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텍이나 탄노이 스피커에 꼭 따라다니는 얘기가 김박중 통이냐 아니냐는 수식어다.
도대체 어떤 분일까?
김. 박. 중
인클로져 제작자의 이름이 풍기는 뉘앙스가 독특하다.
그 유명세와 달리 잡지나 정보가 별로 없었다. 어제 용산사장님께 연결을 부탁 드렸다.
당부 말씀 “말씀을 아주 무뚜뚝하게 하시지만 속내는 아주 착하고 좋은 분이니 절대
겁먹지 말라”고
마석 상성가구공단에 위치한 “제일 케~스”
여기가 김박중 선생의 작업실이다. 케~스? 인터뷰 내내 인클로져라는 단어는 딱 한번 나왔고 주로 케~스 또는 통이라고 했다.
사무실에 들어서니 예상대로 “금강전자 홈피에 내가 나갈 이유가 뭐가 있노! 요새 빈티지도 안하는데…. ”(투덜투덜~~^^)
영자, 인터뷰는커녕 쫓겨날까봐 잔뜩 겁먹었는데 표시는 못하겠고 왜 인터뷰 하러 왔는 지 활짝 웃으면서 설명한다.
그 누가 웃는 얼굴에 침 뱉으랴!!!!
인터뷰가 시작되자 먼저 얘기를 풀어놓으신다.
스물 여섯 살에 시작해서 지금 예순 셋이다. 많이 벌지도 못했고 딱 이만큼 먹고 산다.
그간 한국에 들어 온 건 대충 다 만들어 본 것 같다. JBL 파라곤 빼고는.
88년 전 후 작업할 때가 젤 시절이 좋았다. 아마 다시는 그런 시절이 오지 않을 것이다.
그 당시 외국에서 한국시장을 작게 봤는 지 유닛만 들어왔다. 그러다보니 나 같은 사람이 필요하게 된 거지
그 당시 케이스 공장이 열 몇 군데 됐을 거야
지금은 한 쪽 손가락 곱을 정도고
내가 이 일은 배운 건 한국전쟁 나서 부산에 피난 가서 목공일을 배웠는데 첨엔 가구 칠 기술에서 시작했다. 서울 수복되어 다시 올라와 충무로 전파상을 상대로 하는 공장에서 일했다. 그 때 스피커를 뜯어보고 들여다보니 오묘하고 참 재밋었다. 음이 어떻게 돌아나오고 하는 게 신기하고
그 공장이 장사가 잘되어 사장이 다른 사업한다고 그만 둔다길래 무일푼인 내가 인수를 하겠다고 무릎을 끓고 사정했다. 그 때 사모님이 계를 부어라고 운영하면서 인수자금을 계돈으로 넣게 해주셨다. 내 나이 스물 여덟 살이였다. 충무로 전파상은 다 찾아가 사장님들에게 인사하고, 물건 만들어 가져가면 이게 물건이냐고 밖으로 집어 던져진 적도 있었고 제일 어려웠던 시절이였지만 그래도 분해해보고 그걸 다시 짜고 하는 게 너무 즐거웠다.
그 당시 우미관 옆에 있는 르네상스 음악다방에 JBL 하츠필드가 있었는 데 그걸 보러 두 번이나 갔다. 야단 맞을까봐 커튼 뒤로 가서 뒷모습 잠깐보고 눈에 보여지는 것만 보고 만들었는데 오리지날과 비청하니 당연 실패했지. 그래서 어렵게 도면 구해서 다시 짜서 성공했다.
바이타복스는 사진만 보고 짠 적도 있었다. 바이타복스 191 케이스로 그때서야 김박중이라는 내 이름이 서서히 알려지게 되었다. 아마 1970년대쯤이었을 것이다.
그 시절엔 눈에 보이는 것은 모조리 다 만들고 싶은 그런 시절이였다.
영자) 스피커 통에 관한 한 최고로 인정을 받고 계신다. 그 이유가 뭔지요?
장인정신? 누구처럼 혼을 담고? 어쩌구하면서 만든 거 아니다.
한번도 그런 생각 안했다. 직업정신의 일환이고 내 생각대로 정성껏 만들어 내면 오디오하는 사람들과 시장에서 평가를 해준다고 생각한다.
탄노이 경우는 탄노이사에서는 도면을 줬기 때문에 그 설계도면에 따라 성실하게 이행했다는 것밖에 없다.
탄노이 웨스터민스터는 보통 목공기술로는 어렵다고들 했는데 기술적으로 그닥 까다롭지 않았다. 내가 만든 통과 오리지날통하고 차이가 난다 안난다 말들이 많았는데 나는 있는 설계도면을 보고 정성껏 만드는 데 목적을 두었지 오리지날을 능가할려고 만든 건 아니였다.
그 후 어떤 연유에서인지 시장이 점점 확장되면서 탄노이에서 유닛을 안주고 완성품을 보내더라.
주로 JBL, 탄노이, 젠센, EV 등의 작업을 한다.
한 때 일본 오디오샵에서 수입을 해간 적이 있었고 지금은 거의 내수용이다.
죽기 전에 파라곤을 한번 제작해 보려고 하는 데 주문하는 사람이 없다. 1년에 3조 정도 수리는 하긴 했는데 지금 여기 작업실에 파라곤 한 조를 갖고 있다. 한 두 대 주문 받아 만드는 건 수작업 부분은 가능하지만 기계적인 부분은 불가능하다. 모든 게 구비된 상태 같으면 만들어 보고 싶은데 아마 죽기 전에 어려 울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미니 파라곤은 만들어 어느 오디오매니아에게 줬는데, 언젠가 그게 전자랜드에 다시 나온 걸 봤다. 지금은 어디에 있는 지 모른다.
영자) 가장 완성도가 높은 제품은?
작업할려고 해체해보면 가장 완성도가 높은 제품이 EV 파트리샨 Ⅳ와 탄노이 오토그라프.
설계한 분에게 경의를 표하고 감사드린다.
나야 도면보고 만드는 상태니 아무것도 아니다.
JBL은 파라곤이 완성도가 가장 높다.
알텍은 40~50년대 나온 제품은 합판보다 칩보드가 좋다. 싼 재료라고 뭐라고들 하지만 알텍의 소리성향이 직진성과 강하기 때문에 칩보드와 어울린다.
덕트가 앞으로 있는 스피커는 미송합판과 칩보드를 섞으면 소리가 좋고
미로형은 강한 재질인 자작나무가 어울리고
덕트가 뒤로 있는 스피커는 부드러운 미송합판이 좋다.
가끔 내가 만든 거라고 수리를 부탁해서 들어오는 것보면 50%가 내 제품이 아니다.
예전에 샵에서 표시를 해달고 해서 한 것도 있는 데 일관되게 하지는 안 했지만 내가 만든 건 보면 안다. 가끔 젊었을 때 체계를 잡아 놓을 걸 생각하다 지금 생각하니 안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뒀는데 다 출가했고 아들놈이 솜씨가 좋은 데 이 사업을 이어받을 생각이 없다. 대학 다니면서 방학 때마다 여기와서 도와주고 제대하고도 그러더니 요즘은 여기 근처도 안온다. 아버지가 힘들 게 살아온 걸 봤으니 저도 안하고 싶겠지
최초로 들은 소리에 대한 기억은 1950년대쯤이였을 건데 기기 모델은 생각이 안나지만
공장에 스테레오 앰프가 처음 들어왔다. 인간이 만든 재생된 소리가 나오는 걸 들어보곤 깜짝 놀랬다.
내가 소리를 안 좋아했으면 이 길로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인터뷰를 마치고
마음을 여는 데 시간이 조금 걸릴 뿐이지 따뜻한 분이였다.
왜 다른 사람도 많은 데 자기를 인터뷰하러 왔냐고? 내내 말씀하셨지만 자신을 인정해주는 젊은 친구들이 밉지 않은 지 멀리 찾아와 대접을 소홀히 해서 보내면 안된다고 맛있는 곰탕을 사주시면서도 미안해하셨다.
많은 국내제작자들을 만나 본 건 아니지만 돌아오는 길에 처음으로 감히 그를 장인이라고 부른다.
이글은 어느카페에서 옮긴 글입니다.문제시 삭제하겠읍니다.
도대체 어떤 분일까?
김. 박. 중
인클로져 제작자의 이름이 풍기는 뉘앙스가 독특하다.
그 유명세와 달리 잡지나 정보가 별로 없었다. 어제 용산사장님께 연결을 부탁 드렸다.
당부 말씀 “말씀을 아주 무뚜뚝하게 하시지만 속내는 아주 착하고 좋은 분이니 절대
겁먹지 말라”고
마석 상성가구공단에 위치한 “제일 케~스”
여기가 김박중 선생의 작업실이다. 케~스? 인터뷰 내내 인클로져라는 단어는 딱 한번 나왔고 주로 케~스 또는 통이라고 했다.
사무실에 들어서니 예상대로 “금강전자 홈피에 내가 나갈 이유가 뭐가 있노! 요새 빈티지도 안하는데…. ”(투덜투덜~~^^)
영자, 인터뷰는커녕 쫓겨날까봐 잔뜩 겁먹었는데 표시는 못하겠고 왜 인터뷰 하러 왔는 지 활짝 웃으면서 설명한다.
그 누가 웃는 얼굴에 침 뱉으랴!!!!
인터뷰가 시작되자 먼저 얘기를 풀어놓으신다.
스물 여섯 살에 시작해서 지금 예순 셋이다. 많이 벌지도 못했고 딱 이만큼 먹고 산다.
그간 한국에 들어 온 건 대충 다 만들어 본 것 같다. JBL 파라곤 빼고는.
88년 전 후 작업할 때가 젤 시절이 좋았다. 아마 다시는 그런 시절이 오지 않을 것이다.
그 당시 외국에서 한국시장을 작게 봤는 지 유닛만 들어왔다. 그러다보니 나 같은 사람이 필요하게 된 거지
그 당시 케이스 공장이 열 몇 군데 됐을 거야
지금은 한 쪽 손가락 곱을 정도고
내가 이 일은 배운 건 한국전쟁 나서 부산에 피난 가서 목공일을 배웠는데 첨엔 가구 칠 기술에서 시작했다. 서울 수복되어 다시 올라와 충무로 전파상을 상대로 하는 공장에서 일했다. 그 때 스피커를 뜯어보고 들여다보니 오묘하고 참 재밋었다. 음이 어떻게 돌아나오고 하는 게 신기하고
그 공장이 장사가 잘되어 사장이 다른 사업한다고 그만 둔다길래 무일푼인 내가 인수를 하겠다고 무릎을 끓고 사정했다. 그 때 사모님이 계를 부어라고 운영하면서 인수자금을 계돈으로 넣게 해주셨다. 내 나이 스물 여덟 살이였다. 충무로 전파상은 다 찾아가 사장님들에게 인사하고, 물건 만들어 가져가면 이게 물건이냐고 밖으로 집어 던져진 적도 있었고 제일 어려웠던 시절이였지만 그래도 분해해보고 그걸 다시 짜고 하는 게 너무 즐거웠다.
그 당시 우미관 옆에 있는 르네상스 음악다방에 JBL 하츠필드가 있었는 데 그걸 보러 두 번이나 갔다. 야단 맞을까봐 커튼 뒤로 가서 뒷모습 잠깐보고 눈에 보여지는 것만 보고 만들었는데 오리지날과 비청하니 당연 실패했지. 그래서 어렵게 도면 구해서 다시 짜서 성공했다.
바이타복스는 사진만 보고 짠 적도 있었다. 바이타복스 191 케이스로 그때서야 김박중이라는 내 이름이 서서히 알려지게 되었다. 아마 1970년대쯤이었을 것이다.
그 시절엔 눈에 보이는 것은 모조리 다 만들고 싶은 그런 시절이였다.
영자) 스피커 통에 관한 한 최고로 인정을 받고 계신다. 그 이유가 뭔지요?
장인정신? 누구처럼 혼을 담고? 어쩌구하면서 만든 거 아니다.
한번도 그런 생각 안했다. 직업정신의 일환이고 내 생각대로 정성껏 만들어 내면 오디오하는 사람들과 시장에서 평가를 해준다고 생각한다.
탄노이 경우는 탄노이사에서는 도면을 줬기 때문에 그 설계도면에 따라 성실하게 이행했다는 것밖에 없다.
탄노이 웨스터민스터는 보통 목공기술로는 어렵다고들 했는데 기술적으로 그닥 까다롭지 않았다. 내가 만든 통과 오리지날통하고 차이가 난다 안난다 말들이 많았는데 나는 있는 설계도면을 보고 정성껏 만드는 데 목적을 두었지 오리지날을 능가할려고 만든 건 아니였다.
그 후 어떤 연유에서인지 시장이 점점 확장되면서 탄노이에서 유닛을 안주고 완성품을 보내더라.
주로 JBL, 탄노이, 젠센, EV 등의 작업을 한다.
한 때 일본 오디오샵에서 수입을 해간 적이 있었고 지금은 거의 내수용이다.
죽기 전에 파라곤을 한번 제작해 보려고 하는 데 주문하는 사람이 없다. 1년에 3조 정도 수리는 하긴 했는데 지금 여기 작업실에 파라곤 한 조를 갖고 있다. 한 두 대 주문 받아 만드는 건 수작업 부분은 가능하지만 기계적인 부분은 불가능하다. 모든 게 구비된 상태 같으면 만들어 보고 싶은데 아마 죽기 전에 어려 울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미니 파라곤은 만들어 어느 오디오매니아에게 줬는데, 언젠가 그게 전자랜드에 다시 나온 걸 봤다. 지금은 어디에 있는 지 모른다.
영자) 가장 완성도가 높은 제품은?
작업할려고 해체해보면 가장 완성도가 높은 제품이 EV 파트리샨 Ⅳ와 탄노이 오토그라프.
설계한 분에게 경의를 표하고 감사드린다.
나야 도면보고 만드는 상태니 아무것도 아니다.
JBL은 파라곤이 완성도가 가장 높다.
알텍은 40~50년대 나온 제품은 합판보다 칩보드가 좋다. 싼 재료라고 뭐라고들 하지만 알텍의 소리성향이 직진성과 강하기 때문에 칩보드와 어울린다.
덕트가 앞으로 있는 스피커는 미송합판과 칩보드를 섞으면 소리가 좋고
미로형은 강한 재질인 자작나무가 어울리고
덕트가 뒤로 있는 스피커는 부드러운 미송합판이 좋다.
가끔 내가 만든 거라고 수리를 부탁해서 들어오는 것보면 50%가 내 제품이 아니다.
예전에 샵에서 표시를 해달고 해서 한 것도 있는 데 일관되게 하지는 안 했지만 내가 만든 건 보면 안다. 가끔 젊었을 때 체계를 잡아 놓을 걸 생각하다 지금 생각하니 안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뒀는데 다 출가했고 아들놈이 솜씨가 좋은 데 이 사업을 이어받을 생각이 없다. 대학 다니면서 방학 때마다 여기와서 도와주고 제대하고도 그러더니 요즘은 여기 근처도 안온다. 아버지가 힘들 게 살아온 걸 봤으니 저도 안하고 싶겠지
최초로 들은 소리에 대한 기억은 1950년대쯤이였을 건데 기기 모델은 생각이 안나지만
공장에 스테레오 앰프가 처음 들어왔다. 인간이 만든 재생된 소리가 나오는 걸 들어보곤 깜짝 놀랬다.
내가 소리를 안 좋아했으면 이 길로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인터뷰를 마치고
마음을 여는 데 시간이 조금 걸릴 뿐이지 따뜻한 분이였다.
왜 다른 사람도 많은 데 자기를 인터뷰하러 왔냐고? 내내 말씀하셨지만 자신을 인정해주는 젊은 친구들이 밉지 않은 지 멀리 찾아와 대접을 소홀히 해서 보내면 안된다고 맛있는 곰탕을 사주시면서도 미안해하셨다.
많은 국내제작자들을 만나 본 건 아니지만 돌아오는 길에 처음으로 감히 그를 장인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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