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얼굴 10
우리 모두는 삶에 있어서와 물리적 우주에 있어서의 진리의 존재와 그 확고함에 대한 암묵적 신념을 마음속에 품고 살아갑니다. 우리 자신은 어리석고 결국 죽을 운명이고 공간적으로 제한된 운명이지만 그 한계를 벗어난 어느 천상에는 확고부동하고 항구 불변하는 진실이 있을 것이라는 신념을 품고 있는 것이지요. 우리 삶이 한갓 순간에 지나지 않고, 그 순간 마저 탐욕과 미망 속에 헛되이 보내어진다 해도 우리는 우리 삶의 보든 것들을 ‘영원의 빛에 비추어’ 바라보고자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어리석음을 말하는 것일까요? 차라리 우리의 순수함과 애처로움을 말하는 것은 아닐까요?
부처님께서 일찍이, 제행무상과 제법무아를 설파하셨고 또 부처님의 심오한 통찰이 아무리 옳은 것이라 해도 우리는 어느 시인이 말한 것처럼 “빛나는 별이여, 나도 그대처럼 확고하게 되고 싶어라”라고 말하면서 살고 있는 것이지요. 플라톤은 우리는 모두 동굴 속에서 사슬에 묶인 채로 그림자만을 보고 산다고,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벗어나서 천상의 이데아를 볼 수 있어야 하고 또 거기를 향하는 희망 속에서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현실적 삶 전체를 미망으로 돌린 것이지요. 우리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우리의 지성과 노력만 있으면 결국은 진실에 우리를 일치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우리의 지성이라니요? 도대체 지성이란 것은 무엇일까요? 그 지성이란 것은 진실을 볼 수 있는 것일까요? 현대 철학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근세와 현대를 가르는 기준은-역사학자들은 별별 학설을 다 들이댄다 해도- 지성에 대한 신념의 유무라고 생각합니다. 개신교는, 구교가 심정이 아닌 지성으로 신을 포착할 수 있다는 오류를 저질렀고, 그러므로 그것을 역전시켜 심정으로 신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데에서 출발했습니다. 영국의 데이빗 흄은, 외부 세계에 객관적 실체는 없고 단지 우리의 인식만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어느 현대의 과학 철학자는 “우주의 궁극적인 모습은 결국 우리의 얼굴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소위 말하는 지성의 한계는 결국 언어의 한계로 까지 축소됩니다. “세계는 사물의 총체가 아니고 사건의 총체”이고 “언어의 한계가 세계의 한계”라고 비트겐슈타인은 엄청나게 충격적인 선언을 합니다.
이러한 일이 어떻게 발생한 것일까요 인류는 일찍이 고대 아테네에서 인간 지성에 대한 신념을 그 끝까지 밀고 났고 르네상스기에 이르러 이 신념은 다시 한번 복구되는데, 우리 시대는 이러한 신념을 꽤 오래전에 잃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자신에게 물어보세요. “진리하고 보통 말해지는 것은 절대적인 존재인가 아니면 상대적인 인식인가?” 상대적인 인식이라고 말하시는데 걸겠습니다.
우리 시대는 <이미 없는 것>과 <아직 없는 것>사이에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믿어왔던 신념-신에 대한, 지성에 대한, 과학에 대한- 이 모두 죽었지만 아직 상속자가 정해지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상속자가 반드시 있어야 하는 걸까요? 우리의 운명이란 본래 시냇물의 부평초처럼 부유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닐까요? “생명이란 들의 풀에 지나지 않고 그 영광은 풀의 꽃에 지나지 않는 바, 풀은 시들고 꽃은 떨어지되.....”
이러한 철학은 전형적으로 유럽적인 것입니다. 끝없는 전쟁 속에서 살아왔고 마침내는 파국적이 양차 대전에서 인류의 어리석음과 잔인함을 목격하고 체험했던 유럽인들에게는 이제 기대를 걸 곳도 활기 있게 살아나갈 의욕도 없어진 것이죠. 전후 문학 중 가장 슬픈 소설 중 하나인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이러한 슬픔을 너무도 애달프고 두렵게 포착합니다. 제 1차 세계 대전후 태동된 다다이즘은 인류의 정신적 파국을 가장 거칠고 자포자기적인 심정으로 선언하고 맙니다. 이러한 세계관 아래에서 우리의 일상적인 삶과 우리의 심정적 태도는 어떠한 것이 될까요?
운명의 비극성과 덧없음에 대한 비장한 직시가 우선 하나의 태도가 됩니다. 까뮈가 말하는 바와 같이 몰이해하고 불친절한 우주가 삶의 이해할 수 없는 부조리에 대한 끝없는 직시와 절망적인 삶의 영위입니다. 삶이 행복할 수도 아름다울 수도 있다는 역겨운 허위의식을 벗어던지고 철두철미하게 무의미와 절망을 삶의 근원적인 태도로 살아나가는 것이지요. 유럽의 실존주의자들은 다른 대안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비장함이 감도는 삶의 태도이지요.
그러나 미국식 해결책은 조금 달랐습니다. 미국의 지성인들 역시 절망합니다. 윌리암 포크너, 헤밍웨이, 도스페서스, 피츠제럴드 역시 절망합니다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향락을 하나의 해결책으로 제시합니다. 물론 그러한 향락은 전형적인 향락은 아닙니다. 삶의 무의미와 덧없음에 대한 행동주의로서의 반향인 것이지요. 그러나 해골이 그들의 파티를 내려다 보지요. 신이 죽은 이 세계에서 지상세계는 온전히 인간의 몫인 거고 자기들에게 부여된 시간을 절망을 잊고 지내기 위해서는 향락이 좋은 수단이지요.
유럽의 3극관과 미국의 유럽 3극관은 이 두 세계관을 정확히 반영합니다. 비장한 유럽 관과 향락적인 미국 관 이라고나 할까요. 유럽을 대표하는 3극관은 Ed, Ad1, RE604, Da, PX25, PX4 등이 있고 미국을 대표하는 3극관은 300B, 2A3, 45 등이 있습니다. 오늘은 Ed관에 관해 이야기를 하려합니다.
먼저 지멘스 관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지멘스는 다시 신관과 구관이 있습니다. 신관은 메탈베이스를 노란 종이로 둘러친 것이고 구관은 그 베이스를 붉은 종이로 둘러친 것입니다. 구관은 그 소리가 부드럽긴 한데 해상도가 떨어지고 소리가 야무진 맛이 신관보다 덜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수명이 짧습니다. 보통 RE604의 수명이 8000시간이고 지멘스 Ed구관이 12000시간 정도이고, 지멘스 Ed신관이 16000시간 정도 됩니다. 재미있는 것은 구관이 신관보다 더 비싸게 팔리는 나라는 우리나라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독일 현지에서도 신관이 비싸고 일본에서는 신관이 구관보다 거의 두 배 비쌉니다. 신관이 더욱 선명한 소리를 내고 스피커 구동력도 더 좋고 고역도 더 가늘고 섬세합니다.
그리고 클랑필름 사와 텔레푼켄 사에서 나온 Ed가 있습니다. 보통 Ed라고 하면 지멘스 사의 것을 말하지만 사실은 클랑필름 사의 것이 훨씬 더 좋은 것입니다. 클랑필름 사의 Ed도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메탈베이스로 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베이스가 베크라이트로 된 것입니다. 메탈베이스의 클랑필름 Ed 관은 매우귀합니다. 독일 사람들도 ‘sehr rar (very rare)’라고 말합니다. 텔레푼켄 사의 것은 베이스가 전부 베크라이트입니다.
마지막으로 발보 사의 Ed관이 있습니다. 발보 사는 Ed와 Ad1을 구분 없이 만들었습니다. 단지 7핀 짜리는 Ed라고 이름 붙이고 오리발 (side contact)로 된 것은 Ad1이라고 이름 붙였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발보사의 Ad1은 Ed관으로 분류하는 것이 맞습니다. 일단 그 음색이 완전히 Ed쪽이니까요.
그러므로 지멘스 Ed, 클랑필름 Ed, 텔레푼켄 Ed, 발보Ed, 발보Ad1이 모두 우리가 보통 말하는 Ed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클랑필름 사의 Ed관이 가장 좋은 소리를 내는 것으로 들었고, 그 다음으로 지멘스 Ed 신관, 지멘스 Ed 구관, 텔레푼켄 Ed, 발보 Ed 순으로 좋게 들었습니다. 특히 클랑필름 사의 Ed는 매우 놀라운 소리를 냈습니다. 그런데 발보 Ed관 중에는 메시 플레이트로 된 것이 있는데 이 종류의 관 역시 깜짝 놀랄 정도의 소리를 냅니다. 제게는 이 관이 단 하나 밖에 없습니다. 평생에 유일하게 발견한 것인데 짝을 맞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Ed관은 매우 섬세하고 예쁜 고음을 가지고 있고 전체 대역에서 부드럽고 고운 음을 냅니다. Ed관은 심지어 “벼랑 위에 핀 꽃” 이라고 일컬어지는데 정말이지 고역으로 올라갈 때의 그 아슬아슬한 청초함은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줍니다. 더 이상 훌륭할 수 없다는 표현만이 이 관에 대한 제 개인적인 평가입니다. 얼핏 들으면 무심한듯하지만 주의를 기울여서 듣고 완전히 음악에 몰두하게 되면 정말 훌륭한 관을 앞에 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우선 슬픈 음조라는 생각이 들면서 자기도 모르게 그 쓸쓸한 비장감에 젖어 들게 됩니다. 특히 샤콘느가 단조로 변조되는 부분에 이르러서는 자기도 모르게 가슴에서 무엇인가가 솟아나옵니다. 공감과 슬픔과 외로움과 서늘함 등의 복합적인 감정의 덩어리인 것이지요. 저는 바하의 1번 프랑스 조곡을 듣다가 그만 울고 말았습니다. 그 단조의 미뉴엣이 얼마나 처연하면서도 아름다운지 행복감에 울고 말았습니다. 저는 행복해서 운다는 것을 그때야 처음 알았습니다. 연주의 난이도가 매우 높아 듣는 것만도 영광인 곡이지요. 시도하다 깨끗이 실패했습니다.
Ed관은 증폭률(뮤값)이 4입니다. 낮은 편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음악이 천천히 진행된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PX25는 증폭률이 6으로서 약간은 급하고 위풍당당하다는 느낌을 주는 반면에 Ed관은 느리고 슬픕니다. 신념을 잃은 유럽인, 갈 곳을 잃고 부유하는 덧없음, 늙어가고 있는 영광스러웠던 유럽- 이 모든 것이 그 관에 들어 있습니다. 진공관으로 표현된 ‘유럽의 몰락(슈펭글러)’이라고나 할까요. 거기에다 Ed관은 특유의 품위가 있습니다. 도대체 거칠거나 부족한 데가 전혀 없는 관으로 특히 고역으로 아슬 아슬 하게 치솟을 때의 상승감은 마치 고딕 건조물의 내부에서 천상으로 올라가는 느낌을 줍니다. 마치 대리석으로 매끈하게 깎아놓은 듯한 Ed관의 음은 감히 최고의 소리로 평가 받아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우리 <탄사모>들에게는 Ed관이 추천할 만한 진공관입니다. 우선 싱글로는 4W, 푸시풀로는 10W를 내기 때문에 밀폐형 인클로저가 아닐 경우에는 Ed싱글로도 모든 탄노이를 구동할 수 있습니다. 저는 텔레푼켄 싱글과 자작 푸시풀을 사용하고 있는바 양쪽 다 만족스럽습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푸시풀의 경우에는 WE출력트랜스와도 조화가 잘 된다는 것입니다. WE출력트랜스는 일반적인 바보들의 의견과는 반대로 절대로 화려한 음을 내는 트랜스가 아닙니다. 오히려 섬세하고 가냘프고 표현적인 음을 내지요. 참고로 말씀드리면 WE 171C가 잘 어울립니다.
저는 <두 얼굴 1>에서 탄노이와 가장 잘 어울리는 파워 앰프는 PX25를 추천했습니다만, 탄노이는 Ed와도 잘 어울립니다. 탄노이 역시도 WE 스피커와 JBL 스피커의 철없는 음을 내는 스피커는 아닙니다. 약간 슬프고 부드럽고 숙성된 음을 내지요. 그런 의미로 본다면 PX25와는 다른 측면에서 탄노이와 좋은 궁합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특히 탄노이 인클로저 특유의 목질(木質)의 홀 톤은 Ed관으로 단조 음악을 들었을 때 단연 백미(白眉)를 보여줍니다. 혼 스피커나 기타의 스피커가 내지 못하는 애조 띤 분위기- 마치 <여인의 사랑과 생애>에서 표현되는 것과 같은 -를 내 줍니다.
Ed관은 듣는 사람을 의식해서 만들어진 관은 아닙니다. 스스로 존재하고 스스로 모든 것을 감당해내는 전형적인 독일적 관입니다. Ed관으로 만들어진 앰프를 듣고 있으면 그 관이 참으로 초연하고 천상적이어서 마치 인간이 만든 관이 아닌 것 같다는 느낌까지도 받습니다. 비장함이 신비감까지도 자아내는 것이지요.
우리 모두는 삶에 있어서와 물리적 우주에 있어서의 진리의 존재와 그 확고함에 대한 암묵적 신념을 마음속에 품고 살아갑니다. 우리 자신은 어리석고 결국 죽을 운명이고 공간적으로 제한된 운명이지만 그 한계를 벗어난 어느 천상에는 확고부동하고 항구 불변하는 진실이 있을 것이라는 신념을 품고 있는 것이지요. 우리 삶이 한갓 순간에 지나지 않고, 그 순간 마저 탐욕과 미망 속에 헛되이 보내어진다 해도 우리는 우리 삶의 보든 것들을 ‘영원의 빛에 비추어’ 바라보고자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어리석음을 말하는 것일까요? 차라리 우리의 순수함과 애처로움을 말하는 것은 아닐까요?
부처님께서 일찍이, 제행무상과 제법무아를 설파하셨고 또 부처님의 심오한 통찰이 아무리 옳은 것이라 해도 우리는 어느 시인이 말한 것처럼 “빛나는 별이여, 나도 그대처럼 확고하게 되고 싶어라”라고 말하면서 살고 있는 것이지요. 플라톤은 우리는 모두 동굴 속에서 사슬에 묶인 채로 그림자만을 보고 산다고,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벗어나서 천상의 이데아를 볼 수 있어야 하고 또 거기를 향하는 희망 속에서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현실적 삶 전체를 미망으로 돌린 것이지요. 우리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우리의 지성과 노력만 있으면 결국은 진실에 우리를 일치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우리의 지성이라니요? 도대체 지성이란 것은 무엇일까요? 그 지성이란 것은 진실을 볼 수 있는 것일까요? 현대 철학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근세와 현대를 가르는 기준은-역사학자들은 별별 학설을 다 들이댄다 해도- 지성에 대한 신념의 유무라고 생각합니다. 개신교는, 구교가 심정이 아닌 지성으로 신을 포착할 수 있다는 오류를 저질렀고, 그러므로 그것을 역전시켜 심정으로 신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데에서 출발했습니다. 영국의 데이빗 흄은, 외부 세계에 객관적 실체는 없고 단지 우리의 인식만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어느 현대의 과학 철학자는 “우주의 궁극적인 모습은 결국 우리의 얼굴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소위 말하는 지성의 한계는 결국 언어의 한계로 까지 축소됩니다. “세계는 사물의 총체가 아니고 사건의 총체”이고 “언어의 한계가 세계의 한계”라고 비트겐슈타인은 엄청나게 충격적인 선언을 합니다.
이러한 일이 어떻게 발생한 것일까요 인류는 일찍이 고대 아테네에서 인간 지성에 대한 신념을 그 끝까지 밀고 났고 르네상스기에 이르러 이 신념은 다시 한번 복구되는데, 우리 시대는 이러한 신념을 꽤 오래전에 잃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자신에게 물어보세요. “진리하고 보통 말해지는 것은 절대적인 존재인가 아니면 상대적인 인식인가?” 상대적인 인식이라고 말하시는데 걸겠습니다.
우리 시대는 <이미 없는 것>과 <아직 없는 것>사이에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믿어왔던 신념-신에 대한, 지성에 대한, 과학에 대한- 이 모두 죽었지만 아직 상속자가 정해지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상속자가 반드시 있어야 하는 걸까요? 우리의 운명이란 본래 시냇물의 부평초처럼 부유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닐까요? “생명이란 들의 풀에 지나지 않고 그 영광은 풀의 꽃에 지나지 않는 바, 풀은 시들고 꽃은 떨어지되.....”
이러한 철학은 전형적으로 유럽적인 것입니다. 끝없는 전쟁 속에서 살아왔고 마침내는 파국적이 양차 대전에서 인류의 어리석음과 잔인함을 목격하고 체험했던 유럽인들에게는 이제 기대를 걸 곳도 활기 있게 살아나갈 의욕도 없어진 것이죠. 전후 문학 중 가장 슬픈 소설 중 하나인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이러한 슬픔을 너무도 애달프고 두렵게 포착합니다. 제 1차 세계 대전후 태동된 다다이즘은 인류의 정신적 파국을 가장 거칠고 자포자기적인 심정으로 선언하고 맙니다. 이러한 세계관 아래에서 우리의 일상적인 삶과 우리의 심정적 태도는 어떠한 것이 될까요?
운명의 비극성과 덧없음에 대한 비장한 직시가 우선 하나의 태도가 됩니다. 까뮈가 말하는 바와 같이 몰이해하고 불친절한 우주가 삶의 이해할 수 없는 부조리에 대한 끝없는 직시와 절망적인 삶의 영위입니다. 삶이 행복할 수도 아름다울 수도 있다는 역겨운 허위의식을 벗어던지고 철두철미하게 무의미와 절망을 삶의 근원적인 태도로 살아나가는 것이지요. 유럽의 실존주의자들은 다른 대안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비장함이 감도는 삶의 태도이지요.
그러나 미국식 해결책은 조금 달랐습니다. 미국의 지성인들 역시 절망합니다. 윌리암 포크너, 헤밍웨이, 도스페서스, 피츠제럴드 역시 절망합니다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향락을 하나의 해결책으로 제시합니다. 물론 그러한 향락은 전형적인 향락은 아닙니다. 삶의 무의미와 덧없음에 대한 행동주의로서의 반향인 것이지요. 그러나 해골이 그들의 파티를 내려다 보지요. 신이 죽은 이 세계에서 지상세계는 온전히 인간의 몫인 거고 자기들에게 부여된 시간을 절망을 잊고 지내기 위해서는 향락이 좋은 수단이지요.
유럽의 3극관과 미국의 유럽 3극관은 이 두 세계관을 정확히 반영합니다. 비장한 유럽 관과 향락적인 미국 관 이라고나 할까요. 유럽을 대표하는 3극관은 Ed, Ad1, RE604, Da, PX25, PX4 등이 있고 미국을 대표하는 3극관은 300B, 2A3, 45 등이 있습니다. 오늘은 Ed관에 관해 이야기를 하려합니다.
먼저 지멘스 관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지멘스는 다시 신관과 구관이 있습니다. 신관은 메탈베이스를 노란 종이로 둘러친 것이고 구관은 그 베이스를 붉은 종이로 둘러친 것입니다. 구관은 그 소리가 부드럽긴 한데 해상도가 떨어지고 소리가 야무진 맛이 신관보다 덜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수명이 짧습니다. 보통 RE604의 수명이 8000시간이고 지멘스 Ed구관이 12000시간 정도이고, 지멘스 Ed신관이 16000시간 정도 됩니다. 재미있는 것은 구관이 신관보다 더 비싸게 팔리는 나라는 우리나라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독일 현지에서도 신관이 비싸고 일본에서는 신관이 구관보다 거의 두 배 비쌉니다. 신관이 더욱 선명한 소리를 내고 스피커 구동력도 더 좋고 고역도 더 가늘고 섬세합니다.
그리고 클랑필름 사와 텔레푼켄 사에서 나온 Ed가 있습니다. 보통 Ed라고 하면 지멘스 사의 것을 말하지만 사실은 클랑필름 사의 것이 훨씬 더 좋은 것입니다. 클랑필름 사의 Ed도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메탈베이스로 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베이스가 베크라이트로 된 것입니다. 메탈베이스의 클랑필름 Ed 관은 매우귀합니다. 독일 사람들도 ‘sehr rar (very rare)’라고 말합니다. 텔레푼켄 사의 것은 베이스가 전부 베크라이트입니다.
마지막으로 발보 사의 Ed관이 있습니다. 발보 사는 Ed와 Ad1을 구분 없이 만들었습니다. 단지 7핀 짜리는 Ed라고 이름 붙이고 오리발 (side contact)로 된 것은 Ad1이라고 이름 붙였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발보사의 Ad1은 Ed관으로 분류하는 것이 맞습니다. 일단 그 음색이 완전히 Ed쪽이니까요.
그러므로 지멘스 Ed, 클랑필름 Ed, 텔레푼켄 Ed, 발보Ed, 발보Ad1이 모두 우리가 보통 말하는 Ed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클랑필름 사의 Ed관이 가장 좋은 소리를 내는 것으로 들었고, 그 다음으로 지멘스 Ed 신관, 지멘스 Ed 구관, 텔레푼켄 Ed, 발보 Ed 순으로 좋게 들었습니다. 특히 클랑필름 사의 Ed는 매우 놀라운 소리를 냈습니다. 그런데 발보 Ed관 중에는 메시 플레이트로 된 것이 있는데 이 종류의 관 역시 깜짝 놀랄 정도의 소리를 냅니다. 제게는 이 관이 단 하나 밖에 없습니다. 평생에 유일하게 발견한 것인데 짝을 맞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Ed관은 매우 섬세하고 예쁜 고음을 가지고 있고 전체 대역에서 부드럽고 고운 음을 냅니다. Ed관은 심지어 “벼랑 위에 핀 꽃” 이라고 일컬어지는데 정말이지 고역으로 올라갈 때의 그 아슬아슬한 청초함은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줍니다. 더 이상 훌륭할 수 없다는 표현만이 이 관에 대한 제 개인적인 평가입니다. 얼핏 들으면 무심한듯하지만 주의를 기울여서 듣고 완전히 음악에 몰두하게 되면 정말 훌륭한 관을 앞에 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우선 슬픈 음조라는 생각이 들면서 자기도 모르게 그 쓸쓸한 비장감에 젖어 들게 됩니다. 특히 샤콘느가 단조로 변조되는 부분에 이르러서는 자기도 모르게 가슴에서 무엇인가가 솟아나옵니다. 공감과 슬픔과 외로움과 서늘함 등의 복합적인 감정의 덩어리인 것이지요. 저는 바하의 1번 프랑스 조곡을 듣다가 그만 울고 말았습니다. 그 단조의 미뉴엣이 얼마나 처연하면서도 아름다운지 행복감에 울고 말았습니다. 저는 행복해서 운다는 것을 그때야 처음 알았습니다. 연주의 난이도가 매우 높아 듣는 것만도 영광인 곡이지요. 시도하다 깨끗이 실패했습니다.
Ed관은 증폭률(뮤값)이 4입니다. 낮은 편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음악이 천천히 진행된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PX25는 증폭률이 6으로서 약간은 급하고 위풍당당하다는 느낌을 주는 반면에 Ed관은 느리고 슬픕니다. 신념을 잃은 유럽인, 갈 곳을 잃고 부유하는 덧없음, 늙어가고 있는 영광스러웠던 유럽- 이 모든 것이 그 관에 들어 있습니다. 진공관으로 표현된 ‘유럽의 몰락(슈펭글러)’이라고나 할까요. 거기에다 Ed관은 특유의 품위가 있습니다. 도대체 거칠거나 부족한 데가 전혀 없는 관으로 특히 고역으로 아슬 아슬 하게 치솟을 때의 상승감은 마치 고딕 건조물의 내부에서 천상으로 올라가는 느낌을 줍니다. 마치 대리석으로 매끈하게 깎아놓은 듯한 Ed관의 음은 감히 최고의 소리로 평가 받아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우리 <탄사모>들에게는 Ed관이 추천할 만한 진공관입니다. 우선 싱글로는 4W, 푸시풀로는 10W를 내기 때문에 밀폐형 인클로저가 아닐 경우에는 Ed싱글로도 모든 탄노이를 구동할 수 있습니다. 저는 텔레푼켄 싱글과 자작 푸시풀을 사용하고 있는바 양쪽 다 만족스럽습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푸시풀의 경우에는 WE출력트랜스와도 조화가 잘 된다는 것입니다. WE출력트랜스는 일반적인 바보들의 의견과는 반대로 절대로 화려한 음을 내는 트랜스가 아닙니다. 오히려 섬세하고 가냘프고 표현적인 음을 내지요. 참고로 말씀드리면 WE 171C가 잘 어울립니다.
저는 <두 얼굴 1>에서 탄노이와 가장 잘 어울리는 파워 앰프는 PX25를 추천했습니다만, 탄노이는 Ed와도 잘 어울립니다. 탄노이 역시도 WE 스피커와 JBL 스피커의 철없는 음을 내는 스피커는 아닙니다. 약간 슬프고 부드럽고 숙성된 음을 내지요. 그런 의미로 본다면 PX25와는 다른 측면에서 탄노이와 좋은 궁합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특히 탄노이 인클로저 특유의 목질(木質)의 홀 톤은 Ed관으로 단조 음악을 들었을 때 단연 백미(白眉)를 보여줍니다. 혼 스피커나 기타의 스피커가 내지 못하는 애조 띤 분위기- 마치 <여인의 사랑과 생애>에서 표현되는 것과 같은 -를 내 줍니다.
Ed관은 듣는 사람을 의식해서 만들어진 관은 아닙니다. 스스로 존재하고 스스로 모든 것을 감당해내는 전형적인 독일적 관입니다. Ed관으로 만들어진 앰프를 듣고 있으면 그 관이 참으로 초연하고 천상적이어서 마치 인간이 만든 관이 아닌 것 같다는 느낌까지도 받습니다. 비장함이 신비감까지도 자아내는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