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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얼굴 -

by 조중걸 posted Jun 07,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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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얼굴4-b
저와 절친하게 지내는 한 독일 오디오 애호가께서는 탄노이 스피커에 대하여 ‘마치 음악이 장막을 통하여 들리는 듯 갑갑하다‘ 고 하십니다. 여기에 대하여 저는 ‘그래도 바로 그 소리가 연주회장 소리’ 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대단한 모순인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어떤 대단한 음악 평론가께서 연주회장에서 ‘소리가 갑갑하다’고 하시는 것을 들은 적 있습니다. 그분 역시 독일 스피커를 쓰고 계셨습니다. 저는 또한 제가 알고 지내는 한 바이올린 연주자로부터 어떤 때는 자신의 연주 자체가 자기에게 고역이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은 적도 있습니다. 이분은 탄노이 애호가 이십니다. 이러한 예의 백미(白眉)는 다음과 같은 일화입니다. 한 독일 기기 매니아가 저희 집에 놀러 오셨습니다. 저는 마누라에게 피아노 한 곡을 부탁했고 우리는 감상했습니다. 그 독일 매니아 왈, ‘오디오가 확실히 대단한 거야.’ 저는 웃음을 참느라고 끔찍한 고통을 겪었습니다. 진짜 주화 두 개로 가짜 주화 한 개를 만드는 한심한 위조범보다 더 한심한 감상자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다 무엇일까요?

독일과 영국은 스피커의 제작에 있어 완전히 상반된 접근 태도를 지내고 있습니다. 독일 기기들은 음원자체에 집중합니다. 즉 악기에서 나오는 소리를 가장 정확하게 우리 귀에 전달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습니다. 그 경우 악기 소리가 우리 귀에 그대로 들어옵니다. 선명하게 느껴지는 이유이지요. 영국은 음악을 듣는 감상자에게 집중합니다. 즉 악기에서 나오는 원초적인 음 이상으로 그것을 듣는 우리 귀에 맞도록 스피커를 튜닝하는 것이지요, 음원에서 애초에 나오는 음향은 그 끝이 날카롭게 벼려져 있습니다. 그것이 공기를 타고 파동으로서 우리에게 다가 올 때 부드러워 지는 것이지요. 자신이 피아노를 치면서 소리를 들어보면 그 소리는 확실히 독일 스피커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감상하는 입장에서 좀 떨어져서 연주를 들으면 음 끝의 날이 상당히 동글동글 해 집니다.

독일 기기의 애호가들은 오히려 독일 스피커가 부드럽다고 느끼고 탄노이가 갑갑하다고 느낍니다. 우리는 양념된 갈비를 먼저 먹을 경우 생고기를 도저히 먹지 못합니다. 밋밋하지요.
둘 다를 먹고 싶을 경우 주물럭 다음에 양념갈비를 먹어야지요. 일단 혀가 자극에 익숙해지면 자극적이지 않을 경우 무미건조 해지지요. 강아지의 경우에도 개밥만 주는것이 서로에게 편안하고 바람직한 것이 됩니다. 일단 사람들이 먹는 강한 소오스의 입맛에 길들여진 강아지들에게는 자기네 사료가 너무 맛이 없지요. 그 강아지들은 인간이 걸리는 대부분의 성인병에 노출됩니다. 그리고 변도 지독히 냄새나는 것을 봅니다. 변 치우는 것이 가족간에 불화의 씨앗이 됩니다. 인간 역시도 건강을 생각한다면 대구 매운탕 보다는  대구 지리를 택하는 것이 낫지요. 악기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자 악기의 강렬한 음향에 노출된 귀는 어쿠스틱 악기에는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합니다. 전자 악기가 난리를 쳐야 속이 시원하다고 느끼지요. 불행하게도 모든 향락적 도락은 자극의 상승만을 요구합니다.

탄노이로도 이러한 음을 들을 수 있습니다. 먼저 인클로저를 엄청나게 두껍고 무겁게 짜고 그 안을 솜으로 채우면 됩니다. 그 경우 음 끝이 날카로워지고 선명해 집니다. 이제 양념갈비가 된 것이지요. 그러나 화음은 포기해야 합니다. 저는 그렇게 탄노이를 듣는 사람을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데 이 사람이 바로 제게서 필드형 클랑필름을 가져간 B모씨입니다. 탄노이는 곧장 쫓겨 나갔지요. 생긴 대로 살아야 했던 건데 자기 자신을 잘 몰랐던 것입니다. 독일 스피커가 훨씬 맞는 사람이었지요.

독일 사람들은 우리 외부 세계에 어떤 객관적 실체가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 인식과는 독립되어서 홀로 존재하는 객관적이고 엄정한 대상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관념론적 실재론이 특징적으로 독일적인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영국의 흄이 외부 대상의 객관성을 공격했을 때 악착같이 버텨본 사람도 사실 독일인인 칸트였던 것입니다. 반면에 영국인들은 뼛속까지 경험론자 들입니다. 윌리엄 오캄 - 존 로크 - 죠지 버클리 - 데이빗 흄 - 러쎌 -비트겐슈타인 -오스틴 에 이르는 경험론적 전통은 영국인의 실제적이고 감각적인 기질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영국인들은 객관적인 존재를 부정합니다. 모든 지식은 상대적인 것이고 인식주체에 의존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그들에게는 강하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 논리를 끝까지 밀고 나가면 <보는 것만이 믿는 것이다>라는 주관 관념론에 이르게 됩니다.

결국 이러한 차이가 음향기기의 차이를 불러온 것 같습니다. 음원에서 나오는 소리를 가감없이 청자에게 전달하는 것과 그 소리야 어떻든 우리가 듣는 바로 그 음을 중시하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존재하는 것이지요. 저는 개인적으로 경험론자입니다. 바이올린 소리가 원래 어떻든 그리고 엘리 아멜링의 목젖이 어떻게 진동하든 별 관심 없습니다. 저의 오디오는 “R석에 앉아 있는 나” 라는 환각을 저에게 심어주기만 하면 되고 이것이 제가 탄노이를 좋아하는 이유입니다. “언어의 한계가 세계의 한계” 인 것처럼 “제 귀의 한계가 음의 한계” 인 것입니다.

엔지니어들은 트랜스 매칭 방식은 소리의 대역을 좁히고 음에 비음(nasal sound)을 섞기 때문에 좋지 않다고 말합니다. 아마 90% 이상의 엔지니어들이 그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들은 있는 그대로의 소리를 듣기 위하여는 무한소의 임피던스를 무한대의 임피던스로 받는 것이 가장 좋다고 말하지요. 그들은 도대체 실연을 들어본 사람들인가요? ‘있는 그대로의 음’ 이란 것은 본래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것을 모르는 것이지요. 제 개인적인 경험은 오히려 LCR방식의 포노단 - 입출력 방식의 라인단 - 입출력 방식의 파워앰프로 연결될 때 실제 음에 가장 가까웠다는 것을 말합니다.  듣지도 못하는 초고역, 초저역이 있어야만 있는 그대로의 소리인가요? 탄사모 여러분, 소리를 듣는 것은 바로 여러분 자신이고 소리를 만들어 나가는 것도 바로 여러분입니다. 평론가들이나 엔지니어들이 그것을 대신 해 주지는 못합니다. 기기를 파는 일에는 숍이 많은 도움이 되겠지요. 트랜스 없이 프리와 파워를 연결해서 듣다가 그 사이에 아웃풋, 인풋 트랜스를 삽입시키면 확실히 음의 열기는 감소됩니다. 음이 명확하지만 부드러워지고 감기 걸린 듯한 소리가 되지요. 그러나 다시 트랜스를 떼어내면 갑자기 사납고 새된 소리가 나온다고 느껴집니다. 기호의 문제겠지만 제 경험상 어쨌든 트랜스 방식이 실연과는 더 비슷합니다.


확실히 트랜스 매칭 방식은 음의 감쇄 -소위 말하는 클리핑-를 감수해야 합니다. 임장감과 날카로운 차가움을 좋아하는 하이엔드 유저들은 트랜스 매칭 방식을 기피해야 합니다. 매킨토시사의 초기 솔리드 스테이트 앰프에는 출력트랜스가 장착되어 있습니다. 반도체 소자의 날카로움을 감쇄시키기 위해서였던 것이지요. 이 경우 역시도 트랜스가 음의 날카로움을 깎아냈던 것입니다.

스피커에 있어서 인클로저의 역할은 앰프에 있어서 트랜스 매칭의 효과와 비슷합니다. 만약 음 그 자체를 듣는다고 한다면 유닛이 내는 소리만을 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귀와 연주 사이에는 공간이 있고 울림이 있습니다. 또 전통적인 양식의 음악을 듣고자 하는 우리 탄노이 애호가들은 연주 회장에 앉아 있다는 환각을 갖고 싶습니다. 만약 통울림이 왜곡이고 트랜스매칭이 왜곡이라면, 바이올린이나 기타등의 악기의 경우에도 울림통 없이 막대기에 줄만 묶어서 연주 되어야 합니다. 하기야 센세이션을 좋아했던 파가니니는 자기 지팡이에 줄을 묶어서 바이올린으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평소에는 지팡이로 쓰다가 연주회장에서 지팡이 껍데기를 벗겨내고 연주했던 것이지요. 이 경우에는 연주가 아니라 코메디를 했던 것이지요. 저는 개인적으로 센세이션을 싫어합니다.

우리는 왜곡과 환각의 존재의의를 인정해야 합니다. 아폴론 신뿐만 아니라 바쿠스도 엄연히 중요한 신이니까요. 환각 자체가 실재(reality)는 아닐 지라도 적어도 환각 없이는 실재가 존립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실재가 어떠한 것인지 또 그 실재가 도대체 존재하기나 하는지 조차도 모릅니다. “나는 어제 오렌지의 낙원을 꿈꾸었다. 그러나 나는 오늘 더 이상 오렌지의 존재 자체를 믿지 않는다"

우리에게 꿈이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의 숙면을 방해하는 쓸모없는 것일까요? 현대 정신분석학은 오히려 꿈이야 말로 현실에서 이루지 못하는 희망에 대한 환각적 성취라고 말합니다. 꿈에서나마 우리의 소원이 충족되지 않을 경우 -즉 우리의 무의식이 자기 희망의 충족을 이루지 못할 경우 -우리는 현실 생활 속에서 모두 노이로제의 먹이가 되는 것이지요. 환각 자체가 실재는 아닐지라도 우리의 실재를 가능하게 하는, 오늘의 나와 내일의 나를 이어주는 보이지 않는 <다리>인 것이지요.

수영을 좋아했던 어린 시절의 제 동생은 잠자다 수영했고 머리에 큰 혹을 달기도 했습니다. 멋진 자유형의 결과가 책상다리에 머리를 박은 것이었지요. 그리고 먹는 걸 좋아했던 군 시절의 제 후임병은 온갖 종류의 쩝쩝 소리를 잠꼬대로 실연했습니다. 소리만 들어도 뭘 먹고 있는지 알 정도였습니다. 그들은 몰랐을 것입니다. 머리의 혹과 고참병들의 짜증이 사실은 현실속의 그들의 안위를 보살폈던 것을...   실수체계는 허수의 도움없이 완벽해 질 수 없고, 존재는 반존재 없이는 존립이 불가능하고, 지젤(Giselle)의 몽환적 2막은 실제적 1막보다 더욱 예술성이 넘칩니다. 그러니 실재라거나 실체라거나 사실(fact)이거나 하는 단어를 너무 좋아하지도 신뢰하지도 말아야 할 노릇입니다. 어쩌면 환각이 실재 일 수 있고 실재가 아닐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탄노이의 통울림이 주는 환각에 우리 자신을 내 맡깁니다. 그 환각적 통울림에........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되었는지, 나비가 꿈에 장주가 되었는지”

우리의 삶에는 우리가 누릴지도 모르는 어떤 행복 이상으로 견뎌내야 할 슬픔과 고통이 있습니다. <일체개고>라고 까지 하면 너무도 비관적인 세계관일지 모르지만 어쨌든 겪어내야 할 고통이 참으로 많습니다. 누구도 운명을 이길수는 없고 그저 “기쁨이고 슬픔이고 이것도 다 지나가려니”하고 버텨보는 수밖에는 없지요.

제 주위에 제가 사랑하고 또 저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생각 할 때마다 이루 형연할 수 없는 슬픔과 두려움이 제 가슴을 칠 때가 있습니다. 내가 이렇게도 사랑하고 이렇게도 아끼는 사람들이 허다한 고통과 상실을 어떻게 겪어 나가며 인생을 살아나갈까 라는 두려움과 동시에 그들이 상실 되었을 때에 제가 느껴야 하는 고통도 얼마나 클 것인가 하는 공포감도 들지요. 저는 누구도 제가 감당해야 할 슬픔을 경감시켜주길 원치 않으면서도 그들이 어떤 고통을 겪느니 차라리 제가 겪는 편이 낫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들 모두 중 제 자신이 가장 불행할 때 오히려 운명에 감사할 것도 같습니다. <등신불>의 주인공이 소신공양  을 하듯이 말이지요. 그리고 라스꼴리니꼬프가 “나는 그대의 고통에 무릎을 꿇은 것이 아니라 인류의 고통에 무릎 꿇은 것입니다”고 소냐에게 말하듯이 말이지요.

진정한 의미의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저는 공감과 감정이입니라도 생각합니다. 내 자신의 행복한 운명은 다른 어떤 사람이 불행한 댓가이고 우리는 모두 한 뿌리에서 자라나온 여러 나무 일 뿐이라고요. 그러니 어떤 운명의 우연이 어떤 한 그루의 나무를 잘 자라게 하듯이 다른 한 그루의 나무는 도태시키는 것이지요. 결국 우리는 형제일 뿐 아니라 운명이 바꾸어질 수도 있었을 것이지요. 제가 사랑하는 한 후배는 불치의 질병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저는 침대 한켠에서 멍하니 바라볼 뿐입니다. 그리고 때로는 눈물짓습니다. 침대의 독서등이 흐르는 눈물너머로 마치 태양처럼 떨려 보이지요. 제 후배는 말합니다. “병과 더불어 사는 법을 배워 야지요”
그러한 사람에게 어떤 위안과 조언과 충고가 필요하겠습니까. 말없는 공감과 응시외에 다른 것은 없지요. 그렇게 멍하니 앉아 있다가 집에 돌아오곤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유년시절부터 같이 겪어왔던 여러 즐거움들이 언뜻언뜻하며 뇌리를 치고 지나갑니다. 우리는 우리의 십대중반부터 이미 탄노이를 듣기 시작했습니다. 탄노이와 우리 우정 사이에는 뗄 수 없는 연상작용이 있는 것이지요. 조물주는 왜 이렇게도 아름다운 피조물들을 만들었다가 그렇게도 무심코 소멸시키는가요. 저는 평생에 걸쳐 나의 그 후배 보다 더 아름다운 사람은 본 적이 없습니다, 그는 예술과 학식과 탄노이를 사랑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바하의 아리아 몇 소절 때문에 잠을 못 이루는 들뜬 밤을 보내곤 했었습니다. 탄노이 DMT 10 이라는 스피커였지요. 지금 생각하면 하잘것없는 소품에 지나지 않았지만 당시에는 세계의 모든 보물이 거기에 다 모여 있었습니다.

탄노이는 공감과 감정이입의 스피커입니다. 탄노이는 도도하거나 대자적(An Sich)이기보다는 우리와 더불어 같이 슬퍼하고 같이 기뻐하는, 듣는 사람에게 음악을 일치시키는 스피커입니다. 저에게 탄노이는 항상 커다란 위안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위안은 탄노이가 제게 음악을 쏟아냄에 의하여가 아니라 집안을 채우는 부드럽고 조용한 화음에 의하여 입니다. 탄노이의 음악은 의식도 못하는 채로 우리 주위를 둘러싸는 새벽안개와 같은 종류의 것이지요. 즉 스스로 존재하기 보다는 거기에 있는 어떤 존재를 위하여 그 주위를 둘러싸는 그러한 스피커이지요. 이러한 효과는 선율을 명료하게 뽑아내는 종류의 스피커에 의하여는 절대 가능하지 않습니다. 탄노이와 같이 통울림을 적극적으로 이용하여 스피커 전체가 하나의 악기가 되어야 가능한 것이지요.


* 탄사모의 1차 모임은 6월 18일 오후 2시에 압구정동 무지크바움 (02-546-1296)에서 갖도록 하겠습니다. 이때 여러 가지 토의를 할 것입니다. 날씨 얘기만 하고 헤어질 수는 없지요. 우선 몇가지를 알려드리겠습니다.
첫째로, 우리는 예술사 (History of Art)에 있어서의 <형이상학적 해명>이라는 낯선 주제를 공부 할 것입니다. 백화점 문화센터 수준이니까 매우 쉽습니다. 강사는 조중걸 이지만 때때로 초청 인사도 모실 것입니다. 무료입니다.
둘째로, 올해 9월 20일 경부터는 모임방(분당 미금역의 오피스텔)을 가지게 됩니다. 음악감상, 토론, 예술사 공부등이 거기에서 진행될 예정이라는 것을 알려드립니다.
우리가 감당해야 하는 비용은 관리비 정도 이니까 개인당 1개월에 1만원 정도면 사용 가능할 것 같습니다.
셋째로는, 가입 요건은 없다는 것입니다. 골드문트에 알텍 물려 들거나 웨스턴 124B에 다인 오디오 물려 들어도 우리는 환영합니다. 단 독도가 일본 땅 이라는 사람은 제외합니다.(본래 정치,외교적 견해가 심각하게 차이나는 경우 같이 못 사는 법입니다)


                        “친구들이여 먹고 마시자
                         누가 알겠는가 저 세상에도 음악이 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우리 다시 만날 수 있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