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각 개인의 성향이나 기질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환경에 의해 습득되는 것이라는 견해가 20세기 중반까지의 학문적 경향이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이러한 주장은 당시의 가장 영향력 있는 사회, 역사의 분석 도구인 사회학의 영향이 컸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후 시계추는 반대편으로 향했습니다. 우리의 기질이나 선호, 취향이나 성향은 상당부분 선천적인 것이라는 이론이 당시로서는 새롭게 대두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달게 조미된 음식을 좋아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그 사람의 유전인자 속에 당분에 대한 선호가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인 것이고 어떤 사람이 매운 맛에 대한 혐오를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어느 정도 선천적으로 매운 맛을 싫어하는 인자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판단에는 상당한 제한 조건이 붙습니다. 일반적인 미국인은 확실히 일반적인 한국인 보다 매운 맛을 싫어합니다. 이 경우 우리는 환경의 영향을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매운 맛에 많이 노출된 평균적인 한국인이 매운 맛에 덜 노출된 미국인 보다 그 맛을 더 선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선천적인 성향 차이는 “같은 환경 조건일 때”라는 제한 조건이 붙어야 합니다. 결론은 아마도 중간쯤에 있을 것 같습니다. 즉 선험적인 것과 경험적인 것 사이의 어디쯤에.
집단으로서의 민족성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확실히 민족성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저는 젊은 시절의 대부분을 외국에서 보냈습니다. 병역을 마친 이후로는 쭉 외국에서 살게 되었고 여러 민족에 속한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각 민족 성향에 대한 나름대로의 일반화를 하였는데 이 경우는 어느 정도 후천적인 것이라고 해야 합니다.
어떤 성향이 상당부분 선험적이라는 사실은 쌍둥이의 연구에서 극적으로 밝혀졌습니다. 완전히 상반된 가정환경을 가진 두 가정으로 입양된 쌍둥이가 수십 년 후에 비슷한 직업, 비슷한 남편, 비슷한 의복, 비슷한 습관 등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 관찰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우리 이웃을 좋은 훈련과 교육에 의하여 완전히 상이한 사람들로 만들 수 있기를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단지 그의 타고난 기질이 좋은 방향을 택하도록 유도하고 또한 그 기질 중에 어떤 장점이 있다면 그것을 극대화시키는데 교육의 목적이 있는 것이지요. 동일한 부모 밑에서 자라난 두 여자아이가 완전히 상반된 성향을 가지고 있는 것이 많이 관찰된바 심지어는 소위 “공주병”이라고 우리가 부르는 여성스러움에의 과도한 집착도 선험적인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도 운명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운명 앞에서 겸허해야겠지요. 그리고 운명이 우리에게 좀 더 호의적이기를 기원해야겠지요. 우리는 단지 우리 노력에 의하여, 그 운명이 줄 수도 있는 고통을 완화시키거나 혹은 운명이 줄 수도 있는 행운을 점 더 큰 것으로 만들 뿐이지요. 도박을 잘하는 사람도 항상 돈을 따지는 못합니다. 어떤 사람이 능란한 도박꾼이라고 한다면 단지 잃을 때 좀 덜 잃고 딸 때 좀 더 많이 딸 뿐입니다. 능란한 도박꾼 역시도 운에 지배받는 것이지요. 또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타고난 기질 그 자체가 선이거나 악이거나 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기질은 가치중립적인 것이고 그것이 나쁜 방향을 향했을 때 나쁠 뿐입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 개인의 성향도 어떤 측면에서 후천적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유전인자 자체가 먼 조상들로부터 축적된 것이고 그 먼 조상의 경우는 매우 단순한 집단으로부터 발생한 단일한 DNA가 각기 분화되어 독특한 것들이 되어나갔기 때문이지요. 한 국가의 경우에는 그 국가의 조상들이 겪어온 경험이 축적되어 독특한 성향의 문화를 만들었을 것이고 구성원들은 태어나면서부터 그 집단의 문화의 여러 세례 속에 국가적 단일성을 형성해 나가는 것이겠지요.
여기서 각 국가의 성향은 우리의 주된 관심사인 오디오에 정확히 반영됩니다. 아니 오히려 오디오의 성격으로부터 각 국가의 성향을 거꾸로 유추해 나갈 수 있을 정도입니다. 이것은 정말 재미있는 경험입니다. 독일, 영국, 미국의 오디오들이 앰프나 스피커나 트랜스나 진공관에 이르기 까지 각 민족의 성향을 일관되게 반영합니다. 비요노르 스피커가 미국 스피커가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웨스턴 일렉트릭의 755A 나 22A 혼이 영국 소리일 수는 절대로 없습니다.
독일 소리는 정교하고 선명하고 정확하고 섬세하고 매섭습니다. 미국 소리는 화사하고 예쁘고 낙천적이고 즐겁고 유쾌합니다. 영국 소리는 호방하고 시원하고 소박하고 때때로는 비장합니다.
독일의 Ed, Ad1, Da, RE604 등의 진공관은 조금씩 차이가 있다고는 해도 음의 분해력이 매우 높고 전 대역에 걸쳐서 선명하고 심지어는 저역조차도 분해해냅니다. 이것은 마치 알프레흐트 뒤러의 에칭이나 소묘, 반 다이크의 세밀화를 보는 듯합니다. 그러한 기계적 특성과 더불어 독일관의 전체적인 음조는 약간 어둡습니다. 어딘가 슬프고 애조 띤 색조가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이것이 억지스럽고 꾸민 듯한 슬픔은 아닙니다. 즉 청승스러운 느낌은 없고 매우 굳세고 분명하고 의연한 슬픔이 거기에 있습니다. 이것이 독일 민족의 특징입니다. 독일인 중에 시끄러운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매우 분명하고 정확하고 원칙론 적이지만 약간은 우울하고 조용합니다. 그러나 논리적이고 고지식합니다. 그리고 법률과 권위에 대한 복종은 참으로 충성스럽게 느껴질 정도입니다. 저는 외국 생활 중 몇 명의 독일 친구를 사귈 기회가 있었습니다. 신뢰할 만한 사람들이고 정확한 사람들이지만 솔직히 같이 술 마시기는 싫었습니다. 눈만 꿈벅거리면서 술만 들이키기는 정말 심심하지요. 그들은 생각이 많은 사람들이면서 표현은 잘 안하기 때문에 때로는 엉큼하다는 느낌을 줍니다. 이를테면 내숭이 좀 있지요. 이 점, 독일인과 일본인은 상당히 비슷합니다. 같이 추축국이 된 것이 다 이유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 사람들의 솔직하고 허심탄회한 기질은 이들의 기질과는 상당히 대조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대체로 소양인이라면 그들은 대체로 태음인이 아닌가 싶습니다.
슈베르트의 연가곡집이나 바하의 칸타타나 조곡들은 얼핏 단순하게 보인다 해도 화성학적으로 그리고 대위법적으로 분석해 보면 그 복잡함과 정교함이 이를 데 없습니다. 이러한 구성의 치밀함은 브람스에 이르면 지겨울 정도입니다.
이러한 독일 진공관 중에 RS241은 어느 정도 예외적입니다. 그 관은 상대적으로 풍부한 배음과 푸근한 음조를 지닙니다. 그리고 조용하고 소극적이고 매혹적인 소리를 냅니다. 그러나 이 관은 전형적인 독일 음향용 관은 아닙니다. 송신관입니다.
아마도 처음 들었을 때 미국 진공관처럼 사람을 현혹시키는 관은 없을 것입니다. 300A나 300B, 205D 등의 소리는 거의 기절할 정도로 화사하고 예쁩니다. 이것은 절대 과장이 아닙니다. 저는 205D싱글로 차이코프스키의 세레나데를 듣다가 얼이 다 빠졌습니다. 엄청나게 예쁘고 발랄한 젊은 여자가 제 앞에서 나만을 위한 애교와 아양을 떠는 것 같았습니다. 마치 우리의 사랑스러운 탤런트 이나영씨가 내 앞에서 눈웃음 짓는 것 같았으니까요. 저는 가까스로 이성을 수습하고 여러 음반을 차례로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이 관이 소위 인터넷 용어로 “뽀샵”한 것이란 느낌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즉 화장을 좀 했다는 것이지요.
300B 나 웨스턴 스피커의 소리는 이렇게 예쁘고 발랄하고 화려합니다. 듣기에 아무 부담도 없고 그저 그 매혹적인 소리에 실려가기만 하면 됩니다.
이것이 미국인의 기질입니다. 미국은 건국 이래 슬픈 역사를 겪은 적이 없는 나라입니다. 욱일승천의 기세로 세계 초강대국이 되어나갔지요. 본토가 침략을 당하였다거나. 다른 나라의 식민 지배를 받거나 하지도 않았습니다. 독일이 30년 전쟁 이래 유럽의 약소국으로 전락하여 한없는 가난과 설움 속에 수백 년을 지낸 반면에 미국은 모든 것이 잘되어 나가기만 하였고 양차 세계 대전에 즈음하여서는 마침내 세계 유일의 강대국이 됩니다. 이런 나라는 슬픔을 알지 못합니다. 그들에게 있어 비극이란 전 국가적인 것이라기보다는 개인적인 문제로 치부됩니다. 피츠제럴드나 헤밍웨이의 주인공들의 가장 큰 비극은 권태와 무의미에 젖어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생존의 문제는 없었다는 것이지요. 일반적인 미국인들은 모든 것을 해피엔딩으로 만들어야 속이 시원합니다. 미국에서 잘 팔리려면 반드시 거기에는 행복과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인어공주의 월트 디즈니 판이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엉터리 영화가 된다든지 남녀 간의 로맨스가 필요 없는데도 굳이 그것을 집어넣어서 억지로 이상하고 유치한 영화를 만드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화사하고 예쁘고 화려한 음조가 과장되게 튜닝된 관이 미국을 대표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들의 인생 지침은 상당히 할리우드적입니다. 제 미국 친구들의 첫 번째 특징은 피상적 총명성과 낙관주의 그리고 약간의 경박성입니다. 아무튼 미국인은 좀 설쳐댑니다. 별로 심오하지도 않으면서 잘난 체는 꽤하는 사람들이고 너무도 자신 만만해서 어떤 경우에는 건방지다는 느낌마저도 줍니다. 제 생리에는 안 맞습니다. 누구의 생리엔들 맞겠습니다. 그러니 미국인이 욕 많이 얻어먹습니다.
문제는 제가 다양한 오디오적 경험을 했다는 것입니다. 오래 듣다보니 이것은 마치 술집 여자가 돈 좀 벌자고 쉽게 마음을 주는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즉 저는 미국 진공관에서 화류계 소리 같은 느낌을 받은 것입니다. 부탁이니 웨스턴을 사랑하시는 분은 화부터 내지는 말아 주십시오. 저는 단지 제 취향을 말할 뿐입니다. ‘전체는 부분보다 크다’는 논리적 명제야 구속력이 있는 것이지만 취미판단에는 구속력이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저는 미국 소리를 별로 좋아하는 취향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저는 애교 많은 아가씨를 좋아하는 타입이 아닙니다. 좀 담담하고 조용하고 중성적인 성향이 있는 여자를 좋아하는, 좀 별스런 취향을 가진 사람이지요.
영국 소리는 시원스럽습니다. 우선 PX25, DA30, DA60, DA100, DO24 등이 내는 소리는 약간은 멍청하고 불분명하고 또 해상력도 독일관에 비하여 떨어집니다. 그렇다고 미국관처럼 예쁜 소리를 내는 것도 아닙니다. 이렇게 특징 없고 무미건조하고 개성 없는 관들이 명출력관이라고 할 수 있을 까요?
그러나 명출력관입니다. 그야말로 출력관의 로제타 스톤이라고 할 만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영국이 기술이 부족하여 해상도가 떨어지는 관을 만들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영국인들은 스스로의 성향에 맞도록 출력관을 튜닝하였을 것이고 이렇게 담담하고 개성 없는 관을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영국관이 개성이 없을 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들 스스로 시도하지 않았던 어떤 개성이 거기에 없다고 영국관을 비난하여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마치 미국관에는 독일관의 그 정숙한 개성이 없다고 WE관을 비난하는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영국관들의 매력은 그 호방함과 시원스러움과 소박함에 있기 때문입니다. 즉 그것이 개성이라는 것이지요.
영국인의 기질은 John Bull이라는 스스로의 별명 속에 가장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황소같은 사람들이지요. 우직하고 무뚝뚝한 데가 있지만 사실 더 이상 신사일 수가 없고 또 마음도 비단결입니다. 물론 결점도 많은 민족이긴 합니다만 일단 그 민족적 기질은 시원스럽고 관대함입니다. 너무 시원하다보니 가끔 급하다는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 아마도 영국인들 처럼 급하게 얘기하는 사람들도 없습니다. 그리고 영국 여성들처럼 무뚝뚝하고 웃음 없고 덤덤한 여자들도 다시없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영국 여성들처럼 화장하기 싫어하는 여자도 없습니다. 보통 국제적으로 영국 여성이 가장 못생긴 여자로 통하는데 사실 영국이나 프랑스나 독일이나 인종적으로 다 같습니다. 모두 알만드(Allemande)족이지요. 단지 무뚝뚝하기 때문에 그런 평가를 받는 거지요. 그녀들에게서 아양이나 애교는 증발되었습니다. 쥴리아 오몬드나 헬레나 본햄 카터나 엠마 톰슨 등의 영국 여배우들의 첫 번째 개성은 의도적 애교나 아양이나 눈웃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인 오스틴의 소설에 나오는 아가씨들도 항상 자제와 절도를 지키려 노력하지 애교나 아양을 부리지는 않습니다. 민족적 기질에 맞게 튜닝된 아가씨들이지요.
탄노이도 잘못 튜닝되었을 때에는 짧은 혼에서 나오는 고음이 여간 급하게 덤벼드는 것이 아닙니다. 예쁘지도 않으면서 엉겨 붙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저음은 따로 벙벙 거립니다. 대체로 포노단이나 라인단이 형편없을 때 이런 현상이 나타납니다. 탄노이의 경우 고급의 프리앰프 부가 절대 필수적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여러 고전적 작곡가 중 영국의 헨리 퍼셀을 가장 좋아합니다. 사실 바하나 모차르트보다 더 좋아합니다. 퍼셀의 음악은 바하나 모차르트의 음악이 지니는 치밀함과 화려함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매우 단순하고 간결하고 심지어는 소박합니다. 그러나 호방하고 호쾌합니다. 그리고 때때로는 약간의 비장감 조차 느껴집니다. 그 단순한 음악이 얼마나 아름답게 느껴지는 지 듣다 보면 제 가슴이 조여지는 듯한 기쁨을 느낍니다.
우리의 탄노이가 바로 이러한 스피커입니다. 바하나 베토벤을 낳은 민족이 비요노르나 클라르톤 같은 스피커를 만든 것과 마찬가지로 헨리 퍼셀이나 존 다울랜드를 낳은 민족이 탄노이 스피커를 만든 것입니다. 탄노이는 독일 스피커의 선명함이나 정교함을 지니고 있지도 않고 미국 스피커의 화사하고 치근거리는 애교를 지니고 있지도 않습니다. 둔하고 느리고 담담합니다. 그러나 호방하고 시원스럽고 간결하고 소박하고 점잖습니다. 퍼셀의 ‘메어리 여왕의 생일에 바치는 송가’를 비요노르나 유로딘으로 듣는 다는 것은 755A로 겨울 나그네를 듣는 것보다 더 웃기는 노릇입니다. 그 곡은 탄노이를 위한 곡입니다. 그래야만 그 비장감에 물든 단순하지만 장엄한 소리를 완전히 즐길 수 있습니다.
저는 언젠가 우리나라의 자칭 고전관 전문가로 나름 유명하신 분의 PX25에 대한 경멸에 차고 성급한 평가에 놀란 적이 있습니다. 그 분은 한마디로 간단히 요약합니다. ‘멍청해!’ 만약 우리가 오디오에서 구하는 것이 선명하고 분석적이고 섬세한 음이라면 그 분의 평가가 맞습니다. 그러나 복잡함과 정교함이 능사는 아닙니다. 저는 학창 시절에 중세 스콜라 철학을 공부한 적이 있습니다만 아뭏든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 체계보다 더 정교하고 복잡하고 치밀한 철학은 다시없습니다. 그러나 이 복잡함은 그야말로 학문을 위한 학문, 즉 종사자들의 밥벌이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고명하신 분들이 무엇인가 복잡하고 어려운 얘기를 한다면 그것은 대부분 어떤 심오한 통찰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자기 밥벌이를 위한 변설일 경우가 많습니다. 잘 나가는 대학교수나 박사님들께서 어려운 전문 용어를 전투대형으로 배열해서 나를 기죽일 때에는 심지어 겁에 질리기도 합니다. 주석위에 주석을 붙이고 참조 위에 참조를 갖다 붙이면서 학문을 엄청나게 분석적으로 다루는 사람들 중에 기실 똑똑한 사람은 없습니다. 어느 경우에나 “간결이 지혜의 요체”입니다. 저는 때때로 독일 진공관들에서 이 분석을 위한 분석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도대체 연주회장의 어느 장소에서 그렇게 분석적인 음을 들을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생각하건데 그러한 분석적인 음은 그야말로 기계음입니다. 사실 제 경험상 독일 진공관들을 좋아하시는 동호회 회원들은 대부분이 연주회장 가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으로 사료됩니다.
스콜라철학의 거대한 건조물은 데까르트의 간결하고 실제적이고 솔직한 철학에 의하여 한 순간에 붕괴됩니다. 마찬가지로 저에게 있어 PX25나 DA30은 그 장엄하고 시원스럽고 호방한 음으로 독일관의 정교함이나 미국관의 화사함을 단숨에 붕괴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그 구성이 지극히 간결한 탄노이 역시 그 시원스러움과 호쾌함으로 멀티스피커, 멀티웨이의 비요노르나 클라르톤의 그 답답하고 복잡한 음을 단숨에 붕괴시킵니다. 이것은 마치 북유럽의 세밀화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덜 선명하고 심지어는 애매한 안개 같은 기법(sfumato)에 의해 붕괴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탄노이를 사랑하시는 여러분, 이제 목표는 분명해졌습니다. PX25나 DA30으로 만든 싱글 앰프로 퍼셀의 힘찬 음악을 듣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나오는 음은 위풍당당하고 장엄하고 호방(magnanimous and virile)합니다. 그러면 이제 인생살이는 법전이나 거창한 형이상학적 체계라기보다는 그냥 슬프면 슬퍼하고 기쁘면 기뻐하는 매우 단순하고 소박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니면 독일관의 이단아인 RS241싱글 앰프로 탄노이를 구동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 풀 꺾인 음이 나올 것입니다만 이것도 괜찮은 음으로 느껴질 것입니다.
집단으로서의 민족성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확실히 민족성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저는 젊은 시절의 대부분을 외국에서 보냈습니다. 병역을 마친 이후로는 쭉 외국에서 살게 되었고 여러 민족에 속한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각 민족 성향에 대한 나름대로의 일반화를 하였는데 이 경우는 어느 정도 후천적인 것이라고 해야 합니다.
어떤 성향이 상당부분 선험적이라는 사실은 쌍둥이의 연구에서 극적으로 밝혀졌습니다. 완전히 상반된 가정환경을 가진 두 가정으로 입양된 쌍둥이가 수십 년 후에 비슷한 직업, 비슷한 남편, 비슷한 의복, 비슷한 습관 등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 관찰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우리 이웃을 좋은 훈련과 교육에 의하여 완전히 상이한 사람들로 만들 수 있기를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단지 그의 타고난 기질이 좋은 방향을 택하도록 유도하고 또한 그 기질 중에 어떤 장점이 있다면 그것을 극대화시키는데 교육의 목적이 있는 것이지요. 동일한 부모 밑에서 자라난 두 여자아이가 완전히 상반된 성향을 가지고 있는 것이 많이 관찰된바 심지어는 소위 “공주병”이라고 우리가 부르는 여성스러움에의 과도한 집착도 선험적인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도 운명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운명 앞에서 겸허해야겠지요. 그리고 운명이 우리에게 좀 더 호의적이기를 기원해야겠지요. 우리는 단지 우리 노력에 의하여, 그 운명이 줄 수도 있는 고통을 완화시키거나 혹은 운명이 줄 수도 있는 행운을 점 더 큰 것으로 만들 뿐이지요. 도박을 잘하는 사람도 항상 돈을 따지는 못합니다. 어떤 사람이 능란한 도박꾼이라고 한다면 단지 잃을 때 좀 덜 잃고 딸 때 좀 더 많이 딸 뿐입니다. 능란한 도박꾼 역시도 운에 지배받는 것이지요. 또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타고난 기질 그 자체가 선이거나 악이거나 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기질은 가치중립적인 것이고 그것이 나쁜 방향을 향했을 때 나쁠 뿐입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 개인의 성향도 어떤 측면에서 후천적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유전인자 자체가 먼 조상들로부터 축적된 것이고 그 먼 조상의 경우는 매우 단순한 집단으로부터 발생한 단일한 DNA가 각기 분화되어 독특한 것들이 되어나갔기 때문이지요. 한 국가의 경우에는 그 국가의 조상들이 겪어온 경험이 축적되어 독특한 성향의 문화를 만들었을 것이고 구성원들은 태어나면서부터 그 집단의 문화의 여러 세례 속에 국가적 단일성을 형성해 나가는 것이겠지요.
여기서 각 국가의 성향은 우리의 주된 관심사인 오디오에 정확히 반영됩니다. 아니 오히려 오디오의 성격으로부터 각 국가의 성향을 거꾸로 유추해 나갈 수 있을 정도입니다. 이것은 정말 재미있는 경험입니다. 독일, 영국, 미국의 오디오들이 앰프나 스피커나 트랜스나 진공관에 이르기 까지 각 민족의 성향을 일관되게 반영합니다. 비요노르 스피커가 미국 스피커가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웨스턴 일렉트릭의 755A 나 22A 혼이 영국 소리일 수는 절대로 없습니다.
독일 소리는 정교하고 선명하고 정확하고 섬세하고 매섭습니다. 미국 소리는 화사하고 예쁘고 낙천적이고 즐겁고 유쾌합니다. 영국 소리는 호방하고 시원하고 소박하고 때때로는 비장합니다.
독일의 Ed, Ad1, Da, RE604 등의 진공관은 조금씩 차이가 있다고는 해도 음의 분해력이 매우 높고 전 대역에 걸쳐서 선명하고 심지어는 저역조차도 분해해냅니다. 이것은 마치 알프레흐트 뒤러의 에칭이나 소묘, 반 다이크의 세밀화를 보는 듯합니다. 그러한 기계적 특성과 더불어 독일관의 전체적인 음조는 약간 어둡습니다. 어딘가 슬프고 애조 띤 색조가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이것이 억지스럽고 꾸민 듯한 슬픔은 아닙니다. 즉 청승스러운 느낌은 없고 매우 굳세고 분명하고 의연한 슬픔이 거기에 있습니다. 이것이 독일 민족의 특징입니다. 독일인 중에 시끄러운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매우 분명하고 정확하고 원칙론 적이지만 약간은 우울하고 조용합니다. 그러나 논리적이고 고지식합니다. 그리고 법률과 권위에 대한 복종은 참으로 충성스럽게 느껴질 정도입니다. 저는 외국 생활 중 몇 명의 독일 친구를 사귈 기회가 있었습니다. 신뢰할 만한 사람들이고 정확한 사람들이지만 솔직히 같이 술 마시기는 싫었습니다. 눈만 꿈벅거리면서 술만 들이키기는 정말 심심하지요. 그들은 생각이 많은 사람들이면서 표현은 잘 안하기 때문에 때로는 엉큼하다는 느낌을 줍니다. 이를테면 내숭이 좀 있지요. 이 점, 독일인과 일본인은 상당히 비슷합니다. 같이 추축국이 된 것이 다 이유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 사람들의 솔직하고 허심탄회한 기질은 이들의 기질과는 상당히 대조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대체로 소양인이라면 그들은 대체로 태음인이 아닌가 싶습니다.
슈베르트의 연가곡집이나 바하의 칸타타나 조곡들은 얼핏 단순하게 보인다 해도 화성학적으로 그리고 대위법적으로 분석해 보면 그 복잡함과 정교함이 이를 데 없습니다. 이러한 구성의 치밀함은 브람스에 이르면 지겨울 정도입니다.
이러한 독일 진공관 중에 RS241은 어느 정도 예외적입니다. 그 관은 상대적으로 풍부한 배음과 푸근한 음조를 지닙니다. 그리고 조용하고 소극적이고 매혹적인 소리를 냅니다. 그러나 이 관은 전형적인 독일 음향용 관은 아닙니다. 송신관입니다.
아마도 처음 들었을 때 미국 진공관처럼 사람을 현혹시키는 관은 없을 것입니다. 300A나 300B, 205D 등의 소리는 거의 기절할 정도로 화사하고 예쁩니다. 이것은 절대 과장이 아닙니다. 저는 205D싱글로 차이코프스키의 세레나데를 듣다가 얼이 다 빠졌습니다. 엄청나게 예쁘고 발랄한 젊은 여자가 제 앞에서 나만을 위한 애교와 아양을 떠는 것 같았습니다. 마치 우리의 사랑스러운 탤런트 이나영씨가 내 앞에서 눈웃음 짓는 것 같았으니까요. 저는 가까스로 이성을 수습하고 여러 음반을 차례로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이 관이 소위 인터넷 용어로 “뽀샵”한 것이란 느낌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즉 화장을 좀 했다는 것이지요.
300B 나 웨스턴 스피커의 소리는 이렇게 예쁘고 발랄하고 화려합니다. 듣기에 아무 부담도 없고 그저 그 매혹적인 소리에 실려가기만 하면 됩니다.
이것이 미국인의 기질입니다. 미국은 건국 이래 슬픈 역사를 겪은 적이 없는 나라입니다. 욱일승천의 기세로 세계 초강대국이 되어나갔지요. 본토가 침략을 당하였다거나. 다른 나라의 식민 지배를 받거나 하지도 않았습니다. 독일이 30년 전쟁 이래 유럽의 약소국으로 전락하여 한없는 가난과 설움 속에 수백 년을 지낸 반면에 미국은 모든 것이 잘되어 나가기만 하였고 양차 세계 대전에 즈음하여서는 마침내 세계 유일의 강대국이 됩니다. 이런 나라는 슬픔을 알지 못합니다. 그들에게 있어 비극이란 전 국가적인 것이라기보다는 개인적인 문제로 치부됩니다. 피츠제럴드나 헤밍웨이의 주인공들의 가장 큰 비극은 권태와 무의미에 젖어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생존의 문제는 없었다는 것이지요. 일반적인 미국인들은 모든 것을 해피엔딩으로 만들어야 속이 시원합니다. 미국에서 잘 팔리려면 반드시 거기에는 행복과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인어공주의 월트 디즈니 판이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엉터리 영화가 된다든지 남녀 간의 로맨스가 필요 없는데도 굳이 그것을 집어넣어서 억지로 이상하고 유치한 영화를 만드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화사하고 예쁘고 화려한 음조가 과장되게 튜닝된 관이 미국을 대표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들의 인생 지침은 상당히 할리우드적입니다. 제 미국 친구들의 첫 번째 특징은 피상적 총명성과 낙관주의 그리고 약간의 경박성입니다. 아무튼 미국인은 좀 설쳐댑니다. 별로 심오하지도 않으면서 잘난 체는 꽤하는 사람들이고 너무도 자신 만만해서 어떤 경우에는 건방지다는 느낌마저도 줍니다. 제 생리에는 안 맞습니다. 누구의 생리엔들 맞겠습니다. 그러니 미국인이 욕 많이 얻어먹습니다.
문제는 제가 다양한 오디오적 경험을 했다는 것입니다. 오래 듣다보니 이것은 마치 술집 여자가 돈 좀 벌자고 쉽게 마음을 주는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즉 저는 미국 진공관에서 화류계 소리 같은 느낌을 받은 것입니다. 부탁이니 웨스턴을 사랑하시는 분은 화부터 내지는 말아 주십시오. 저는 단지 제 취향을 말할 뿐입니다. ‘전체는 부분보다 크다’는 논리적 명제야 구속력이 있는 것이지만 취미판단에는 구속력이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저는 미국 소리를 별로 좋아하는 취향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저는 애교 많은 아가씨를 좋아하는 타입이 아닙니다. 좀 담담하고 조용하고 중성적인 성향이 있는 여자를 좋아하는, 좀 별스런 취향을 가진 사람이지요.
영국 소리는 시원스럽습니다. 우선 PX25, DA30, DA60, DA100, DO24 등이 내는 소리는 약간은 멍청하고 불분명하고 또 해상력도 독일관에 비하여 떨어집니다. 그렇다고 미국관처럼 예쁜 소리를 내는 것도 아닙니다. 이렇게 특징 없고 무미건조하고 개성 없는 관들이 명출력관이라고 할 수 있을 까요?
그러나 명출력관입니다. 그야말로 출력관의 로제타 스톤이라고 할 만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영국이 기술이 부족하여 해상도가 떨어지는 관을 만들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영국인들은 스스로의 성향에 맞도록 출력관을 튜닝하였을 것이고 이렇게 담담하고 개성 없는 관을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영국관이 개성이 없을 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들 스스로 시도하지 않았던 어떤 개성이 거기에 없다고 영국관을 비난하여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마치 미국관에는 독일관의 그 정숙한 개성이 없다고 WE관을 비난하는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영국관들의 매력은 그 호방함과 시원스러움과 소박함에 있기 때문입니다. 즉 그것이 개성이라는 것이지요.
영국인의 기질은 John Bull이라는 스스로의 별명 속에 가장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황소같은 사람들이지요. 우직하고 무뚝뚝한 데가 있지만 사실 더 이상 신사일 수가 없고 또 마음도 비단결입니다. 물론 결점도 많은 민족이긴 합니다만 일단 그 민족적 기질은 시원스럽고 관대함입니다. 너무 시원하다보니 가끔 급하다는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 아마도 영국인들 처럼 급하게 얘기하는 사람들도 없습니다. 그리고 영국 여성들처럼 무뚝뚝하고 웃음 없고 덤덤한 여자들도 다시없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영국 여성들처럼 화장하기 싫어하는 여자도 없습니다. 보통 국제적으로 영국 여성이 가장 못생긴 여자로 통하는데 사실 영국이나 프랑스나 독일이나 인종적으로 다 같습니다. 모두 알만드(Allemande)족이지요. 단지 무뚝뚝하기 때문에 그런 평가를 받는 거지요. 그녀들에게서 아양이나 애교는 증발되었습니다. 쥴리아 오몬드나 헬레나 본햄 카터나 엠마 톰슨 등의 영국 여배우들의 첫 번째 개성은 의도적 애교나 아양이나 눈웃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인 오스틴의 소설에 나오는 아가씨들도 항상 자제와 절도를 지키려 노력하지 애교나 아양을 부리지는 않습니다. 민족적 기질에 맞게 튜닝된 아가씨들이지요.
탄노이도 잘못 튜닝되었을 때에는 짧은 혼에서 나오는 고음이 여간 급하게 덤벼드는 것이 아닙니다. 예쁘지도 않으면서 엉겨 붙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저음은 따로 벙벙 거립니다. 대체로 포노단이나 라인단이 형편없을 때 이런 현상이 나타납니다. 탄노이의 경우 고급의 프리앰프 부가 절대 필수적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여러 고전적 작곡가 중 영국의 헨리 퍼셀을 가장 좋아합니다. 사실 바하나 모차르트보다 더 좋아합니다. 퍼셀의 음악은 바하나 모차르트의 음악이 지니는 치밀함과 화려함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매우 단순하고 간결하고 심지어는 소박합니다. 그러나 호방하고 호쾌합니다. 그리고 때때로는 약간의 비장감 조차 느껴집니다. 그 단순한 음악이 얼마나 아름답게 느껴지는 지 듣다 보면 제 가슴이 조여지는 듯한 기쁨을 느낍니다.
우리의 탄노이가 바로 이러한 스피커입니다. 바하나 베토벤을 낳은 민족이 비요노르나 클라르톤 같은 스피커를 만든 것과 마찬가지로 헨리 퍼셀이나 존 다울랜드를 낳은 민족이 탄노이 스피커를 만든 것입니다. 탄노이는 독일 스피커의 선명함이나 정교함을 지니고 있지도 않고 미국 스피커의 화사하고 치근거리는 애교를 지니고 있지도 않습니다. 둔하고 느리고 담담합니다. 그러나 호방하고 시원스럽고 간결하고 소박하고 점잖습니다. 퍼셀의 ‘메어리 여왕의 생일에 바치는 송가’를 비요노르나 유로딘으로 듣는 다는 것은 755A로 겨울 나그네를 듣는 것보다 더 웃기는 노릇입니다. 그 곡은 탄노이를 위한 곡입니다. 그래야만 그 비장감에 물든 단순하지만 장엄한 소리를 완전히 즐길 수 있습니다.
저는 언젠가 우리나라의 자칭 고전관 전문가로 나름 유명하신 분의 PX25에 대한 경멸에 차고 성급한 평가에 놀란 적이 있습니다. 그 분은 한마디로 간단히 요약합니다. ‘멍청해!’ 만약 우리가 오디오에서 구하는 것이 선명하고 분석적이고 섬세한 음이라면 그 분의 평가가 맞습니다. 그러나 복잡함과 정교함이 능사는 아닙니다. 저는 학창 시절에 중세 스콜라 철학을 공부한 적이 있습니다만 아뭏든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 체계보다 더 정교하고 복잡하고 치밀한 철학은 다시없습니다. 그러나 이 복잡함은 그야말로 학문을 위한 학문, 즉 종사자들의 밥벌이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고명하신 분들이 무엇인가 복잡하고 어려운 얘기를 한다면 그것은 대부분 어떤 심오한 통찰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자기 밥벌이를 위한 변설일 경우가 많습니다. 잘 나가는 대학교수나 박사님들께서 어려운 전문 용어를 전투대형으로 배열해서 나를 기죽일 때에는 심지어 겁에 질리기도 합니다. 주석위에 주석을 붙이고 참조 위에 참조를 갖다 붙이면서 학문을 엄청나게 분석적으로 다루는 사람들 중에 기실 똑똑한 사람은 없습니다. 어느 경우에나 “간결이 지혜의 요체”입니다. 저는 때때로 독일 진공관들에서 이 분석을 위한 분석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도대체 연주회장의 어느 장소에서 그렇게 분석적인 음을 들을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생각하건데 그러한 분석적인 음은 그야말로 기계음입니다. 사실 제 경험상 독일 진공관들을 좋아하시는 동호회 회원들은 대부분이 연주회장 가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으로 사료됩니다.
스콜라철학의 거대한 건조물은 데까르트의 간결하고 실제적이고 솔직한 철학에 의하여 한 순간에 붕괴됩니다. 마찬가지로 저에게 있어 PX25나 DA30은 그 장엄하고 시원스럽고 호방한 음으로 독일관의 정교함이나 미국관의 화사함을 단숨에 붕괴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그 구성이 지극히 간결한 탄노이 역시 그 시원스러움과 호쾌함으로 멀티스피커, 멀티웨이의 비요노르나 클라르톤의 그 답답하고 복잡한 음을 단숨에 붕괴시킵니다. 이것은 마치 북유럽의 세밀화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덜 선명하고 심지어는 애매한 안개 같은 기법(sfumato)에 의해 붕괴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탄노이를 사랑하시는 여러분, 이제 목표는 분명해졌습니다. PX25나 DA30으로 만든 싱글 앰프로 퍼셀의 힘찬 음악을 듣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나오는 음은 위풍당당하고 장엄하고 호방(magnanimous and virile)합니다. 그러면 이제 인생살이는 법전이나 거창한 형이상학적 체계라기보다는 그냥 슬프면 슬퍼하고 기쁘면 기뻐하는 매우 단순하고 소박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니면 독일관의 이단아인 RS241싱글 앰프로 탄노이를 구동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 풀 꺾인 음이 나올 것입니다만 이것도 괜찮은 음으로 느껴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