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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징의 마술

by 윤영진 posted Apr 30,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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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어떤 자작 및 빈티지 오디오 고수분께서 하신 말씀 중에,
처음 앰프를 만들었을 때, 소리가 밝고 거칠고 탁 트인 것이 있을 수 있고
약간 어둡고 답답하고 부드러운 것이 있을 수 있는데,

혹시 앞의 경우라면 조금 더 튜닝을 해야 하지만, 뒤의 경우라면 건드리지 말고 한달 쯤
일단 둬 보라고 한 조언이 있었습니다.

얼마 전 제작을 마친 PX4 싱글앰프가 바로 뒤의 경우였습니다.
사용된 관은 전부 60년 넘은 것들이고, 트랜스나 콘덴서는 전부 신품입니다.
그런데 소리가 부드럽고 은은한 것은 좋은데, 뭔가 베일에 싸인 것처럼 답답하고
저역도 풀어지고 고역도 명료하지 못하고.....
B전압을 올려볼지, 전류량을 늘려볼지, 초단관을 좀 더 증폭률이 높은 걸로 바꿔볼지.....
몇번을 적극적으로 음을 튜닝해 볼까 하는 마음에 조바심을 떨다가 전에 고수분께
들은 말도 있고 해서, 일단 시간의 마법에 맡겨두기로 하고 인내심을 발휘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어제 일요일 아침 밥을 먹고 앰프를 작동하고 나서 예열이 끝나자 마자
놀랄만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한 2-3주일 넘게 전기불로 지지고 난 시점입니다.

음이 "확-" 터져 나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풀어지던 저역은 깊게 쩌르렁거리고, 고역은 명료해지고, 중역은 맑고,
특히 평면적이던 공간감이 살아서 뒷쪽으로 깊이가 확 깊어졌습니다.

그 정도가 납득할만큼 미미한 것이라면 놀랄 일이 아닌데,
너무 차이가 커서 갑자기 앰프가 다른 것으로 바뀐 것은 아닌가 놀라서 이리저리 살표 볼 정도입니다.


  "이게 바로 에이징이구나!...."라는 신음이 절로 나왔습니다.

전에는 앰프를 오버홀하거나, 튜닝하거나, 제작을 해도 주로 개조를 하다 보니
사용되는 모든 부품(트랜스, 콘덴서, 저항....) 등이 대부분 본래 사용하던 중고품과 신품이
섞여 있어서 그런지 에이징이 되는 느낌도 서서히 조금씩 받았는데,
이번처럼 모든 부품을 신품으로 일시에 땜질해서 사용하다 보니,
에이징이 어느 날 갑자기, 한번에 확 터지듯이 된 것입니다.

마치 시내에서 오랜동안 살살 몰던 답답한 자동차를 차 안 다니는 고속도로에서 RPM 높여서
화끈하게 밟아준 다음에 엑셀을 밟는 느낌과 비슷합니다.

다시 처음 결론으로 돌아가서,
고전관을 사용한 자작앰프는 처음 완성하고 들었을 때, 조금 답답하고 유연하고 풀어지는 듯한 느낌이 나는 것이 제대로 만들어진 것이란 점입니다.
이 때 금방 손을 대지 말고 한달 정도는 밥 뜸들이는 정성으로 불을 지피며 기다려야 합니다.
처음부터 강하고 터진 느낌이 든다면, 나중에 에이징 되고 나서 이걸 부드럽게 튜닝하느라
고생을 한 번 더 하게 됩니다.

진공관 앰프를 20년을 넘게 들어도 신품을 들인 경험이 없고,
주로 고물 빈티지만 만지다가 보니, 이처럼 남들은 수도 없이 경험했을 유치한 경우를
마치 대단한 일이라도 겪은 듯 말하게 된 점이 쑥스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