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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얼굴 3

by 조중걸 posted May 24,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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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얼굴 3

<이상적인 오디오>에 대한 개념은 각자가 다릅니다. 그런데 어쩌면<개념>이라는 용어 자체가 잘못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소리에 관한한 생각보다는 <느낌>을 따라가니까요. 우리의 감정 중 느낌처럼 애매한 것도 없고 느낌처럼 자기 주장이 강한 것도 없습니다. “느낌만으로 사물을 판단하는 사람은 바보 아니면 미치광이이다”라고 어느 현인께서 말씀하셨다는데 바로 저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주제에 관한한 저는 구별되어야 할 사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사실이란 실상 하나의 안타까움인데, 어떤 애호가들은 느낌(취향)의 차이와 우열의 차이를 구별하지 않는다(못한다?)는 것입니다. 강호에는 노이만이나 윌리엄슨이나 마란츠 보다도 대단한 사람 많습니다! “싱글이래야지. 푸시풀 듣는 것도 귀라고 할 수 있어?”라거나“3극 직렬관이래야지. 5극관이나 빔관은 갖다 버려야 해 (부디 저한테 버려 주십시오)”라는 말씀을 아주 쉽게 하십니다. 빔관에 푸시풀도 즐겁게 듣는 제 가슴에 대못을 박는 말씀이십니다. 네 귀는 <막귀>라는 말씀에 다름아니지요. 한 달쯤 전에는 3극관 싱글 애호가께서 무려 한시간에 걸쳐 그 구성의 우수성에 대하여 끝없는 설교와 설득을 하셨습니다.

나쁜 푸시풀 앰프가 있을 것이고 나쁜 5극관이 있을 뿐 아닌가요? 또 좋은 싱글 엔디드 회로와 좋은 3극 직렬관이 있을 뿐이라고요. 어떤 분은 ‘3극 직렬관은 숯불구이이고 빔관은 삶은 고기( 혹은 프라이팬 고기)’라고 멋진 비유를 하십니다. 그런데 저는 삶은 고기도 좋아합니다. 암(癌) 걱정 안 해도 되고 부드러우니까요. 알텍당 당수께서도 6L6에 알텍을 물려 듣고 있는 것을 저는 압니다. 좋더군요. 정말이지 나름대로 좋습니다! 유연하고 나긋나긋하고 부드럽고 푸근합니다.

화류계 생활 33년에 스쳐간 기기도 숱하게 많은데 (날린 돈도 많고요) 저는 아직까지도 지조도 줏대도 없는 인간입니다. 섬세하게 살랑거리는 3극관 싱글이 좋다가도 갑자기 잔변감이 들기도 합니다. 푸시풀의 시원하게 내지르는 호쾌함이 그립습니다. 어떤 때는 그것이 무지막지해서 싫고요. 기호만큼 변덕스러운 것도 없습니다.

근래에 강남 사람들하고 공부 많이 한 사람들처럼 많이 씹힌 사람들도 없습니다만, 아마 탄노이 스피커처럼 많이 씹히지는 않았을 겁니다. 심지어는 강남 사람들하고 탄노이가 같이 묶여서 씹힙니다. 공부 많이 하고 강남 살고 탄노이 듣는 사람은 이제 트리플로 씹히는 겁니다.

<윤**>씨의 <소리의 **>이라는 책에서는 탄노이 스피커에 한 챕터를 할애하는데 다음과 같이 시작합니다. “돈깨나 있다는 사람들이 탄노이를 좋아하는 이유는 뭘까? …… 탄노이 웨스트민스터에서 훨씬 성능이 뛰어난 와트 퍼피로 바꾸었을 때 왜 이렇게 가난해졌느냐는 위안의 설 …… 한때 강남의 한 고급 아파트에는 한 집 건너 하나씩 탄노이가 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 이 멋진 스피커로 무슨 음악을 들었는지 모르지만……”

강남 사람들하고 탄노이 듣는 사람들은 하릴없이 속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특정지역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그 사람들에게 이렇게 무차별폭격을 가해도 되는 건지…… 고 민**선생께서 탄노이를 비판한 것을 필두로 탄노이는 귀가 트였다고 자부하는 많은 사람들의 비판 대상입니다. 그런데 윤**씨께 한 가지 궁금한 사실이 있습니다. 와트 퍼피가 탄노이보다 성능이 뛰어나다는 것은 혹시 본인의 느낌을 사실로 바꿔 놓은 것은 아닌가요? 어떤 근거로 와트 퍼피가 탄노이보다 더 뛰어난 걸까요? 혹시 더 비싸다는 애기를 이렇게 바꿔서 말한 것은 아닌가요?

탄노이와 와트 퍼피를 비교하는 것은 김치와 피자를 비교하는 것 이상으로 웃기는 애깁니다. 탄노이와 와트 퍼피는 음악에 접근하는 태도 자체가 완전히 다릅니다. 비교 대상이 아니라는 거죠. 음악과 재현이라는 주제에 대하여 이제 새로운 개념이 싹트고 있습니다. 음악에 대한 전통적인 개념은 전통적인 악기로 연주회장에서 실연되는 것이고, 오디오에 대한 전통적인 개념은 그 연주의 재현이죠. 이 경우 오디오 기기가 필요한 이유는 매일 연주회장에 다닐 정도로 돈이 많지도 한가하지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새롭게 대두되고 있는 음악은 컴퓨터로 합성된 인공적 음향과 스튜디오 녹음 등을 포함합니다. 이 경우 음악은 어딘가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인위적으로 만든 것이 됩니다. 마치 칸딘스키나 말레비치가 자연을 그리기보다는 그들 내면을 그린 것과 같고, 영화 <가위손>이 몽상을 현실보다  더욱 현실적인 것으로 만든 것과 같죠. 음악에 대한 정의를 새롭게 해야 하는 것이고 이 새로운 정의 하에서는 도대체 고유 명사적 음악이란 있을 수가 없게 됩니다. 포스트 모던의 물결이 음악에 있어서는 이렇게 성립된 것입니다. 저는 때때로 현대 하이엔드 오디오에서 들리는 소리가 연주회장의 소리보다도 더 박진감 있고 더 다이나믹해서 마치 오디오의 소리가 실체이고 연주회장의 소리가 모방된 소리라는 섬찟한 느낌이 들 때도 있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느낌이 포스트모던의 시작이죠. 아마도 다음 시대를 선도할 창조적 음악의 출발점은 여기가 되겠죠. “자연이 예술을 모방한다”고 말한 것은 아마도 오스카 와일드였던 것 같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전통파입니다. 저에게 있어 음악은 휴식이고 위안이고 즐거움이고 센티멘탈리즘입니다. 이것이 저의 수준입니다. 소외감 때문에 몸을 떨고 하늘엔 보잉 747기가 굉음을 내고 있는 이 시대에 저는 한심하게도 현실의 고달픔에서 음악 속으로 도망가는 사람입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시대정신 속에 살고 있습니다. 헤비메탈과 하드코어나 여러 실험적 음악을 하는 사람들이죠.

스트라빈스키로부터 시작해서 힌데미트 등을 거쳐 존 케이지와 백남준에 이르는 계열도 여기에 속한다고 할 수 있지요. 현대 하이엔드 기기들은 바로 이러한 음악에도 부응하도록 만들어진 것입니다. 현대음악과 대중음악은 그 도구로서 다양한 음악적 악기들을 사용하기 때문에 거기에 부응하는 오디오 기기들도 광대역의 빠른 응답 특성을 가져야 하고 엄청난 해상력과 임장감을 가져야 합니다.

탄노이는 그중에서도 특히 모니터 시리즈는 반면에 전통적인 음악적 개념에 부응하도록 만들어진 것입니다. 즉 연주회장에 앉아 있듯이 탄노이 앞에 앉아 있을 것을 가정한 것이지요. 탄노이는 전통적인 악기 소리를 잘 재현해내고 또 전쟁시에 사용되었을 때에는 가짜 대포소리를 잘 내면 되었습니다.

탄노이에 대한 비판 중에 가장 큰 것은 탄노이는 저역에서 뭉친다는 것입니다. 저음부의 악기들이 생생하지 않다고들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실제 연주회장에서의 저음입니다. 우리가 연주회장에 앉아있으면 음향은 일단 하늘로 올라갔다가 위에서부터 우리에게 내려옵니다. 직선으로 뻗는 소리는 연주자가 자기 연주 소리를 들을 때만 가능합니다. 우리가 정위감이라는 것을 ‘연주회장의 전면에서 수동적으로 음악을 들을 때’라고 가정한다면 이 경우 정위감은 완전히 희생됩니다. 하이엔드 기기에서 느끼는 정위감은 사실상 만들어진 것입니다. 일단 긴 혼이 달린 스피커나 멀티웨이의 스피커들은 정위감이 있을 수 없습니다. 진정한 정위감은 오로지 풀레인지나 동축형에서 가능합니다. 사실상 탄노이가 정위감에 있어서 가장 정확한 스피커 중 하나라는 것이죠. 우리가 멀티웨이, 멀티스피커에서 시끄럽다고 느끼고, 탄노이에서 단정하다고 느끼는 것은 바로 이 이유입니다. 이것이 이론적으로 왜 그런가 하는 것은 언젠가 기회가 되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연주회장에서는 저음부가 애매하고 희미하게 뭉쳐서 나옵니다. 그리고 이것이 훨씬 자연스러운 저음입니다. 이것은 마치 자연스러운 태양광은 애매한 주광색인 것과 같습니다. 태양광을 스펙트럼으로 분석해 놓았을 때 그것이 진짜 햇빛인가요? 낱낱의 저음부 악기가 제각기 자기의 음을 선명하게 우리에게 전달해야 한다면 - 와트 퍼피는 그것을 잘합니다만 - 그것이 멋지게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연주회장 소리는 아닙니다. 이것은 와트 퍼피가 더 나쁘고 탄노이가 더 낫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단지 제작의 목적이 다르다는 것이죠.

사실상 ‘정위감’이라는 용어도 애매한 것입니다. 도대체 어느 위치에서의 정위감이 진정한 정위감인가요? 연주회장의 전면인가요? 아니면 측면인가요? 연주자들 사이에서 음악을 듣는다고 가정한다면 놀랍게도 동축형보다도 오히려 멀티스피커가 더욱 훌륭한 정위감을 가진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암스테르담의 콘서트헤보우 홀에서 <비창>을 들은 적이 있는데 뒤쪽 좌석이었습니다. 거기가 C석이었습니다. 탄노이보다는 차라리 린(Linn) 아이소바릭 스피커에 가까운 소리가 나더군요. 린 스피커는 우퍼 하나의 위상을 하늘로 향하여 반전시키니까요.

‘결국 어떤 기기가 좋은 것이냐’는 질문은 다음과 같은 형식으로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듣고자 하는 음악과 내가 앉고자 하는 좌석과 내가 느끼고자 하는 음색에 비추어 내게 가장 알맞은 기기가 무엇인가?’ 저는 개인적으로는 클래식을 듣고자 하고 R석에 앉고 싶고 간결하고 단정하고 차분한 음색을 원합니다. 그래서 탄노이가 좋습니다. 물론 위와 같은 조건을 만족시키는 다른 스피커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탄노이를 택합니다. 약간은 구슬픈, 튀지는 않지만 스미듯이 다가오는 예쁜 고음, 삶의 영고성쇠를 다 겪은 듯한 차분함을 지니는 중음, 온화하고 포용력 있는 저음 등은 탄노이에서만 만족스럽게 얻을 수 있었으니까요. 더하여 음색과 분위기가 동시에 만들어내는 고풍스럽고 품격에 넘치는 화음 등은 제 경험상 탄노이에서만 가능했습니다. ‘은회색의 그을음’이라는 문학적 수사가 사용되는 바로 그 음색이죠. 결론적으로 탄노이에 대한 저의 사랑은 탄노이가 지닌, 있을지도 모르는 어떤 물리적 성격에 있지는 않다는 것이죠. 탄노이와 동일한 성격을 지닌 어떤 스피커도 내지 못하는 탄노이 고유의 음 -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음 - 그 음색에 있는 것입니다.

* 두 얼굴 4에서는 ‘탄노이와 통울림’에 대하여 두 얼굴 5, 6, 7에서는 탄노이와 매칭 앰프에 대해서 써보겠습니다. 시끄럽다면 찌그러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