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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질과 소리

by 조중걸 posted Jul 15,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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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질과 소리

약간의 철학적 인식론이 전개된다 하더라도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결국 논의가 거기까지 이르러야 무엇인가 통찰이 얻어지기 때문입니다. 오디오 기기의 객관적이라고 믿어지는 재질과 오디오 감상자가 느끼는 주관적이라고 믿어지는 음악성의 문제는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이 주제는 단지 오디오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이것은 세계관과 형이상학적 신념의 문제이며 우리 삶에 대한 우리 자신의 태도의 문제입니다.

근대와 현대를 가르는 기준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인과율 (the law of causality)”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있어서입니다. 근대세계는 원인에서 결과를 연역해내는 사고방식을 당연한 것으로 알았습니다. 근대적 사유양식에 의하면, 유클리드의 기하학적 정리 - 피타고라스의 정리, 아폴로니우스의 정리, 삼각형의 내각의 정리 등 -은 환원시켜 가면 다섯 개의 기하학적 공준(postulate)에 닿고, 따라서 모든 정리는 이 다섯 개의 공준으로부터 연역된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2R입니다. 증명을 요청 맡은 기하학자는 “동위각은 같고”, ‘엇각은 같다’라는 두 하위(sub)정리에 의해 이것을 증명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다시 동위각은 왜 같은지, 그리고 엇각은 왜 같은 지의 증명을 새롭게 요청합니다. 이때 기하학자는 다시 이것을 증명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증명과정은 어디에선가 끝나야 합니다. 이것이 무한히 계속되어야 할 과정이라면 거기에 우리 정리의 확실성의 보장을 해줄 수 있는 기초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기하학에서의 이 증명의 종점은 곧 공준 입니다. 여기서 그 공준이 정리의 기초로 작동해 줄 수 없다는 사실이 결국 더 큰 문제로 드러납니다. “두 점 사이에 직선을 그을 수 있다” 거나, “모든 직각은 서로 같다” 등의 공준은 더 이상 증명될 수 없습니다. 이때 어떤 사람들은 이것은 “자명(self-evident)”하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어떤 사람들은 “독단(dogma)”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근대에서 현대로의 전환은 이 기초를 자명하다고 보는 것에서에서 독단으로 보는 것으로 옮겨 왔습니다. 이 과정에 대한 완전한 이해를 위해서는 매우 복잡한 철학적 학습이 필요하므로 넘어가겠습니다. 누구도 여기서 “대륙의 합리론”과 “영국의 경험론”에 대한 전면적인 학습을 원하지는 않겠지요. 단지 현대는 데이비드 흄이라는 영국 철학자가 제시한 길을 따라왔고, 따라서 모든 지식의 기초가 되는 그 근원(현대 철학에서는 “단순자”라 부릅니다)은 독단에 지나지 않는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이것은 단지 기하학의 문제는 아닙니다. 우리는 모든 물질에는 기초가 되는 단순자(the simples)가 있으리라고 믿고 계속 분석해 들어갑니다. 우리는 연역의 기초가 되는 그 근원 을 찾으려는 노력을 해왔습니다. 원소주기율표가 발표되었을때, 세포라는 생명현상의 단순자가 발견되었을 때, 질병의 원인으로서의 세균이 발견되었을 때 19세기의 근대적 세계관의 자신감은 하늘을 찌를 듯 했습니다. 이제 모든 단순자들이 발견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라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원소들조차도 아직 분석의 여지가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한 새로운 신념하에서 오늘날 입자가속기에서 아원자까지도 쪼개고 있습니다. 완전한 기초라고 할 만한 물질의 단순자가 발견될까요? 현대철학자들은 이러한 행위가 물리학자들의 일말의 사기(fraud)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물질의 근원은 아마도 발견 되지 않을 것입니다. 단지 물리학자들만이 그 발견이 가능하다고 믿고 있습니다. 연구용역비를 계속 받아내야 자기 밥그릇이 채워지기 때문입니다.

현대철학은 이때 중심을 “연역의 기초”에서 “연역의 결과”로 옮깁니다. 이때 전자를 본질(essence)이라고 부르고, 후자를 실존(existence)이라고 부릅니다. 현대철학은 기초에서 결과가 연역된다고 보기보다는, 결과가 기초를 ‘요청(demand)’한다고 봅니다. 즉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절대로 어려운 얘기가 아닙니다.

다시 기하학의 예로 돌아가 보도록 하지요. 우리는 기하학의 기초가 참임이 입증 불가능하다는 사실, 즉 공준은 증명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압니다. 이것은 “공준이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공준이 거짓”이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단지 그것이 참임을 증명할 수 없다는 얘깁니다. 그러나 세계는 유클리드 기하학의 정리에 입각해 있습니다. 이 기하학적 정리에 의해 고층건물도 짓고, 교량도 건설하고, 우주선도 발사합니다. 이때 누군가가 나서서 “너희들은 매우 이상한 것을 하고 있다. 지금 너희들의 기초는 안개 속에 있다. 이 근원도 모르는 놈들아, 건물과 교량은 어떤 확실성의 보장도 못받고 있으니 그것들이 내일 붕괴된다고 해도 이상할게 없다”고 떠들고 다닌다고 합시다. 이때 우리의 반응은 어떨까요? 대충 이렇습니다. “쟤네 할아버지도 정신병원에서 죽었고, 쟤네 아버지도 약간 이상하긴 했어”라고 말할 겁니다.

그 기초의 불확실성이 어떻든 우리는 거기에 준해 큰 문제없이 현존을 영위라고 있습니다. 고층 건물도 버티고 있고, 교량도 인재가 아닌한 버티고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그 기초가 되는 공준이 참임을 요청합니다. 즉 우리 세계가 그럭저럭 살만한 세계라면 그 기원도 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때 이러한 신념체계를 우리는 “규약적 체계(agreemental system)\"라고 부릅니다. 즉 세계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우리로부터 독립한 어떤 객관적이고 실재적 실체에 대한 우리의 인식에 의존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동의에 기초한 것입니다. 결국 현대의 모든 시스템은 규약적인 것입니다. 거기에 선험성은 없습니다. 과학교과서는 세계의 실재에 대한 우리의 규약적 체계이고, 법은 우리 사회적이고 윤리적 삶의 실재에 대한 우리의 규약적 체계이고, 가치는 의미에 대한 우리의 규약적 체계입니다.

이 세계에 실재는 없습니다. 아니, 있을수도 있습니다. 확실한 것은 이 실재를 우리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단순자를 알 수는 없다는 것이지요. 이때 이 단순자는 “말해질 수 없는 것(what cannot be said)\"이 됩니다. 우리는 지도를 보고 세계를 아는 것이지 세계를 더듬어서 세계에 대해 아는 것은 아닙니다. 안드로메다 성운이나 시리우스 성단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우리가 가서 보았기 때문인가요? 우리의 물리적 체계인 과학교과서가 그것에 대해 말한 바대로 우리는 그것을 알게 됩니다. 이것이 근대에서 현재로서의 전환입니다. “실존이 본질에 앞서는 것처럼, 과학교과서는 세계의 물리적 실재에 앞서고, 법은 윤리에 앞서며, 정리는 공준에 앞서고, 현재는 과거에 앞서고, 가치는 의미에 앞서고, 통증은 질병에 앞서고, 감상자는 오디오에 앞섭니다.”

거기에 어떤 오디오의 우열을 가릴 수 있는 실재, 즉 재질은 사실 없습니다. 단지 어떤 카트리지 혹은 어떤 톤암이 더 낫다는 평가는 우리의 규약일 뿐입니다. 물론 이 규약은 단지 시장에서의 가격으로만 나타납니다 이것에는 구속력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객관적 실재에 대해 우리는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가격은 시장에서의 하나의 규약입니다.

오디오의 소리의 질이 어떤 유형적인 물리적 실재에 의해 결정된다는 원리, 혹은 믿음은 “본질은 실재에 앞선다”는 근대적 사고방식으로의 퇴행입니다. 거기에는 단지 오디오 애호가들이 전체적으로 받아들이는 가격체계만 존재할 뿐입니다. “시장은 제품에 앞서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자기가 만든 제품의 가격이 거기에 들인 재질, 즉 원료, 인건비, 유통비용 등에 의해 결정된다고 믿는 제조업자라면 현대에 속할 자격이 없습니다. 모든 가격은 원가와 상관없이 시장에서의 수요,공급의 법칙이라는 규약적 체계에 의해 결정됩니다. 이것이 소위 \"꼬리가 개를 흔든다(wag the dog)\"는 새로운 금언입니다. 금융의 배분기능이 제조업 자체를 결정 짓습니다.

60년대 초의 Ortofon SPU-A가 이베이에 뜬다면 30명 쯤의 입찰지가 나서고, 가격은 2천불에서 2500불 사이에서 결정됩니다. 현대 Meister Silver나 Gold Reference는 신품 가격이 1500불쯤에 Buy It Now에 형성되어 있지만 지금 1년째 안팔리고 계속 리스팅되고 있습니다. 63년 산 SPU-A는 일단 시장에 떴다하면 순식간에 사라집니다. 저는 이것을 객관적 질 때문이라고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거기에 객관은 없기 때문입니다. 단지 우리 감상자들의 카트리지에 대한 규약적 체계는 그렇게 형성되어 있다고 말하겠습니다.

물리적 사실에서 물질의 가치가 결정된다고요? 절대 아닙니다. 음의 가치에 대한 우리의 규약이 물리적 실재의 질적 차이를 요청하고 그것에 따라 가격이 결정될 뿐 입니다. 그러니 앞으로는 제발 “물질적 근원”이나 “실체적 사실” 이나 “본래의 재질” 등을 들먹이지 맙시다. 누군가 -내가 기억하는 바로는 엄민형씨 인데-말한 바대로 “스펙이 좋아서 소리가 좋은 것이 아니라, 소리가 좋아서 스펙이 좋은 겁니다.” 물론 이때 “소리가 좋다”는 언명은 단지 일반적인 동호인들의 규약적 동의인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