디오와 많이 닮았다.
붓은 약 2천 년 전쯤 진나라 몽염이라는 사람이 발명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중국은 물론 한자 문화권 문인들은 붓에 대한 집착이 대단했다. 중국의 백거이는 안휘성 석산의 산토끼털(가늘고 자줏빛이라 했다)로 만든 붓을 시를 지어 칭송했고, 안휘성 휘주는 붓, 종이, 벼루, 먹 등 문방사우의 세계최고품 산지로 유명하다.

붓은 토끼털이 가장 대중적이나 필모의 품질에 따라 선별에 따라 품질이 천차만별이다. 양 어깨죽지 털은 편차가 비교적 적은 모범적 재료이다. 족제비 꼬리털은 탄력이 좋다. 그러나 역시 붓 중의 왕이라 할 수 있는 것은 서수필이다. 쥐의 수염을 모아 만든 붓이라 만들기도 매우 어렵고 가격도 천정부지이다. 추사 선생도 중국의 서수필을 구하기 위해 애를 쓰던 일화가 전해진다.

먹물을 머금은 붓의 모양은 밑둥부터 끝까지 오디오의 저역, 중역, 고역과 흡사하다. 글씨를 써 보면, 중간 굵기의 획으로 일관되면 글이 단정하기는 하지만 맛이 없고, 역시 굵은 획과 실오라기 같이 이어지는 가는 획이 함께 어울려야 글 맛이 산다.
문제는 모필의 재질이다. 어느 것은 힘주어 필을 긋고 나서 펴지는 탄력과 속도가 늦다. 어떤 것은 지나치게 필모가 강직해서 마치 매직펜으로 글을 쓰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어느 날 하이엔드 오디오를 들으며 로트링 제도용 펜으로 선을 긋는 기분이 들었다. 정밀하기는 하지만 붓으로 써 내려간 글 맛이 더 그리워진 경험이었다.

나는 늘 오디오 튜닝의 이상향을 서수필에 두고 있다. 그러나 아직 나는 그 비싼 서수필을 가져보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아쉬운대로 족제비 꼬리털을 경험상의 이상으로 여긴다.

와인도 비슷하다.
지금은 호주나 칠레, 캘리포니아 등지에서도 최고급 와인이 인기를 얻고 있지만 그래도 역시 와인은 프랑스를 빼고 얘기 할 수 없다.

진공관의 음도 미국관, 독일관을 최고로 치는 사람이 더 많지만, 나는 아직까지 영국관이 제일 좋다. 물리적, 음향학적 등등 어떤 측정치로도 영국 고전관이 독일관이나 미국관보다 더 좋다는 근거는 없다. 그리고 대개 영국관은 약하다. 같은 회사에서 만든 같은 관이라도 편차가 있기 쉽다.

더 비싸고 좋은 출력관이 많지만, 내가 들어 가장 좋은 관은 PX4이다.
마치 부르고뉴 지방 꼬트 드 본느의 꼬르똥 와인을 마실 때의 느낌을 갖게 한다. 피노 느와의 떫은 맛 뒤에 감춰진 향미를 연상시킨다.
꼬르똥 와인은 기이하게도 유명 백포도주 산지인 꼬트 드 본느의 유일한 적포도주 농원에서 산출된다.

PX4는 가장 독일관 소리에 근접한 영국관이란 평을 듣는다.
독일산 백포도주 맛을 느끼게 하는 샤도네이 명산지에서 나오는 유일한 적포도주처럼, PX4도 독일관 기질을 풍긴다.

6SN7을 선택할 때도 그랬다. 미국산 6SN7 관들은 보르도 와인의 카버넷 쇼비뇽이나 메를로 종의 향이 난다. 음색이 짙고 감미가 풍부하다.
그러나 영국관인 ECC32나 B65는 부르고뉴 와인의 향이 난다. 약간 색이 엷고, 앵두향을 품은 섬세한 맛이 난다. 처음에는 타닌의 맛이 진해서 텁텁하지만 혀에 익숙해지면서 오묘하게 숨어 있던 향들이 우아하게 풍긴다. 영국관들이 그렇다. 여음이 좋다.

마침 집에 VDQS급은 아니지만 뺑 드 뻬이 급의 부르고뉴 와인이 한 병 있다. 와이프와 한 두 잔 마시며 비위를 맞춰 주고는 한 잔 크고 넓은 브루고뉴 글래스에 왕창 따라 들고 내 방으로 잠행해야 하겠다.

와인을 홀짝거리며 되살아난 B65 한 알과 기쁨을 나누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