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부산사는 이창복입니다.
얼마 전 이 곳 동호회를 알게 되었고
여러 선생님들의 좋은 글을 통해 탄노이에 대한 이해를 넓혀가고 있습니다.
아래 글은 오토그라프와 저와의 인연을 주절주절 써 본 것입니다.
어제 저녁부터는 제법 시원한 바람이
집 안의 가벼운 물건들을 흔들고 있습니다.
너무 더우면 음악이고 뭐고 다 귀찮아지는데
요 며칠새가 저에겐 너무나 짜릿한 시간들입니다.
한 여름의 신혼 여행이라고 그냥 자는 사람은 없겠지요.
김박중 선생님께 주문하고 45일 간 기다림 끝에
어느 뜨거운 여름날 드디어 오토그라프를 얻게 되고
12일 째 밀회를 즐기고 있습니다.
오토그라프는 저에겐 아주 인연이 깊은 스피커입니다.
조그만 스피커 두 개가 양쪽으로 달린 데크와 라디오 겸용 기기에
성음에서 라이센스한 그라마폰의 노란 라벨이 붙어있는 테이프로
클래식을 듣던 시절,
멜로디 위주로 음악을 듣던 시절이지요.
바로 그 시절
남포동 옛 미화당 백화점 앞에 클래식 음악 감상실이 생겼습니다.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20여평의 감상실에는
양팔걸이 소파만 극장식으로 나열되어 있고,
별도의 작은 방에서 차와 담소를 나눌 수 있는
이상적인 음악 감상실이었습니다.
'Philharmony'
대학 3학년 시절이었습니다.(1981년)
처음으로 클래식 음악을 최고의 청취 환경에서
당시 최고의 스피커로 듣게된 것이지요.
거대한 스피커에 울려나오는 부드러운 소리는
감수성 예민한 젊은이의 몸과 마음을 흔들어놨습니다.
대학시절 연극부의 연습이 없는 날이면
혼자 19번 버스를 타고 남포동까지 달려갔습니다.
당시 장전동에서 남포동까지 버스로 50분 정도 걸렸던 것 같습니다.
얼마인지 기억 나지 않지만
상당한 입장료를 지불하고 필하모니를 찾았지요.
엄청난 투자를 해서 만든 필하모니지만
찾는 이는 거의 없었습니다.
제가 필하모니를 찾아갈 때마다
그 큰 감상실 안에 저 혼자일 때가 많았으니까요.
계속된 적자로 결국 필하모니는 멋진 청취 시설을 버리고
오디오 시스템만 가지고 자갈치 시장 2층으로 이사를 가게됩니다.
오토그라프가 화려한 남포동에서
그 때만해도 포장이 안되어 질척거리는 자갈치 시장의 모퉁이로 밀려난 것이지요.
그 뒤로 중앙동 뒷골목으로 다시 이사를 가게되고
거기서 당시 신문에도 크게 보도 되었던 '필하모니 화재'가 발생합니다.
적자로 청취 환경을 잃고
화재로 오디오 시스템을 잃은 비운의 '필하모니'였습니다.
그 때 필하모니의 무대를 꽉 채우고 서 있던 스피커가
바로 오토그라프였습니다.
나중에 알게된 사실이지만 당시의 유닛은 레드였다고 합니다.
오토그라프를 잊고 오랜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런데 작년에 오토그라프를 다시 만날 기회가 생겼습니다.
양산의 서재관선생님께서 밀레니엄 오토그라프를 들이신 것이지요.
한 걸음에 달려가
그 은은한 오토그라프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20여년이 지난 후 만난 오토그라프의 소리는
감동 이상의 것이었습니다.
옛 기억을 추억하며 언젠간 오토그라프를 갖겠다는 생각과 함께
서재관선생님 댁을 나섰지요.
가격적인 부담과 공간상의 문제로
지금 오토그라프를 갖는다는 것은 너무 무리라고 생각하면서......
그런데 지난 6월
우리 산동네에 계신 정교수님댁에서
다시 오토그라프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아파트의 큰 방에 오디오룸을 꾸미시고
거기에서 오토그라프를 울리시고 계신게 아닙니까.
공간이 그렇게 큰 곳이 아닌데서도
오토그라프를 운영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된거지요.
바로 다음 날
실례를 무릅쓰고 다시 정교수님댁을 찾아가
다시 한 번 들어보고
바로 통을 주문했습니다.
올 여름 장마만큼이나 지리한 기다림 끝에
지금 오토그라프는 저의집 거실에서
저랑 같이 살고 있습니다.
다소 긴
저와 오토와의 사연을 주절주절 늘어놨습니다.
에딘버러와 굳이 비교를 하자면
에딘버러는 화사하게 차려 입은 이쁜 젊은 여자라면
오토그라프는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편안한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회원님들 건강한 여름 나시길 바랍니다.
아래는 통에 유닛이 장착되는 과정의 사진입니다.
유닛과 나무 혼 장착 전의 모습입니다.
백로디드된 음의 출구 모습입니다.
안에 네트워크와 스피커선과의 연결 박스가 보입니다.
비상금 보관함으로도 사용되는 곳입니다.
나무혼의 뒷 모습입니다.
유명한 탄노이 설립자의 사인으로 만든 로고입니다.
이 시대의 명인
스피커통을 40년 가까이 만들어 오신
김박중선생님의 친필 사인입니다.
제가 꼭 통에 사인을 남겨달라고 부탁드렸습니다.
유닛(K3808)이 장착된 모습입니다.
완성된 모습입니다.
부산사는 이창복입니다.
얼마 전 이 곳 동호회를 알게 되었고
여러 선생님들의 좋은 글을 통해 탄노이에 대한 이해를 넓혀가고 있습니다.
아래 글은 오토그라프와 저와의 인연을 주절주절 써 본 것입니다.
어제 저녁부터는 제법 시원한 바람이
집 안의 가벼운 물건들을 흔들고 있습니다.
너무 더우면 음악이고 뭐고 다 귀찮아지는데
요 며칠새가 저에겐 너무나 짜릿한 시간들입니다.
한 여름의 신혼 여행이라고 그냥 자는 사람은 없겠지요.
김박중 선생님께 주문하고 45일 간 기다림 끝에
어느 뜨거운 여름날 드디어 오토그라프를 얻게 되고
12일 째 밀회를 즐기고 있습니다.
오토그라프는 저에겐 아주 인연이 깊은 스피커입니다.
조그만 스피커 두 개가 양쪽으로 달린 데크와 라디오 겸용 기기에
성음에서 라이센스한 그라마폰의 노란 라벨이 붙어있는 테이프로
클래식을 듣던 시절,
멜로디 위주로 음악을 듣던 시절이지요.
바로 그 시절
남포동 옛 미화당 백화점 앞에 클래식 음악 감상실이 생겼습니다.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20여평의 감상실에는
양팔걸이 소파만 극장식으로 나열되어 있고,
별도의 작은 방에서 차와 담소를 나눌 수 있는
이상적인 음악 감상실이었습니다.
'Philharmony'
대학 3학년 시절이었습니다.(1981년)
처음으로 클래식 음악을 최고의 청취 환경에서
당시 최고의 스피커로 듣게된 것이지요.
거대한 스피커에 울려나오는 부드러운 소리는
감수성 예민한 젊은이의 몸과 마음을 흔들어놨습니다.
대학시절 연극부의 연습이 없는 날이면
혼자 19번 버스를 타고 남포동까지 달려갔습니다.
당시 장전동에서 남포동까지 버스로 50분 정도 걸렸던 것 같습니다.
얼마인지 기억 나지 않지만
상당한 입장료를 지불하고 필하모니를 찾았지요.
엄청난 투자를 해서 만든 필하모니지만
찾는 이는 거의 없었습니다.
제가 필하모니를 찾아갈 때마다
그 큰 감상실 안에 저 혼자일 때가 많았으니까요.
계속된 적자로 결국 필하모니는 멋진 청취 시설을 버리고
오디오 시스템만 가지고 자갈치 시장 2층으로 이사를 가게됩니다.
오토그라프가 화려한 남포동에서
그 때만해도 포장이 안되어 질척거리는 자갈치 시장의 모퉁이로 밀려난 것이지요.
그 뒤로 중앙동 뒷골목으로 다시 이사를 가게되고
거기서 당시 신문에도 크게 보도 되었던 '필하모니 화재'가 발생합니다.
적자로 청취 환경을 잃고
화재로 오디오 시스템을 잃은 비운의 '필하모니'였습니다.
그 때 필하모니의 무대를 꽉 채우고 서 있던 스피커가
바로 오토그라프였습니다.
나중에 알게된 사실이지만 당시의 유닛은 레드였다고 합니다.
오토그라프를 잊고 오랜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런데 작년에 오토그라프를 다시 만날 기회가 생겼습니다.
양산의 서재관선생님께서 밀레니엄 오토그라프를 들이신 것이지요.
한 걸음에 달려가
그 은은한 오토그라프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20여년이 지난 후 만난 오토그라프의 소리는
감동 이상의 것이었습니다.
옛 기억을 추억하며 언젠간 오토그라프를 갖겠다는 생각과 함께
서재관선생님 댁을 나섰지요.
가격적인 부담과 공간상의 문제로
지금 오토그라프를 갖는다는 것은 너무 무리라고 생각하면서......
그런데 지난 6월
우리 산동네에 계신 정교수님댁에서
다시 오토그라프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아파트의 큰 방에 오디오룸을 꾸미시고
거기에서 오토그라프를 울리시고 계신게 아닙니까.
공간이 그렇게 큰 곳이 아닌데서도
오토그라프를 운영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된거지요.
바로 다음 날
실례를 무릅쓰고 다시 정교수님댁을 찾아가
다시 한 번 들어보고
바로 통을 주문했습니다.
올 여름 장마만큼이나 지리한 기다림 끝에
지금 오토그라프는 저의집 거실에서
저랑 같이 살고 있습니다.
다소 긴
저와 오토와의 사연을 주절주절 늘어놨습니다.
에딘버러와 굳이 비교를 하자면
에딘버러는 화사하게 차려 입은 이쁜 젊은 여자라면
오토그라프는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편안한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회원님들 건강한 여름 나시길 바랍니다.
아래는 통에 유닛이 장착되는 과정의 사진입니다.
유닛과 나무 혼 장착 전의 모습입니다.
백로디드된 음의 출구 모습입니다.
안에 네트워크와 스피커선과의 연결 박스가 보입니다.
비상금 보관함으로도 사용되는 곳입니다.
나무혼의 뒷 모습입니다.
유명한 탄노이 설립자의 사인으로 만든 로고입니다.
이 시대의 명인
스피커통을 40년 가까이 만들어 오신
김박중선생님의 친필 사인입니다.
제가 꼭 통에 사인을 남겨달라고 부탁드렸습니다.
유닛(K3808)이 장착된 모습입니다.
완성된 모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