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혈단신으로 외국생활을 10여 년쯤 해보면 외로움이 어떤 것인지를 압니다. 정체성이 붕괴되어 갑니다. 삶이 진짜 삶이 아닌 것 같고 영혼은 나 자신과 일체가 되지 못한 채로 어딘가를 부유하는 느낌을 줍니다. 내가 겪은 일상들이 나의 사건이라기보다는 누군가의 사건인 것 같습니다. 어두운 바닷물이 나를 질식시키고 나의 낮조차도 어두움으로 가리지요. 그 두려움. 외로움이 누적되어 가다가 어느 순간 미칠 것 같은 순간이 옵니다. 그때에는 술로 의식을 잠재웁니다. 먼저 술집에 들어가서 들이키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맥주 몇 병과 보드카 한 병을 사가지고 집으로 찾아듭니다. 아침에 일어나보면 완전히 폐허가 된 거실에서 뻗어있는 나를 발견합니다. 이러고 나면 그럭저럭 보름쯤은 살게 됩니다.
제가 10여 년의 유학생활 끝에 학위를 받고 정착했을 당시에 제 꼴은 이와 같았습니다. 제 실력과 학위는 한국의 대학에서 근무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자격요건이었나 봅니다. 도대체 받아주는 대학이 한 군데도 없었고 결국 그 오만하고 경박한 미국인들 사이에서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시카고 대학. 그 도시는 인간이 살지 말아야 할 첫 번째 도시 중 하나입니다. 겨울에는 엄청난 바람이 불어대고 봄날은 온타리오 호수에서 솟아오르는 두터운 안개로 덮입니다. 공업도시이다 보니 주거환경도 형편없습니다. 거기에 근무했던 시간은 지금은 가끔 꿈에서 나타납니다. 저는 몸서리치며 깨지요.
더 이상 교수 기숙사에 있기가 싫었습니다. 그 퀴퀴한 마리화나 냄새를 더 맡으면 죽을 것 같았습니다. 나가기로 결정했는데 자동차를 사야했습니다. 저는 이미 결정했습니다. 10년쯤 된 도요타나 혼다의 썩은 차를 사기로. 새 차일 때 어떤 매력도 없는 일본차들은 중고가 되었을 때 자못 쓸모 있는 차가 됩니다. 견뎌주니까요.
중고차 매장들을 이리저리 전전했습니다. 제 발이 멈춘 곳은 일본차 매장이 아니라 독일차 매장이었습니다. 노천에 중고 포르쉐 한 대가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황금의 밝은 태양빛을 배경으로 그 붉은 색 ‘꿈’은 언제라도 폭발하며 뛰쳐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가난했습니다. 꿈 밖에 가진 것 없는 가난한 젊은이였습니다. 그러나 환각과 몽상에 잠길 수는 있었습니다. 딜러에게 요청했습니다. 테스트 드라이브를 해보겠다고. 저 자신이 그 차를 감당할 만큼 부자라는 환각을 제 자신에게 부과했습니다. 단 한 시간. 짧은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충분한 시간이었습니다. 그 자동차가 얼마만큼 매력적인 기계인가를 알기에는 그 한 시간으로 충분했습니다. 그 차는 기계공학이 극단에 이르면 어떤 쾌락을 제공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었습니다. 저는 평소에도 악셀레이터의 존재 이유가 “바닥까지 밟히기 위해서”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수줍어하고 소극적인 외피를 벗기면 열정과 소란스러움으로 꽉 찬 저의 내면이 있습니다. 악셀레이터를 바닥까지 밟자 그 차는 달리는 것이 아니라 폭발하는 것이었습니다. 250km/h. 이 속도가 정말 가능한 속도였습니다. 불안하고 동요하는 250km가 아니가 안정감 있고 자신감 넘치는 250km였습니다.
딜러에게 키를 건네줄 때 이제 그 기계는 제게 하나의 로망으로 남았고, 환각이 현실에 자리를 양보할 때 10년 된 도요타 터셀이 거기에 있었습니다. 많이 낡은 이 차는 트렁크 덮개에 손가락이 두 개쯤 들어갈 만한 구멍이 두 개나 있었습니다. 비가 오는 날이면 저는 청테잎으로 이 구멍부터 막았습니다. 안 그러면 트렁크가 수영장으로 변하니까요. 잊어버린 적이 있었는데 그 다음날 출근길에 정지하거나 출발하거나 할 때 트렁크 수영장이 출렁거려 멀미가 났습니다. 결국 이 차는 2년 밖에 못쓰게 됩니다.
이 차와 관련한 추억은 아름다운 이탈리아 아가씨와 맺어져 있습니다. 저는 이 차에 그 아가씨를 태우고 수많은 곳을 다녔습니다. 버팔로, 뉴욕, 토론토, 몬트리올 등. 그리고 그 안에서 셀 수 없는 입맞춤을 했습니다. 그 아가씨와 헤어지게 되었을 때 저는 이 차와도 헤어지기로 했습니다. 이 차가 가슴 아픈 이별과 그 아가씨의 울음을 제게 계속 상기시키는 것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운전할 때마다 음료수 병을 건네주기도 하고, 담뱃불을 붙여주기도 하고, 계속 재잘거리며 내 귀를 시끄럽게 하기도 했던 그 아가씨에 대한 기억은 이 차가 사라지며 함께 사라져 갔습니다. 가끔 꿈속에 나타나는 아름다웠던 미소만이 잔류물처럼 나를 새벽에 깨게 합니다. 그러나 그마저도 수 십 년의 세월 속에 스러지고 있습니다. “마음의 상처에는 시간이 의사”라고 말한 사람은 그리스의 위대했던 핀다로스였지요.
그 다음 차는 도요타 캠리. 이 차는 제법 차다운 차였습니다. 데모(demonstration)용으로 1700km를 주행한 차의 키를 기쁜 마음으로 건네받았습니다. 세월이 오래 흘러, 수백 년, 수천 년 흘러 제가 살던 그 마을이 폐허가 되고, 거기 세차장에 어떤 귀신인가가 차를 몰고 들어온다면, 그 귀신은 아마 저의 영혼일 것입니다. 저는 엄청나게 자주 세차를 했습니다. 가는 금줄을 길게 두른 녹색의 캠리는 북미의 강렬한 태양 아래서 비취처럼 반짝였습니다. 눈부시게 아름다웠습니다. 저는 그 차에 티끌 한 점 붙어있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때때로 강의 중에도 주차장을 내려다보기도 했습니다. 거기의 수많은 차 중에서 어떤 차인가가 황금빛 테두리를 두른 구름을 타고 떠올랐습니다. 저의 캠리였습니다.
이 차가 훌륭한 세단이란 사실은 소비자 보고서(consumer report)에서 항상 만점을 받고 또 중고가치(resale value)가 가장 높다는 사실에서도 입증됩니다. 이 차는 우리 두뇌와 합리성에 호소하는 차이지요. 매우 경제성이 높고 단정하니까요. 그러나 이 차는 우리 가슴과 열정에 호소하지는 않습니다. 밋밋하고 평이하고 개성이 없습니다. 규범적이고 단정한 삶을 사는 모범생 같은 차입니다.
저는 이 차를 몰고 국적을 바꾸게 됩니다. 이 차로 나이아가라 다리를 건너 토론토에 정착하게 되니까요. 캐나다! 이 나라는 제게 완전히 신천지였습니다. 제게 그러한 격렬한 정열이 숨겨져 있었다는 사실을 저는 이 나라에서 알게 됩니다. 대부분의 땅에는 도로조차 없습니다. 저는 수많은 비포장 길을 달려 트레킹과 낚시와 캠핑을 다녔습니다. 저는 캐나다에서 친구들도 만들게 되었습니다. 제 차는 때때로 시속 100km도 내지 못했습니다. 네 명의 승객과 낚시의 포획물로 엄청난 하중을 짊어지고 달려야 했으니까요. 이 차는 일 년에 평균 6만km를 달렸습니다. 낚시여행을 가게 되면 왕복 1500km의 주행은 보통이었으니까요. 대견한 이 차는 그 모든 노역을 다 견뎌주었습니다. 차의 모범생! 이것이 캠리입니다. 계속 그대로 살았다면 저는 아마 침대에서 노년을 맞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제가 부딪힌 위험한 순간들이 생명을 부지하기에는 너무 많았으니까요. 암벽에서 떨어지기도 하고, 보트가 전복되기도 하고, 원시림 속에서 길을 잃기도 하고.
저는 제 묘비명에 “직업을 잘못 택한 사람 여기 잠들다”라고 써주기를 요청했습니다. 제 기질은 탐험가, 모험가 등에 어울립니다. 아니면 하다못해 관광 가이드에 어울립니다. 얌전하게 연구하고 가르치는 일은 제 본령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 넓은 캐나다를 온통 쏘다니며 캐나다 물고기들을 잡아댔습니다. 그때에는 삶이 너무도 풍부하고 소란스러워서 시간이 가는 것도 몰랐습니다. 제가 결혼 적령기를 지나 이미 냄새나는 중년에 접어들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던 거지요.
얼마 전에 술을 많이 마신 적이 있습니다. 맥주로 시작해서 산사춘과 소주를 거쳐 위스키에 이르렀습니다. 제가 정신을 잃었던 것 같습니다. 간헐적으로 정신이 나는데, 제가 홀로 네온 사이를 헤매고 있었던 순간이 기억납니다. “밤이 현기증 나게 밝구나” 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리고는 어디엔가 들어가서 또 한잔한 기억이 납니다. 다음 기억은 김포공항입니다. 일원동의 마지막 술집과 김포공항 사이가 기억의 진공상태입니다. 제가 왜 김포공항에 간 걸까요. 저는 추론했습니다. 아마도 택시기사에게 김포공항으로 가자고 했던 것 같습니다. 캐나다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술 마시던 중에 언뜻 들었으니까요. 예전에는 거기서 캐나다로 갔지요. 인천공항이 기억 안 난 것이 천만다행입니다. 거기에는 잠잘 만한 싸구려 모텔이 없으니까요.
캐나다에서 제 인생은 활기와 시끄러움을 노래했습니다. 지금부터 17년 전에 발생했던 일들이지요. 제 차에서는 퀴퀴한 담배냄새와 생선 비린내가 났습니다. 제가 무엇인가를 깔끔하게 유지하는 데에는 소질이 없습니다. 첫 일 년간 그렇게 아꼈던 차가 조금씩 당연한 것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차의 주행거리가 30만km쯤 되었을 때 마침내 귀국이 가능해졌습니다. 한국에서도 먹고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국에서는 한참동안을 차 없이 지냈습니다. 대중교통이 워낙 거미줄 같고 저렴한 것이 차 없이 살기로 결정한 첫 번째 동기였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동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귀국한지 며칠 지나 길을 가다 약간은 이색적인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딱 붙은 두 대의 차 주인들이 각각 자기 차의 엔진소리를 응원 삼아 상대편에게 퍼부어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퍼부어대는 말 중에는 여러 종의 동물의 보통명사들이 섞여있었습니다. 사실 저는 왜 동물에의 유비가 욕이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사람을 ‘개 같은’ 혹은 ‘소 같은’ 놈이라고 말하면 상대편에 대한 모독이 되는 것인지요. 희한한 일입니다. 개와 소가 어째서 그러는지 모르겠습니다. 알고 보면 개와 소 등은 그 품위와 지조와 성실성과 충성에 있어 최고의 품격을 가진 동물들입니다. 어째서 보통의 인간들은 개나 소보다 낫다고 생각할까요? 참 이상한 오만입니다. 사실 어떤 나쁜 사람에게 “개 같은 놈”이라고 말하게 되면 모욕을 당하는 것은 그 ‘놈’이 아니라 그 ‘개’입니다. 개가 들으면 어이없어 할 것 같네요.
아무튼 나의 결론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한국에서 차를 모는 과정 중에 길바닥에서 동물의 보통명사를 상대 면전에 퍼붓는 상황이 반드시 존재한다. 그리고 상대의 눈흘김과 예언적 저주(~할 놈 등의)를 반드시 당하고 퍼붓는 경우가 생긴다. 나는 너무 오랜 외국 생활로 그 상황에 능란하게 대처하지 못한다. 이것은 면허시험장에서도 가르치지 않는다. 이것을 먼저 배우지 않는 한 차를 몰면 안 된다 등등.
제가 차를 사기로 결정한 때는 귀국한지 5년 만이었습니다. 5년간을 차 없이 지낸 것이지요. 나름대로 좋았습니다. 지하철에서 아찔하게 차려입고 머리를 멋지게 틀어 올린 아가씨들을 마음 놓고 감상하기도 하고, 잡상인들에게서 때수건과 이쑤시개를 사기도 하고, 약간은 수상스런 김밥을 사먹기도 하고…. 이러면서 저도 점차로 능란한 한국인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이제 저도 누구 못지않게 동물과 인간을 비유하기도 하고, 저주를 퍼부을 줄도 알게 되고, 양심 없이 끼어들기, 양심 없이 꼬리 물기도 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저는 한국의 국민차인 그랜저 XG를 샀습니다. 2003년의 일입니다. 그 차를 몰고 나간 첫 날, 저는 평생 얻어먹은 욕보다 더 많은 욕을 단 하루에 얻어먹었습니다. 제가 아무리 많은 주행거리의 기록을 가지고 있다한들 그것은 북미에서의 일이었습니다. 한국에서는 그 경험이 오히려 방해가 되었습니다. 한국의 길바닥에는 외국에 있는 모든 것이 있다 해도 양보와 자제는 절대로 없습니다. 저는 모든 차량으로부터 경적소리를 얻어들었고, 창문에 대고 퍼붓는 욕을 얻어먹었습니다. 하루하루의 운전이 공포 속에 지나가기를 한 달여, 저는 마침내 적응하기 시작했습니다. 역시 저는 배달민족의 후예였습니다. 모든 운전자와 대등하게 욕을 해대기 시작했으니까요.
사실 그랜저는 참 좋은 차입니다. 캠리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훌륭한 차입니다. 매끈하고, 부드럽고, 푸근하고, 민감합니다. 저는 이 차와의 드라이빙을 많이 즐겼습니다. 전국을 누볐습니다. 이렇게 5년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비극이 발생했습니다. 엔진이 깨졌답니다! 연료분사노즐 하나가 제 기능을 하지 못했고, 거기서 연료가 액체인 채로 흘러나와 실린더를 채운 끝에 엔진을 깨뜨렸답니다. 저는 어이없고 황당하고 화가 났습니다. 도대체 이런 종류의 고장은 상상도 못했고, 경험은 물론 못했고, 심지어는 누구에게 들어본 적도 없는 종류의 것입니다. 총 430만원이 들었습니다. 엔진을 교체했습니다. 제가 캠리와 비교하며 불평하자 구의동의 정비사는 오히려 내게 화를 냈습니다. 일본차가 얼마나 많이 고장나는지 아느냐고. 그의 말이 맞겠지요. 그러나 나는 캠리나 렉서스의 엔진이 깨졌다는 얘기는 들은 적이 없습니다. 저는 여러분께 조언합니다. 그랜저 살 때에는 엔진 깨지는 것을 조심하라고.
그랜저와는 정이 떨어졌습니다. 저는 여러 선택의 가능성 가운데 고민했습니다. 제네시스를 살까, 벤츠 E클래스를 살까, 렉서스를 살까. 제네시스를 가장 먼저 제거했습니다. 현대차와는 다시 상종하기 싫기 때문입니다. 이제 벤츠와 렉서스 사이에서 고민했습니다. 와중에 이십년 전의 꿈이 불현듯 나의 가슴을 쳤습니다. 그렇다. 포르쉐가 있다. 포르쉐는 3억에 가까운 돈이 듭니다. 제게 이 돈은 없습니다. 포르쉐 중고 사이트를 뒤지기 시작했고, 의기양양하게 한 대를 골라잡아 시험주행을 했습니다.
20년은 긴 세월입니다. 포르쉐는 여전히 같은 포르쉐였지만 제가 변했습니다. 좁고 시끄럽고 불편하고. 악셀레이터를 밟자 포르쉐는 폭발하듯이 뛰쳐나갔습니다. 한심하게도 악셀을 밟은 나 자신이 화들짝 놀랐습니다. 20년의 세월이 흘러갔고, 저는 어느덧 순화되고 길들여진 것입니다. 제 심장은 그 폭발을 견뎌낼 수가 없게 변한 것이지요. 제 정열과 패기는 조금씩 잠들어갔고 이제는 영원히 잠든 것 같습니다. 소란스러움과 활기 보다는 평온과 고요가 더 좋게 느껴지는 나이가 된 것일까요. 젊은 시절의 정열을 다시 깨울 수는 없는 것일까요. 모든 것에 무관심해지고 꿈조차 품지 않는 노인이 되어가는 것일까요.
노년이 생각만큼 나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젊었던 시절의 동요와 정념은 모두 사라지고 포기와 고요가 나의 삶을 지배하게 되겠지요. 날렵하고 매끈한, 처녀의 엉덩이 같은 포르쉐 보다는 펑퍼짐한 아줌마 몸매의 세단을 더욱 좋아하게 될 것이고. 저는 오늘도 고민하고 있습니다. 젊었던 시절의 정열을 다시 깨워 포르쉐를 시도해볼까, 아니면 이제 조용히 스러지는 노인이 되어 얌전하게 렉서스를 몰고 다닐까. 젊은 시절이 다시 깨워질 수 있을까? 20년간 순화되어진 나의 거칠었던 정열들, 코카서스와 시베리아의 모든 눈을 다 갖다 뿌려도 꺼지지 않을 것 같던 내 마음의 불길들. 젊었던 시절의 그 불길들.
제가 PX25 앰프를 다시 시도해보기로 한 내면적 동기는 아마도 노인이 되어가는 내 마음에 기초한 것 같습니다. 저는 젊었던 시절에는 사실 이 관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지나치게 두루뭉술하고 뭉게구름 같이 펑퍼짐하고. 젊었을 때에는 무엇인가 좀 까칠한 개성이 있는 관이 좋았습니다. 독일계열 관들은 한 성질 합니다. 매섭고, 극단적인 해상도를 지니고, 거의 아슬아슬하다고 할 만한 고역을 지닌 독일계열의 3극관들은 제 젊은 시절에 엄청난 호소력을 지녔습니다. 저는 RE604, Ad1, Ed, Da 등의 관으로 증폭되는 소리를 좋아했습니다. Ed로 들은 바이올린의 고역은 정말이지 그 아슬아슬함이 “벼랑 위에 핀 꽃”이었습니다.
제가 PX25 관의 소리를 언제, 왜 좋아하게 되었는지는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이 관이 그리워졌습니다. 아마도 이것은 제가 늙어가고 있다는 증거 같습니다. 그 호방하고 순박하고 부드러운 푸근함이 좋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거기에 더해 제가 여태까지 들은 PX25 관의 앰프는 전부 싸구려들이었습니다. 사실 Decca에서 만든 PX4와 PX25 앰프는 형편없는 소리를 냅니다. 온통 혼란스럽고, 해상도는 거의 방열관 수준이고 정신없이 분주한 분위기를 냅니다. 아마도 그 출력트랜스가 싸구려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당연한 노릇입니다. 프로장비도 아닌 앰프에 비싼 트랜스를 쓰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제가 들어본 적이 있었던 자작품의 PX25 앰프들은 비슷한 수준입니다. 보통 MHL4나 ML4로 드라이브하고 그럭저럭하는 출력트랜스를 사용한, 싸구려로 만들어진 싱글 앰프들이지요. 이때 PX25는 더할 수 없이 멍청한 소리를 냅니다. 자작하는 소규모 공방의 엔지니어들이 반성 좀 해야 합니다. 엔지니어들의 그 드높은 자부심과 그 질 낮은 앰프와의 대비는 어떻게 설명할는지.
저는 PX25의 가능성이 그것 밖에 안 된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계획을 세웠습니다. STC사의 3A/108A로 초단을 삼고, 3A/110A로 드라이브하고 페란티(Ferranti)사의 AF3 인터스테이지를 사용해보자. 그리고 출력트랜스는 해상도가 가장 선명하다고 하는 이소폰-클랑필름을 써보기도 하자. 계획과 행동이 거의 동시에 진행되는 것으로 보아 오디오에 관한한 제가 완전히 늙은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당장 나의 엔지니어에게 요청했습니다. “만듭시다!”
여러분, 어떨 것 같습니까? 완전히 3극 직렬관 만으로 구동되는 PX25 앰프, 최고급으로 일컬어지는 트랜스들과 WE의 4각 오일콘덴서로 만들어진 PX25 앰프는 어떤 소리를 낼 것 같습니까? 이 앰프는 차로 말하면 이를테면 로터스 에스프리입니다. 호방하고 시원스러움은 여전합니다. 그 활기와 씩씩함도 여전합니다. 그리고 PX25 특유의 멍청함은 모두 사라집니다. 안개는 걷혔습니다. 감미롭고, 부드러우면서도 호방하고, 시원스럽고, 스케일이 큰 음이 지금 저의 탄노이에서 쏟아지고 있습니다. 특히 이 싱글 앰프에서 쏟아지는 풍부하고 선명한 저음은 놀라울 정도입니다. 몇 명이 저의 집에서 감상했고 모두가 그 힘차면서도 부드러운 소리에 놀랐습니다. 이 앰프로 베토벤의 4번 교향곡 1악장을 들었을 때에는 제 가슴이 방망이질 치고 있었습니다. 그 호쾌함. 방금 머리 위에서 깨진 천둥과 같은 그 강력함.
저는 PX25 ST, PX25 Balloon, PP5/400 등을 차례로 교체해보았습니다. 슬프게도 황금이 만능이더군요. 비싼 관이 좋은 소리를 냈습니다. ST관은 어딘가 평이하고 흔한 느낌을 주는 음을 냅니다. 매우 평범하고 단조롭고 대중적인 느낌을 줍니다. Balloon관은 품위가 있고 스케일도 더 큽니다. 확실히 더 고전적이고 풍부한 소리를 내고, 어딘가 배음도 더 두텁다는 느낌을 줍니다. PP5/400은 관 중의 관이고 모든 출력관의 로제타스톤이라고 할 만합니다. 정숙하고 깨끗하고 단정하고 매끈합니다. 활기는 PX25에 미치지 못합니다. 좀 여성적이라고나 할까요. 그러나 전체적인 분위기는 고요하고 아름답습니다. 마치 와또나 베르메르의 그림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지요.
중요한 사실은 정류관이 주는 차이가 출력관이 주는 차이보다 더 크다는 것입니다. 저는 U52와 274B 각인관을 서로 교체하며 감상해보았습니다. 274B 각인관이 왜 좋은 관인가가 5분도 안되어 입증됩니다. U52로 들으면 어딘가 음이 억지로 끌려나오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확실히 274B 각인관은 우수한 관입니다. 음이 시원스럽고 깔끔하면서도 매끈해집니다.
이것이 제가 천 수 백만 원을 파워앰프 하나에 쏟아 부으며 얻게 된 결론입니다. PX25는 정말 훌륭한 관입니다. 단, 반드시 3극 직렬관으로 드라이브하라는 충고를 하고 싶습니다. 그래야 PX25가 얼마만큼 훌륭한 관인가가 입증됩니다. 사실 초단관과 드라이브관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어설픈 엔지니어들은 초단관과 드라이브관에 3극 직렬관을 쓰기를 꺼립니다. 노이즈를 해결할 자신이 없는 것이지요. 제가 아는 어떤 동호인은 101F와 216A로 드라이브한 205D 앰프를 어떤 엔지니어에게 제작 의뢰했는데 험이 반입니다. 그 엔지니어는 거의 아우라에 싸인 자부심을 가지고 계신 듯한데 실력은 그 모양입니다. 많은 엔지니어들은 자기 실력의 한계를 먼저 인정하고 노력하기 보다는 다른 길을 택합니다. 직렬관으로 드라이브하면 저음이 안 나온다는 것입니다. 저는 도대체 이해가 안갑니다. 이론적으로 임상적으로도 이해가 안갑니다. 제 PX25 앰프가 쏟아내는 저음은 엄청날 뿐만 아니라 아름답기까지 합니다. 그러니 관을 탓하기보다 먼저 스스로를 거울에 비춰보기 바랍니다.
다른 조언을 하나 더 하겠습니다. 파워앰프에서 인터스테이지 트랜스의 질은 결정적이라는 것입니다. 제게는 7, 8조의 인터스테이지가 있습니다. 저는 모든 트랜스를 번갈아 보며 시험해보았습니다. 끈질기고 극성맞은 오도팔입니다. 트랜스의 종류에 따른 그 엄청난 음의 변화에 저는 정말 놀랐습니다. 페란티 인터스테이지가 음 자체의 질에 있어서 최고입니다. 사실 과장을 좀 하자면 경악할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다음으로 WE의 Acme가 좋았습니다. Acme는 특히 WE 고유의 그 촉촉하게 화사한 음을 냈습니다. 그리고 다른 몇 개의 탁월한 인터스테이지들을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저의 이야기는 뜻하지 않은 방향으로 흐르게 됩니다! 저의 자동차와 앰프에 관련한 최근의 경험과 인식이 여기에 그쳤다면 어쩐지 좀 밋밋한 이야기였을 텐데 제 마음에서 극적인 반전이 일어났습니다. 뒤늦은 반항이 일어난 것입니다.
자신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았습니다. “이제 내가 52세이다. 이제 노년의 입구에 있다. 아무리 말해도 중년은 확실히 지났고 장년도 저물어가고 있다. 무기력한 회색의 노년이 기다리고 있다. 내 생물학적 나이는 그렇다고 말하고 있다. 노년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 젊은 시절은 불안과 동요의 시절이었다. 나이든 사람들의 평온과 안정을 얼마나 부러워했던가. 빨리 나이 들고 싶었었다. 이제 내가 젊은 시절에 요구했던 그 안정에 접근하고 있다. 그러나 안정과 안식은 평온이라기보다는 체념이고 포기이다. 이것이 내가 바랐던 노년이었는가. 나는 이러한 내 노년을 수용하고자 하는가.”
제 마음 속에서 무엇인가 불만스러운 외침이 가냘프게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나이 들어가며 자꾸만 편해지려하고 있고 까다로워지고 있습니다. 이제 조금만 불편해도 잠을 자지 못하고 음식이 조금만 거칠어도 먹고자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까다로운 저를 “나이 들었으니까” 하고는 합리화해왔습니다. 주위에서도 그렇게 말하며 저의 합리화를 도와줍니다. “당신의 젊은 시절은 충분히 고생스러웠고 당신은 삶의 도전에 비교적 성실하게 응해왔다. 그러니 이제 좀 더 편안해져도 좋은 일 아니냐.”
모든 상황이 저의 노년을 당연한 것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젊은 시절에는 아무 곳에서나 숙면을 취할 수 있었고 삶은 감자 두 개와 우유 한 컵은 충분히 좋은 음식이었습니다. 이제는 이불이 조금만 접혀있어도 잠을 잘 수 없고 그럴듯하고 성의 있게 차려진 식사에나 만족합니다.
제가 포르쉐를 포기한 동기는 이것이었습니다. 평온과 안식이 노년의 당연한 보상이라는 합리화가 정열과 활기에의 도전을 꺾은 것이지요. 제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었습니다. 노년은 세월에서 보다는 마음에서 먼저 옵니다. 편안함과 사치스러움에의 요구가 노년보다 선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것을 “늙어가니까”라며 합리화합니다. 제 자신을 정직하게 바라보았을 때 거기에는 이기적이고 안일한 한 늙기 시작하는 역겨운 사람, 교수라는 그럴듯한 직함을 가진 한심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저는 종로 3가의 지하철역으로 갔습니다. 노숙자의 경험도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며. 마음먹기였습니다. 서너 시간의 잠이 꿀맛 같았습니다. 라면박스도 훌륭한 쿠션이었고 신문지도 따뜻한 이불이었습니다. 노련한 옆의 노숙자가 제게 말을 건넸습니다. “언제 나왔수? 이 생활 자꾸 하지 마시오. 뭐라도 일자리를 구하시오. 습관 되면 여기가 당신 집이 되는 거요.”
저는 가끔 노숙자 사이에서 잠을 청하려 합니다. 생물학적으로 늙은 것이야 어쩔 수 없지만 안일과 까다로움 속에서 스스로 노년을 청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결국 포르쉐를 샀습니다. 세단을 포기했습니다. 검은 빛을 번쩍이며 품격과 성공을 상징하는 벤츠는 훌륭하지만 저는 제 평생 한 번도 그 끝까지 실현된 적이 없었던 제 마음의 불길을 밀고 나가기로 했습니다. 엊그제는 영동 고속도로에서 시속 220km까지 달려봤습니다. 엄청난 굉음과 강력함! 위험하다고 말하지만 침대에서 앓다가 죽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주위 사람들이 자못 놀라고 있습니다. 얌전하고 분별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나 봅니다. 제가 살아온 세월들은 그러했습니다. 제 자신으로 살기 보다는 주위 사람들과 사회가 원하는 양식으로 살아온 것이지요. 그러나 제 자신의 마음속에는 학자나 작가 보다는 모험가와 탐험가의 영혼이 있습니다. 제가 시도했던 모든 모험은 주위의 만류로 항상 좌절되었습니다. 암벽 등반은 인수봉에서의 단 한 번의 추락으로 금지되었고, 오지 여행은 출발조차 못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주위가 요청하는 이러한 삶을 살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저는 직업을 잘못 택한 사람입니다. 관광 안내원이었더라면 차라리 훨씬 행복했을 것입니다. 그랬더라면 저는 캐나다의 도로도 없는 호수나 아프리카나 아마존의 어떤 오지에 이르는 새로운 루트를 개척했을 것입니다.
새로운 앰프를 다시 제작하려 합니다. 젊은 시절에 선호했던 그 음을 다시 한 번 추구해 보고자 합니다. Ba를 초관, Ca를 드라이브관, Da를 출력관으로 하는 파워앰프를 만들고자 합니다. 원래는 PX25와 비슷한 성향의 Da30 앰프를 만들려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제가 60이 넘었을 때 다시 시도하겠습니다. 이번에는 날카롭고 매서운 해상도를 가지는 Da 앰프를 만들겠습니다.
제가 10여 년의 유학생활 끝에 학위를 받고 정착했을 당시에 제 꼴은 이와 같았습니다. 제 실력과 학위는 한국의 대학에서 근무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자격요건이었나 봅니다. 도대체 받아주는 대학이 한 군데도 없었고 결국 그 오만하고 경박한 미국인들 사이에서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시카고 대학. 그 도시는 인간이 살지 말아야 할 첫 번째 도시 중 하나입니다. 겨울에는 엄청난 바람이 불어대고 봄날은 온타리오 호수에서 솟아오르는 두터운 안개로 덮입니다. 공업도시이다 보니 주거환경도 형편없습니다. 거기에 근무했던 시간은 지금은 가끔 꿈에서 나타납니다. 저는 몸서리치며 깨지요.
더 이상 교수 기숙사에 있기가 싫었습니다. 그 퀴퀴한 마리화나 냄새를 더 맡으면 죽을 것 같았습니다. 나가기로 결정했는데 자동차를 사야했습니다. 저는 이미 결정했습니다. 10년쯤 된 도요타나 혼다의 썩은 차를 사기로. 새 차일 때 어떤 매력도 없는 일본차들은 중고가 되었을 때 자못 쓸모 있는 차가 됩니다. 견뎌주니까요.
중고차 매장들을 이리저리 전전했습니다. 제 발이 멈춘 곳은 일본차 매장이 아니라 독일차 매장이었습니다. 노천에 중고 포르쉐 한 대가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황금의 밝은 태양빛을 배경으로 그 붉은 색 ‘꿈’은 언제라도 폭발하며 뛰쳐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가난했습니다. 꿈 밖에 가진 것 없는 가난한 젊은이였습니다. 그러나 환각과 몽상에 잠길 수는 있었습니다. 딜러에게 요청했습니다. 테스트 드라이브를 해보겠다고. 저 자신이 그 차를 감당할 만큼 부자라는 환각을 제 자신에게 부과했습니다. 단 한 시간. 짧은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충분한 시간이었습니다. 그 자동차가 얼마만큼 매력적인 기계인가를 알기에는 그 한 시간으로 충분했습니다. 그 차는 기계공학이 극단에 이르면 어떤 쾌락을 제공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었습니다. 저는 평소에도 악셀레이터의 존재 이유가 “바닥까지 밟히기 위해서”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수줍어하고 소극적인 외피를 벗기면 열정과 소란스러움으로 꽉 찬 저의 내면이 있습니다. 악셀레이터를 바닥까지 밟자 그 차는 달리는 것이 아니라 폭발하는 것이었습니다. 250km/h. 이 속도가 정말 가능한 속도였습니다. 불안하고 동요하는 250km가 아니가 안정감 있고 자신감 넘치는 250km였습니다.
딜러에게 키를 건네줄 때 이제 그 기계는 제게 하나의 로망으로 남았고, 환각이 현실에 자리를 양보할 때 10년 된 도요타 터셀이 거기에 있었습니다. 많이 낡은 이 차는 트렁크 덮개에 손가락이 두 개쯤 들어갈 만한 구멍이 두 개나 있었습니다. 비가 오는 날이면 저는 청테잎으로 이 구멍부터 막았습니다. 안 그러면 트렁크가 수영장으로 변하니까요. 잊어버린 적이 있었는데 그 다음날 출근길에 정지하거나 출발하거나 할 때 트렁크 수영장이 출렁거려 멀미가 났습니다. 결국 이 차는 2년 밖에 못쓰게 됩니다.
이 차와 관련한 추억은 아름다운 이탈리아 아가씨와 맺어져 있습니다. 저는 이 차에 그 아가씨를 태우고 수많은 곳을 다녔습니다. 버팔로, 뉴욕, 토론토, 몬트리올 등. 그리고 그 안에서 셀 수 없는 입맞춤을 했습니다. 그 아가씨와 헤어지게 되었을 때 저는 이 차와도 헤어지기로 했습니다. 이 차가 가슴 아픈 이별과 그 아가씨의 울음을 제게 계속 상기시키는 것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운전할 때마다 음료수 병을 건네주기도 하고, 담뱃불을 붙여주기도 하고, 계속 재잘거리며 내 귀를 시끄럽게 하기도 했던 그 아가씨에 대한 기억은 이 차가 사라지며 함께 사라져 갔습니다. 가끔 꿈속에 나타나는 아름다웠던 미소만이 잔류물처럼 나를 새벽에 깨게 합니다. 그러나 그마저도 수 십 년의 세월 속에 스러지고 있습니다. “마음의 상처에는 시간이 의사”라고 말한 사람은 그리스의 위대했던 핀다로스였지요.
그 다음 차는 도요타 캠리. 이 차는 제법 차다운 차였습니다. 데모(demonstration)용으로 1700km를 주행한 차의 키를 기쁜 마음으로 건네받았습니다. 세월이 오래 흘러, 수백 년, 수천 년 흘러 제가 살던 그 마을이 폐허가 되고, 거기 세차장에 어떤 귀신인가가 차를 몰고 들어온다면, 그 귀신은 아마 저의 영혼일 것입니다. 저는 엄청나게 자주 세차를 했습니다. 가는 금줄을 길게 두른 녹색의 캠리는 북미의 강렬한 태양 아래서 비취처럼 반짝였습니다. 눈부시게 아름다웠습니다. 저는 그 차에 티끌 한 점 붙어있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때때로 강의 중에도 주차장을 내려다보기도 했습니다. 거기의 수많은 차 중에서 어떤 차인가가 황금빛 테두리를 두른 구름을 타고 떠올랐습니다. 저의 캠리였습니다.
이 차가 훌륭한 세단이란 사실은 소비자 보고서(consumer report)에서 항상 만점을 받고 또 중고가치(resale value)가 가장 높다는 사실에서도 입증됩니다. 이 차는 우리 두뇌와 합리성에 호소하는 차이지요. 매우 경제성이 높고 단정하니까요. 그러나 이 차는 우리 가슴과 열정에 호소하지는 않습니다. 밋밋하고 평이하고 개성이 없습니다. 규범적이고 단정한 삶을 사는 모범생 같은 차입니다.
저는 이 차를 몰고 국적을 바꾸게 됩니다. 이 차로 나이아가라 다리를 건너 토론토에 정착하게 되니까요. 캐나다! 이 나라는 제게 완전히 신천지였습니다. 제게 그러한 격렬한 정열이 숨겨져 있었다는 사실을 저는 이 나라에서 알게 됩니다. 대부분의 땅에는 도로조차 없습니다. 저는 수많은 비포장 길을 달려 트레킹과 낚시와 캠핑을 다녔습니다. 저는 캐나다에서 친구들도 만들게 되었습니다. 제 차는 때때로 시속 100km도 내지 못했습니다. 네 명의 승객과 낚시의 포획물로 엄청난 하중을 짊어지고 달려야 했으니까요. 이 차는 일 년에 평균 6만km를 달렸습니다. 낚시여행을 가게 되면 왕복 1500km의 주행은 보통이었으니까요. 대견한 이 차는 그 모든 노역을 다 견뎌주었습니다. 차의 모범생! 이것이 캠리입니다. 계속 그대로 살았다면 저는 아마 침대에서 노년을 맞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제가 부딪힌 위험한 순간들이 생명을 부지하기에는 너무 많았으니까요. 암벽에서 떨어지기도 하고, 보트가 전복되기도 하고, 원시림 속에서 길을 잃기도 하고.
저는 제 묘비명에 “직업을 잘못 택한 사람 여기 잠들다”라고 써주기를 요청했습니다. 제 기질은 탐험가, 모험가 등에 어울립니다. 아니면 하다못해 관광 가이드에 어울립니다. 얌전하게 연구하고 가르치는 일은 제 본령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 넓은 캐나다를 온통 쏘다니며 캐나다 물고기들을 잡아댔습니다. 그때에는 삶이 너무도 풍부하고 소란스러워서 시간이 가는 것도 몰랐습니다. 제가 결혼 적령기를 지나 이미 냄새나는 중년에 접어들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던 거지요.
얼마 전에 술을 많이 마신 적이 있습니다. 맥주로 시작해서 산사춘과 소주를 거쳐 위스키에 이르렀습니다. 제가 정신을 잃었던 것 같습니다. 간헐적으로 정신이 나는데, 제가 홀로 네온 사이를 헤매고 있었던 순간이 기억납니다. “밤이 현기증 나게 밝구나” 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리고는 어디엔가 들어가서 또 한잔한 기억이 납니다. 다음 기억은 김포공항입니다. 일원동의 마지막 술집과 김포공항 사이가 기억의 진공상태입니다. 제가 왜 김포공항에 간 걸까요. 저는 추론했습니다. 아마도 택시기사에게 김포공항으로 가자고 했던 것 같습니다. 캐나다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술 마시던 중에 언뜻 들었으니까요. 예전에는 거기서 캐나다로 갔지요. 인천공항이 기억 안 난 것이 천만다행입니다. 거기에는 잠잘 만한 싸구려 모텔이 없으니까요.
캐나다에서 제 인생은 활기와 시끄러움을 노래했습니다. 지금부터 17년 전에 발생했던 일들이지요. 제 차에서는 퀴퀴한 담배냄새와 생선 비린내가 났습니다. 제가 무엇인가를 깔끔하게 유지하는 데에는 소질이 없습니다. 첫 일 년간 그렇게 아꼈던 차가 조금씩 당연한 것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차의 주행거리가 30만km쯤 되었을 때 마침내 귀국이 가능해졌습니다. 한국에서도 먹고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국에서는 한참동안을 차 없이 지냈습니다. 대중교통이 워낙 거미줄 같고 저렴한 것이 차 없이 살기로 결정한 첫 번째 동기였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동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귀국한지 며칠 지나 길을 가다 약간은 이색적인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딱 붙은 두 대의 차 주인들이 각각 자기 차의 엔진소리를 응원 삼아 상대편에게 퍼부어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퍼부어대는 말 중에는 여러 종의 동물의 보통명사들이 섞여있었습니다. 사실 저는 왜 동물에의 유비가 욕이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사람을 ‘개 같은’ 혹은 ‘소 같은’ 놈이라고 말하면 상대편에 대한 모독이 되는 것인지요. 희한한 일입니다. 개와 소가 어째서 그러는지 모르겠습니다. 알고 보면 개와 소 등은 그 품위와 지조와 성실성과 충성에 있어 최고의 품격을 가진 동물들입니다. 어째서 보통의 인간들은 개나 소보다 낫다고 생각할까요? 참 이상한 오만입니다. 사실 어떤 나쁜 사람에게 “개 같은 놈”이라고 말하게 되면 모욕을 당하는 것은 그 ‘놈’이 아니라 그 ‘개’입니다. 개가 들으면 어이없어 할 것 같네요.
아무튼 나의 결론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한국에서 차를 모는 과정 중에 길바닥에서 동물의 보통명사를 상대 면전에 퍼붓는 상황이 반드시 존재한다. 그리고 상대의 눈흘김과 예언적 저주(~할 놈 등의)를 반드시 당하고 퍼붓는 경우가 생긴다. 나는 너무 오랜 외국 생활로 그 상황에 능란하게 대처하지 못한다. 이것은 면허시험장에서도 가르치지 않는다. 이것을 먼저 배우지 않는 한 차를 몰면 안 된다 등등.
제가 차를 사기로 결정한 때는 귀국한지 5년 만이었습니다. 5년간을 차 없이 지낸 것이지요. 나름대로 좋았습니다. 지하철에서 아찔하게 차려입고 머리를 멋지게 틀어 올린 아가씨들을 마음 놓고 감상하기도 하고, 잡상인들에게서 때수건과 이쑤시개를 사기도 하고, 약간은 수상스런 김밥을 사먹기도 하고…. 이러면서 저도 점차로 능란한 한국인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이제 저도 누구 못지않게 동물과 인간을 비유하기도 하고, 저주를 퍼부을 줄도 알게 되고, 양심 없이 끼어들기, 양심 없이 꼬리 물기도 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저는 한국의 국민차인 그랜저 XG를 샀습니다. 2003년의 일입니다. 그 차를 몰고 나간 첫 날, 저는 평생 얻어먹은 욕보다 더 많은 욕을 단 하루에 얻어먹었습니다. 제가 아무리 많은 주행거리의 기록을 가지고 있다한들 그것은 북미에서의 일이었습니다. 한국에서는 그 경험이 오히려 방해가 되었습니다. 한국의 길바닥에는 외국에 있는 모든 것이 있다 해도 양보와 자제는 절대로 없습니다. 저는 모든 차량으로부터 경적소리를 얻어들었고, 창문에 대고 퍼붓는 욕을 얻어먹었습니다. 하루하루의 운전이 공포 속에 지나가기를 한 달여, 저는 마침내 적응하기 시작했습니다. 역시 저는 배달민족의 후예였습니다. 모든 운전자와 대등하게 욕을 해대기 시작했으니까요.
사실 그랜저는 참 좋은 차입니다. 캠리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훌륭한 차입니다. 매끈하고, 부드럽고, 푸근하고, 민감합니다. 저는 이 차와의 드라이빙을 많이 즐겼습니다. 전국을 누볐습니다. 이렇게 5년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비극이 발생했습니다. 엔진이 깨졌답니다! 연료분사노즐 하나가 제 기능을 하지 못했고, 거기서 연료가 액체인 채로 흘러나와 실린더를 채운 끝에 엔진을 깨뜨렸답니다. 저는 어이없고 황당하고 화가 났습니다. 도대체 이런 종류의 고장은 상상도 못했고, 경험은 물론 못했고, 심지어는 누구에게 들어본 적도 없는 종류의 것입니다. 총 430만원이 들었습니다. 엔진을 교체했습니다. 제가 캠리와 비교하며 불평하자 구의동의 정비사는 오히려 내게 화를 냈습니다. 일본차가 얼마나 많이 고장나는지 아느냐고. 그의 말이 맞겠지요. 그러나 나는 캠리나 렉서스의 엔진이 깨졌다는 얘기는 들은 적이 없습니다. 저는 여러분께 조언합니다. 그랜저 살 때에는 엔진 깨지는 것을 조심하라고.
그랜저와는 정이 떨어졌습니다. 저는 여러 선택의 가능성 가운데 고민했습니다. 제네시스를 살까, 벤츠 E클래스를 살까, 렉서스를 살까. 제네시스를 가장 먼저 제거했습니다. 현대차와는 다시 상종하기 싫기 때문입니다. 이제 벤츠와 렉서스 사이에서 고민했습니다. 와중에 이십년 전의 꿈이 불현듯 나의 가슴을 쳤습니다. 그렇다. 포르쉐가 있다. 포르쉐는 3억에 가까운 돈이 듭니다. 제게 이 돈은 없습니다. 포르쉐 중고 사이트를 뒤지기 시작했고, 의기양양하게 한 대를 골라잡아 시험주행을 했습니다.
20년은 긴 세월입니다. 포르쉐는 여전히 같은 포르쉐였지만 제가 변했습니다. 좁고 시끄럽고 불편하고. 악셀레이터를 밟자 포르쉐는 폭발하듯이 뛰쳐나갔습니다. 한심하게도 악셀을 밟은 나 자신이 화들짝 놀랐습니다. 20년의 세월이 흘러갔고, 저는 어느덧 순화되고 길들여진 것입니다. 제 심장은 그 폭발을 견뎌낼 수가 없게 변한 것이지요. 제 정열과 패기는 조금씩 잠들어갔고 이제는 영원히 잠든 것 같습니다. 소란스러움과 활기 보다는 평온과 고요가 더 좋게 느껴지는 나이가 된 것일까요. 젊은 시절의 정열을 다시 깨울 수는 없는 것일까요. 모든 것에 무관심해지고 꿈조차 품지 않는 노인이 되어가는 것일까요.
노년이 생각만큼 나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젊었던 시절의 동요와 정념은 모두 사라지고 포기와 고요가 나의 삶을 지배하게 되겠지요. 날렵하고 매끈한, 처녀의 엉덩이 같은 포르쉐 보다는 펑퍼짐한 아줌마 몸매의 세단을 더욱 좋아하게 될 것이고. 저는 오늘도 고민하고 있습니다. 젊었던 시절의 정열을 다시 깨워 포르쉐를 시도해볼까, 아니면 이제 조용히 스러지는 노인이 되어 얌전하게 렉서스를 몰고 다닐까. 젊은 시절이 다시 깨워질 수 있을까? 20년간 순화되어진 나의 거칠었던 정열들, 코카서스와 시베리아의 모든 눈을 다 갖다 뿌려도 꺼지지 않을 것 같던 내 마음의 불길들. 젊었던 시절의 그 불길들.
제가 PX25 앰프를 다시 시도해보기로 한 내면적 동기는 아마도 노인이 되어가는 내 마음에 기초한 것 같습니다. 저는 젊었던 시절에는 사실 이 관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지나치게 두루뭉술하고 뭉게구름 같이 펑퍼짐하고. 젊었을 때에는 무엇인가 좀 까칠한 개성이 있는 관이 좋았습니다. 독일계열 관들은 한 성질 합니다. 매섭고, 극단적인 해상도를 지니고, 거의 아슬아슬하다고 할 만한 고역을 지닌 독일계열의 3극관들은 제 젊은 시절에 엄청난 호소력을 지녔습니다. 저는 RE604, Ad1, Ed, Da 등의 관으로 증폭되는 소리를 좋아했습니다. Ed로 들은 바이올린의 고역은 정말이지 그 아슬아슬함이 “벼랑 위에 핀 꽃”이었습니다.
제가 PX25 관의 소리를 언제, 왜 좋아하게 되었는지는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이 관이 그리워졌습니다. 아마도 이것은 제가 늙어가고 있다는 증거 같습니다. 그 호방하고 순박하고 부드러운 푸근함이 좋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거기에 더해 제가 여태까지 들은 PX25 관의 앰프는 전부 싸구려들이었습니다. 사실 Decca에서 만든 PX4와 PX25 앰프는 형편없는 소리를 냅니다. 온통 혼란스럽고, 해상도는 거의 방열관 수준이고 정신없이 분주한 분위기를 냅니다. 아마도 그 출력트랜스가 싸구려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당연한 노릇입니다. 프로장비도 아닌 앰프에 비싼 트랜스를 쓰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제가 들어본 적이 있었던 자작품의 PX25 앰프들은 비슷한 수준입니다. 보통 MHL4나 ML4로 드라이브하고 그럭저럭하는 출력트랜스를 사용한, 싸구려로 만들어진 싱글 앰프들이지요. 이때 PX25는 더할 수 없이 멍청한 소리를 냅니다. 자작하는 소규모 공방의 엔지니어들이 반성 좀 해야 합니다. 엔지니어들의 그 드높은 자부심과 그 질 낮은 앰프와의 대비는 어떻게 설명할는지.
저는 PX25의 가능성이 그것 밖에 안 된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계획을 세웠습니다. STC사의 3A/108A로 초단을 삼고, 3A/110A로 드라이브하고 페란티(Ferranti)사의 AF3 인터스테이지를 사용해보자. 그리고 출력트랜스는 해상도가 가장 선명하다고 하는 이소폰-클랑필름을 써보기도 하자. 계획과 행동이 거의 동시에 진행되는 것으로 보아 오디오에 관한한 제가 완전히 늙은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당장 나의 엔지니어에게 요청했습니다. “만듭시다!”
여러분, 어떨 것 같습니까? 완전히 3극 직렬관 만으로 구동되는 PX25 앰프, 최고급으로 일컬어지는 트랜스들과 WE의 4각 오일콘덴서로 만들어진 PX25 앰프는 어떤 소리를 낼 것 같습니까? 이 앰프는 차로 말하면 이를테면 로터스 에스프리입니다. 호방하고 시원스러움은 여전합니다. 그 활기와 씩씩함도 여전합니다. 그리고 PX25 특유의 멍청함은 모두 사라집니다. 안개는 걷혔습니다. 감미롭고, 부드러우면서도 호방하고, 시원스럽고, 스케일이 큰 음이 지금 저의 탄노이에서 쏟아지고 있습니다. 특히 이 싱글 앰프에서 쏟아지는 풍부하고 선명한 저음은 놀라울 정도입니다. 몇 명이 저의 집에서 감상했고 모두가 그 힘차면서도 부드러운 소리에 놀랐습니다. 이 앰프로 베토벤의 4번 교향곡 1악장을 들었을 때에는 제 가슴이 방망이질 치고 있었습니다. 그 호쾌함. 방금 머리 위에서 깨진 천둥과 같은 그 강력함.
저는 PX25 ST, PX25 Balloon, PP5/400 등을 차례로 교체해보았습니다. 슬프게도 황금이 만능이더군요. 비싼 관이 좋은 소리를 냈습니다. ST관은 어딘가 평이하고 흔한 느낌을 주는 음을 냅니다. 매우 평범하고 단조롭고 대중적인 느낌을 줍니다. Balloon관은 품위가 있고 스케일도 더 큽니다. 확실히 더 고전적이고 풍부한 소리를 내고, 어딘가 배음도 더 두텁다는 느낌을 줍니다. PP5/400은 관 중의 관이고 모든 출력관의 로제타스톤이라고 할 만합니다. 정숙하고 깨끗하고 단정하고 매끈합니다. 활기는 PX25에 미치지 못합니다. 좀 여성적이라고나 할까요. 그러나 전체적인 분위기는 고요하고 아름답습니다. 마치 와또나 베르메르의 그림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지요.
중요한 사실은 정류관이 주는 차이가 출력관이 주는 차이보다 더 크다는 것입니다. 저는 U52와 274B 각인관을 서로 교체하며 감상해보았습니다. 274B 각인관이 왜 좋은 관인가가 5분도 안되어 입증됩니다. U52로 들으면 어딘가 음이 억지로 끌려나오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확실히 274B 각인관은 우수한 관입니다. 음이 시원스럽고 깔끔하면서도 매끈해집니다.
이것이 제가 천 수 백만 원을 파워앰프 하나에 쏟아 부으며 얻게 된 결론입니다. PX25는 정말 훌륭한 관입니다. 단, 반드시 3극 직렬관으로 드라이브하라는 충고를 하고 싶습니다. 그래야 PX25가 얼마만큼 훌륭한 관인가가 입증됩니다. 사실 초단관과 드라이브관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어설픈 엔지니어들은 초단관과 드라이브관에 3극 직렬관을 쓰기를 꺼립니다. 노이즈를 해결할 자신이 없는 것이지요. 제가 아는 어떤 동호인은 101F와 216A로 드라이브한 205D 앰프를 어떤 엔지니어에게 제작 의뢰했는데 험이 반입니다. 그 엔지니어는 거의 아우라에 싸인 자부심을 가지고 계신 듯한데 실력은 그 모양입니다. 많은 엔지니어들은 자기 실력의 한계를 먼저 인정하고 노력하기 보다는 다른 길을 택합니다. 직렬관으로 드라이브하면 저음이 안 나온다는 것입니다. 저는 도대체 이해가 안갑니다. 이론적으로 임상적으로도 이해가 안갑니다. 제 PX25 앰프가 쏟아내는 저음은 엄청날 뿐만 아니라 아름답기까지 합니다. 그러니 관을 탓하기보다 먼저 스스로를 거울에 비춰보기 바랍니다.
다른 조언을 하나 더 하겠습니다. 파워앰프에서 인터스테이지 트랜스의 질은 결정적이라는 것입니다. 제게는 7, 8조의 인터스테이지가 있습니다. 저는 모든 트랜스를 번갈아 보며 시험해보았습니다. 끈질기고 극성맞은 오도팔입니다. 트랜스의 종류에 따른 그 엄청난 음의 변화에 저는 정말 놀랐습니다. 페란티 인터스테이지가 음 자체의 질에 있어서 최고입니다. 사실 과장을 좀 하자면 경악할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다음으로 WE의 Acme가 좋았습니다. Acme는 특히 WE 고유의 그 촉촉하게 화사한 음을 냈습니다. 그리고 다른 몇 개의 탁월한 인터스테이지들을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저의 이야기는 뜻하지 않은 방향으로 흐르게 됩니다! 저의 자동차와 앰프에 관련한 최근의 경험과 인식이 여기에 그쳤다면 어쩐지 좀 밋밋한 이야기였을 텐데 제 마음에서 극적인 반전이 일어났습니다. 뒤늦은 반항이 일어난 것입니다.
자신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았습니다. “이제 내가 52세이다. 이제 노년의 입구에 있다. 아무리 말해도 중년은 확실히 지났고 장년도 저물어가고 있다. 무기력한 회색의 노년이 기다리고 있다. 내 생물학적 나이는 그렇다고 말하고 있다. 노년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 젊은 시절은 불안과 동요의 시절이었다. 나이든 사람들의 평온과 안정을 얼마나 부러워했던가. 빨리 나이 들고 싶었었다. 이제 내가 젊은 시절에 요구했던 그 안정에 접근하고 있다. 그러나 안정과 안식은 평온이라기보다는 체념이고 포기이다. 이것이 내가 바랐던 노년이었는가. 나는 이러한 내 노년을 수용하고자 하는가.”
제 마음 속에서 무엇인가 불만스러운 외침이 가냘프게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나이 들어가며 자꾸만 편해지려하고 있고 까다로워지고 있습니다. 이제 조금만 불편해도 잠을 자지 못하고 음식이 조금만 거칠어도 먹고자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까다로운 저를 “나이 들었으니까” 하고는 합리화해왔습니다. 주위에서도 그렇게 말하며 저의 합리화를 도와줍니다. “당신의 젊은 시절은 충분히 고생스러웠고 당신은 삶의 도전에 비교적 성실하게 응해왔다. 그러니 이제 좀 더 편안해져도 좋은 일 아니냐.”
모든 상황이 저의 노년을 당연한 것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젊은 시절에는 아무 곳에서나 숙면을 취할 수 있었고 삶은 감자 두 개와 우유 한 컵은 충분히 좋은 음식이었습니다. 이제는 이불이 조금만 접혀있어도 잠을 잘 수 없고 그럴듯하고 성의 있게 차려진 식사에나 만족합니다.
제가 포르쉐를 포기한 동기는 이것이었습니다. 평온과 안식이 노년의 당연한 보상이라는 합리화가 정열과 활기에의 도전을 꺾은 것이지요. 제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었습니다. 노년은 세월에서 보다는 마음에서 먼저 옵니다. 편안함과 사치스러움에의 요구가 노년보다 선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것을 “늙어가니까”라며 합리화합니다. 제 자신을 정직하게 바라보았을 때 거기에는 이기적이고 안일한 한 늙기 시작하는 역겨운 사람, 교수라는 그럴듯한 직함을 가진 한심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저는 종로 3가의 지하철역으로 갔습니다. 노숙자의 경험도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며. 마음먹기였습니다. 서너 시간의 잠이 꿀맛 같았습니다. 라면박스도 훌륭한 쿠션이었고 신문지도 따뜻한 이불이었습니다. 노련한 옆의 노숙자가 제게 말을 건넸습니다. “언제 나왔수? 이 생활 자꾸 하지 마시오. 뭐라도 일자리를 구하시오. 습관 되면 여기가 당신 집이 되는 거요.”
저는 가끔 노숙자 사이에서 잠을 청하려 합니다. 생물학적으로 늙은 것이야 어쩔 수 없지만 안일과 까다로움 속에서 스스로 노년을 청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결국 포르쉐를 샀습니다. 세단을 포기했습니다. 검은 빛을 번쩍이며 품격과 성공을 상징하는 벤츠는 훌륭하지만 저는 제 평생 한 번도 그 끝까지 실현된 적이 없었던 제 마음의 불길을 밀고 나가기로 했습니다. 엊그제는 영동 고속도로에서 시속 220km까지 달려봤습니다. 엄청난 굉음과 강력함! 위험하다고 말하지만 침대에서 앓다가 죽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주위 사람들이 자못 놀라고 있습니다. 얌전하고 분별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나 봅니다. 제가 살아온 세월들은 그러했습니다. 제 자신으로 살기 보다는 주위 사람들과 사회가 원하는 양식으로 살아온 것이지요. 그러나 제 자신의 마음속에는 학자나 작가 보다는 모험가와 탐험가의 영혼이 있습니다. 제가 시도했던 모든 모험은 주위의 만류로 항상 좌절되었습니다. 암벽 등반은 인수봉에서의 단 한 번의 추락으로 금지되었고, 오지 여행은 출발조차 못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주위가 요청하는 이러한 삶을 살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저는 직업을 잘못 택한 사람입니다. 관광 안내원이었더라면 차라리 훨씬 행복했을 것입니다. 그랬더라면 저는 캐나다의 도로도 없는 호수나 아프리카나 아마존의 어떤 오지에 이르는 새로운 루트를 개척했을 것입니다.
새로운 앰프를 다시 제작하려 합니다. 젊은 시절에 선호했던 그 음을 다시 한 번 추구해 보고자 합니다. Ba를 초관, Ca를 드라이브관, Da를 출력관으로 하는 파워앰프를 만들고자 합니다. 원래는 PX25와 비슷한 성향의 Da30 앰프를 만들려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제가 60이 넘었을 때 다시 시도하겠습니다. 이번에는 날카롭고 매서운 해상도를 가지는 Da 앰프를 만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