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도 런던에는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밤이었습니다.
12월초였으니까…
꼭 8개월만에 다시 찾아온 런던이건만 변한건 하나도 눈에 안 띄는데 겨울에 내리는 부슬비까지도 어쩌면 예나 지금이나 똑 같다는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나왔습니다. 아마 10년후에 다시 이곳을 찾아 온다 해도 모든 것이 지금과 꼭 같을 거라는 생각이 스쳐갔습니다.
해머스미스 지하철 역에서 내려 풀햄 팰리스 로드를 따라 템즈강변 쪽으로 걸어 내려가는 동안 저는 가랑비에 옷 젖는 줄도 모르고 내심 기대감과 설레임으로 자못 흥분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까짓 밤거리에 우산도 없이 가랑비를 혼자 맞으며 걷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았습니다. (원래 영국 사람들은 왠만한 비는 그냥 맞고 다닙니다만…)
일주일전 쯤 런던에 도착했던 그 다음 날 늦은 밤,
저는 서울서 미리 연락해둔 곳으로 가서 그렇게도 애타게 찾던 그 고물짝 앰프 두 덩어리를 들고 새벽녁에야 호텔로 들어 왔습니다. 가뜩이나 시차가 안 맞아서 잠을 설치는데다가 이 앰프를 들고 서울로 가서 그 소리를 들어 볼 기대감에 잠이 오질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호텔방에서 대충 포장했던 앰프를 다시 풀러서 자세히 뜯어 보고 있자니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것을 서울에 가지고 가더라도 50년이나 된 이 앰프가 제대로 기능이나 하는지가 의심스러워졌고 이를 점검이라도 해 보려면 이를 제대로 볼 수 있는 기술자를 찾아야 한다는 점과 이에 걸리는 시간이 꽤나 걸릴 거라는 생각이 들자 저는 가뜩이나 설치던 잠을 아예 떨쳐버리고 벌떡 일어나 앉았습니다.
거의 뜬 눈으로 밤을 새다시피한 그 다음날 저녁
저는 이 무거운 고물짝 앰프 두 덩어리를 들고 해머스미스로 향했습니다. 시내로 가는 지하철 안에서 시간이 없어 못한 저녁을 때우기 위해 샌드위치를 입에 물면서 언뜻 쳐다본 지하철 차창에는 흘러 내리는 빗방울의 굵은 선들 사이로 반사된 제 얼굴이 마치 무엇엔가 홀린듯한 심각한 표정으로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이 때에도 저는 그만 피식 쓴 웃음이 나오더군요. 아마도 이번이 거의 마지막 기회일 거라는 나름의 조급함이 나를 이렇게 몰고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신없이 지나간 런던 출장의 일주일이었지만 내내 머리속에는 그 M의 말이 거슬렸습니다. 저간의 사정을 설명한 내게 원래 수리에 2-3주는 걸려야 할 것이지만 이렇게 출장까지 와서 찾아준 내게 감사한 마음을 보답하기 위해 나의 귀국행 비행기를 타기 전날인 금요일 밤까지 끝내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100% 장담은 못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럭저럭 꽤나 오래 살았던 런던에 있을 동안 이러 저러한 연유로 알게되어 꽤나 여러 번 만났던 M은 전자기기 수리전문가인데 특히 영국산 빈티지 앰프를 잘 수리하곤 했었습니다. 어느 기종을 가지고 가도 어느 구석에선가 누렇게 바랜 회로도를 꺼내 점검해 보는 그 모습은 마치 쓰레기장 분위기 같은 그의 가게 때문인지 지저분하다는 첫 인상과는 관계없이 진짜 장인정신을 지닌 쟁이의 모습처럼 내 마음에 새겨졌었던 인물이었습니다.
마침 그의 가게는 제가 살던 동네에서 여름 내내 일요일아침이면 같이 테니스를 치던 지인의 가게가 M의 가게 바로 한 집 건너 있었기 때문에 그 인근에 있는 유명한 이태리 식당에도 꽤나 자주 간 덕에 저는 그 주변을 이미 잘 알고 지내던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수리를 의뢰하러 간 그 날 그 M의 가게 구석에는 이 M과 정답게 이야기하는 노인 한분이 있었는데 그의 옷차림은 마치 부둣가에서 하역작업을 마치고 난 후, 선술집에서 기네스 한잔을 걸치고 있는 듯한 허름한 차림을 하고 있었는데 표정은 얼마나 평화로워 보였는지 한참을 이야기 하고 싶은 인상을 가지신 분이었습니다.
.............
내일이면 서울로 간다는 기대와 함께 완벽하게 고쳤을까? 궁금해 하면서 이곳으로 오기전에 전화한 M은 여러말 할 것 없이 와서 보고 가져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전과 다름없이 여기저기 산더미처럼 중고 부품들이 쌓여있던 그의 가게에 들어서니 며칠 전 왔을 때 계셨던 그 노인은 그 날도 그 자리에 여전히 앉아계셨습니다.
점검차 앰프를 연결하니 하나는 완벽한데 하나는 아주 약한 험이 발생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내부를 들여다 보니 부품의 거의 반을 새것으로 갈아 치운 것으로 보아 두 덩어리 모두 대수술을 한 것임에는 틀림없었지만 한쪽에서 약한 험이 잡히는 것이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M도 여러번 이것을 잡아 보려고 시도를 하였으나 이를 고치지 못했는데 더 이상의 시간이 없으니 우선 서울로 가지고 가서 그곳에서 다시 점검을 해 보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좀 떨떠름한 표정을 짓자, 그럼 시간이 있냐고 해서 시간이 있다고 하자 그는 납땜 기구를 다시 챙겨 들었습니다. 그러기를 몇차례 한참의 시간이 지나도록 우리는 밖에서 그렇게도 요란하게 비가 퍼 붓는지도 모르고 온갖 신경을 앰프와 연결된 스피커에 쏟아 부었습니다.
이 것 저것 CD와 테이프를 틀어가며 음악을 듣는데 그때까지 조용히 앉아서 음악만 듣던 그 할아버지가 몇가지 제안을 하자 M은 그 노인의 말대로 회로도 몇 곳의 저항을 바꾸어 보았는데 거짓말같이 그때까지 신경쓰였던 험이 말끔이 없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 순간 우리 모두는 환호성을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M은 엄지 손가락을 일으켜 세우며 그 노인에게 감사하다는 표시를 연발해대었습니다. 밖에는 이미 가랑비가 제법 굵은 빗줄기로 바뀌어 쇼 윈도우를 때리고 있었는데 쇼 윈도우 바깥으로 지나다니는 자동차의 헤트라이트 줄기는 마치 B셔터로 찍은 사진처럼 긴 꼬리를 물고 다니는 네온싸인으로 보였습니다.
우리는 잉글리시 Tea를 한잔씩하면서 이제는 앰프 수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음악 감상을 위해서 다시 자세를 고쳐 앉았습니다. 이미 M이 문을 닫는 시간인 저녁 8시가 훨씬 지난 10시가 다 되어 갔지만 그 날 우리들에게는 늦은 시간이 별 문제가 되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점점 굵어지는 빗줄기가 유리창을 때리며 흘러내리고 있는데 M의 쓰레기장 같은 가게 안에는 슈베르트의 피아노 소나타가 아름답고 청명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고 여기에 크림을 넣은 따끈한 잉글리시 티는 분위기를 한껏 돋우었습니다.
새벽녁에야 호텔에 도착한 저는 오는 길에 비를 흠뻑 맞았었지만 저는 그날 왠일인지 전혀 춥지 않았었습니다. 옷은 비록 흠뻑 젖었지만 가슴은 바짝마른 장작처럼 훈훈하게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
이젠 어느덧 기억에서 잊어질만큼 시간도 꽤나 흘렀습니다.
오늘도 우리 집 음악실의 턴테이블에는 슈베르트의 피아노 소나타가 돌아가고 있습니다.
이 순간이 오면 저는 그 날, 쇼윈도우 밖으로 흘러 내리는 빗물과 함께 잉글리시 티를 마시며 엄지손가락을 치켜 세우던 M과 그의 손을 잡고 어깨를 으쓱해하던 그 할아버지의 모습이 느린 동영상으로 눈 앞에 떠 오릅니다.
12월초였으니까…
꼭 8개월만에 다시 찾아온 런던이건만 변한건 하나도 눈에 안 띄는데 겨울에 내리는 부슬비까지도 어쩌면 예나 지금이나 똑 같다는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나왔습니다. 아마 10년후에 다시 이곳을 찾아 온다 해도 모든 것이 지금과 꼭 같을 거라는 생각이 스쳐갔습니다.
해머스미스 지하철 역에서 내려 풀햄 팰리스 로드를 따라 템즈강변 쪽으로 걸어 내려가는 동안 저는 가랑비에 옷 젖는 줄도 모르고 내심 기대감과 설레임으로 자못 흥분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까짓 밤거리에 우산도 없이 가랑비를 혼자 맞으며 걷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았습니다. (원래 영국 사람들은 왠만한 비는 그냥 맞고 다닙니다만…)
일주일전 쯤 런던에 도착했던 그 다음 날 늦은 밤,
저는 서울서 미리 연락해둔 곳으로 가서 그렇게도 애타게 찾던 그 고물짝 앰프 두 덩어리를 들고 새벽녁에야 호텔로 들어 왔습니다. 가뜩이나 시차가 안 맞아서 잠을 설치는데다가 이 앰프를 들고 서울로 가서 그 소리를 들어 볼 기대감에 잠이 오질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호텔방에서 대충 포장했던 앰프를 다시 풀러서 자세히 뜯어 보고 있자니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것을 서울에 가지고 가더라도 50년이나 된 이 앰프가 제대로 기능이나 하는지가 의심스러워졌고 이를 점검이라도 해 보려면 이를 제대로 볼 수 있는 기술자를 찾아야 한다는 점과 이에 걸리는 시간이 꽤나 걸릴 거라는 생각이 들자 저는 가뜩이나 설치던 잠을 아예 떨쳐버리고 벌떡 일어나 앉았습니다.
거의 뜬 눈으로 밤을 새다시피한 그 다음날 저녁
저는 이 무거운 고물짝 앰프 두 덩어리를 들고 해머스미스로 향했습니다. 시내로 가는 지하철 안에서 시간이 없어 못한 저녁을 때우기 위해 샌드위치를 입에 물면서 언뜻 쳐다본 지하철 차창에는 흘러 내리는 빗방울의 굵은 선들 사이로 반사된 제 얼굴이 마치 무엇엔가 홀린듯한 심각한 표정으로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이 때에도 저는 그만 피식 쓴 웃음이 나오더군요. 아마도 이번이 거의 마지막 기회일 거라는 나름의 조급함이 나를 이렇게 몰고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신없이 지나간 런던 출장의 일주일이었지만 내내 머리속에는 그 M의 말이 거슬렸습니다. 저간의 사정을 설명한 내게 원래 수리에 2-3주는 걸려야 할 것이지만 이렇게 출장까지 와서 찾아준 내게 감사한 마음을 보답하기 위해 나의 귀국행 비행기를 타기 전날인 금요일 밤까지 끝내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100% 장담은 못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럭저럭 꽤나 오래 살았던 런던에 있을 동안 이러 저러한 연유로 알게되어 꽤나 여러 번 만났던 M은 전자기기 수리전문가인데 특히 영국산 빈티지 앰프를 잘 수리하곤 했었습니다. 어느 기종을 가지고 가도 어느 구석에선가 누렇게 바랜 회로도를 꺼내 점검해 보는 그 모습은 마치 쓰레기장 분위기 같은 그의 가게 때문인지 지저분하다는 첫 인상과는 관계없이 진짜 장인정신을 지닌 쟁이의 모습처럼 내 마음에 새겨졌었던 인물이었습니다.
마침 그의 가게는 제가 살던 동네에서 여름 내내 일요일아침이면 같이 테니스를 치던 지인의 가게가 M의 가게 바로 한 집 건너 있었기 때문에 그 인근에 있는 유명한 이태리 식당에도 꽤나 자주 간 덕에 저는 그 주변을 이미 잘 알고 지내던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수리를 의뢰하러 간 그 날 그 M의 가게 구석에는 이 M과 정답게 이야기하는 노인 한분이 있었는데 그의 옷차림은 마치 부둣가에서 하역작업을 마치고 난 후, 선술집에서 기네스 한잔을 걸치고 있는 듯한 허름한 차림을 하고 있었는데 표정은 얼마나 평화로워 보였는지 한참을 이야기 하고 싶은 인상을 가지신 분이었습니다.
.............
내일이면 서울로 간다는 기대와 함께 완벽하게 고쳤을까? 궁금해 하면서 이곳으로 오기전에 전화한 M은 여러말 할 것 없이 와서 보고 가져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전과 다름없이 여기저기 산더미처럼 중고 부품들이 쌓여있던 그의 가게에 들어서니 며칠 전 왔을 때 계셨던 그 노인은 그 날도 그 자리에 여전히 앉아계셨습니다.
점검차 앰프를 연결하니 하나는 완벽한데 하나는 아주 약한 험이 발생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내부를 들여다 보니 부품의 거의 반을 새것으로 갈아 치운 것으로 보아 두 덩어리 모두 대수술을 한 것임에는 틀림없었지만 한쪽에서 약한 험이 잡히는 것이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M도 여러번 이것을 잡아 보려고 시도를 하였으나 이를 고치지 못했는데 더 이상의 시간이 없으니 우선 서울로 가지고 가서 그곳에서 다시 점검을 해 보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좀 떨떠름한 표정을 짓자, 그럼 시간이 있냐고 해서 시간이 있다고 하자 그는 납땜 기구를 다시 챙겨 들었습니다. 그러기를 몇차례 한참의 시간이 지나도록 우리는 밖에서 그렇게도 요란하게 비가 퍼 붓는지도 모르고 온갖 신경을 앰프와 연결된 스피커에 쏟아 부었습니다.
이 것 저것 CD와 테이프를 틀어가며 음악을 듣는데 그때까지 조용히 앉아서 음악만 듣던 그 할아버지가 몇가지 제안을 하자 M은 그 노인의 말대로 회로도 몇 곳의 저항을 바꾸어 보았는데 거짓말같이 그때까지 신경쓰였던 험이 말끔이 없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 순간 우리 모두는 환호성을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M은 엄지 손가락을 일으켜 세우며 그 노인에게 감사하다는 표시를 연발해대었습니다. 밖에는 이미 가랑비가 제법 굵은 빗줄기로 바뀌어 쇼 윈도우를 때리고 있었는데 쇼 윈도우 바깥으로 지나다니는 자동차의 헤트라이트 줄기는 마치 B셔터로 찍은 사진처럼 긴 꼬리를 물고 다니는 네온싸인으로 보였습니다.
우리는 잉글리시 Tea를 한잔씩하면서 이제는 앰프 수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음악 감상을 위해서 다시 자세를 고쳐 앉았습니다. 이미 M이 문을 닫는 시간인 저녁 8시가 훨씬 지난 10시가 다 되어 갔지만 그 날 우리들에게는 늦은 시간이 별 문제가 되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점점 굵어지는 빗줄기가 유리창을 때리며 흘러내리고 있는데 M의 쓰레기장 같은 가게 안에는 슈베르트의 피아노 소나타가 아름답고 청명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고 여기에 크림을 넣은 따끈한 잉글리시 티는 분위기를 한껏 돋우었습니다.
새벽녁에야 호텔에 도착한 저는 오는 길에 비를 흠뻑 맞았었지만 저는 그날 왠일인지 전혀 춥지 않았었습니다. 옷은 비록 흠뻑 젖었지만 가슴은 바짝마른 장작처럼 훈훈하게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
이젠 어느덧 기억에서 잊어질만큼 시간도 꽤나 흘렀습니다.
오늘도 우리 집 음악실의 턴테이블에는 슈베르트의 피아노 소나타가 돌아가고 있습니다.
이 순간이 오면 저는 그 날, 쇼윈도우 밖으로 흘러 내리는 빗물과 함께 잉글리시 티를 마시며 엄지손가락을 치켜 세우던 M과 그의 손을 잡고 어깨를 으쓱해하던 그 할아버지의 모습이 느린 동영상으로 눈 앞에 떠 오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