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점점 소박한 시스템으로

by 윤영진 posted Aug 03,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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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동안 명망 잇고, 비싸고 좋은 기기에 대한 욕심에 시달렸습니다.
물론 이를 뒷받침할 경제력이 있다면 괜찮지만, 마누라를 속여서 빚을 내지 않으면 감당하기 어려운 욕심이었습니다. 실제로 이런 일이 잦았고, 평생 다툼 없이 사는 부부간에 거의 유일한 다툼의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아주 값싸고 소박한 기기들로 음악 듣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입니다.

스피커는 완전히 족보에서 벗어난 잡종 젠센으로 우퍼와 통, 중역 혼만 젠센이고 드라이버와 트위커는 독일계, 네트워크는 영국산 자가 개조품.....

CDP는 중국 조립 40만원짜리 날림...
DAC는 10만원에 미국에서 고물 들여다가 내가 내부를 손을 본 허접....
튜너는 고물 쿼드 3....
LP플레이어는 영국산 미첼 고물에 일제 루스터 중급 암을 얹고, 바늘은 기네스 북에 "세계 최저가 MC카트리지"로 기록된 AT의 7만원 짜리 ....
MC승압 트랜스만 상대적으로 고급인 WESTREX의 희귀종(코터를 한번에 퇴출시킨) ....
프리앰프는 6J5 를 2단 구성한, 20만원 쯤 하는 싸구려 WE 트랜스를 단 자작 프리....
파워앰프는 거져 남 줘도 안 주워갈 허름한 2A3 싱글....

고물과 허접과 날림으로 구성된 시스템입니다.

물론 1천만원을 호가하는 빈티지 파워앰프도 2조나 있고, 더 고급의 스피커 유닛도 캐비넷에
들어 있고, 고가의 고전관도 모아 놓은 것이 좀 있습니다.
CDP도 2천만원쯤 하는 걸 빌려다가 물려보기도 했고....
케이블도 고가의 것을 사보기도 하고 빌려다 물려보기도 하지만 오래 가지 못하고
결국 허름한 자작 케이블로 갑니다.

당연히 비싸고 좋은 걸 물려 보면 좋다는 걸 느끼고 사용에 욕심도 납니다.
그런데 이 욕심이 전처럼 참지 못할 정도로 강렬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자꾸만, "다른 고급 기기가 좋기는 하지만, 내가 쓰는 허접 기기보다 가격만큼 안 좋다."는 생각이 설득력을 발휘합니다.
생각이 점점 검소해진 것입니다.

오디오 기기란 것이 일종의 "인성"이나 "감정"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문득 듭니다.
아무리 비싸고 좋은 기기도 사용자가 기기에 대해서 불신하거나 미워하면 소리도 점차 안 좋아지고 자주 말썽을 부립니다.
그런데, 아무리 오래된 허접 기기라도 사용자가 진실된 애정을 보이고 사용하다 보면 고장도 잘 안 일으키고, 소리도 점점 잘 내주는 걸 느낄 때가 많습니다.

마누라도 역시 같습니다.
오랜 동안 조강지처 속이고 젊고 아리따운 여자들에게 눈 돌리고 살았는데,
그 때에는 마누라가 점점 늙어가는 것만 눈에 들어오고, 역시 마누라도 자신을 가꾸지 않고 체중도 많이 불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밖으로 눈 안 돌리고 마누라에게 상냥하게 대하자, 마누라가 몸매도 가꾸고 미용에도 신경을 써서 주위 사람들이 날씬해지고 예뻐졌다고 찬탄을 하게 되었습니다.
4개월 사이 무려 7KG이나 감량을 하고 날씬이가 되었습니다.

조금 두렵기도 합니다. 마누라가 그동안 나의 비리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란
"제 발 저림" 증상입니다.

결론은 기기 바꿈질보다는 갖고 있는 기기를 다듬고 어루만져서 지니고 있는 최상의 능력을 발휘하도록 만드는 것이 오디오를 좋아하는 최선의 길이란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는 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