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오른편에 놓인 진열장이 눈에 띄었다. 가서 살펴보니 다양한 디자인으로 제작된 반지들이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다. 무심코 가격표를 보고는 깜짝 놀랐다. 85만엔, 97만엔 ... 그러다 550만엔짜리도 봤다. 아니 이게 진짜 다이아몬드인가? 관계자에게 물어보니 진품이라고 한다. 이런 고가의 제품이 이런 식으로 진열되어도 문제가 없는 것일까? 그러나 관계자는 빙그레 웃기만 한다.
《GIP Laboratory가 위치한 가미노야마 마을》
여기는 야마가타(山形) 현에 소재한 가미노야마(上山)이라는 작은 마을이다. 물론 이 현의 중심 도시는 야마가타이지만, 인구가 고작 20만에 불과할 정도로 규모가 작다. 현 전체의 인구가 120만이고, 가미노야마만 따져도 몇 만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시골 마을이라 도난의 위험이 없으니 저런 고가의 귀금속을 방치하다시피 하는 것일까? 아니면 이 가게의 주인 성격이 원래 그런 것일까? 잘 알 수가 없다.
필자가 이 작은 마을을 찾은 데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GIP라는 신비의 브랜드를 방문하기 위함이다. 특히 웨스턴 일렉트릭(WE)과의 관계가 궁금했던 바, GIP가 이의 단순 복각인지 혹은 그 성능을 뛰어넘는 창작물인지 알고 싶었다. 우선 결론부터 말하면 후자에 속한다. 분명 WE의 영향을 받기는 했지만, 이의 기술적 한계를 극복해서 새로운 유닛을 만들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만일 그래도 WE의 아류라고 우기는 분들이 있다면 이렇게 말하고 싶다. 전체 오디오 역사에서 솔직히 WE의 영향을 받지 않은 제품이 얼마나 될까?
둘째는 GIP를 만든 이의 이력이나 퍼스낼리티의 문제. 대체 이런 시골에 살면서 무슨 마음으로 이런 제품을 만들었단 말인가? 무엇보다 모델로 삼은 WE는 오디오계에서 일종의 종교로 통하는 부분이 있을 정도로 외골수 신도들이 많다. 심지어 WE의 웨스턴만 입에 올려도 인상을 험하게 쓰며 알지도 못하면 닥치고 있어, 라는 식의 태도를 보이는 분들도 많다. 무엇보다 자택에 WE를 소유하고 있다고 할 때의 자긍심은 정말로 남다르다.
《GIP Laboratory 사무실 1층은 스즈키씨의 가업인 안경점과 금은방을 겸하고 있다》
그러므로 일본의 한 소규모 메이커가 감히 WE를 걸고 넘어간다는 것은 일종의 신성모독으로 비춰질 수도 있다. 하지만 최근 뮌헨 쇼에서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와 가져간 여러 대의 스피커를 모두 팔았을 뿐 아니라 주문도 여럿 받았다고 하니, 그 음에는 WE와는 다른 차원의 뭔가가 있다고 해도 좋을 터이다. 바로 그런 마술을 부린 인물을 알고 싶었던 것이다.
여기서 잠시 가미노야마에 대해 좀 더 설명하려고 한다. 야마가타 현이 소재한 곳은 도쿄의 북쪽에 해당하는 동북(東北) 지방에 속한다. 이와테, 아오모리, 아키타 등 총 6개의 현이 있는데, 최근에 쓰나미를 맞은 후쿠시마도 포함된다. 그렇다. 후쿠시마. 바로 야마가타 현의 옆에 있는 곳으로, 거리상으로는 200Km 정도나 되고, 중간에 커다란 산맥이 가로막혀 있어서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피해는 없다.
물론 재해 당시에는 이 도시도 하루에 10여 회 이상의 지진과 여진이 발생해서 공포에 떨게 했고, 물자가 부족해 식사량도 조절해야 했다. 그러나 지금은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 마치 몇 십 년 전에 그런 일이 발생한 듯한 느낌을 준다. 아직도 후쿠시마 해안가는 위험하고 원전 위협이 멈춘 것은 아니지만, 이 지역만큼은 그런 과거를 잊은 듯하다. 확실히 그런 면에서 많은 재해를 맞이한 나라다운 모습이다.
《사무실 안쪽에 위치한 테스트용 시스템》
이 지역의 주된 산업은 농업이다. 특히 과일 재배가 뛰어나 특산물이 많다. 수박, 체리(사쿠란보), 쌀 등이 유명하다. 인근의 니카타는 사케, 아오모리는 사과가 빼어나서 이런 여러 상품들을 맛보는 재미 또한 쏠쏠하다. 이번 방문에서 이자카야도 가보고, 꼬치 구이, 스시, 라멘, 소바, 사케 등을 골고루 맛볼 수 있었는데, 도쿄나 오사카는 명함을 내밀지 못할 정도로 수준이 높았다. 우리와 정반대의 경우라 할까? 이중에 야마가타산 사케는 최근 화제를 몰고 있는 바, 특히 주온다이, 데와자쿠라, 하츠마고 등은 일본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매니아층을 형성할 정도다. 워낙 산으로 둘러싸인 데다 겨울에 눈이 많은 고장이라 기본적으로 물이 좋은 탓도 있을 것이다. 또 추운 고지대에서 생산된 메밀은 역시 소바 맛에 결정적으로 기여하고 있다. 오로지 소바와 사케만으로도 방문할 가치가 있는 지역인 셈이다.
그러나 이 지역이 오로지 농업만으로 꾸려 가는가 하면 결코 그렇지 않다. 대 메이커들의 하청 기업들이 많아 고도의 기술력을 요하는 부품 제조 공장들이 많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노우하우가 엄청난 회사들이어서, 상당한 고수익을 올리고 있다. 동북 지방이라고 하면 어딘지 모르게 낙후되고 가난한 지역이라는 인상이 강한데, 막상 방문해보니 인심도 좋고, 기본 문화 시설도 풍부하며, 번듯하게 지은 집도 많아 경제적으로 꽤 윤택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우리나라에선 겨울에 잠시 스키나 타고, 노천욕이나 즐기는 곳으로 알려져 있는데, 실상은 절대 그렇지 않다.
《일반인에게는 잘 공개 안하는 스즈키씨 자택의 메인시스템. 지진피해로 사진 우측상단의 천장이 부서져 있다》
어쨌든 GIP 탐방을 목적으로 한 이번 여행은 실은 도착한지 3일째가 되어서야 이뤄질 수 있었다. 애초 쓰나미가 없었다면 서울에서 센다이까지 직항편을 이용해 손쉽게 야마가타로 갈 수 있었다. 그러나 가을까지 국제선이 폐쇄된 센다이인지라, 우선 하네다 공항에 도착해서 도쿄 역까지 모노레일과 야마노테 선을 번갈아 타며 도착, 이후 신간센을 타고 야마가타로 향하는 강행군을 할 수밖에 없었다. 오로지 신간센만 3시간이 넘게 타야 했으므로, 호텔에 도착했을 때엔 적잖이 피곤했다. 다음 날에는 특별히 이 지역을 둘러보는 기회를 가졌다. 아무래도 GIP가 탄생한 배경이 되는 현 곳곳의 모습을 미리 보고 또 정보도 얻고 싶었기 때문이다. 정식으로 가이드를 고용해서 승용차를 타고 움직였으므로 짧은 시간 내에 많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당연히 GIP의 오너 스즈키 신이치(鈴木伸一) 씨와의 인터뷰가 수월하게 진행될 수 있었으므로, 이 자리를 빌어 가이드를 해준 분들께 감사를 드리고 싶다.
《스즈키 신이치씨가 운영하는 소바가게》
이윽고 야마가타 방문 3일째 되는 날 오후 1시쯤 GIP의 직원이 직접 차를 몰고 왔다. 근방의 소바집에서 덴뿌라와 함께 맛있는 점심을 먹은 후에야 그 가게가 신이치씨가 직접 운영하는 가게라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섬세하면서 깊은 맛을 지닌 소바의 느낌이 어딘지 모르게 GIP의 음과 닮았다는 느낌이 잠시 들었다. 이어서 인근의 카페에서 정식으로 대면한 후 인터뷰가 이어졌다. 신이치씨는 서글서글한 인상에 어딘지 모르게 괴짜 이미지가 물씬 풍기는 분으로, 그간 GIP를 설립해서 이끌어오기까지의 지난한 여정을 들을 수 있었다. 여기에 그 내용을 정리해서 소개하겠다. 편의상 스즈키 신이치씨의 이니셜인 SS로 표기함을 밝힌다.
인터뷰이: 이종학(Johnny Lee)
인터뷰어: 스즈키 신이치(Suzuki Shinichi)
-우선 GIP의 첫 번째 공식 인터뷰임으로 한국 오디오 애호가들을 위해 간단한 자기 소개를 부탁드리겠습니다. SS : 저는 1959년 야마가타 현, 바로 가미노야마에서 출생했습니다. 안경과 보석 세공을 하는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오디오와 접할 수 있었습니다. 부친이 열혈 오디오파일이었기 때문이죠. 덕분에 다이아톤이니 뭐니 하는 오디오가 들락거렸는데, 제가 고교에 다닐 무렵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부친께서 알텍 A7을 들였기 때문이죠. -알텍 A7이면 지금도 큰 인기를 얻고 있는 제품입니다. 당시의 시스템이 궁금해지는군요. SS : 그때 프리앰프는 럭스맨 CL35였고, 파워는 다이나코의 마크 3이었습니다. 턴테이블은 파이오니어제였는데, 슈어의 V-15 카트리지를 끼었던 기억이 납니다. 아무튼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오디오에 몰두해서, 제 전공과 맞물려 지금에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전공이 무엇인지 밝혀주시겠습니까? SS : 음악입니다. 저는 쭉 피아노를 쳤습니다. 도쿄에 있는 사립 음대에 진학해서 피아노뿐 아니라 악단 지휘까지 공부했습니다. 그 시절엔 참 재미있는 일이 많았죠.(웃음) 밤에 클럽에서 아르바이트를 많이 했는데, 주로 영화 음악을 연주했습니다. 그렇게 번 돈으로 학비도 대고 또 오디오에 투자도 했죠. -당시 하숙 생활을 할 때인데, 무슨 스피커를 썼는지 궁금하군요. SS : JBL의 L200이라는 스피커입니다. 그러나 점차 열중하게 되어 이 제품의 LE15B 우퍼만 빼놓고 나머지는 다 바꿨습니다. 일단 375 드라이버를 구해서 여기다 HL89 혼을 달았고, 075 트위터도 추가했습니다. 아마 이때부터 스피커 유닛에 대한 관심이 본격화되지 않았나 싶군요. -낮에는 학교에 다니고 저녁엔 나이트클럽에서 아르바이트. 그리고 오디오 삼매경. 참 낭만적인 시기를 보내셨군요. SS : 그렇죠. 그래서 무려 3개의 대학을 전전했답니다. 처음 입학한 곳이 사립대였는데 학비가 너무 비싸서 좀 싼 사립으로 옮겼고, 나중에는 공립으로 갔습니다. 무려 8년간 이런 생활을 하가 결국 졸업장을 따지 못하고 그만둬 버렸습니다. -아마 전문 음악인으로 살기엔 뭔가 미래가 불투명한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요? SS : 또 가업도 이어야 했으니까요. 그래서 28세에 귀향해서 부친의 일을 이어받았습니다. 안경의 경우 전문 라이센스가 필요한 분야라 따로 공부를 해서 땄습니다. 그러나 오디오에 대한 취미를 버릴 수 없어서 계속 이런 저런 유닛을 구해서 들어보는 생활이 이어졌습니다. 가우스, 알텍, 바이타복스 등을 손에 넣어 이리저리 인클로저를 짜고 음을 비교하는 재미에 흠뻑 젖어들었죠. 그러다 32살에 운명적으로 WE 594 유닛을 만납니다.
《594 드라이버 다이아프레임》
-드디어 WE 등장이군요. SS : 그간 WE에 대한 소문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습니다만, 상태가 좋은 것을 구하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겨우 하나를 구한 것이죠. 일단 다른 유닛에 비해 퀄리티가 뛰어났습니다. 그리고 음을 들어보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특별한 맛이 있었죠. 300Hz부터 고역에 이르는 대역을 커버하는 점도 큰 매력이었고요. -594를 만난 것이 1991년. 그때 일본에서 WE에 대한 평가는 어땠습니까? SS : 아직 WE의 붐이 본격적으로 불 때가 아니라 대략 두 가지 설(設)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엄청 좋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옛날에 설계한 제품임으로 명성만큼은 아니다, 라는 것이었죠. -실제 들어보니 첫 번째 설이 맞았군요. SS : 그렇죠. 겨우 하나밖에 구하지 못해 모노로 들었을 뿐인데, 일단 피아노를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퀄리티, 뎁스, 컬러 등 모든 면에서 다른 유닛들을 압도했습니다. 불행히도 이에 준하는 수준의 유닛을 구하지 못해, 결국 아직까지 스테레오를 구성하지는 못했답니다. (웃음) 여기서 하나 깨달은 게 있다면 WE는 사용 방법에 따라 정말로 소리 편차가 심한 제품이구나, 라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어찌어찌 몇 번 들은 것 같고 WE가 이렇다 저렇다 논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웨스턴 594 드라이버 내부 부품》
-그 후에도 다양한 유닛들을 섭렵했죠? SS : 유닛에 대한 호기심이 끊이지 않아 약 10년간 여러 모델을 들였습니다. 다인오디오, ATC, 스캔스픽, 포컬 등 새롭게 각광받는 제품들을 써봤습니다. -WE 이전에는 구형 유닛들을 쓰다가 그 이후에는 신생 브랜드 제품들을 쓴 점이 흥미롭군요. 이렇게 신구 대결을 해보니 어떻든가요? SS : 역시 전혀 틀린 물건들이라는 점입니다. 뭐 사용자의 기호에 따라 호불호가 갈리겠지만, 제 경우엔 역시 혼(Horn)이 아니면 안 되겠구나 라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예를 들어 신진 유닛들을 보면 작은 방에선 꽤 좋지만, 공간이 커지면 영 맥을 못 춥니다. 음의 퀄리티나 만듦새를 봤을 때 역시 WE, 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음의 퀄리티에 대해 말씀하시는데, 구체적으로 무슨 의미입니까? SS : 좀 막연하기는 하지만, 예를 들어 저는 스타인웨이로 연주를 많이 합니다. 그때 저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피아노를 접하기는 힘들죠. 또 지휘를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저보다 가깝게 악단에 다가가겠습니까? 바로 그때 들은 음, 질감, 필링 등을 종합적으로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요?
-오디오를 DIY로 하는 분들을 보면 주로 앰프 쪽에 많은 것 같습니다. 회로도를 구해서 부품을 구입하고 납땜을 하고 상태 좋은 진공관을 구하는 등 꽤 흥미로운 분야입니다. 그런데 신이치씨는 유닛에 집중했더군요.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SS : 아무래도 앰프나 소스보다 음의 변화가 현격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한번 시스템을 구축한다고 치죠. 비슷한 가격대의 앰프를 교체하는 것과 스피커를 바꾸는 것 중 어디가 더 차이가 심하겠습니까? -그렇다면 완성품을 사서 듣는 것이 편한 방법이 아닙니까? 구태여 유닛을 구해서 통을 짜는 번거로움을 피할 수 있으니까요. SS : 맞습니다. 그러나 곰곰이 따져보면 결국 소리를 내는 것은 스피커에서도 유닛이 핵심입니다. 이것을 갖고 이런저런 통에 맞추고 또 다른 유닛과 조합하는 재미에 빠질 수밖에 없죠. -아마 여러 대의 스피커를 놓고 이리저리 짜 맞추고 또 교체하는 모습을 누군가 봤다면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할 겁니다. SS : 당연하죠. (웃음) 그러나 저희 집이 보석이며 안경, 시계 관련의 일을 해서 어릴 적부터 기계를 갖고 노는 일이 다반사였습니다. 직접 시계를 분해해서 다시 조립한다던지 라디오를 해체한다던지 아무튼 이런 메카니즘에 관계된 부분이 재미있었습니다. 아마도 그런 기질이 이렇게 발전한 모양입니다.
-그럼 본격적으로 유닛을 만들어보겠다고 결심한 것이 언제입니까? SS : 2002년도입니다. -아무래도 대도시가 아닌 이런 시골에서 스피커 유닛과 같은 복잡한 제품을 만든다는 것은 여러모로 에로 사항이 있을 것 같은데요. SS : 저희 가업이 이곳에 터를 뒀기 때문에 감히 도쿄로 이사할 수 없는 이유도 있지만, 이 지역엔 자동차니 첨단 기계장비니 아무튼 다양한 회사들의 부품을 제작하는 곳들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유닛 제작 정도는 문제가 없다고 봅니다.
《4181 우퍼의 댐퍼》 -그러면 우퍼의 콘지부터 시작해볼까요? 어떤 방식으로 만드는지 궁금합니다. SS : 저희 콘지는 인근의 모가미 전자에서 만듭니다. 이곳은 파이오니아 산하의 회사로 다양한 스피커를 제작하고 있죠. 저는 페이퍼 콘을 주문했는데, WE를 분석한 결과 북미의 소나무를 사용한다는 것을 알고 일단 이것을 주요 소재로 삼았죠. 그러나 다른 여러 소재를 어떻게 섞느냐는 상당한 난제였습니다. 결국 30여 가지의 다양한 형태를 만든 다음에 제가 원하는 콘지를 구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비율만 같다고 WE 소리가 나오는 것은 아니고 여기에 콘지를 딱딱하게 만드는 재료라던가 열처리 등 복잡한 공정이 많습니다. 그 점에 기초해서 제 나름대로 개량을 한 것이죠.
-프레임은 어떻습니까? SS : 이 또한 쉽지 않았습니다. WE를 분석해보니 일본의 표준 규격인 JIS에 맞지 않았습니다. 그런 규격에 맞는 알루미늄 자체가 없더군요. 여러 개의 유닛을 구해 뜯어보고, 차이를 살피는 등 연구 끝에 WE보다 더 나은 프레임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필드 코일을 고집하던데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SS : 우선 장점이라면 스피드가 빠르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자기 회로를 어떻게 만드느냐, 특히 그 중심이 되는 요크를 어떻게 구성하느냐는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전기며 자석에 관한 부분을 공부해가며 접근했습니다. 제일 처음에는 WE와 형태만 같은 것을 만들어봤습니다. 그러다 같은 선이라도 두께에 따라 소리가 다르고, 몇 번 감느냐에 따라 천차만별이라는 점을 알아냈습니다. 무게며 저항치도 중요한 요소죠. WE 594와 4181에 들어가는 전자석을 보고 공부한 후, 나름대로 발전시켰습니다. 그렇게 자신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WE의 단순 복각이 아닌 GIP만의 독자적인 기술력이 투입된 부분이군요. SS : 맞습니다. 제일 중요한 것이 자석을 만드는 요크에 관한 것입니다. 여기에 투입되는 철의 순도가 상당히 중요합니다. WE에선 99.5% 이상을 권하고 실제 분석해보면 99.6%짜리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 부분의 분석 끝에 나온 것은 99.5%를 기점으로 가우스가 거의 수직 상승 곡선을 그린다는 겁니다. 즉, 이 부분에서 아주 미세하게 순도가 올라가도 그 효과는 엄청나게 달라진다는 것이죠. 저희 제품에 사용하는 것은 99.85%입니다.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99.5% 이상의 순도를 확보하기란 쉽지 않아 보입니다. SS : 99% 이상의 순철을 가열해서 주물통에 넣으면 서서히 냉각되면서 수소 가스가 잔뜩 발생합니다. 그것을 현미경으로 살피면 마치 스폰지처럼 여기저기에 구멍이 숭숭 나 있죠. 처음엔 서른 개를 부우면 모두 불량이었습니다. 다시 한 번 70년 전에 이미 WE가 저런 고순도의 철을 생산했다는 점에 경외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 점차 기술이 늘어서 지금은 30개 부우면 반 정도는 99.6%, 99.7% 정도 나옵니다. 99.85%짜리는 네다섯 개 정도에 불과하죠. 이것을 일일이 사람 손으로 만들어야 하니 여기서 경비가 상당히 듭니다.
-이런 주물 작업을 하려면 꽤 큰 철공소가 필요할 텐데요. SS : 다행히 저의 친척 중의 한 분이 철공소를 운영하고 계십니다. 그 분의 도움을 많이 받았죠. -아, 그런 행운이 있었군요. 좋습니다. 그럼 인클로저에 대해 이야기해보죠. SS : WE의 경우 역시 미국산 소나무를 썼습니다. 화이트 파인이라는 소재입니다. 저희도 처음엔 같은 목재를 썼지만, 조금씩 기술력이 쌓이면서 지금은 다른 목재도 사용합니다. 역시 인클로저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재료이고, 또 하나는 조립 방법입니다. 이 부분에서 저희는 상당한 노하우를 갖고 있답니다.
-매칭하는 앰프에 관해서도 설명해주시죠. 역시 진공관을 써야 합니까? SS : 제가 테스트를 한 결과로는 아무래도 TR보다 진공관, 그것도 3극관에 물렸을 때 제일 소리가 좋았습니다. -앰프도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SS : 현재 이미 만들어서 쓰고 있습니다. 다만 정식으로 판매하지는 않고 따로 주문이 오면 만들어 줍니다. 여기서 제가 WE를 분석해보니 모든 앰프들의 주파수 대역이 좁더군요. 아무래도 극장용으로 제작하다보니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저는 현대 오디오의 기준에 맞게 보다 와이드 레인지한 음을 추구합니다. 주로 300B 푸시풀과 211 싱글을 만들죠.
-고가라는 점이 걸리긴 하지만, 소리 자체로만 놓고 보면 상당히 훌륭합니다. 또 GIP만의 확실한 개성을 느낄 수도 있고요. 보다 많은 애호가들이 GIP의 진가를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이 드는군요. SS : 감사합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가미노야마에 소재한 그의 작업실을 찾았다. 아직도 1층엔 안경이며 보석류를 파는 매장이 있고, 그 위로 2층은 살림집, 3층은 개인 시청실로 쓰고 있었다. 외부 손님들이 오면 데려가는 별도의 큰 시청실이 있는 바, 이 부분은 동사의 7000 및 9000 시리즈의 제품 리뷰 시에 소개하기로 하겠다.
아무튼 GIP의 직원 둘이 부지런히 유닛을 조립하고, 부품을 검사하는 작업실은 1층 한쪽에 마련되어 있다. 아무래도 대부분의 작업을 OEM으로 해결하기에 많은 직원을 쓸 필요는 없어 보였다. 오히려 정확한 감수가 더 필요하지 않겠는가.
잠시 후, 아주 재미있는 실험이 벌어졌다. 오로지 드라이버만 갖고 테스트를 하는 것이다. 여기서 등장한 것이 JBL의 전설적인 375 드라이버다. 이것을 WE의 594와 비교했다. 일단 적수가 되지 못했다. 재즈 피아노 트리오를 들었는데, 375엔 아예 저역 성분이 포함되지 않았고, 중고역의 밀도도 낮았다. 뭔가 음이 허하고 맥이 빠졌다. 반면 WE쪽은 더블 베이스 음이 상당히 들렸고, 밀도도 높아 피아노의 질감이나 잔향도 잘 표현되었다.
이윽고 WE 594와 GIP 594의 비교가 이어졌다. 역시 여러 면에서 GIP의 손을 들어줄 만했다. 훨씬 뉘앙스가 풍부하고, 다이내믹 레인지가 넓으며, 밀도가 높았다. WE의 팬들이라면 말도 안 된다고 반발할 듯도 싶지만, 실제 비교를 해보면 이런 차이가 나오는 것을 어떡한단 말인가? GIP가 독자적인 유닛을 제작해서 스피커를 만든다고 자신하는 데에는 다 이런 데이터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혹시나 싶어 이번에는 소프트를 바꿔서 야신타의 노래를 틀었다. 375는 아예 명함을 내밀기 힘들었고, WE는 부드러우면서 촉촉한 음이 나왔다. 이전에 들어본 WE의 소리와 통하는 미음이었다. 반면 GIP는 좀 더 생생하고, 해상력이 풍부한 음으로 다가온다. 물론 여성 보컬만 따지만 WE가 더 마음에 든다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중간에 나온 색소폰 소리는 확연히 구분이 되었다. 예를 들어 강하게 텅잉하는 부분에서 GIP가 훨씬 풍부한 다이내믹스를 들려준다. 이어서 드라이버며 우퍼, 트위터 등 여러 유닛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사진으로만 봐도 만듦새가 대단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데, 거기에는 다 이유가 있다.
《597 트위터》
예를 들어 스피커의 이퀄라이저에 쓰이는 재질을 보면 WE에 쓰인 것이 퍼멘줄(permendule)이라는 소재다. 코발트와 철이 각각 반반씩 섞였는데, 일본에선 그런 순도를 가진 제품이 없다고 한다. 결국 미국 군용에 납품하는 것을 구했는데, 이게 처음 살 때보다 10배나 단가가 올랐다고 한다. 이런 여러 요소들이 개재되어 최근에 20% 가격을 올릴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어쨌든 GIP의 제품 가격이 높은 것은 사실이지만, 이렇게 소재 하나하나를 어렵게 구하고 또 제작하는 상황이고 보면 어쩔 수 없다는 생각도 든다.
이번 방문에서 한 가지 깨달은 것은, GIP가 마치 최고의 소재를 동원해서 만든 요리와 같다는 점이다. 유닛에 들어가는 진동판이나 댐퍼 하나도 모두 최상의 것들을 투입하며, 소리의 완성도 전자석을 비롯 역시 순도가 높은 3극관 구동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즉, 요리에서 소재 자체가 좋으면 별다른 소스나 장식이 필요없 듯, GIP가 추구하는 것은 바로 이런 최상의 소재를 만든다는 데에 있다. 철의 순도가 0.001%만 올라가도 소리가 확 변하는 제품, 바로 그런 것을 제작하기에 이런 가격표는 필연적이라 하겠다. 하긴 최상의 퀄리티를 자랑하는 사시미 몇 점에 몇 만엔씩 받는 가게가 존재하는 일본을 이해한다면 GIP가 추구하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아주 다행인 것은 GIP가 유닛을 따로 판매한다는 점이다. 혹 완성품의 가격이나 외관에 불만이 있다면 차라리 유닛만을 사서 스스로 제작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어쨌든 세계 최고의 유닛이라고 자부해도 좋을 만큼 뛰어난 퀄리티를 갖고 있으니, 이를 통해 많은 이들이 DIY를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여기에 전자석을 따로 설계하고, 파워 서플라이를 구성하고, 진공관 싱글을 만들어보는 분주한 나날들이 이어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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