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얼굴 8
저는 가끔 현재 우리나라의 전공 분류가 아주 우습게 잘못되어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계, 과, 속, 종식 분류로 따진다면 아마도 계에 해당하는 분류가 문과, 이과의 분류일 것 같습니다. 그런데 분류에서는 공유되는 성격을 가진 전공들이 같은 게에 들어가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수학은 어느 쪽이냐 하면 인문대의 한 전공으로 분류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수학이나 물리학은 공학이나 의학보다는 철학이나 예술 쪽에 훨씬 가까운 과목이라는 것이지요. 어느 과학 철학자가 “과학은 예술을 닮았다(Le science ressemble L'art)"고 했지만 이것은 전적으로 사실입니다. 수학이나 과학은 관찰이나 논리에 의하기보다는 직관과 영감(inspiration)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사실은 하나의 예술이지요. 어떤 분은 묻겠지요. 그러면 왜 집합과 명제가 수학의 한 주제가 되냐고요. 사실은 그렇기 때문에 수학은 철학의 한 분야입니다. 이 부분을 철학과 공유하니까요.
이렇게 분석하자면 물리학, 생물학, 화학 등의 순수과학은 모두 인문대에 속해야 합니다. 이러한 학문들은 모두 우리의 경험에 호소하기보다는 훨씬 더 많이 우리의 상상력에 의존합니다. 자연과학의 본래 명칭은 자연철학(Natural Philosophy)이었습니다. 모두 철학의 한 분파였던 것이지요. 이러한 과목들은 기초과학이나 순수과학으로 불립니다만 어느 경우나 응용과학의 한 토대로서의 기능을 염두에 둔 명칭이지요.
그러나 제가 생각하기로는 이러한 과학들은 스스로의 존재 의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부산물이 기술(technology)에 응용되는 경우가 있다고 하더라도 본래적으로 스스로 존재하는 것으로서의 독자적인 의미를 가진다는 것입니다. 너무도 물질주의적이고 현상적 세계에 갇혀 사는 우리는 항상 ‘쓸모’에 대해 말합니다만 이러한 우리 처지가 행복하진 않군요. 생산성에 공헌하고 물질적 풍요를 불러와야만 의미가 있는 것인가요. 생산성의 향상이 우리에게 더 질 높은 생활을 보장한다는 것은 산업혁명이래의 자본주의의 달콤한 유혹이었지만, 우리 삶의 어떤 측면에서 질이 높아졌는지 모르겠습니다. 세탁기, 냉장고, 텔레비전, 에어컨 등을 노예노동으로 환산하면 가구 당 몇 명쯤의 노예를 거느린 것일까요? 텔레비전 대신 광대가 있어야 하고 에어컨 대신 부채를 부쳐주는 노예까지 있어야 한다고 계산하면 가구 당 적어도 열 명 정도의 노예를 거느린 셈은 될 겁니다. 노예 노동이 우리의 시간을 이렇게 많이 벌어주고 있는데도 우리는 계속 시간에 쫓깁니다. 여가 없이는 질 높은 삶이 없다는 것을 고려하자면 우리 삶의 질은 장구한 세월 동안 계속 나빠져 왔습니다.
동일한 질문에 대한 두 개의 상이한 답변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하지요. 예를 들어 “역사학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있다고 가정하지요. 여기에 대해 한 역사학자께서는 역사학의 효용에 대해 틀에 박힌 구구절절한 말들을 늘어놓습니다.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대화이다. 우리는 과거에 비추어 현재를 이해할 수 있고 또 과거와 현재의 대화를 바탕으로 미래의 희끄무레한 여명을 볼 수 있다. 고로 역사학의 존재의의는 분명하다.” 장엄한 선언입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 속을 차지하고 있는 가장 커다란 동기는 사실 밥그릇입니다. 역사를 전공했으니 이제 그것은 그의 숙명이 되었고 그것의 존재 의의를 인정받아야만 고등학교, 대학교에서 역사 과목의 비중이 높아질 것이고, 취업문도 넓어질 것이고, 어찌어찌 거기에 편승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역사학자님만 그런 것이 아니고 대부분의 불편부당(不偏不黨)하고 무사무욕(無私無慾)하게 보이는 언명들이 그 이면에는 간단하게도 밥그릇만 배경으로 하고 있을 때가 대부분이니 이 분만 탓할 노릇도 아닙니다. 사실 역사학의 효용에 대한 이 구차한 변명을 한 분은 우리가 우습게 봐도 될 분은 아닙니다. 역사철학에 관한 초베스트셀러인 『역사란 무엇인가』의 저자 E. H. 카아 씨입니다.
두 번째의 전적으로 상이한 답변을 한번 살펴볼까요. 어떤 역사학자는 되먹지 않게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역사학의 존재이유? 과거에 무엇인가가 발생했다. 나는 그것을 알고 싶다. 이것이 전부다.” 정말 되먹지 못한 답변인가요? 제 개인적인 생각은 “그렇지 않다.”입니다. 즉 이 답변이야말로 옳은 선언이라는 것이지요. 제 개인적인 생각은 다음과 같습니다. 확실히 우리 모두는 물질적 요구를 지니고 있습니다. 도대체 먹고 살 수 있어야 다음 일을 생각할 여지가 있으니까요. ‘목구녕이 포도청’이지요. 그러나 ‘목구녕’만이 삶의 전부는 아닙니다. 우리가 어떤 일인가를 무목적적으로 그리고 무상성을 지니고서 한다면 어쩌면 우리 삶의 의의는 거기에 있을지 모릅니다.
즉 우리가 삶의 실천적 요구를 벗어날 때 인간 고유의 가치 있는 어떤 것인가가 존재한다는 것이지요. “눈앞의 강을 건너야 할 장애물로만 바라보는 한 예술은 없다.”라고 말한 사람은 쇼펜하우어입니다만 이것은 새로울 것도 없는 언명입니다. 예술이 가능하려면 강을 건너서 자기 길을 재촉하기보다는 그 아름다움에 도취되어 다리를 찾기를 멈추고 오로지 바라보고 감탄해야 하지요. 이제부터 그는 단순한 나그네이기를 멈추고 시인이 되는 것입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보자면 오디오도 우리에게 그와 같은 무목적적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생존 경쟁의 물질적 측면에 사로잡혀 괴로운 일상을 영위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 한때는 이러한 물질들이 우리 삶의 가치 있는 부분과는 상관없었던 젊은 시절을 회상할 수 있습니다. 모두가 산의 높은 곳에 머무르며 희박한 산소에도 개의치 않고 살아갈 각오가 되어 있던 시절이지요. 그러나 모두 지상의 진흙탕으로 끌어내려졌습니다. 이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생존 경쟁에서 이기려고만 애쓰지 순결한 젊은 시절도 돌아가려하지는 않습니다. 어리고 순진했고 세상일을 아무것도 몰랐던 시절이라고 치부하면서요. 이것도 틀린 것은 아닙니다. 확실히 우린 몰랐습니다. 우리 순수함의 근거가 무지였지요. 그러나 이제 더 이상 “생각하는 것도 말하는 것도 어린애이기를 멈추었습니다.” 우리의 순수함이 의미 있는 것은 이제 성숙한 순수함이라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삶이 주는 여러 추악함, 고통 속에서 다시 한 번 순수해질 수 있는 것이지요.
우리에게 예술 감상이란 이와 같은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도구인 오디오도 이와 같은 견지에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왕왕 수단과 목적이 전도되고 의미가 무의미로 무의미가 의미로 전도됩니다. 음악을 위한 오디오가 아니라 오디오를 위한 음악이 되는 경우가 참으로 많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 부딪쳐서 우리는 두 가지를 주의해야 합니다.
먼저 투자가치로서의 오디오입니다. 저는 이런 종류의 매니아들에게는 경악을 금치 못할 때가 왕왕 있습니다. 저는 어떤 매니아들이 오디오를 하나의 재화로 간주하는 데에 놀란 적이 있습니다. 즉 투자 가치가 있는 상품으로 간주하는 것이지요. 이런 분들은 오로지 오리지널만을 사들이지 제작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물론 이 행위 자체가 일반적으로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음악 애호가를 자처하는 사람들이나 음향 박물관 운운할 경우에는 잘못입니다. 오디오 기기를 투자 대상으로 매점하는 행위는 장사꾼이나 할 짓이지 신사가 할 일은 아닙니다. 사실 다양한 계층의 다양한 교육적, 교양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오디오 취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에 준하여 각자의 즐거움을 누립니다. 그러나 값이 오를 것이라는 신념(?)을 지니고서는 많은 기기들을 집안으로 끌어들이는 사람들은 결국 무엇보다도 그 기기 소유의 애초의 목적, 즉 음악 감상의 즐거움 그 자체를 잃게 됩니다. 사회학적 용어로 말하자면 ‘소외’가 진행되는 것이지요. 그러한 사람들은 ‘소리’는 들을지언정 ‘음악’은 들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저는 개인적으로 수집 취미와 음악 취미를 동시에 지닌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자기가 소유한 기기들의 음향적 가능성에만 관심 있는 것이지 실제로 그것이 창조하는 음악 세계에는 관심이 없는 것이지요. 이것은 매우 속되고 비천한 행위입니다. 한 인간으로서의 여성과 결혼해야지 그 여성이 지니고 있는 경제적 능력과 결혼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음악 그 자체를 위한 오디오여야지 돈을 위한 오디오여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또 다른 문제는 이러한 사람들이 오디오의 가격을 올려놓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논의의 대상이 되는 것은 소위 ‘빈티지’라는 명칭이 붙어있는 오디오입니다. 이 기기들은 그것이 아니면 자아낼 수 없는 어떤 독특한 음악적 분위기를 지닙니다. 그리고 그 숫자가 지극히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원하는 사람들이 타당한 가격에 향유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어떤 분인가는 EMT 927을 30여대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논의의 여지가 없는 매점매석 행위입니다. 이런 식으로 되어 900만원 남짓하던 가격이 이제 2000만원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그 분은 행복해서 미치겠다고 합니다. 사실 그 돈들은 같은 애호가의 주머니를 털어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렇게 행복한가요? 먹고 사는 문제만으로도 이 제로섬(zero sum)적 경쟁이 지겨운데 이제 오디오까지도 이 경쟁의 획득물로 내몰아야 하나요? 구역질이 나는군요. 음악애호가라기보다는 그냥 시정잡배입니다.
음악 그 자체만을 위해서는 사실 제작이 언제나 더 낫습니다. 후세는 그 윗세대들에 비해 어떤 이득을 보고 사는 바 그것은 윗세대들의 업적 위에서 출발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빈티지 오디오들의 회로와 구성을 모두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개선의 여지가 많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부품만 구해지면 언제라도 빈티지 오디오들보다 더 나은 음을 내는 오디오를 제작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업그레이드할 때 발생합니다. 가치가 엄청나게 절하됩니다. 제작을 하시고자 하는 동호인들은 그러므로 가장 궁극적인 앰프로서 끝까지 함께 가겠다는 생각을 하시거나 싫증나거나 업그레이드할 때에는 자신의 앰프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무료나 헐값에 양도하겠다는 각오로 제작에 임해야 합니다.
우리는 음악이 우리에게 현실적인 어떤 이득을 주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좋기 때문에 좋아할 뿐이지요. 이는 마치 천문학을 아무리 열심히 한다고 해도 지구의 땅 한 평도 늘어나지는 않으며, 아무리 철학을 열심히 해도 먹고사는 데는 아무 보탬도 안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천성적으로 알고자 하기(Man by nature desires to know)" 때문에 천문학이나 철학 등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천성적으로 아름다운 선율과 화음의 울림을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는 음악을 사랑합니다. 그러니 그 기기가 나에게 어떤 이득을 주지 않는 것이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오디오 기기로 돈 벌고자 하는 사람들은 오디오 판매상이나 오디오 엔지니어로 충분합니다. 동호인까지 그 난장판에 끼어들지는 맙시다.
두 번째로 주의해야 할 측면에 관하여 말해보겠습니다. ‘오디오는 음악을 듣기 위한 도구’라는 단순한 정의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오디오는 계측기들을 물리적으로 만족시키기 위한 도구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디오 기기는 우리의 귀를 즐겁게 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지 주파수 특성 계측기나 오실로스코프를 즐겁게 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소리를 진정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귀를 통해서입니다. 어떤 음향기기도 귀의 매개 없이 소리를 뇌로 곧장 전달하지는 못합니다. 우리의 생리 기관은 물리학적으로 완벽성을 갖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즉 완벽한 방형파가 나온다 해도 우리 귀는 별로 만족스럽게 느끼지 못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때 우리가 준수하고 그 명령을 따라야 하는 대상은 우리의 ‘귀’이지 오실로스코프는 아닙니다. 그 불완전한 기관-연골과 말단 신경으로 이루어진 그 아슬아슬한 생리기관이 그래도 우리가 태어난 이래 세상의 여러 소리와 우리 자아를 연결시켜준 중요하고 친근한 감각 기관인 것입니다.
바로 며칠 전에 어떤 오디오 엔지니어 한 분이 자신이 제작한 라인단과 메인 앰프를 들고 저의 집을 방문하셨습니다. 득의만만하고 의기양양하셨습니다. 3만Khz까지 완벽한 방형파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간결하고 단순하게 만들어져서 음악 이외의 다른 요소는 끼어들 여지도 없고 또 어떠한 종류의 왜곡도 일어날 수 없는 앰프라고 말했습니다. ‘The Simpler, the Better!'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저는 이러한 종류의 감동에는 쉽게 물들지 않습니다. 눈으로 음악을 듣는 것은 아니니까요. 저는 정말이지 실망했습니다. 실망스러움을 감추려고 애썼지만 그래도 실망스러웠습니다. 사막과 같이 삭막했고 선인장처럼 날카로웠습니다. 제 귀가 그렇게 느끼는데 도대체 만족스러운 주파수 특성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어떤 과학적 도움을 받더라도 소리를 정확하게 측정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오디오 시스템은 일정한 전기적 특성을 지닙니다. 카트리지는 일정한 수치의 전류를 전달하고 그에 준하여 앰프는 일정한 양의 출력을 담당합니다. 이 에너지가 스피커 콘을 자극하고 이 자극에 따라 콘의 일정한 진폭이 생깁니다. 만약 콘의 진폭이 실제 소리의 정확한 양을 나타낸다는 가정이라면 우리는 소리의 양을 측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먼저 왜곡이 있고 또한 실제 소리의 강도와 음량을 스피커 콘의 진폭과 비교하는 방법은 아직 없습니다. 물론 특정 부하에서 소비되는 전력을 기초로 한 dB이라는 단위가 있지만 이것은 우리 귀와 관련된 것이 아니고 따라서 실제 소리의 측정치라기보다는 하나의 전기적 수치일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문제의 끝이 아니라는 데에 있습니다. 어떤 음이 좋은 음이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것은 단지 음의 물리적 측면과 관계된 것이 아닙니다. 음질, 음색, 음악성 등의 요소는 음의 밸런스라는 물리적 요소 이상의 어떤 추상적 대상입니다. 동일하게 만들어지고 동일한 부품으로 만들어진 앰프라 할지라도 사실 위의 세 요소는 서로 다릅니다. 이것은 왜일까요? 제 생각에는 오디오에는 눈에 보이는 부품과 회로 이상의 어떤 것이 첨가되는 것 같습니다. 이를테면 요리사의 ‘손맛’이라고나 할까요. 여기에 더하여 사용자의 취향과 노력도 관계됩니다. 오디오는 이상하게도 사용에 의하여 감가상각되기보다는 오히려 가치가 더 커집니다. 그리고 특정 장르와 특정 음역대에 더 유연하게 대응하게 됩니다. 즉 주인님의 취향에 맞추어지는 것이지요. 제 오디오들은 클래식에는 더없이 훌륭하게 대응하지만 가요나 팝에는 완전히 무능합니다. 폐차 직전 자동차의 뒤틀리는 미션 같은 느낌을 줍니다. 그러므로 오디오 기기와 관련해 여러분에게 하고 싶은 두 번째 조언은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먼저 소리 자체에 집중하십시오. 즉 관심의 중심을 오디오로부터 여러분 자신에게로 옮기라는 것입니다. 누군가 좋은 계측 특성을 지닌 오디오를 소유한 분이 여러분 댁을 방문하여 자신의 수치를 자랑하면서 여러분 기기의 수치 특성을 묻는다면, 여러분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디스크를 조용히 올려놓고 “서로 입 닥치고 즐기기나 하자”고 말해 주십시오. 그리고 여러분 중 어느 분인가가 오디오 입문자라 할지라도 오디오 스펙(audio specification)에 절대 위축되지 마십시오. 스펙에만 의존하여 기기의 구입 결정을 내려서도 안 됩니다. 당신이 아무리 초보자라 할지라도 ‘귀’와 관련해서는 어떤 전문가와도 겨룰 수 있습니다. 더하여 만약 여러분이 연주회를 다녀온 경험이 축적되어 있다면 여러분은 어떤 전문가보다도 소리를 잘 듣는 사람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 기기와 더불어 살아나갈 사람은 전문가가 아니라 여러분 자신입니다.
언젠가 저는 재미있는 실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할 일 없이 늙어가는 사람은 별 짓을 다합니다. 우선 헐리우드의 11명의 배우 사진을 모으고는 합성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부위들만을 골랐습니다. 샤론 스톤의 코, 안젤리나 졸리의 입술, 나오미 와츠의 이마, 헬레나 본 햄 카터의 눈 등을 차례로 한 얼굴에 합성해 나갔습니다. 결과는? 새로운 괴물의 탄생이었습니다. 이 따위 장난은 절대하면 안 되겠구나 싶을 정도의 이상한 인물이었습니다.
오디오도 마찬가지입니다. 각 기기의 스펙이 좀 덜 완벽하더라도 조화와 에이징(aging)이 의미 있는 것입니다. 완벽한 스펙들의 조합은 오히려 이상한 괴물의 탄생을 낳게 됩니다. 여성들이 어느 정도 덜 아름다운 기관들을 얼굴에 지니고 있다 해도 살아가는 동안에 그 기관들을 조화롭게 사용하고 좋은 마음으로 사용할 때에는 그럭저럭 봐줄 만한 용모가 됩니다. 그러나 그러한 조화 속에 엉뚱한 부조화를 불러들이는 것은 완벽한 아름다움의 한 기관이 성형으로 자리잡을 때입니다. 성형외과 의사들이 조화를 말하는 것도 이러한 사실을 경험으로 알기 때문입니다.(선험적으로 알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전체 시스템이 중요합니다. 좀 부족한 기기들이 하나의 조합을 이룬다 할지라도 조금씩 개선시켜나가고 또 많이 사용해주면 스스로 명기가 되어 나갑니다. 완벽한 기기를 소유하기 위한 욕심보라는 완벽한 사용자가 되려는 각오가 더 중요한 것이지요. 여기에는 인내도 필요합니다. 어떤 사용자는 당당하게 말합니다. “나는 하루도 못 참아. 시원찮으면 당장 아웃이야.” 정말 잘난 사람입니다. 세팅시키자마자 좋은 소리를 내줘야 그 집안에서 견뎌낸다는 말씀인데 이 아저씨는 첫경험의 처녀와 어떻게 첫날밤을 지냈는지 모르겠습니다. 숙맥인 그 첫경험의 아가씨와. 그러나 순결한 소녀는 첫사랑의 저녁에 고뇌를 알고 눈물짓습니다. 부디 좋은 소리를 낼 가능성의 시간 정도는 기다려줘야 합니다.
저는 가끔 현재 우리나라의 전공 분류가 아주 우습게 잘못되어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계, 과, 속, 종식 분류로 따진다면 아마도 계에 해당하는 분류가 문과, 이과의 분류일 것 같습니다. 그런데 분류에서는 공유되는 성격을 가진 전공들이 같은 게에 들어가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수학은 어느 쪽이냐 하면 인문대의 한 전공으로 분류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수학이나 물리학은 공학이나 의학보다는 철학이나 예술 쪽에 훨씬 가까운 과목이라는 것이지요. 어느 과학 철학자가 “과학은 예술을 닮았다(Le science ressemble L'art)"고 했지만 이것은 전적으로 사실입니다. 수학이나 과학은 관찰이나 논리에 의하기보다는 직관과 영감(inspiration)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사실은 하나의 예술이지요. 어떤 분은 묻겠지요. 그러면 왜 집합과 명제가 수학의 한 주제가 되냐고요. 사실은 그렇기 때문에 수학은 철학의 한 분야입니다. 이 부분을 철학과 공유하니까요.
이렇게 분석하자면 물리학, 생물학, 화학 등의 순수과학은 모두 인문대에 속해야 합니다. 이러한 학문들은 모두 우리의 경험에 호소하기보다는 훨씬 더 많이 우리의 상상력에 의존합니다. 자연과학의 본래 명칭은 자연철학(Natural Philosophy)이었습니다. 모두 철학의 한 분파였던 것이지요. 이러한 과목들은 기초과학이나 순수과학으로 불립니다만 어느 경우나 응용과학의 한 토대로서의 기능을 염두에 둔 명칭이지요.
그러나 제가 생각하기로는 이러한 과학들은 스스로의 존재 의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부산물이 기술(technology)에 응용되는 경우가 있다고 하더라도 본래적으로 스스로 존재하는 것으로서의 독자적인 의미를 가진다는 것입니다. 너무도 물질주의적이고 현상적 세계에 갇혀 사는 우리는 항상 ‘쓸모’에 대해 말합니다만 이러한 우리 처지가 행복하진 않군요. 생산성에 공헌하고 물질적 풍요를 불러와야만 의미가 있는 것인가요. 생산성의 향상이 우리에게 더 질 높은 생활을 보장한다는 것은 산업혁명이래의 자본주의의 달콤한 유혹이었지만, 우리 삶의 어떤 측면에서 질이 높아졌는지 모르겠습니다. 세탁기, 냉장고, 텔레비전, 에어컨 등을 노예노동으로 환산하면 가구 당 몇 명쯤의 노예를 거느린 것일까요? 텔레비전 대신 광대가 있어야 하고 에어컨 대신 부채를 부쳐주는 노예까지 있어야 한다고 계산하면 가구 당 적어도 열 명 정도의 노예를 거느린 셈은 될 겁니다. 노예 노동이 우리의 시간을 이렇게 많이 벌어주고 있는데도 우리는 계속 시간에 쫓깁니다. 여가 없이는 질 높은 삶이 없다는 것을 고려하자면 우리 삶의 질은 장구한 세월 동안 계속 나빠져 왔습니다.
동일한 질문에 대한 두 개의 상이한 답변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하지요. 예를 들어 “역사학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있다고 가정하지요. 여기에 대해 한 역사학자께서는 역사학의 효용에 대해 틀에 박힌 구구절절한 말들을 늘어놓습니다.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대화이다. 우리는 과거에 비추어 현재를 이해할 수 있고 또 과거와 현재의 대화를 바탕으로 미래의 희끄무레한 여명을 볼 수 있다. 고로 역사학의 존재의의는 분명하다.” 장엄한 선언입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 속을 차지하고 있는 가장 커다란 동기는 사실 밥그릇입니다. 역사를 전공했으니 이제 그것은 그의 숙명이 되었고 그것의 존재 의의를 인정받아야만 고등학교, 대학교에서 역사 과목의 비중이 높아질 것이고, 취업문도 넓어질 것이고, 어찌어찌 거기에 편승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역사학자님만 그런 것이 아니고 대부분의 불편부당(不偏不黨)하고 무사무욕(無私無慾)하게 보이는 언명들이 그 이면에는 간단하게도 밥그릇만 배경으로 하고 있을 때가 대부분이니 이 분만 탓할 노릇도 아닙니다. 사실 역사학의 효용에 대한 이 구차한 변명을 한 분은 우리가 우습게 봐도 될 분은 아닙니다. 역사철학에 관한 초베스트셀러인 『역사란 무엇인가』의 저자 E. H. 카아 씨입니다.
두 번째의 전적으로 상이한 답변을 한번 살펴볼까요. 어떤 역사학자는 되먹지 않게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역사학의 존재이유? 과거에 무엇인가가 발생했다. 나는 그것을 알고 싶다. 이것이 전부다.” 정말 되먹지 못한 답변인가요? 제 개인적인 생각은 “그렇지 않다.”입니다. 즉 이 답변이야말로 옳은 선언이라는 것이지요. 제 개인적인 생각은 다음과 같습니다. 확실히 우리 모두는 물질적 요구를 지니고 있습니다. 도대체 먹고 살 수 있어야 다음 일을 생각할 여지가 있으니까요. ‘목구녕이 포도청’이지요. 그러나 ‘목구녕’만이 삶의 전부는 아닙니다. 우리가 어떤 일인가를 무목적적으로 그리고 무상성을 지니고서 한다면 어쩌면 우리 삶의 의의는 거기에 있을지 모릅니다.
즉 우리가 삶의 실천적 요구를 벗어날 때 인간 고유의 가치 있는 어떤 것인가가 존재한다는 것이지요. “눈앞의 강을 건너야 할 장애물로만 바라보는 한 예술은 없다.”라고 말한 사람은 쇼펜하우어입니다만 이것은 새로울 것도 없는 언명입니다. 예술이 가능하려면 강을 건너서 자기 길을 재촉하기보다는 그 아름다움에 도취되어 다리를 찾기를 멈추고 오로지 바라보고 감탄해야 하지요. 이제부터 그는 단순한 나그네이기를 멈추고 시인이 되는 것입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보자면 오디오도 우리에게 그와 같은 무목적적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생존 경쟁의 물질적 측면에 사로잡혀 괴로운 일상을 영위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 한때는 이러한 물질들이 우리 삶의 가치 있는 부분과는 상관없었던 젊은 시절을 회상할 수 있습니다. 모두가 산의 높은 곳에 머무르며 희박한 산소에도 개의치 않고 살아갈 각오가 되어 있던 시절이지요. 그러나 모두 지상의 진흙탕으로 끌어내려졌습니다. 이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생존 경쟁에서 이기려고만 애쓰지 순결한 젊은 시절도 돌아가려하지는 않습니다. 어리고 순진했고 세상일을 아무것도 몰랐던 시절이라고 치부하면서요. 이것도 틀린 것은 아닙니다. 확실히 우린 몰랐습니다. 우리 순수함의 근거가 무지였지요. 그러나 이제 더 이상 “생각하는 것도 말하는 것도 어린애이기를 멈추었습니다.” 우리의 순수함이 의미 있는 것은 이제 성숙한 순수함이라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삶이 주는 여러 추악함, 고통 속에서 다시 한 번 순수해질 수 있는 것이지요.
우리에게 예술 감상이란 이와 같은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도구인 오디오도 이와 같은 견지에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왕왕 수단과 목적이 전도되고 의미가 무의미로 무의미가 의미로 전도됩니다. 음악을 위한 오디오가 아니라 오디오를 위한 음악이 되는 경우가 참으로 많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 부딪쳐서 우리는 두 가지를 주의해야 합니다.
먼저 투자가치로서의 오디오입니다. 저는 이런 종류의 매니아들에게는 경악을 금치 못할 때가 왕왕 있습니다. 저는 어떤 매니아들이 오디오를 하나의 재화로 간주하는 데에 놀란 적이 있습니다. 즉 투자 가치가 있는 상품으로 간주하는 것이지요. 이런 분들은 오로지 오리지널만을 사들이지 제작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물론 이 행위 자체가 일반적으로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음악 애호가를 자처하는 사람들이나 음향 박물관 운운할 경우에는 잘못입니다. 오디오 기기를 투자 대상으로 매점하는 행위는 장사꾼이나 할 짓이지 신사가 할 일은 아닙니다. 사실 다양한 계층의 다양한 교육적, 교양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오디오 취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에 준하여 각자의 즐거움을 누립니다. 그러나 값이 오를 것이라는 신념(?)을 지니고서는 많은 기기들을 집안으로 끌어들이는 사람들은 결국 무엇보다도 그 기기 소유의 애초의 목적, 즉 음악 감상의 즐거움 그 자체를 잃게 됩니다. 사회학적 용어로 말하자면 ‘소외’가 진행되는 것이지요. 그러한 사람들은 ‘소리’는 들을지언정 ‘음악’은 들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저는 개인적으로 수집 취미와 음악 취미를 동시에 지닌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자기가 소유한 기기들의 음향적 가능성에만 관심 있는 것이지 실제로 그것이 창조하는 음악 세계에는 관심이 없는 것이지요. 이것은 매우 속되고 비천한 행위입니다. 한 인간으로서의 여성과 결혼해야지 그 여성이 지니고 있는 경제적 능력과 결혼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음악 그 자체를 위한 오디오여야지 돈을 위한 오디오여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또 다른 문제는 이러한 사람들이 오디오의 가격을 올려놓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논의의 대상이 되는 것은 소위 ‘빈티지’라는 명칭이 붙어있는 오디오입니다. 이 기기들은 그것이 아니면 자아낼 수 없는 어떤 독특한 음악적 분위기를 지닙니다. 그리고 그 숫자가 지극히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원하는 사람들이 타당한 가격에 향유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어떤 분인가는 EMT 927을 30여대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논의의 여지가 없는 매점매석 행위입니다. 이런 식으로 되어 900만원 남짓하던 가격이 이제 2000만원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그 분은 행복해서 미치겠다고 합니다. 사실 그 돈들은 같은 애호가의 주머니를 털어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렇게 행복한가요? 먹고 사는 문제만으로도 이 제로섬(zero sum)적 경쟁이 지겨운데 이제 오디오까지도 이 경쟁의 획득물로 내몰아야 하나요? 구역질이 나는군요. 음악애호가라기보다는 그냥 시정잡배입니다.
음악 그 자체만을 위해서는 사실 제작이 언제나 더 낫습니다. 후세는 그 윗세대들에 비해 어떤 이득을 보고 사는 바 그것은 윗세대들의 업적 위에서 출발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빈티지 오디오들의 회로와 구성을 모두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개선의 여지가 많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부품만 구해지면 언제라도 빈티지 오디오들보다 더 나은 음을 내는 오디오를 제작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업그레이드할 때 발생합니다. 가치가 엄청나게 절하됩니다. 제작을 하시고자 하는 동호인들은 그러므로 가장 궁극적인 앰프로서 끝까지 함께 가겠다는 생각을 하시거나 싫증나거나 업그레이드할 때에는 자신의 앰프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무료나 헐값에 양도하겠다는 각오로 제작에 임해야 합니다.
우리는 음악이 우리에게 현실적인 어떤 이득을 주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좋기 때문에 좋아할 뿐이지요. 이는 마치 천문학을 아무리 열심히 한다고 해도 지구의 땅 한 평도 늘어나지는 않으며, 아무리 철학을 열심히 해도 먹고사는 데는 아무 보탬도 안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천성적으로 알고자 하기(Man by nature desires to know)" 때문에 천문학이나 철학 등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천성적으로 아름다운 선율과 화음의 울림을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는 음악을 사랑합니다. 그러니 그 기기가 나에게 어떤 이득을 주지 않는 것이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오디오 기기로 돈 벌고자 하는 사람들은 오디오 판매상이나 오디오 엔지니어로 충분합니다. 동호인까지 그 난장판에 끼어들지는 맙시다.
두 번째로 주의해야 할 측면에 관하여 말해보겠습니다. ‘오디오는 음악을 듣기 위한 도구’라는 단순한 정의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오디오는 계측기들을 물리적으로 만족시키기 위한 도구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디오 기기는 우리의 귀를 즐겁게 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지 주파수 특성 계측기나 오실로스코프를 즐겁게 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소리를 진정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귀를 통해서입니다. 어떤 음향기기도 귀의 매개 없이 소리를 뇌로 곧장 전달하지는 못합니다. 우리의 생리 기관은 물리학적으로 완벽성을 갖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즉 완벽한 방형파가 나온다 해도 우리 귀는 별로 만족스럽게 느끼지 못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때 우리가 준수하고 그 명령을 따라야 하는 대상은 우리의 ‘귀’이지 오실로스코프는 아닙니다. 그 불완전한 기관-연골과 말단 신경으로 이루어진 그 아슬아슬한 생리기관이 그래도 우리가 태어난 이래 세상의 여러 소리와 우리 자아를 연결시켜준 중요하고 친근한 감각 기관인 것입니다.
바로 며칠 전에 어떤 오디오 엔지니어 한 분이 자신이 제작한 라인단과 메인 앰프를 들고 저의 집을 방문하셨습니다. 득의만만하고 의기양양하셨습니다. 3만Khz까지 완벽한 방형파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간결하고 단순하게 만들어져서 음악 이외의 다른 요소는 끼어들 여지도 없고 또 어떠한 종류의 왜곡도 일어날 수 없는 앰프라고 말했습니다. ‘The Simpler, the Better!'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저는 이러한 종류의 감동에는 쉽게 물들지 않습니다. 눈으로 음악을 듣는 것은 아니니까요. 저는 정말이지 실망했습니다. 실망스러움을 감추려고 애썼지만 그래도 실망스러웠습니다. 사막과 같이 삭막했고 선인장처럼 날카로웠습니다. 제 귀가 그렇게 느끼는데 도대체 만족스러운 주파수 특성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어떤 과학적 도움을 받더라도 소리를 정확하게 측정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오디오 시스템은 일정한 전기적 특성을 지닙니다. 카트리지는 일정한 수치의 전류를 전달하고 그에 준하여 앰프는 일정한 양의 출력을 담당합니다. 이 에너지가 스피커 콘을 자극하고 이 자극에 따라 콘의 일정한 진폭이 생깁니다. 만약 콘의 진폭이 실제 소리의 정확한 양을 나타낸다는 가정이라면 우리는 소리의 양을 측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먼저 왜곡이 있고 또한 실제 소리의 강도와 음량을 스피커 콘의 진폭과 비교하는 방법은 아직 없습니다. 물론 특정 부하에서 소비되는 전력을 기초로 한 dB이라는 단위가 있지만 이것은 우리 귀와 관련된 것이 아니고 따라서 실제 소리의 측정치라기보다는 하나의 전기적 수치일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문제의 끝이 아니라는 데에 있습니다. 어떤 음이 좋은 음이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것은 단지 음의 물리적 측면과 관계된 것이 아닙니다. 음질, 음색, 음악성 등의 요소는 음의 밸런스라는 물리적 요소 이상의 어떤 추상적 대상입니다. 동일하게 만들어지고 동일한 부품으로 만들어진 앰프라 할지라도 사실 위의 세 요소는 서로 다릅니다. 이것은 왜일까요? 제 생각에는 오디오에는 눈에 보이는 부품과 회로 이상의 어떤 것이 첨가되는 것 같습니다. 이를테면 요리사의 ‘손맛’이라고나 할까요. 여기에 더하여 사용자의 취향과 노력도 관계됩니다. 오디오는 이상하게도 사용에 의하여 감가상각되기보다는 오히려 가치가 더 커집니다. 그리고 특정 장르와 특정 음역대에 더 유연하게 대응하게 됩니다. 즉 주인님의 취향에 맞추어지는 것이지요. 제 오디오들은 클래식에는 더없이 훌륭하게 대응하지만 가요나 팝에는 완전히 무능합니다. 폐차 직전 자동차의 뒤틀리는 미션 같은 느낌을 줍니다. 그러므로 오디오 기기와 관련해 여러분에게 하고 싶은 두 번째 조언은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먼저 소리 자체에 집중하십시오. 즉 관심의 중심을 오디오로부터 여러분 자신에게로 옮기라는 것입니다. 누군가 좋은 계측 특성을 지닌 오디오를 소유한 분이 여러분 댁을 방문하여 자신의 수치를 자랑하면서 여러분 기기의 수치 특성을 묻는다면, 여러분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디스크를 조용히 올려놓고 “서로 입 닥치고 즐기기나 하자”고 말해 주십시오. 그리고 여러분 중 어느 분인가가 오디오 입문자라 할지라도 오디오 스펙(audio specification)에 절대 위축되지 마십시오. 스펙에만 의존하여 기기의 구입 결정을 내려서도 안 됩니다. 당신이 아무리 초보자라 할지라도 ‘귀’와 관련해서는 어떤 전문가와도 겨룰 수 있습니다. 더하여 만약 여러분이 연주회를 다녀온 경험이 축적되어 있다면 여러분은 어떤 전문가보다도 소리를 잘 듣는 사람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 기기와 더불어 살아나갈 사람은 전문가가 아니라 여러분 자신입니다.
언젠가 저는 재미있는 실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할 일 없이 늙어가는 사람은 별 짓을 다합니다. 우선 헐리우드의 11명의 배우 사진을 모으고는 합성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부위들만을 골랐습니다. 샤론 스톤의 코, 안젤리나 졸리의 입술, 나오미 와츠의 이마, 헬레나 본 햄 카터의 눈 등을 차례로 한 얼굴에 합성해 나갔습니다. 결과는? 새로운 괴물의 탄생이었습니다. 이 따위 장난은 절대하면 안 되겠구나 싶을 정도의 이상한 인물이었습니다.
오디오도 마찬가지입니다. 각 기기의 스펙이 좀 덜 완벽하더라도 조화와 에이징(aging)이 의미 있는 것입니다. 완벽한 스펙들의 조합은 오히려 이상한 괴물의 탄생을 낳게 됩니다. 여성들이 어느 정도 덜 아름다운 기관들을 얼굴에 지니고 있다 해도 살아가는 동안에 그 기관들을 조화롭게 사용하고 좋은 마음으로 사용할 때에는 그럭저럭 봐줄 만한 용모가 됩니다. 그러나 그러한 조화 속에 엉뚱한 부조화를 불러들이는 것은 완벽한 아름다움의 한 기관이 성형으로 자리잡을 때입니다. 성형외과 의사들이 조화를 말하는 것도 이러한 사실을 경험으로 알기 때문입니다.(선험적으로 알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전체 시스템이 중요합니다. 좀 부족한 기기들이 하나의 조합을 이룬다 할지라도 조금씩 개선시켜나가고 또 많이 사용해주면 스스로 명기가 되어 나갑니다. 완벽한 기기를 소유하기 위한 욕심보라는 완벽한 사용자가 되려는 각오가 더 중요한 것이지요. 여기에는 인내도 필요합니다. 어떤 사용자는 당당하게 말합니다. “나는 하루도 못 참아. 시원찮으면 당장 아웃이야.” 정말 잘난 사람입니다. 세팅시키자마자 좋은 소리를 내줘야 그 집안에서 견뎌낸다는 말씀인데 이 아저씨는 첫경험의 처녀와 어떻게 첫날밤을 지냈는지 모르겠습니다. 숙맥인 그 첫경험의 아가씨와. 그러나 순결한 소녀는 첫사랑의 저녁에 고뇌를 알고 눈물짓습니다. 부디 좋은 소리를 낼 가능성의 시간 정도는 기다려줘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