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팀파니는 말이야, 가장 뒤쪽에 있지만 쾅, 치면 어떤 소리 보다 가장 먼저 내게 달려오지. 하지만 타점은 제 위치를
벗어나지 않거든. 어떤 오디오는 팀파니 소리가 가장 빠르게 튀어나오긴 해. 그런데 가장 앞쪽에서 쿵쾅쿵쾅 염병을 떠는 거야.
세상에, 난 어떤 경우에도 팀파니를 가장 앞줄에 세웠던 적이 없어. 뿐인가. 심벌즈는 아예 내 귀 양쪽에 대고 미친듯이 쳐대는
것 같더라니까. 그러니 딴 소리들인들 성하겠는가. 바이올린들은 약먹은 것처럼 깽깽대면서 날아오르고 첼로 하고 더블베이스 놈들은
무슨 잘못을 했는지 잔뜩 누죽들어서 빌빌대기나 하고...그런 소리들을 듣다보니 내가 그런 연주를 하는 꿈을 꾼 적도 있어.
악몽도 그런 악몽은 정말이지....내 생애 최악의 악몽이었지."
요즘 가이스키의 목소리엔 이전과는 다른 생기가 돌았다.
"옛날에 한 번은 바이올린 연주자 하나가 영 신경에 거슬리는 거야. 예쁜 여성 연주자였지.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자기가
예쁜 줄 확신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그걸 알려주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는 그런 스타일이었지."
"여자가 예쁘게 보이려 노력하는 건 귀엽게 봐줄 수도 있을 텐데요."
"그건 정말 예쁜 경우고. 어른 말에 끼어들지 말고 듣기나 해 임마. 동방예의지국에서 왔다면서?"
가이스키는 허험, 헛기침을 보탰다.
"문제는 걔가 연주할 때도 그런 습관을 유지하는 거였지. 어떻게 활을 그으면 예쁘게 보일 수 있을까, 어떻게 몸동작을 하면 우아하게
보일 수 있을까, 머리 속이 온통 그런 생각 뿐인 것처럼 보이는 거야. 소리도 딱 그에 어울리는 소리가 나는데 거슬려서 미치겠더라구."
"혹시 그 여자 좋아하신 것 아닙니까?"
"이 쉐퀴가 정말....,"
가이스키가 기술자에게 뭔가를 집어 던졌다. CD였다. 기술자는 가볍게 피하고 그게 뭔지 확인도 하지 않았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여자가 그런 종류야. 내부로 몰두하지 못하고 겉으로 꾸미기 바쁘고 드러내기만 하려는 그런 여자. 지만 이쁜 줄 알고
지만 귀한 줄 아니까 누구하고도 속깊이 어울리질 못해. 그런 것들이 전체의 화음과 조화를 망치는 원흉이니까."
가이스키가 버럭 목청을 높였다.
"반신불수가 되어 여자를 언제 안아봤는지 기억조차 없는 지금도 그런 것들이 가장 싫다구. 알아?"
"남자도 그런 종류들 있어요. 왜 여자만 갖고 그래요?"
가이스키는 이를 갈았다.
"그래, 임마. 남자도 있어. 그걸 누가 몰라? 요는 그 동안 들었던 대개의 오디오에서 그 계집애가 자꾸 떠오르더라 그 얘기를 하려던 거였단
말이야. 왜? 내가 가장 기억하기 싫은 것들 중 하나인데 빌어먹을 오디오 소리들을 들으면서 오히려 선명하게 기억이 되살아나니까."
"그 여자한테 악보 받침대 던졌었죠?"
기술자의 기습같은 질문에 가이스키는 멈칫 했다.
"하필이면 받침대 모서리가 그 여자의 눈에 맞아서...지금 그 가해자에게서 말씀을 직접 들어보니 그렇게 맞추려고 정조준했던 것 같기도 하고..."
가이스키는 발광했다.
"그만, 그만, 이 개샠 십샠 야비한 색키 언제 내 뒷조사를 한 거야?"
"뒷조사는 무슨 뒷조사요? 워낙 유명한 얘기여서 저절로 알게 된 것 뿐인데."
"그게 언젯적 얘긴데, 이 개샠, 더 얘기하면 너 죽어. 죽일 거야."
가이스키는 꽤액 고함을 지르고는 헉헉댔다.
가이스키는 한참만에 스스로 진정을 하고 흔들의자에 몸을 묻었다. 드넓은 가이스키의 거실엔 처음인 듯한 낯선 침묵이 깊게 가라앉았고
흔들의자의 다리만 마루바닥을 그네타듯 흔들렸다.
가이스키는 문득 입을 열었다. 목소리에 힘이 없었고 쉬어서 흘러나왔다.
"자네 말이 맞아. 전체와 어울리지 못함으로써 전체를 힘들게 하는 그런 연주자는 교체해버리면 그만이야. 늘 그렇게 했지. 담담하고
엄격하고 위엄있게 말이야. 그런데 그 여자에겐 그러지 못했지. 뿐만 아니라 눈 하나를 없애버리는 몹쓸 짓까지 한 거야."
기술자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가장 꼴보기 싫은 종류인 건 맞았어. 그런데 그러면서도 난 그 여자에게만큼은 자꾸 알 수 없는 충동을 느낀 거야. 까놓고 말하지.
그건 욕정이었어. 난 그 여자가 그렇게 싫은데도 또 갖고 싶기도 했던 거야. 결국 눈 하나를 빼앗는 미친 짓을 하고 나서야 내 사람으로
만들 수 있었지."
기술자가 거들었다.
"두 분이 결혼하셨단 얘기도 알고 있었습니다. 물론 뒷조사를 한 건 아니구요."
"알량한 책임감이나 동정이 아니길 바랬어. 그 여자가 또한 내 마음을 그렇게 오해하지 않기를 바랬지. 그 여자가 나중에 다른 사람들이
아니고 그저 내게 잘 보이고 싶어 그런 부자연스런 연출을 자기도 모르게 자꾸 하게됐다는 말을 했을 땐...자넨 그 심정 아나? 난 그녀에게
악보받침대를 던졌던 내 손모가지를 잘라버리고 싶었어. 정말이지 내 생애 최고의 못난 짓이었지."
"어쨌든 저는 두 분이 맺어지고 행복하게 잘 사셨다는 데에 방점을 찍고 싶습니다."
"잘난 체 하지마, 색꺄. 인생은 동화가 아냐. 우린 행복하게 잘 살지 않았어."
"그랬다고들 하던데."
"우리는 시작부터 왜곡되었어. 나는 그녀에 대한 마음을 그런 미친 짓으로 표현했고, 그녀 또한 나에 대한 마음을 오히려 내가 가장
꼴보기 싫어하는 방법으로 표현했어. 우리는 끝끝내 그 시작을 바로잡지 못하고 묻어둔 채 그냥저냥 살았지. 그걸 꺼내서 바로잡거나
녹여없앨 용기도 없었고......결정적으로 그만큼의 사랑도 없었지."
"뭐 저도 사랑같은 건 몰라서....."
"까불지말게, 젊은이. 자넨 사랑을 알아."
기술자는 가이스키의 노망을 의심하는 얼굴이 되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차츰 자리가 잡혀가고 중간중간 바로잡기도 하면서 실체가 드러나는 이 소리....함께 만들어가는 거라고 했지만 결국 자네가 만들고
있는 거지. 나는 소리에 대해서 어떤 말도 할 수 있지만, 진공관 어디를 어떻게 건드려야 그런 소리를 표현해낼 수 있는지는 아무 것도
모르지. 내가 말하는 이런 저런 소리를 진공관을 통해 구현해내는 건 결국 자네란 말이지. 그런데 한가지 놀라운 게 뭔지 아나?"
기술자의 얼굴에 긴장이 어렸다.
"침착하신 말투, 또 놀라긴 하셨군요."
"자네가 만들어내는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자면 하나의 소리가 꾸밈과 왜곡이 없고 있는 그대로 표현되고 있다는 느낌이 자꾸 들어.
믿을 수 없어. 자네 같은 꼬라지가 설마 소리의 본질을 꿰뚫고 있기라도 하단 말인가."
"그건 제가 모르는 얘깁니다. 저는 다만 제가 아는 한 소리길을 바르게 닦아보자는 그 생각 하나 뿐입니다."
"이런 소리를 내야되겠다는 생각을 안한다고?"
"제가 뭐라고 이런 소리 내겠다고 척 내고 저런 소리 내겠다고 척 내고 하겠습니까. 저는 소리를 모릅니다. 그래서 영감님처럼 평생
소리를 다루며 살아오신 분들이 옆에서 이래라저래라 해주시는 게 저도 편하고 좋은 겁니다."
가이스키는 낮게 신음했다.
"음...그랬군 그랬어. 이 새퀴 너 그런 놈이었군. 그래서 이렇게 꾸미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느낌을 주는 소리를 만들어내는 거야.
바로 그거야. 그것 때문에 나는 네놈이 소리를 진정 사랑할 줄 아는 놈이라고 여기게 된 것이고, 나의 잘못된 사랑을 기억하고 네놈 앞에서
그 잘못을 고백하게 된 거지."
기술자는 뭐라 할 말이 없는 듯 우물거리다가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만 스스로 부끄러워진 듯도 했다.
"나는 나의 왜곡과 용기없음 사랑모름을 가리고 숨기기 위해 평생 있는 그대로를 외쳐왔어. 가장 꾸밈없는 척, 가장 정직한 척, 가장
진실된 척 해왔지. 그러다가 뜻밖에도 그토록 혐오해마지 않던 오디오 소리를 통해서 있는 그대로를 소스라치게 깨우치게 되었구나.
알지 못했고 알 수 없다. 사람의 일이란 정녕 알지 못하고 알 수 없는 거로구나."
"너무 갖다 붙이십니다."
정말 부끄러운지 기술자가 가까스로 말했다. 가이스키는 세차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다, 이 정도면 됐다. 더 갈 일도 아니다. 이전까지 들었던 오디오들은 꾸밈과 왜곡이 넘쳐났었다. 지금 보니 그 삐까번쩍하고
요란한 겉모습들부터 꾸밈과 왜곡이었고 소리 또한 생긴 그대로 났던 것이다. 그건 내 모습이기도 했다. 나는 그것들을 보고 화를 내고
염병발광을 했지만 결국 그것은 내 자신의 왜곡과 꾸밈에 대한 혐오였다. 그렇게 향했어야 했다. 그녀의 꾸밈과 왜곡에 대한 혐오 또한
먼저 내게 들이댔어야 했다."
가이스키는 그만 미쳐버렸는지 눈물까지 주루루 흘렸다.
"아아....나 가이스키, 오늘에서야 하나의 꾸밈없고 정직한 소리를 통해 나를, 내 자신을 비로소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구나.
아아아아아....이것이 진공관이구나. 이것이 빔관이구나. 이것이 오디오 소리로구나."
오디오에선 말러 5번 4악장 아다지에토가 대하大河와 같은 마지막 장중한 마무리를 쏟아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