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장기

나의 통나무 스피커 - AR 백통 얘기

by 오택근 posted Jan 19,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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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백년묵은 아름들이 통 나무를 잘라, 통나무 속을 쪼아 내어 통채로 만든 통나무 스피커,
  백통 스피커입니다."
" 가격은 집 한채 값이고, 우리나라엔 몇대 밖에 없는 희귀한 스피커입니다...."
  명동, 보석과 고급 오디오, 연예인의거리  충무로 쇼핑가에서, 화려하고  럭셔리한 쇼윈도의
  붉은 카펫 위에 보물 처럼 통나무 스피커를 모셔놓고, 멋지게 차려 입은  사장님의  말씀입
  니다.

아마 1960년대 중순경 쯤 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전축을 살려고 까까머리 고등학생인 나를 데리고
충무로 오디오 가게를 이집 저집 기웃 그리고 있을 때의 얘기입니다.

당시 인기 전축은 게라더 턴을 부착하여 만든 텔레푼겐의 콘솔형 전축이었고,
가게주인은 소위 HiFi 정도 한다고 보이는 손님 들에게는 콘솔형이 아닌 Separate
궤짝형의 AR Speaker등을 권한 것으로 추측됨니다.

이 콘솔형에 부착된 텔레푼겐 리시버의 주파수 다이얼에 FM 과 AM, MM1, MM2  등이 깨알
같이 복잡하게 나열되어 있어서, 가게주인에게 FM은 뭐냐고 물어 본적이 있을 때이니, 호랑이
담배 피울 때입니다.< KBS에서 아마 1970년 초순경 최초로 현재의 93.1을 방송함 ? >

당시만 해도 전축은 번쩍번쩍한 호마이카(피아노 마감)로 만들어 보기만 해도 호사스럽(?)게
보였을 때, 가게주인은 마치 생 통나무로 만들어 놓은 것 같은 궤짝처럼 보이는 AR Speaker에
대하여 침이 마르도록 장황한 설명을 늘어놓았습니다.

이 백통 스피커는 미국에서 수백 년 된 아름들이 나무를 잘라, 바다물에 담궈 놨다가 건조하길
수십번을 반복한 후 통나무 채로 속을 쪼아 내어 만들었기 때문에 스피커 통 자체가 통나무의
한 토막으로서 영구 불변하고, 너무나 무거워 장사 두명이 들수 있고,  음질이 탁월하며 ....
값은 집 한채 값인 120만원 이고 ...우리 나라에는 몇 대 밖에 없고 ....어쩌고 저쩌고 ...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  와 !  세상에 이런 스피커도 있구나 !... 집 한채 값이라 ... 꿈의
스피커구나... 나는 평생 언제 이런 스피커를 가져 보나... 재벌이나 복권에 당첨되지 않는 한
내게는 영원한 꿈이로구나 ...

뭐 ... 이런 한탄을 하며, 기회만 있으면 충무로 가게로 달려가 귀 동냥이나 하며 청소년기를
보냈습니다. 그  이후 장가들어 전세값도 마련하지 못한 주제에 집 한채 값의 스피커라 ...
내게는 현실과 너무나 동떨어진 동경의 스피커 였습니다.

1990년대 초순경 미국 동부지역 출장 길에 모처럼 주말에 틈을 내어 워싱턴 근교에 있는 자연
박물관인 스미쏘니안 인스티투션 국립 박물관을 관람하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대 자연의 변천사를 연대별로 당시의 최고의 과학 발명품과 같이 전시되어 인류사의 발전을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와! 세상에, 뜻밖에 이게 웬 일입니까. 청소년기에 꿈에서나 동경하여 왔든 , 백통은 아니지만
와인색의 통나무 스피커가 당당하게 박물관 중앙에 진열되어 있고 팻말에 [스피커 제작 기술의
대 혁명을 이룩한 증표]라는 뜻이 새겨진 명패를 달고 ar3(?)가 자태를 뽐내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 ...

이순간 피가 다시 끓기 시작했습니다.
비록 내가 재벌은커녕 부자 축에도 못 끼지만 이런 좋은 기회에 "통나무 백통 스피커" 를
장만하자...
원산지에서 사면 국내값의 최소한 20~30%에는 살 수 있을 것이다  ? @ # ...
국내에서 120만 원 했으니 잘만 하면 30만원 내외면 살 수 있지 않을 까 ? # @

내친 김에 AR Speaker의 딜러도 자청해 볼 겸 뉴욕 롱아이랜드에 있는 AR본사를 찾아갔습니
다. 떠나기 전에 AR사의 세일즈 메니저와 전화로 방문 취지를 설명하고 약속을 하였기 때문에
세일즈 메니저는 과분할 정도로 친절하게 제조과정과 제품에 대하여 설명해 주고 환대해 주었
습니다.

실험실, 제조과정, 청음실 등을 모두 둘러보았지만 어렸을 때 본 "통나무 스피커"는 볼 수 없었
고 엄격하게 선별된 합판(Plywood/Veneer)과 칩보드로 만든 스피커 밖에 없어서 내심으로
는 "통나무 스피커" 제작은 이제 더 이상 만들지 않나?  아니면 다른 공장에서 만드나?  의구심
을 떨칠 길이 없어 "통나무 스피커= Log Enclosure Speaker" 는 어디서 제작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이 메니저는 나의 질문이 무슨 뜻인지를 전혀 알지를 못하여, 할 수 없이 옛날 충무로 가게주인
이 설명한 대로  "통나무의 속을 파서 스피커 통을 만든 것" 을 얘기하였더니 웃음을 자제하며,
스피커 통은 합판과 칩보드로 만 만들어야 하는 이유를 소상하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처칠 수상이 인도수상과 만찬을 같이 할 때, 만찬 테이블에 서빙된 손씻는 물인 핑거볼을 인도
수상이 먹는 숲으로 착각하고 마시자, 무안함을 주지 않기 위해서 처칠 수상도 핑거볼을 같이
마셨다는 에피소드가 연상되어 우리는 이심전심으로 같이 박장대소 하였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동경해 온 나의 꿈이 깨지는 순간이었고, 나의 무식이 탄로난  순간이었습니다.
  
ar3a의 당시 현지 가격이 900불(발매시는 300불) 정도였으니 요즘 가치로 환산하면 적어도
10,000불이 넘는 고가의 스피커를 무슨 원가를 줄인다고 ...오히려 인건비가 몇 배가 더 먹히는
합판과 칩보드를 조합해서,  이들을 만들었겠는가 !  나도 참 무식도 했고,  장가까지 간놈이
중매쟁이 말을 그대로 믿는.. 순진하기도 했지 쯔쯔쯔...

앞뒷판으로 칩보드를 사용하는 이유는 칩보드가 합판보다 비중이 높기 때문에 공진과 공명
면에서 우수하여 저음에 좋고, 합판의 두께와 합판에 사용되는 나무의 수질에 따라 음질이 바뀌
어지는 실험 데이터에 대한 메니저의 설명은 귓전에 맴돌 뿐이었고.., 돌아오는 길에 나의 뇌리
속에는 "통나무 스피커" 라는 환상의 스피커만 메트로 차창 밖의 저녁 노을과 함께 오버랩
되었습니다.

수다스러웠든 충무로 오디오 가게주인의 중매로 이 여인에게 첫눈에 반해버린 후 근 20 여 년
을 흠모하고 참고 기다려 왔는데, 통나무 스피커라는 환상은 깨져 버리고... 아무래도 나하고는
인연이 없나 보다...  "통나무 스피커", "환상의 Sound",  "상상의 스피커" 로만 가슴속 깊히
고이 간직하자...라고 독백하며,

미모의 소녀 에스메랄다를 평생 사랑했든 노트르담 사원의 종지기- 곱추 카지모도는 끝내
에스메랄다가 죽고 나서야 겨우 자기의 연인으로 받아 줄 수 있었든 슬픈 사연과 같이,
나의 통나무 스피커여 ... 나의 에스메랄다가 되었구나.

세월은 흘러 그로부터  20 여년이 더 흘러간 후 외모는 온갓 상처 투성이고 마치 귀신과 같은
모습으로 나의 에스메랄다가 이제 또다시 내 앞에 나타났다.
고관대작에게나 어울렸든 그녀가 40 여 년이 흘러간 지금에야 애처러운 모습으로 다시 내 앞에
나타났다.

찬찬히 뜯어보니, 비록 다 늙어 몰골은 말이 아니나, 태생이 귀족출신 인지라 자태가 단아하고
품위는 단정하며, 놈들의 손은 타지 않은 듯 아직도 의연하고 도도한 자세로, 그 흔한 성형 수술
한번 받아 보지 않은 "고상함" 그 자체였다.
소리를 시켜 보았다.  아 ! ... 그  옛날 그대로 한점도 변함이 없구나 ...

고음은 청아 하기를 아침이슬 보다 더 맑고 깨끗하며,
중음은 귓전에 속삭임보다 더 싱싱하고,
저음은 그 내려감에 끝이 없구나.
영혼을 울리는 이 아름다운 소리를 감히 어떻게 다 표현 할 수 있으랴...

카지모도는 그의 여인이 갇혀 있는 차가운 암흑의 지하 무덤에까지 따라가 영원히 결합하지
않았는가 !
내 주제에 뭘 더 이상 망설인다 말인가 !

아 ! ...  사랑하는 여인을  못잊어,  끝내 자결하고 만, 불쌍하고 연약한  베르테르여,

나를 보라,.
40 여 년간을 기다리다 ...
다 늙은 후에도 연민의 내 여인을 얻은 나를 보라....
승리한 나를 보라....


고귀한 자태의 ar3a 를 정경호님을 위시한 많은 회원님의 도움을 받아
첫선을 본지 40 여 년만에 안방에 모셔놓고 두서없는 글을 남깁니다.

장문을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2009  1월  19일
오 택근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