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웅산의 노래에 취해서

by 윤영진 posted Sep 25,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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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달 마지막 토요일이면 평창동 '김준 재즈클럽'에서 재즈 싱어 '웅산'의 공연이 열립니다.
요즘 나윤선이나 말로 등등 국내 젊은 재즈 싱어들이 많이 등장해서 저마다 실력을 자랑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저는 웅산을 가장 좋아합니다.

주위에서 저하고 사귄다(?)는 오해를 받을만큼 저에게 잘 해 주시는 김준 선생 사모님은 "솔직히 말해봐! 노래가 좋은 거야 외모에 반한거냐?"라고 은근히 내 속셈의 부끄러운 부분을 꼬집습니다.
사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고, 노래도 좋은데 외모까지 출중하니 달리 흠 잡을 수가 없습니다.

어제 공연은 근래 들었던 중에서 가장 좋았습니다.
오후에 여자 후배하고 "너는 나의 인생"이라는 신파 영화를 보면서 눈물께나 흘리고 극장을 나서는데 김준선생 사모님이 전화를 주셨습니다. "자네 좋아하는 된장국 끓여놓았으니, 공연전에 와서 저녁먹어"라고 ....
김선생 사모님 음식솜씨는 장안에 익히 알려져 있습니다. 동서양 음식을 넘나들면서 다 맛있게 만드시는데, 특히 한국 음식 그 중에서도 가장 기본적인 국과 나물 같은 것은 절로 "예술이다!"라는 감탄이 나오게 만듭니다.
사실 그 전에 재벌 L그룹 G회장님께서 저녁을 사 주신다고 해서 '반 약속'을 해 놓은 상태인데,
어쩝니까.... 아무리 회장님 단골의 고급 음식점 음식도 좋지만 '예술 된장국'의 유혹이 더 큰걸...

금요일 저녁부터 토요일 새벽까지 통음을 하고 겨우 낮에 복지리 국물로 속을 달랜 상태에서 "예술 된장국" 소리를 듣자마자 입에는 침이 가득 고이고, 쓰린 위장은 갑자기 제상태를 찾는 것입니다.

연로하신 회장님께는 대단히 실례지만, "저녁 따로 드시고 카페로 2차 오십시오!"라고 강권을 드리고 평창동으로 향했습니다. 다행히 회장님과 일행분들 댁이 전부 평창동이라 무리한 부탁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충무로에서 평창동 가는 길에 광화문 일대가 주차장입니다. 고연전 뒤풀이 때문인지....
1시간 훌쩍 넘겨서 도착해서 인사도 대충 하고 밥부터 먹기 시작했습니다.
숙취가 겨우 풀린 속에 예술된장국이 들어가니 사르르 속이 풀려버리더군요.^^

예약손님들이 늦어서 공연이 1시간이나 늦게 시작되는 바람에 느긋하게 저녁을 먹었습니다.
공연전에 회장님 일행 3분이 도착하셨는데, 70대 연세에는 재즈가 잘 안 맞는가 봅니다.
"늙어서 무식하단 소리 안 들으려면 어찌하겠나, 좋은 척 들어야지..."라고 .....
다행히 김선생께서 권해주신 칠레산 와인이 질이 좋아서 일단 흡족하신 표정으로 넘어갔습니다.
물론 노래 두 곡 끝나자 슬며시 나가셨지만.....

이날 웅산의 노래 중 클라이막스는 'Misty Blue'였습니다. 대개 공연을 할 때 들어보면, 전체 시간 중
2/3쯤을 넘겼을 때가 가장 좋은 목소리가 나옵니다. 한 마디로 성대가 에이징이 되고 몸에 힘이 풀리며 코 끝에 땀이 송글송글 맺히는 시간이 그 쯤인 것 같습니다.

타이트한 진 슬랙스에, 배가 살짝쌀짝 드러나는 레이스 무늬의 짧은 앞버튼 셔츠, 홀쭉한 재킷을 전부 블랙 컬러로 입은 웅산은 보는것만으로도 예술입니다.
옆에서 나의 넉 잃은 추태를 보다 못한 여자 후배는 자꾸 나보고 "침 좀 닦고 쳐다 보라!"고 핀잔을 주고....

야누스나 블루노트, 재즈스토리, 천년후에 등 서울의 재즈 클럽을 다녀보면, 시설과 공간은 좋은데 이상하게 음악이 귀와 마음에 착착 감기는 맛이 안 나는 곳이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이곳 클럽은 그런 위화감이 전혀 안 듭니다. 공간의 크기가 아담한 탓일 겁니다.
재즈는 특히 "공간의 크기"에 영향을 많이 받습니다.
대충 30-40평 정도가 가장 좋은 것 같습니다. 이 정도 크기면 연주자와 청중의 거리가 10m 를 넘지 않고 일체감이 형성됩니다. 마이크를 사용하지 않아도 될 정도의 공간....

같은 웅산의 같은 노래를 야누스에서 들었을 때보다 평창동에서 듣는 것이 훨씬 좋습니다.
웅산 역시 그런 말을 합니다. "넓은 공간에서는 마음이 불편하고 노래도 잘 안 된다."고.....

음식에 취하고, 연주와 노래에 취하고, 와인에 취해 아무 생각이 없어야 하는데....

하- 이눔의 오디오병은 시도 때도 없이 고개를 들이밉니다.
집에서 재생했던 음과 실연주와의 비교분석을 위해서 뇌가 고속연산을 하는 겁니다.^^
특히 요즘 골몰하고 있는 트랜스프리의 음 튜닝 때문에 더 신경이 곤두서서 들었습니다.
콘서트홀 같이 거대한 장소에서 심포니를 듣고 이걸 좁은 집의 시스템 소리와 비교하는 무의미하다고 생각합니다. 너무 공간의 차이가 크니까 비교 자체가 어불성설인 셈입니다.
그러나 30-40평의 재즈연주장에서의 실연주 음향은 집에서 비교하는데도 큰 무리가 없습니다.

따라서 오디오 음 튜닝하는데는 클래식 보다는 재즈가 훨씬 요긴하고 편리합니다.

역시 실연주에 비교하면 오디오시스템의 결점과 단점이 쉬 드러납니다.
스내어 블러쉬 같은 사각거리는 고음, 베이스의 우미한 울림... 이런 것이 아직 부족하다는 것을 느낍니다. 다만 육성의 재생에 있어서는 직열3극관과 혼의 음색이 얼추 따라간다는 것을 느끼고 기분이 좋았습니다.

위장이란 것이 단순하고 아둔해서 된장국 한 그릇에 풀려버리더니 와인이 한 없이 들어갑니다.
결국 1시쯤 되어 일어나려고 하는데, 사모님이 "기왕 늦은 거 해장까지 해버리고 가라!"며 잡습니다.
뭔가 하고 기다리다 보니 하- '북어국'을 또 내 놓으십니다.

이 분의 북어국 또한 김선생의 술꾼 친구들 사이에 '절품'으로 소문난 겁니다.
이걸 후딱 비워버리니까, 또 행복한 기분이 사-알 듭니다.

다음 주에 샌프란시스코 출장가면 밤에 뒤지고 다닐 재즈클럽을 미리 수배해 놨는데,
국정감사니 뭐니 해서 갈수가 없어서 실망이 컸는데, 토요일 웅산의 노래와 맛있는 된장국, 북어국 때문에 기분이 싹 풀어져 버렸습니다.

혹시 평창동 재즈클럽 가실 분들이 있다면, 다짜고짜 "된장국이나 북어국 주라!"고 해도 안 줍니다.
판매하는 메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일단 사모님의 눈에 들어서 통과가 되어야 맛을 볼 수 있습니다.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