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지않는 전설, 탄노이>
-----‘효형출판’에서 2001년 발간된 ‘소리의 황홀’(윤광준 저) 에서 옮겨왔습니다.----
때때로 텔레비전의 저녁뉴스에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유명인사의 집안 모습이 공개되는 경우가 있다. 그들의 거실에는 마치 부의 상징처럼 놓여 있는 대형 스피커가 눈에 뛴다. 예외 없이 탄노이 스피커다. 축재한 사람들과 탄노이 스피커, 이 묘한 연관은 퍽 자주 나타난다.
돈깨나 있다는 사람들이 탄노이 스피커를 좋아하는 이유는 뭘까? 탄노이는 크고 멋진 위용에 걸맞은 품격과 격조를 갖춘 스피커란 사실이다. 집안에 들여놓으면 보는 사람들이 한결같이 ‘아!’ 하고 감탄하게 되는 스피커가 바로 탄노이다. 장황하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 알아서 놀라주니까.
오디오에 빠져있는 내 친구의 얘기를 꺼내야겠다. 사람과 어울리기를 좋아하는 그의 집엔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방문한다. 커다란 웨스트민스터를 쓰던 시절에는 오는 사람마다 이 스피커를 보며 놀라는 표정으로 “대단하다!”를 연발했다고 한다. 이후 훨씬 성능이 뛰어난 와트 파피로 바꾸었을 때 그 왜소한 덩치에 실망하더라는 거다. 왜 이렇게 가난해졌느냐는 위안의 말과 함께….
탄노이의 존재감이 사람을 압도하는 사례다.
한때 강남의 한 고급 아파트에는 한 집 건너 하나씩 탄노이 스피커가 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이 아파트를 자주 드나들던 오디오 가게 점원들의 입에서 나온 얘기다. 옆집에 들여놓은 탄노이를 반상회 때 보고 이웃집 아주머니들이 경쟁적으로 들여놨다는 거다.
이 멋진 스피커로 무슨 음악을 들었는지 모르지만 탄노이 스피커가 이 지역 주민들의 문화적 욕구를 채워 주었다면 그나마 다행스런 일이다.
이웃 일본에서 탄노이의 인기는 한 세대를 거쳐 지금도 여전하다. 탄노이 숭배자였던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그 손자 세대의 탄노이 팬이 생겨난다. 최신 오디오 잡지의 대형 폴더 광고는 탄노이가 여전히 독점하고 있다. 전 세계를 통틀어 유독 일본에 많은 탄노이 팬들이 몰려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우리나라의 탄노이 붐은 일본의 영향을 지우기 힘들다. 작가 ‘고미 야스스케’가 쓴 탄노이 예찬론의 반향으로 탄노이는 더 유명해졌다. 사회적 영향력이 큰 유명 작가의 탄노이 예찬은 그 신뢰를 더해준 계기가 되었다. 가는 귀를 먹어 음을 잘 듣지 못했던 노 작가의 탄노이 체험론은 그의 문학적 깊이를 더한 명문으로 이름 높다. 그는 오토그래프의 열렬한 팬이었다. 일본 오디오파일들은 ‘고미 야스스케’의 탄노이 사랑에 호응했고, 이는 곧 탄노이 신드롬으로 발전했다. 탄노이와 일본인은 뗄레야 뗄 수 없다. 300B 싱글 앰프와 같이 물려서 듣는 탄노이 사운드를 오디오에서 득도의 경지쯤으로 생각하는 일본인들이 많다.
탄노이의 인기를 반영하듯 일본 오디오 잡지는 연일 탄노이 광고로 채워진다. 마땅한 오디오 정보를 얻기 어려웠던 70-80년대 국내사정은 일본 잡지의 의존도가 컸다. 이렇게 해서 일본의 탄노이 유행이 국내에 무분별하게 수용됐다. 탄노이 열풍이 우리나라에 그대로 밀려오게된 직접적인 원인이다. 80년대 중반까지 클래식 음악을 들으려면 탄노이 스피커가 아니면 안 된다는 말이 공공연히 떠돌 정도였다.
신예 하이엔드 오디오 스피커들의 기세에 눌려 약간 주춤해지긴 했지만 탄노이 생명력은 끈질기게 이어지고 있다.
탄노이를 현대 하이엔드 스피커의 범주에 넣기는 어렵다.
하지만 오랜 세월을 통해 시대와함께 변신해온 탄노이의 열정은 모든 스피커의 모범이다.
탄노이는 아직도 현역인 것이다. 오랜 전통만으로 구차한 명성이 유지되었다면 탄노이 존재를 얘기할 필요도 없다. 우리나라와 일본을 비롯, 아시아지역에서 특히 탄노이의 인기가 높은 것은 유럽의 문화적 전통에 대한 흠모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명문 탄노이의 매력은 세월을 초월한 일관성이다. 1947년 처음 만든 듀얼 콘센트릭 유닛을 아직도 사용하고 있다면 대단한 고집이다. 듀얼 콘센트릭 유닛은 탄노이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단서이기도 하다. 한 몸체 안에 고음, 저음용 유닛이 두 개 들어잇는 동축형 풀 레인지 유닛이다.
창립자인 ‘가이 R. 파운틴’을 역사에 남게한 유명한 코너형 혼 시스템 ‘오토그래프’로 듀얼 콘센트릭 유닛은 명성을 날리게 된다. 훗날 오토그래프는 프레스티지 시리즈의 최고봉인 ‘웨스트민스터’로 계승되며, 여기에도 듀얼 콘센트릭 유닛이 사용되고 있다.
탄노이는 이 유닛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기본적인 구조를 유지시킨채 시대의 요구에 따라 끊임없이 세부를 개량하고 기술적인 보완을 해나갔다. 전통과 신기술을 적절한 균형으로 조화시킨 개선이다. 디지털시대의 음을 소화하기 위해서는 더 빠른 반응속도와 섬세한 표현력이 요구된다. 듀얼 콘센트릭 유닛의 한계가 없는 것은 아니다. 모순의 갈등에 있는 전통의 고수와 현대성의 획득사이에서 탄노이는 자신의 듀얼 콘센트릭을 고집했다.
문제는 현재란 시점이다. 현대 스피커와 경쟁해야 하는 탄노이의 어려움은 전통을 포기해야만 해결 가능한 것들이 많다는 데 있다.
하이엔드 스피커에 비해 탄노이가 고집하고 있는 듀얼 콘센트릭 유닛과 대형 인클로우저 방식은 특성상의 한계를 드러낸다. 이 방식의 고집 때문에 탄노이의 변신은 몇 배로 더 힘들다. “듀얼 콘센트릭 유닛을 쓰지않는 탄노이는 탄노이가 아니다.” 라는 사용자의 반응. 이점을 상당히 의식하고 있는 탄노이는 교묘한 수법으로 현대 하이엔드 스피커의 대열에 합류했다.
1966년 새로 발표한 ‘킹덤’을 처음 보았을 때 탄노이의 고민을 단적으로 읽어 낼 수 있었다. 개선된 듀얼 콘센트릭 유닛을 중심으로 고음역과 저음역 유닛을 더한 보완의 방법으로 접근하고 있다. 기본축을 유지하면서 성능을 개선하겠다는 의지다. 예전 프레스티지 시리즈보다 더 커지고, 품격을 높였다. 그 동안의 기술적 성과를 투입해서 최신 스피커에 뒤지지않는 특성 확보가 가능해졌다.
킹덤은 에전의 탄노이와는 전혀 분위기가 다르다. 탄노이 왕국의 새로운 미래를 제시할 모습으로 변신했다. 여전히 위풍당당하고 깊이가 있다. 하지만 예전의 탄노이가 갖던 특유의 분위기는 오히려 줄어들었다. 중핵이라 할 듀얼 콘센트릭의 유닛은 여전히 위력을 발휘한다. 하지만 유닛 구성과 배열에서 오는 이미지는 일반적인 스피커와 전혀 다를 것이 없다.
‘탄노이도 별 수 없이 시대의 요구에 자신의 개성을 약화시켜 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킹덤에서 나오는 사운드를 들으며 탄노이 특유의 아름다움이 많이 변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이전의 탄노이가 지닌 특유의 음악적 소노리티는 전체와 세부를 적당히 버무려 얻는 융화의 음이었다. 킹덤이 만들어내는 확장된 사운드는 기존의 문제점들을 개선해서 세련된 느낌을 준다. 그러나 과거 탄노이만의 특유한 울림은 이질적인 울림으로 바뀌었다. 웅대한 규모의 압도감을 준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좋다고 할 수 없는 아쉬움이 있다.
역시 탄노이는 과거의 기억안에서 더욱 강렬하고 아름답다.
지킬 전통이 많을수록 새롭게 바뀐다는 것은 이만큼 어렵다. 탄노이의 진정한 매력은 크기와 외관의 품격에만 있지 않다. “탄노이 사운드”라고 이름 붙일 악기와 같은 울림이다. 탄노이라는 악기인 것이다.
유명 콘서트홀의 고유한 울림이 있듯이 탄노이는 탄노이의 고유한 울림을 갖고 있다. 음악이 탄노이화 된다고나 할까.
나직하게 깔리는 음색의 찹찹함이 있고, 여운을 길게 남기며 사라지는 잔향의 느낌은 다른 스피커로는 좀처럼 얻기 어렵다. 현악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재현해주는 스피커를 얘기할 때 탄노이를 거론하게 되는 이유가 이것이다. 인공적인 냄새가 적고 약간 슬픈듯한 느낌의 독특한 음색을 가진 탄노이라는 울림이 있는 악기. 이런 탄노이의 울림을 일본의 탄노이 숭배자들은 “은회색의 차분함”이라 표현 하는데, 이 절묘한 비유를 넘어설 다른 말을 찾기 어렵다.
탄노이 스피커는 호불호가 분명한 스피커다. 탄노이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리얼리티를 추구하는 극명한 음을 바라지 않는다. 음이 섞여 모든 것이 융화된, 유화 물감의 팔레트 같은 사운드를 즐기는 것이다. 때로는 필요 이상으로 음악을 거대하게 만들어 감상에 빠지게 하는 부풀려진 쾌감을 주는 스피커이기도 하다. 이런 특징들은 또한 탄노이를 싫어하는 사람들의 충분한 이유가 되기도 한다. 좀더 선명한 해상력과 타이트한 긴장감이 탄노이에 더해지길 원하는 사람들이 많다.
한 스피커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갑론을박을 벌인 다는 것은 그럴 만한 가치를 이미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탄노이가 만드는 탐미의 세계를 이미 맛보았다는 것은 아닐까?
오랜 기간 동안 탄노이에 대해 이토록 많은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그 존재 이유에 대한 강한 확신 때문이다.-------------------
-----‘효형출판’에서 2001년 발간된 ‘소리의 황홀’(윤광준 저) 에서 옮겨왔습니다.----
때때로 텔레비전의 저녁뉴스에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유명인사의 집안 모습이 공개되는 경우가 있다. 그들의 거실에는 마치 부의 상징처럼 놓여 있는 대형 스피커가 눈에 뛴다. 예외 없이 탄노이 스피커다. 축재한 사람들과 탄노이 스피커, 이 묘한 연관은 퍽 자주 나타난다.
돈깨나 있다는 사람들이 탄노이 스피커를 좋아하는 이유는 뭘까? 탄노이는 크고 멋진 위용에 걸맞은 품격과 격조를 갖춘 스피커란 사실이다. 집안에 들여놓으면 보는 사람들이 한결같이 ‘아!’ 하고 감탄하게 되는 스피커가 바로 탄노이다. 장황하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 알아서 놀라주니까.
오디오에 빠져있는 내 친구의 얘기를 꺼내야겠다. 사람과 어울리기를 좋아하는 그의 집엔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방문한다. 커다란 웨스트민스터를 쓰던 시절에는 오는 사람마다 이 스피커를 보며 놀라는 표정으로 “대단하다!”를 연발했다고 한다. 이후 훨씬 성능이 뛰어난 와트 파피로 바꾸었을 때 그 왜소한 덩치에 실망하더라는 거다. 왜 이렇게 가난해졌느냐는 위안의 말과 함께….
탄노이의 존재감이 사람을 압도하는 사례다.
한때 강남의 한 고급 아파트에는 한 집 건너 하나씩 탄노이 스피커가 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이 아파트를 자주 드나들던 오디오 가게 점원들의 입에서 나온 얘기다. 옆집에 들여놓은 탄노이를 반상회 때 보고 이웃집 아주머니들이 경쟁적으로 들여놨다는 거다.
이 멋진 스피커로 무슨 음악을 들었는지 모르지만 탄노이 스피커가 이 지역 주민들의 문화적 욕구를 채워 주었다면 그나마 다행스런 일이다.
이웃 일본에서 탄노이의 인기는 한 세대를 거쳐 지금도 여전하다. 탄노이 숭배자였던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그 손자 세대의 탄노이 팬이 생겨난다. 최신 오디오 잡지의 대형 폴더 광고는 탄노이가 여전히 독점하고 있다. 전 세계를 통틀어 유독 일본에 많은 탄노이 팬들이 몰려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우리나라의 탄노이 붐은 일본의 영향을 지우기 힘들다. 작가 ‘고미 야스스케’가 쓴 탄노이 예찬론의 반향으로 탄노이는 더 유명해졌다. 사회적 영향력이 큰 유명 작가의 탄노이 예찬은 그 신뢰를 더해준 계기가 되었다. 가는 귀를 먹어 음을 잘 듣지 못했던 노 작가의 탄노이 체험론은 그의 문학적 깊이를 더한 명문으로 이름 높다. 그는 오토그래프의 열렬한 팬이었다. 일본 오디오파일들은 ‘고미 야스스케’의 탄노이 사랑에 호응했고, 이는 곧 탄노이 신드롬으로 발전했다. 탄노이와 일본인은 뗄레야 뗄 수 없다. 300B 싱글 앰프와 같이 물려서 듣는 탄노이 사운드를 오디오에서 득도의 경지쯤으로 생각하는 일본인들이 많다.
탄노이의 인기를 반영하듯 일본 오디오 잡지는 연일 탄노이 광고로 채워진다. 마땅한 오디오 정보를 얻기 어려웠던 70-80년대 국내사정은 일본 잡지의 의존도가 컸다. 이렇게 해서 일본의 탄노이 유행이 국내에 무분별하게 수용됐다. 탄노이 열풍이 우리나라에 그대로 밀려오게된 직접적인 원인이다. 80년대 중반까지 클래식 음악을 들으려면 탄노이 스피커가 아니면 안 된다는 말이 공공연히 떠돌 정도였다.
신예 하이엔드 오디오 스피커들의 기세에 눌려 약간 주춤해지긴 했지만 탄노이 생명력은 끈질기게 이어지고 있다.
탄노이를 현대 하이엔드 스피커의 범주에 넣기는 어렵다.
하지만 오랜 세월을 통해 시대와함께 변신해온 탄노이의 열정은 모든 스피커의 모범이다.
탄노이는 아직도 현역인 것이다. 오랜 전통만으로 구차한 명성이 유지되었다면 탄노이 존재를 얘기할 필요도 없다. 우리나라와 일본을 비롯, 아시아지역에서 특히 탄노이의 인기가 높은 것은 유럽의 문화적 전통에 대한 흠모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명문 탄노이의 매력은 세월을 초월한 일관성이다. 1947년 처음 만든 듀얼 콘센트릭 유닛을 아직도 사용하고 있다면 대단한 고집이다. 듀얼 콘센트릭 유닛은 탄노이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단서이기도 하다. 한 몸체 안에 고음, 저음용 유닛이 두 개 들어잇는 동축형 풀 레인지 유닛이다.
창립자인 ‘가이 R. 파운틴’을 역사에 남게한 유명한 코너형 혼 시스템 ‘오토그래프’로 듀얼 콘센트릭 유닛은 명성을 날리게 된다. 훗날 오토그래프는 프레스티지 시리즈의 최고봉인 ‘웨스트민스터’로 계승되며, 여기에도 듀얼 콘센트릭 유닛이 사용되고 있다.
탄노이는 이 유닛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기본적인 구조를 유지시킨채 시대의 요구에 따라 끊임없이 세부를 개량하고 기술적인 보완을 해나갔다. 전통과 신기술을 적절한 균형으로 조화시킨 개선이다. 디지털시대의 음을 소화하기 위해서는 더 빠른 반응속도와 섬세한 표현력이 요구된다. 듀얼 콘센트릭 유닛의 한계가 없는 것은 아니다. 모순의 갈등에 있는 전통의 고수와 현대성의 획득사이에서 탄노이는 자신의 듀얼 콘센트릭을 고집했다.
문제는 현재란 시점이다. 현대 스피커와 경쟁해야 하는 탄노이의 어려움은 전통을 포기해야만 해결 가능한 것들이 많다는 데 있다.
하이엔드 스피커에 비해 탄노이가 고집하고 있는 듀얼 콘센트릭 유닛과 대형 인클로우저 방식은 특성상의 한계를 드러낸다. 이 방식의 고집 때문에 탄노이의 변신은 몇 배로 더 힘들다. “듀얼 콘센트릭 유닛을 쓰지않는 탄노이는 탄노이가 아니다.” 라는 사용자의 반응. 이점을 상당히 의식하고 있는 탄노이는 교묘한 수법으로 현대 하이엔드 스피커의 대열에 합류했다.
1966년 새로 발표한 ‘킹덤’을 처음 보았을 때 탄노이의 고민을 단적으로 읽어 낼 수 있었다. 개선된 듀얼 콘센트릭 유닛을 중심으로 고음역과 저음역 유닛을 더한 보완의 방법으로 접근하고 있다. 기본축을 유지하면서 성능을 개선하겠다는 의지다. 예전 프레스티지 시리즈보다 더 커지고, 품격을 높였다. 그 동안의 기술적 성과를 투입해서 최신 스피커에 뒤지지않는 특성 확보가 가능해졌다.
킹덤은 에전의 탄노이와는 전혀 분위기가 다르다. 탄노이 왕국의 새로운 미래를 제시할 모습으로 변신했다. 여전히 위풍당당하고 깊이가 있다. 하지만 예전의 탄노이가 갖던 특유의 분위기는 오히려 줄어들었다. 중핵이라 할 듀얼 콘센트릭의 유닛은 여전히 위력을 발휘한다. 하지만 유닛 구성과 배열에서 오는 이미지는 일반적인 스피커와 전혀 다를 것이 없다.
‘탄노이도 별 수 없이 시대의 요구에 자신의 개성을 약화시켜 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킹덤에서 나오는 사운드를 들으며 탄노이 특유의 아름다움이 많이 변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이전의 탄노이가 지닌 특유의 음악적 소노리티는 전체와 세부를 적당히 버무려 얻는 융화의 음이었다. 킹덤이 만들어내는 확장된 사운드는 기존의 문제점들을 개선해서 세련된 느낌을 준다. 그러나 과거 탄노이만의 특유한 울림은 이질적인 울림으로 바뀌었다. 웅대한 규모의 압도감을 준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좋다고 할 수 없는 아쉬움이 있다.
역시 탄노이는 과거의 기억안에서 더욱 강렬하고 아름답다.
지킬 전통이 많을수록 새롭게 바뀐다는 것은 이만큼 어렵다. 탄노이의 진정한 매력은 크기와 외관의 품격에만 있지 않다. “탄노이 사운드”라고 이름 붙일 악기와 같은 울림이다. 탄노이라는 악기인 것이다.
유명 콘서트홀의 고유한 울림이 있듯이 탄노이는 탄노이의 고유한 울림을 갖고 있다. 음악이 탄노이화 된다고나 할까.
나직하게 깔리는 음색의 찹찹함이 있고, 여운을 길게 남기며 사라지는 잔향의 느낌은 다른 스피커로는 좀처럼 얻기 어렵다. 현악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재현해주는 스피커를 얘기할 때 탄노이를 거론하게 되는 이유가 이것이다. 인공적인 냄새가 적고 약간 슬픈듯한 느낌의 독특한 음색을 가진 탄노이라는 울림이 있는 악기. 이런 탄노이의 울림을 일본의 탄노이 숭배자들은 “은회색의 차분함”이라 표현 하는데, 이 절묘한 비유를 넘어설 다른 말을 찾기 어렵다.
탄노이 스피커는 호불호가 분명한 스피커다. 탄노이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리얼리티를 추구하는 극명한 음을 바라지 않는다. 음이 섞여 모든 것이 융화된, 유화 물감의 팔레트 같은 사운드를 즐기는 것이다. 때로는 필요 이상으로 음악을 거대하게 만들어 감상에 빠지게 하는 부풀려진 쾌감을 주는 스피커이기도 하다. 이런 특징들은 또한 탄노이를 싫어하는 사람들의 충분한 이유가 되기도 한다. 좀더 선명한 해상력과 타이트한 긴장감이 탄노이에 더해지길 원하는 사람들이 많다.
한 스피커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갑론을박을 벌인 다는 것은 그럴 만한 가치를 이미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탄노이가 만드는 탐미의 세계를 이미 맛보았다는 것은 아닐까?
오랜 기간 동안 탄노이에 대해 이토록 많은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그 존재 이유에 대한 강한 확신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