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여곡절 끝에 첫 소리가 났다.
가이스키는 때로는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뜨기도 하고 때로는 고개를 숙였다가 들었다가 하면서 소리를 들었다.
기술자는 별 다른 표정없이 가만히 있기만 했다. 소리에 집중하지 않고 다른 먼 데를 신경쓰는 것 같기도 했다.
"이것은 내가 삼십년 전에 지휘했던 브루크너 8번 녹음이지."
가이스키가 입을 열었을 때, 기술자가 가이스키를 쳐다보았다.
가이스키의 다음 말을 기다리는 기색이었다. 가이스키는 손을 내저었다.
"자네답지 않게 왜 심각해져 있나. 긴장 풀게."
"어떻게 들으셨습니까?"
기술자가 물었다. 가이스키는 낯선 사람을 보듯 기술자를 잠시 가만히 쳐다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동안 겪은 오디오들 중 몇 개는 나도 깜빡 속아 넘어갈 뻔 하기도 했지. 그럴듯 했거든. 그러나 그건 악기가
몇 개 안될 때 얘기야. 수십 내지는 백에 이르는 악기들이 한꺼번에 쏟아지면 여지없이 처참한 본색을 드러내더군."
가이스키의 눈이 빛났다. 광기 비슷한 게 어른거리듯 했다.
"오케스트라에 편입된 악기들은 말이야, 제각각 다른 본성들을 갖고 있어. 그것들이 소리를 내기 시작하면 그 본성들만큼
다양한 소리들이 쏟아지지. 시작은 같아도 과정과 끝이 달라. 어느 놈은 뒷줄에 있어도 소리가 먼저 오고, 어느 놈은 앞에
있어도 그 소리는 나중에 오기도 하지. 그런가하면 어느 놈은 옆으로 날고, 어느 놈은 앞으로 달려오기도 해. 그런 놈들이
동시에 한꺼번에 운다고 생각해보게. 대단한 일이지. 그 모든 소리들을 함께 어울리게 하는 게 내가 할 일이지."
가이스키는 지나간 일들을 생각하는지 늙은 눈으로 잠시 허공을 더듬었다.
"때로는 그 때문에 박자와 타이밍을 의도적으로 조절하고 어떤 파트는 더 키우고 어떤 파트는 억누르기도 하지만, 난 거의
모든 경우에 그것들의 본성이 그대로 드러나도록 하는 편이거든. 막상 지휘를 한다고 하지만 그 파트별로 다르게 소리가 일어나서
내게 닿아오는 그것들을 어떤 면에선 즐겼다고 봐야지. 그런 다른 것들이 크게는 한데 어울려서 화음과 조화를 이루며 또 다른
하나의 거대한 소리를 새롭게 창조해내는 건 기적과도 같다고 할만 하지."
가이스키는 나직히 한숨을 뱉었다.
"거기까지 표현할 줄 아는 오디오는 없더군. 특히 총주부에선 중구난방에 제멋대로이거나 미친 년 머리카락처럼 헝클어지거나
게으른놈 머리털처럼 뭉쳐서 방향도 못잡고 어쩔 줄을 모르거나 그 모양들이더군. 그러니 내가 오디오를 통해서 내 지난 날을
들어보고 정리해 보려는 게 헛된 망상이었던가 회의에 빠지고, 결국 그걸 못견디고 발광을 하게 된 거지."
가이스키가 힐끗 기술자를 쳐다보았다.
"자네가 만들어낸 소리엔 적어도 그런 문제는 없군. 하도 되지도 않을 소리를 많이 들어서인지 사실 난 오디오로 내가 말한
것들이 표현되리라곤 기대하지 않았지. 그런데 돼. 무슨 수작을 부린 것인가?"
기술자는 비로소 조금 안도하는 기색이었다.
"그게 일단은 영감님이 진작 눈치 채신 빔관의 마력입니다. 각 소리들의...그 뭐냐...영감님 말씀대로 그 본성들을 따로따로
표현할 줄 아는 출력관은 제가 경험한 한 빔관들 뿐입니다. 이르자면 가장 정상적인 소리가 난다고 할 수 있지요."
"역시 그런가? 나는 지금 사실 몹시 놀라고 있다네. 지휘석에 오른 내게 닿아오던 그때의 그 소리, 그 분위기가 다시 그때로 돌아간듯
생생해지는 느낌이거든. 나는 놀라면 호들갑을 떨지 않아. 오히려 침착해진다구."
"물론 진공관 혼자서 소리를 내는 건 아니지만 진공관 오디오의 주인공은 항상 진공관입니다. 다른 모든 부품들은 진공관을
동작시키기 위해서 존재하는 거지요."
기술자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영감님 말씀대로 적은 악기들에선 어떤 오디오도 나름의 매력과 역할을 뽐냅니다. 하지만 관현악 대편성에선 결국 되는 놈과
안되는 놈이 극명하게 갈립니다. 처절할 정도로 잔인하게. 소편성만 들어야 하는 오디오는 그 자체로 기형에 불구입니다. 관현악
총주부까지 감당해낼 수 있는 놈으로 소편성을 들어보면 그 또한 바로 알 수 있는 일입니다. 결국 하나의 소리를 내든 모든 소리를
한꺼번에 내든 소리는 바로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가이스키의 눈이 번들거렸다.
"자네 지금, 잘난 체 하는 것인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좋네. 지금 소리에도 분명히 문제는 있거든."
기술자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받았다.
"그걸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이제 첫 소리가 났을 뿐입니다. 지금부터 이 구성에서 최대한 바른 소리를 찾아가야 합니다."
"아, 한번 만들고 끝이 아닌가?"
"공부 안하셨어요? 빔관과 5극관들엔 3극관에 없는 것들이 있어요. 두 개의 그리드가 더 있잖습니까. 그 중 제2그리드라는 놈이
빔관과 5극관들의 성감대입니다. 거길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천당과 지옥이 갈립니다."
"오오...성감대를 가진 진공관이라...절묘하구나. 그럼 내가 들었던 기존의 6L6들은 성감대를 잘못 다룬 것인가?"
"대개 과하게 다루지요. 그럼 빔관과 5극관들은 고통스러운 소리로 복수합니다. 물론 그게 잘 다뤄달라는 호소일 수도 있지요."
"재미있군. 자네 여자 좋아하나? 여자들도 많이 다뤄봤나본데?"
"저는 여자를 좋아하는데 여자들이 저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대신 빔관과 5극관들은 많이 다뤄봤지요."
"자네도 나름 처절한 인생이군. 아무리 진공관이 좋다한들 피와 살과 체온을 가진 사람만 하겠는가. 어쨌든 지금 현재 소린 좀
뻣뻣한 감이 있네."
가이스키가 갑자기 본론으로 화제를 돌렸다.
"어느 부분에선 너무 강하고 직선적이야. 지나치게 남성적이라고나 할까. 아니, 그 보단 마초적이라고 하는 게 더 나을려나."
"차츰 부드러워지긴 할 겁니다만, 그건 빔관과 5극관들의 태생적인 단점일 수도 있습니다."
"그럼 해결이 안될 수도 있다는 뜻인가?"
"그런 건 관의 동작, 성감대의 안정을 이루는 게 우선이지만, 다른 부품들과 조화를 이뤄야 할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걸 지금부터
해나가야 합니다."
가이스키는 비로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군. 오늘 첫 소리를 들어보니 비로소 하나의 어떤 과정이 진공관 오디오에도 있다는 걸 알게 되겠군."
"일단 지금 소리를 즐기십시오. 이 소리는 점점 더 나아질 것입니다."
"확신하는가?"
"항상 그렇게 되어왔지요."
가이스키는 빙그레 미소지었다.
"보름은 씻지 않은 듯한 꾀죄죄한 몰골에 비정상적인 언행....여전히 믿음은 안가지만 별 수 없군. 내 음반들을 들으면서 그때 기억을
되살려주는 소리를 듣게 해준 건 자네가 처음이니까."
"저를 칭찬하지 말고 빔관들을 칭찬해 주십시오. 그 놈들 없으면 저도 별 수 없습니다. 진공관으로 소리 낸다는 게 결국 별 것도
아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