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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오의 재생 音에 대한 나의 기준(02)

by 심상용 posted Jun 05,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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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오의 재생 音에 대한 나의 기준(02)

소위 하이엔드 적이라고 칭하는 오디오에서 연주되어지는 사운드의 장점은 넓은 대역의 에너지를 발현한다는 점이다. 빈티지 진공관을 이용한 오디오의 재생음악을 추종하는 나의 개인적 취향이 어느 때는 흔들려 이와 같은 방향으로 바꾸어 갈까하고 잠깐 생각을 하게 만드는 요소가 참 매력이다.

이런 점을 너무 강조하다 보면 빈티지 오디오를 운용하는 경우에도 해당 된 다고 보는데, 넓이는 썩 괜찮았으나, 너무 악기들의 소리가 과장되어 튀어나오기 때문에 매우 귀를 아프게 하는 경우도 있다. 약 5분 정도 청음 하다보면 두통이 유발되어 지고 가슴이 답답하면서 인내심이 무너져 더 듣기를 포기를 하게 만든다.

음악이 연주되었을 때, 오케스트라의 연주의 무대가 두 개의 스피커를 통하여 얼마만큼 좌우 뒤로, 앞으로 펼쳐져 들려지는지를 개인적으로 정의하여 본다.

즉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을 감상한다고 하면, 연주하는 그 오케스트라 연주가 얼마만큼 대역을 확보하면서 생생한 음의 촉수를 가지고 재생되고 있느냐 하는 문제이다. 따라서 재생되는 사운드는 음의 윤곽이 전혀 드러나지 않은 멍청한 듯 뭉쳐 있지 않는 연주를, 즉 연주하는 악기들의 위치가 눈으로 음상이 마치 잡혀 올 듯 하면서 적당한 밸런스를 유지하는지를 확인하는 것이 나의 기준이다.

그러나 이 조건은 상대적인 요소가 도사리고 있기에 참 너무 애매한 부분이 너무 많다, 상대적 기준 차가 분명히 상존하기에 상대방의 재생하는 연주를 이야기 할 때 조심스런 배려가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개인적 기호에 따라 그 기준이 상대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나의 취향이 실연에 딱 맞는 재연이라고 하여 다른 사람의 튜닝 포인트에 대해 나의 주관적, 기호적인 절대적 기준으로 정의하기란 정말 곤란하고 매우 위험한 발상이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오디오를 이용한 음반에서 아름다운 예술성과 품격 있는 철학을 담아낸 연주는 참 어렵기에 힘든 고봉을 오르는 사역인지도 모른다. 천차만별한 소리를 담아낸 오디오라는 악기는 신이 인간에게 준 마지막 선물인지도 모른다.

나의 음에 대한 기준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음반에 담긴 음악의 넓이와 깊이 높이라는 공간감을 얼마나 왜곡 없이 표현하고 있는가를 확인하는 과정이다. 다시 말하면 연주하는 무대의 에너지가 스피커를 통하여 나의 귀와 눈앞에서 얼마만큼 깊이와 넓이 높이를 가지고 연주되어지는지를 관조하면서 듣는 포인트이다. 주어진 오디오적 요소와 감상자의 심리 상태, 듣는 공간의 적합성 등이 어우러져 들려오는 사운드의 넓이는 개인적 능력과 취향이 빚어내는 예술의 세계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나의 넓이에 대한 기준은 너무 이상적인 말장난 같다라고 지적 할 수 있다. 좁고, 낮은 사운드, 멍청한 악기들을 살리기 위해 지휘자가 안간힘을 다 쓰는 사운드는 절대 사양한다. 한마디로 자연스러움이 좋다. 넓은 푸른 초원에 한가롭게 노니는 소들의 여유 있는 표정과 솔바람이 흐르는 맑은 코발트 빛 하늘빛이 담아진 그런 향기가 배어 든 사운드를 재현하려고 한다.

그러면서 인간적인 따스함이 결코 잃어버리지 않은 사운드를 원하니 난 별 수 없이 빈티지 진공관을 이용한 오디오를 통하여 재생되는 연주를 선택 할 수 밖에 없다. 이와 같은 조건은 어쩌면 나의 로망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느낌을 오디오의 밑판을 열고서 수 없는 땜질을 할 때마다, 선택되어 부착되어지는 다양한 부품과 선재들에게 기를 불어 놓고 기도하듯 염원한다. 그렇게 나의 오디오를 통한 연주를 위한 밤은 길고 진지하게 매일 매일 지속되어질 것이다.  

작곡가에 의해 생산된 음악과 그것을 연주하고 담아낸 지휘자, 엔지니어들의 철학과 예술의 혼은 작은 음반 속에서 그 순수한 자체로서 존재한다. 그 음악의 표현은 듣는 자와 가꾸는 자의 예술적인 소양과 지식의 깊이와 넓이 만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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