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에는 다수의 악랄한 함정이 들어 있습니다. 심장이 허약하신 분이나, 자주 감정 조절에 난항을 겪고 계신 분들은
읽는 것을 심사숙고 하시길 바랍니다.
* 지난 월요일에 작은 교통사고가 있었습니다. 다행히 다른 차들과 운전자들의 털끝 하나 스치지 않았으나, 저 혼자서 차로는
중앙분리대를 들이박고, 저는 머리로 차량의 앞유리창을 들이박아 박살냈습니다.
(잠시 공익적인 문구 하나 ; 여러분, 운전할 땐 꼭 벨트 매세요. (아, 저요? 저는 안맸지요.))
혹시라도 아래글을 읽다가 도저히 못참겠다 싶은 대목이 나오더라도 저 놈이 교통사고 후유증이 심각하구나,
그렇게 이해하옵시고 양지하옵시며 혜량하옵시길 앙망합니다.
당대의 가장 저명한 오케스트라 지휘자 중 한 사람인 드미트리콘스탄니누어스가이스키는 이름에서 볼 수 있듯 러시아 출신이다.
(이름의 길이가 지루한 감이 있으므로 줄여서 가이스키라고 하겠습니다.)
가이스키는 곡의 해석이나 악기들의 특성을 파악하는 데에서 여느 지휘자들과는 다른 독보적인 경지를 쌓았다.
가이스키는 말했다.
"나는 바흐나 베토벤이 아니고 그들이 될 수도 없으므로 굳이 그들을 이해하려 하지도 않고 그들이 무슨 마음으로 작곡을 했는지
알 수도 없을 뿐더러 알고 싶지도 않습니다. 나는 그저 그들이 남겨준 악보를 보고 또 보고 거기서 내게 어떤 영감이 떨어질 때까지,
나는 지금 분명히 말했습니다. 영감은 내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어디선가 오는 것이고 그게 내 안에 들어오면 나는 내게
떨어졌다고 생각합니다. 우야든둥 어떤 영감이 떨어질 때까지 보고 또 보고 합니다. 그것은 내 것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며, 나는 그게
바흐나 베토벤이 줬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나는 단지 내게 떨어진 그 영감을 음악으로 표현해 보려고 노력하고 또 노력할 뿐입니다."
가이스키는 자기를 우러러보는 연주자들이나 자기에게 열광하는 청중들의 태도를 좋아하지 않았다.
"나를 그런 눈, 그런 표정으로 쳐다보면 안됩니다. 나는 여러분들과 조금도 다를 게 없는 사람일 뿐입니다."
뭇 사람들은 그런 가이스키를 위대하면서도 겸손한 사람이라고 더욱 칭송해마지 않았으나 가이스키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나에 대해서 물어보니 나에 대해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것 뿐입니다. 거기에 겸손이니 뭐니 이상한 단어들을 갖다붙이지 마시길
바랍니다."
가이스키는 덧붙여지거나 바뀌거나 윤색되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있는 그대로 표현하길 원했고, 그렇게 되길 바랬으며, 연주 땐
모든 연주자들이 그렇게 따라주길 재촉했다.
그런 가이스키의 연주는 때로는 엄숙하고 때로는 경건했으며 때로는 치밀했다.
"어이, 거기 날 갖고 글 쓰는 놈, 그렇게 갖다 붙이지 말라니까. 엄숙이니 경건이니 치밀은 무슨....지라알..."
언제나 천년의 거목처럼, 바위처럼 그대로일 것만 같던 그런 가이스키가 만년에는 자주 히스테리와 광포함을 드러냈다.
"뭐냐, 이 개같은 소리는...이건 내가 한 연주가 아냐."
"으악, 당장 꺼. 내 애들은 연습 때라도 저런 좆같은 연주를 한 적이 없어."
평생을 워낙 격렬한 몸동작으로 일관하며 살아온 탓인지 가이스키는 만년엔 팔다리의 관절이 망가져 반신불수나 다름없는 상태였다.
가이스키는 음반으로 나온 자기의 연주들을 오디오를 통해 듣고 싶어했다.
"내 성과를 자족하고 싶은 게 아니다. 내가 모자랐던 부분이나 부족했던 부분을 반추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것을 반성하고 되씹어
스스로 소화시킨 후에야 나는 편하게 눈을 감을 수 있을 것이다."
가이스키의 뜻은 거룩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가이스키의 뜻은 그 시작부터 어긋났다.
"이 세상의 오디오란 것들이 이 정도 밖에 안되는 물건들이었구나. 오디오를 만든 자들은 뭘 하는 자들이며 그걸 듣는 자들은 또
도대체 뭐하는 자들이냐. 이런 것들을 소리라고 만들고 소리라고 듣고 있단 말이냐."
가이스키는 곁을 돌보는 자들이 새로 오디오를 구해 올 때마다 발광했다.
"당장 갖다 버려.내 아직 손발이 자유롭다면 저것들을 오함마로 탕탕 때려부쉈을 것이며 튼튼한 이빨로 잘근잘근 씹어돌렸을 것이다."
가이스키는 종내엔 오래도록 자기 곁을 지켜온 수족과도 같은 최측근들까지도 의심했다.
"너희들이 날 편하게 죽지 못하게 하려고 더러운 소리를 내는 오디오만 골라서 갖고 오는 거지? 어느 분야에서든 진짜배기는 있는 법이야.
오디오 분야라고 그런 게 없을 리가 없잖아. 너희들이 지금 무슨 음모를 꾸미고 있는 거냐? 저 쓰레기들 하고 너희도 나가 죽어, 당장."
어느 날 가이스키는 최측근들이 또 새롭게 들여온 시스템을 고개를 숙이고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측근들은 놀람과 기쁨이 엇갈리는 얼굴들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우리가 드디어 가이스키님이 만족해할만한 시스템을 구해온 모양이다, 그런 기쁨.
그러나 그 시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어느 순간 가이스키가 고개를 들면서 번쩍 눈을 떴다. 눈에서 섬광과 같은 광채가 쏘아졌다. 측근들은 지리고 말았다.
"나 대신 인두질과 배선을 하여 오디오를 직접 만들 수 있는 자를 구해와라. 내가 직접 오디오를 만들겠다."
측근들은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가이스키가 버럭 고함쳤다.
"당장 저것도 내다버리고 너희들은 좆털이 휘날리게 달려가서 기술자를 구해와."
가이스키의 측근들은 멀리 한국까지 가서 기술자 한 명을 구해왔다.
가이스키는 그의 국적은 상관하지 않았다.
"그 동안 수많은 오디오들을 들었다. 그 오디오들에 따라온 설명서도 읽었지. 한마디로 오디오 쪽엔 거짓말장이들과 사기꾼들 뿐인 것
같더군. 자네도 그런 언어로 나를 농락하면 나는 자네도 죽이고 나도 죽을 거야. 난 지금 장난하자는 게 아니거든."
요컨대 까불면 넌 죽는다, 였다. 한국에서 온 기술자는 귀찮은 듯 손을 내저었다.
"그러고 싶어도 결국 소리는 못 속이고 소리가 속아넘어가지도 않으니까 그런 걱정 붙잡아매슈."
가이스키는 눈을 번쩍 떴다.
"소리를 못 속이고 소리가 속아넘어가지도 않는다고?"
기술자는 빈정대듯이 되받았다.
"당연한걸 뭘 새삼스럽게 또 물어보쇼?"
가이스키는 한국의 기술자를 지그시 노려보았다. 눈빛이 이글거리듯 했다.
"너 이 개샠...조금 마음에 들었다. 앞으로도 마음에 들길 바란다."
측근들이 기술자를 한쪽에 불러서 위협했다.
"가이스키님의 생애와 업적을 그토록 말해주었는데 그 태도가 뭐냐? 가이스키님 앞에서 깎듯한 예의를 갖춰라."
기술자가 답했다, 짧게.
"좆까."
기술자는 가장 먼저 가이스키의 거처에 있는 오디오에 관계된 모든 것을 정리하게 했다.
"완전한 무, 여기가 소리의 시작입니다."
뭐나 되는 것처럼 잔뜩 개폼을 잡고 입을 여는 기술자를 가이스키가 차단했다.
"잠깐, 자네가 뭔가 착각하는 것 같은데 소리를 만드는 건 나야. 자넨 내가 시키는대로 하기만 하면 돼. 내가 그 동안 그냥 듣기만
했는 줄 아는가. 그 동안 전 세계의 내로라하는 오디오들이 여길 들어왔다가 쫓겨나갔어. 그러면서 나는 그 놈들의 특징을 모두
파악했지. 나는 어떻게 하면 그것들의 장점과 단점을 다스려 바른 소리를 만들어낼 수 있을지 이미 정리가 끝났어."
기술자는 빈정댔다.
"오...그러셨어요? 그래 저한테 뭘 시키실려구요?"
"단도직입적으로 묻지. 자네라면 출력관은 뭘 쓸텐가?"
가이스키의 물음에 기술자는 눈을 동그렇게 떴다.
"오, 진공관 오디오도 들어보신 겁니까, 위대한 가이스키님?"
"쉽샠, 묻는 말에나 대답해."
"정말 이런저런 거 다 들어보신 겁니까? 아니, 그것들의 특성을 파악하신 겁니까?"
"그렇다니까. 늙은이 한 입으로 같은 말 반복하게 하지 마. 헉, 힘들단 말이다, 새꺄. 헉...."
"제겐 변할 수 없는 굳건한 기준이 있습니다. 영감님하고 제가 동시에 말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기술자가 제안하자 가이스키의 입에 처음으로 희미한 웃음이 어리는가 싶더니 곧 바로 지워졌다.
"너...날 의심하는구나."
"피차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좋아. 그럼 하나 둘 셋 하면서 말해볼까?"
"장난하지 말자면서요?"
"닥쳐 임마. 하나, 둘, 셋. 육에르육"
"빔관."
가이스키의 입에서 육엘육이 나온 것과 한국에서 온 기술자의 입에서 빔관이란 말이 나온 것은 거의 동시였다.
가이스키의 얼굴이 멍청해졌다.
"빔관이 뭐야?"
한국에서 온 절체불명의 기술자는 처음으로 빙그레, 순하고 선선한 웃음을 지었다.
"영감님이 허풍쟁이는 아니시네요. 빔관은 태생부터가 전력증폭용이니 곧 출력을 담당하는 영역에 있지요, 천상 출력관 용도란 뜻입니다.
진공관이란 캐소드에서 방출되는 전자가 그리드로 들어오는 신호를 싣고 플레이트로 전달되고, 플레이트는 그것을 재량껏 키워 밖으로 내보내는
역할을 하는 물건인데, 이때 빔관은 그 전자의 흐름을 내부의 차폐와 제어부에 간섭되지 않고 자유롭게 하기 위해 설계된 특별한 관입니다.
그 특별함은 곧 소리로 증명되지요. 핵심은 전자의 자유로움, 그것이며 영감님이 말씀하신 그 육엘육도 빔관의 한 종류입니다."
가이스키의 늙은 눈에 생기가 돌았다.
"아, 그런 비밀이 있었군. 자유...아, 그 얼마나 아름다운 언어인가. 어쩐지 내가 듣기엔 그나마 그 육엘육을 출력관으로 쓴 앰프들에서
유일한 가능성을 보았지. 만든 놈들이 어떻게 만들었는지 듣기에 괴로운 소리들이었지만, 그거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갖게 한 유일한 관이었다니까.
그런데 그 빔관이란 것들이 육엘육 말고도 또 있단 말인가?"
"아마 영감님의 신분이나 지위에 맞추려고 값비싼 오디오들만 들이는 바람에 그나마 육엘육 정도만 가까스로 구경하실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빔관들이 좀 천대를 받거든요."
"천대를 받는다....음 왠지 더욱 그 녀석들에게 끌리는군"
기술자는 다시 빙그레 웃었다.
"영감님이 똥귀에다가 막귀가 아니고 대가리에 허위의식만 가득 들이찬 고집불통 늙은이가 아니시니 앞으로 제가 좀 편하겠네요."
"날 좋게 말하는 건지 나쁘게 말하는 건지 분간이 어렵군. 그런 말투는 좋지 않네. 모든 건 명쾌하고 명확한 게 좋은 거야."
"영감님 윈(Win)."
"음, 듣기 좋군, 좋아. 나는 내 인생에서 내 자신에게 승리하고 싶은 늙은이야. 지금이 그러기 위한 마지막 관문과 같지."
어느 날 가이스키가 새로운 제안을 했다.
"내 처음 생각을 바꾸고 자네와 협력하기로 하지. 자네도 얼마든지 자네 의견을 말하게. 나는 내 의견을 피력하겠네. 그래서 둘이 힘을
합쳐 멋진 소리를 만들어 보자고."
"진작 그러실 것이지. 소리는 한 사람 보다 같은 데를 바라보는 두 사람, 세 사람이 만나 협력하면 더욱 빛이 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영감님과
저처럼 만드는 자와 듣는 자가 같은 데를 바라보는 게 가장 이상적이지요."
기술자는 그 날로 가이스키의 측근들을 대신 부렸다.
세계의 저명한 오디오들을 구하느라 욕봤던 측근들은 그때부터 기술자가 요구하는 이런저런 부품들을 구하느라 바빴다.
측근들은 오디오를 구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며 투덜댔고, 기술자는 가이스키가 했듯 측근들이 구해오는 대부분의 부품들을 도로 갖다버리게 했다.
"이렇게 뺀질뺀질 번지르르 휘황찬란하게 생겨먹은 좆같은 부품들은 써먹을 데가 없어요. 갖다 버려요."
"오십 살 안된 놈들은 구해오지 마십시오."
"러시아가 고국이라고 러시아 부품들을 구해오시면 안됩니다."
와중에 가이스키는 진공관 오디오에 관련된 책자들을 탐독했다.
기술자가 못마땅해했다.
"그런 건 광고지나 다름없어요. 이거나 보고 또 보세요."
기술자가 가이스키에게 준 건 진공관 스펙이 적힌 책이었다.
"이게 뭔가? 온통 도표와 그래프 뿐이지 않은가. 이런 걸 무슨 재미로 보라고...."
"그게 영감님이 평생 봐 오신 악보나 마찬가집니다."
가이스키는 어쨌든 공부를 많이 했다.
"그 빔관이란 것이 알고봤더니 지금까지 나온 오디오들의 대부분이더군. 6L6에 꽂혀서인지 난 왠지 그 중에서도 66자가 붙은 관들이
끌리는군. 6V6도 있고 6Y6이란 관도 있더군. 그런데 6F6 하고 6K6은 또 뭔가? 스펙집을 보니 걔네들은 좀 다른 것 같던데."
"예, 그 년들은 5극관들입니다. 6F6이 언니, 6K6이 동생이라 할 수 있죠. 소리가 여성적이란 뜻입니다."
"곱겠군."
"곱지요."
"그럼 6V6과 6L6, 6Y6은 형제들인가?"
"그렇습니다. 그 녀석들이야말로 대표적인 빔관들이지요."
"6G6 하고 6W6은 뭔가? 걔네들도 있던데..."
"6G6은 막내여동생이라 할만 한데 아직은 미성숙했으니 여자라고 보기엔 뭣한 감이 있습니다. 6W6은 역시 빔관인데 따로 6DG8로 불리기도
하고 비슷한 놈으로 그 위에 6Y6이 있으니 집을 나가버린 놈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오...온갖 관들이 있으나 나는 특히 이 형제자매들에게 유독 끌리는구나."
"그 까닭을 소리로 확인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으음....준비는 잘 되어가나? 소리는 언제 들어볼 수 있나?"
"조만간........."
"만약 아니면....."
가이스키는 손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해보였다.
"자넨 즉시 이거야. 집에 못 가는 거지. 영원히."
"소리 나오면 제대로 듣기나 하쇼."
예전의 권병조님의 "성중괴노"를 읽는 듯합니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