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딘 평판 스피커 만들기>란 글에 대한 <비오딘에 대해>라는 글에 대한 평판을 가진 스피커에 대한 글
<비오딘에 대해>라는 제목으로 김의호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이 눈에 띄어서 저도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김선생님 말씀 중에 \'네트워크는 간단하게 트랜스 하나로 중고역을 콘트롤하는군요.\"라는 말은 좀 이해가 되지 않군요. 왜 이런 말을 하는지요. 아마 위의 영문 \"Network circuit replaced by one capacitor here\"라는 말을 영어라는 학문의 관점에서 보아 잘못 이해하신 것이라고 주관적으로 판단이 됩니다. 트랜스가 아니라 아마 콘덴서일 것이고, 문맥을 보아서 원래 오리지널은 다른 형태인데, 여기서는 콘덴서 하나 붙여서 개조했다는 뜻인 것 같은데, 전체 문장을 보지 않아서 학문적 판단을 내리기가 모호하네요.
이렇게 글을 쓰고 보니 괜히 시비거는 것 같아서 멈칫거려집니다.
이 난은 동호회, 특히 독일 오디오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같은 취미를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장소이지 학문적인 사항을 논하는 자리는 아닙니다. 그래서 주관적인 사항을 가지고 주관적으로 이야기해도 그 말이 서로에게 도움이 된다면 괜찮다는 것입니다.
근데 한마디 더 합시다.
오디오가 학문과 같다니, 당최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오디오가 학문이라면, 아마 미학의 범주에 속할 것인데, 미학이란게 원래 희랍말로 <아이스테시스, 감성적인 받아들임에 대한 이론>이란 뜻이 아니던가요. 그래서 미학이 만들어질 때, 감성적인 주관성에 대한 이론이다라는 뜻이 중요시되었습니다. 즉 개인의 주관적인 경험이 중요했다는 뜻이지요. 주관적인 경험에서 나오지 않고서는 객관성이란게 있을 수 없다는 것이 미학의 원래 시작에서 나온 생각입니다. 근데 사람들이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이 없어지니까, 남의 말에 권위를 부여하고, 믿게 되고, 이런 믿음이 학문성이라는 이름으로 객관적이라고 폼을 잡게 되는 것입니다. 모두 자기 감성에 대해서 자신이 없고, 생각하는 능력이 사라지니까 학문이라는 권위의 우상을 도입하는 것입니다.
오디오는 주관적인 것이고, 주관적인 감성이 바탕이 되어서 서로 인정할 때, 객관성을 가질 수도 있겠죠. 그리고 오디오를 일종의 학문이라 하더라도 이 자리는 동호회 자리입니다. 주관적으로 좋다는 판단을 표현해도 되는 자리지요.
김의호선생 동호회 기록을 보니까 비오노르 스피커를 제작하셨더군요. 님의 열정에 대해서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그런데 혹시 제가 어떤 분의 비오노르 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다고 해서 그것이 결코 님의 비오노르를 욕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님의 비오노르 소리를 들은 바가 없습니다.
저도 기회가 되어서 이번에 약 다섯 개 이상의 평판 스피커를 나왕 코어합판으로 제작해보았습니다. 그런데 소리가 안 좋더군요. 정말 고생했습니다. 아내는 거실에서 제가 비닐 깔고 합판 도색을 하고 있으니 앞으로는 더 이상 거실을 어지럽히지 말라고 경고하더군요. 이런 수모를 받으면서 만든 스피커를 소리가 안 되어서 부숴버렸기 때문에 어줍잖은 글이지만 소리전자에 글을 올렸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이런 실수를 하지 말라고요. 제가 목수 기질이 좀 있습니다. 나무 만지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영리적 행위를 하지 않고 다른 분들을 위해서 스피커를 만들어보았습니다. 힘들더군요. 그렇지만 즐거웠습니다. 근데 누구는 손재주 좋다고 하네요. 손재주 좋다는 말 듣고자 글 올리지는 않았습니다. 저의 주관적 판단으로는 영 거슬리는 소리더군요.
하지만 다시 미송으로 평판을 만들어서 음악을 들으니 정말 좋았습니다. 음악을 듣는 즐거움이 생생하더군요. 감동을 미송평판이 선사하더군요. 낙엽송이나 나왕 코어는 정말 죽을 맛이었습니다. 시체를 만지는 듯한 죽은 소리가 나더군요. 어이쿠, 이건 두 소재를 비교한 뒤에 나온 은유법입니다. 비교하지 않을 때는 낙엽송도 좋았습니다. 단 한 개의 스피커만 실험해본게 아닙니다. 대 여섯가지 필드코일의 8인치에서 15인치까지, 192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학문적으로 부정확) 필드 스피커를 달아서 실험해봤습니다.
제가 본문에서 몇 개의 평판 스피커를 예전에도 만들고, 지금도 만들어서 여러 가지 스피커를 사용해서 들어보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경험을 저의 주관적인 판단이지만 귀가 밝은 오디오 동호인들도 인정하였습니다. 그분들의 주관적 생각이 어떤지는 객관적으로 판단하기는 어렵고, 이걸 입증하라면 난 안하겠습니다. 그래도 몇 가지의 경험을 했다고, 생각했고, 나의 주관성을 개인적인 경험의 차원에서 털어놓아도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미송으로 바꾸니 소리가 기가 막히더군요. 음악을 듣는 것이 상쾌하고, 즐거워졌습니다. 저는 이 기쁨을 다른 사람에게도 전달하고 싶었습니다. 부처님은 도를 깨닫고, 이 도를 대승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전달해야 하는 고민을 했다는데, 저는 고민할 필요조차도 없이 이런 나왕 코어로 소리를 듣는 사람들에게 더 나은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시펐습니다. 이건 나의 선한 마음에서 나온 본연의 요구였습니다. 그래서 성적 표현이니 하는 말에 수정조차 하는 친절을, 문화적인 행위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친절한 행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오디오가 학문이라고 하시면서 네트워크를 트랜스 하나로 중고역을 콘트롤 한다고 하니 좀 당황스럽군요.
네트워크는 트랜스 하나(콘덴서로 추측됨)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학문적인 사람이 못되어서 학문을 때려치워서(간단하게 말해서 귀차니즘으로) 다시 자료를 들춰내지는 않겠습니다만은 네트워크가 유러딘에도 사용되는가 하는 네트워크를 사용합니다. 네트워크가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습니다. 학문적으로 말입니다. 비오딘 중역 및 저역 스피커에는 여러 타입이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트랜스 하나로 중고역을 잘라낸다는 것은 엄청난 모험입니다.
동호인의 모임에서 즐겁게 지냅시다. 너무 날을 새우거나, 과례를 하면 비례가 되고 우습게 됩니다. 괜히 다른 사람의 입방아거리가 됩니다. 저는 즐겁자고 오디오 합니다. 즐거워서 오디오 합니다. 과시하려고 오디오를 하지는 않습니다. 무엇보다 더 좋은 소리를 듣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