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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오질을 관통하는 관성의 법칙-벗어날 수 없어!

by 항아리 posted Sep 22,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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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저는 2001년에 처음 진공관앰프를 갖게 되었고,
 그전까지 들어오던 TR앰프에 비해 진공관앰프란 것이
어떤 나은 점도 없다는 것에 매우 실망하고 화가 났었습니다.

 만나지게 된 건 아니라고 해서 바꿔치기 보단
어떻게든 해보려는 마음이 먼저인 성격이다 보니,
그 앰프의 내부 부품들을 하나하나 바꿔가며 들어보게 되었습니다.

 요즘 제가 보는 유일한 TV프로그램이 탑밴드라는 아마튜어 밴드들의 경연 프로인데,
 거기 패자부활전에 나왔던 \'내 귀에 도청장치\'란 다소 또라이스러운 밴드의 \'실험\'이란
노래의 가사가 그때의 상황에 적절하게 어울렸습니다.

 -널 관찰하고 분석하고 실험해 보고 싶어
 널 사랑한다했던 다른 그 사람까지 해부해 보고 싶어.-

 일부 부품들의 교체로 어떤 의미있는 변화도 들을 수 없었으므로,
 결국 그 앰프는 껍데기만 남기고 모두 교체되게 되었습니다.
 완전 해부, 완전 재조립.

2. 물건 보단 사람을 보고 사람을 믿는 편이어서, 2002년에 들어선 당시 잘 알려진 속칭
\'고수\'들의 자작앰프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도저도 아니거나, 네맛도 내맛도 없거나, 지나치지 않으면 반드시 모자란 소리들에 어떤
배신감마저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 앰프들도 소리를 관찰 당하고 내외부를 분석 당하고 개별의 부품들이 실험 당하고,
전체적으로 해부 당하게 되었습니다.
 
1,2의 과정에서 현대부품들은 버려지고, 자작앰프들에 간간히 붙어 있던 옛 부품들은 살아남았습니다.
그 개별의 부품들은 차이가 분명해서 선택이 어렵지 않았습니다.
 사랑하게 된 부품들과 증오하게 된 부품들도 생겨났습니다. 그 부품들의 나이에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그것들이 태어난 시대까지 점점 호불호가 갈리게 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개별 부품들의 품성을 이해하게 되었고, 회로는 덤으로 알게 되었으며,
정해진 길을 가듯 직접 만드는 자작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그때쯤이 2005년입니다.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고 보신탕집개 3년이면 삶과 죽음의 의미를 깨우친다는 말은
거짓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막상 마음에 드는 소리를 찾는 것은 장난이 아니란 걸 점점 무겁게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아닌 소리만 잔뜩 알게 되었습니다.
 그 뒤부턴 마음에 드는 소리를 분명한 목표로 정해놓고 그 길로 나아가는 게 아니라,
 알 수 없는 미지의 무엇을 향해 아닌 것을 해결하고 치워가는 과정과 같았습니다.

 참 재미있었습니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을 고뇌와 번민의 시간만큼 해결을 맛볼 때의 기쁨은 작지 않았습니다.

 이제 2012년,
 어느덧 진공관과 첫 대면을 한지 십여 년이 지났습니다.
 강산이 변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저도 얼마만큼 흘러왔는지 알지 못합니다.
 
 어디 가서 어떤 소리를 들으면,
 그 소리를 내는 앰프를 봅니다.
 저 놈은 구제불능, 저 놈은 불가능, 저 놈은 저 요란한 포장 속에 정말 형편없는 것들이 들어있겠구나,
 저 놈은 저렇게 좋은 놈을 갖고 왜 저런 소리를 낼까, 저 놈은 조금만 건드려도 오르가즘을 느끼겠는걸...
 관찰하고 분석합니다.
 제 것이 아니므로 실험과 해부는 할 수 없고 그래서도 안됩니다.
 
 간혹 실험과 해부를 허락하는 분이나 오히려 요구하는 분들이 계신데 그 자리에서
가능성이 있어 보일 경우에만 실험과 해부를 시연합니다.
 그들은 대개 소리의 무서움과 개별의 부품들이 얼마나 중요한지 믿기지 않아 합니다. 적극적인 분은
왜 진작 인두를 잡지 않았을까 탄식하기도 합니다.
 물론 껍데기 외엔 쓸모없어 보이는 놈들은 어떤 경우에도 실험과 해부를 할 수 없습니다.

 완제품들은 그게 어떤 출신성분에 어떤 놈들이든 반드시 1,2의 과정을 되새기게 할 뿐입니다.

 저는 이제 제가 만든 앰프를 사랑합니다.
 그 앰프들에 들어있는 개별의 사연을 품은 오래된 부품들 하나하나를 사랑하고, 그 놈들이 한데
어울려서 내주는 소리를 사랑합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더 깊이 사랑할 수 있을까, 관찰하고 분석하고 실험하고 해부합니다.
 어디 다른 데에 더 나은 놈들이 있다면 견딜 수 없을 것이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저는 거기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벗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다른 분들 또한 걸어오게 된 길에서 그러하리란 생각을 합니다.
 그게 어떤 길이든.
 
 
 사족; 내가 걸어온 길이 옳고 내 길이 진리이며 최고다, 라고 자부하는 분들이 계시다면
반드시 저하고 만나 충돌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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