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다크롬 필름의 탄생과 브람스 교향곡
본 글은 2011년 초겨울에 저의 블러그와 사진 동호회에 올렸던 글입니다.
http://blog.naver.com/dadamum/110100474980
프롤로그…
I love to take a photograph
So mama don’t take my kodachrome away......
몇해전, 미국의 코다크롬이 생산 중지되었고, 2010년 12월 말로 세계 유일의 코다크롬 슬라이드 필름현상소로
남아있던 미국 캔자스주 파슨스 소재 드웨인 현상소가 문을 닫게 된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 아쉬움이 너무 컸다.
조그마하고 한적한 시골마을에 작년 연말에는 무척 많이 사람들이 북적였다고 한다.
몇십롤 몇백롤의 코다크롬을 맡긴 사람도 있었고 사라지는 역사의 현장을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세계 각국에서 기자와 관광객 (특히 유럽)들이 방문해 사진을 찍었다고 한다.
필자 개인적으로는 35년동안 수많은 필름을 사용했으면서도 정작 코다크롬은 한 롤도 사용하지 못한 것이 사뭇 후회된다.
80년대말 몇년간 일본에 거주하면서 니콘FM과 F3 카메라를 메고 이곳 저곳을 기웃거렸는데도
어떤 이유에서였는지 코다크롬 현상소가 있던 일본에서조차 코다크롬 64를 써보지 못했다.
연이 안 닿았었던 것일까….? 그렇게 위로해 본다.
다만 코다크롬으로 찍어서 현상 인화한 40년 이상된 몇장의 사진만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당시 지인이었던 미국 분이 찍어준 사진이었다. 아마도 구정 전후였을 것이다.
하와이에 보내서 현상 인화하여 오느라고 2달만에 사진을 받아보았다.
(하기야 그 당시에 우리나라에서 컬러필름을 현상하는 곳이 있었는가는 모른다)
그리고 당시로서는 상상도 못할 커다란 사이즈였는데 그림 엽서 크기 정도로 기억된다.
소위 흑백이 주류였던 시대였으므로 컬러라는 사진은 구경도 못한 사람들이 많았고
칼라라는 명칭보다도 총천연색 사진이라고 불렸던 것을 기억하시는 분들도 있으리라 생각된다.
영화도 흑백 영화와 총천연색 영화로 구분되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현상 인화되어 온 칼라 사진을 보고 무척 감동을 하였다.
마치 미국 잡지에서나 가끔 보이던 그런 진한 컬러의 색이었다.
필자가 사진작업을 시작한 후로도 그 색은 기억 속에서 지워지지 않았고 계속 칼라인화의 레퍼런스가 되었다.
그러나 몇십년 동안 그 색을 만들어내 본적이 없는 것 같다. 한번도 컬러인화에서 만족해 본적이 없었다.
국내의 컬러 인화물은 마치 인쇄용어를 사용하면 반사 분해한 것 같다면 그 코다크롬의 사진은
슬라이드 원본을 분해한 것 정도로 커다란 차이였다고 기억하고 있다.
(어린 시절 내가 살던 신촌의 모 국민학교 앞에서는 흑백사진을 물감으로 칠하여 컬러처럼 만들어주며
돈을 벌던 사람도 있었다. 간혹 옛 어른들의 사진을 그런 식으로 컬러화한 것들도 보았고...)
본론….
여러분들이 사용하고 있는 칼라필름의 탄생의 내막을 다들 잘 알고 계시겠지만....
세계 최초의 실용적인 칼라필름으로서 코닥이 1935년에 16mm 영화용 코다크롬을 발매하고
그 다음해에 스틸 사진 (현재의 사이즈)용 코다크롬을 발매 했었지만 그 발명 뒤에는
19세기의 독일 작곡가 요하네스 브람스(1833-1897)도 관련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코다크롬의 발명자는 레오폴드 마네스(Leopold Damrosch Mannes, 1899-1964)와
레오폴드 고도브스키(Leopold Godowsky, Jr. 1900-1983)이다.
이 두 사람은 모두 프로 음악가 연주가로, 마네스는 피아니스트, 고도브스키는 바이올리니스트였다.
그러나 두 사람은 음악 이외에도 사진이라는 공통의 취미를 가지고 있어서
그것이 사진 역사에 금자탑을 세우는 계기가 된다.
이들이 고교생이었던 1917년, 컬러 활동사진 (영어자료에는 무비가 아니고 모션 픽쳐로 나옴)이라고
이름 붙여진 [Our Navy]를 보러 갔었다, 그러나 그 색조가 안개가 낀 것처럼 뿌옇고 뚜렷하지 않아
자연스러운 색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의욕적인 아마추어 카메라맨이었던 이들 두 사람은 [좀 더 뛰어난 컬러사진의 방법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자연스러운 색상의 실용적인 컬러사진은 50년 이상에 걸쳐 저명한 과학자들이 계속 연구해 왔었으나
그 당시까지도 아직 그 누구도 성공하지 못한 것이었다.
당시에도 이미 코다크롬이라는 상표의 컬러필름은 존재하고 있었지만 (1914년 발표),
그것은 삼원색이 아닌 두가지 색으로 재현하는 컬러 사진(테크니컬러)으로 포트레이트에는 사용되었기는 했지만
풍경 등의 다양한 색이 포함된 피사체에는 사용할 수 없었던 필름이었다.
그후에 코다크롬은 이들이 발명한 필름의 이름이 되지만, 그들의 코다크롬은 그전의 오리지널 2색(테크니컬러)
코다크롬과는 전혀 관계가 없던 것이었다.
나이 어린 16-17세의 마네스와 고도브스키는 고등학교의 물리 실험실에서 카메라와 투영장치를 제작하였다.
그것은 3개가 하나로 된 렌즈와 필터인데 각각이 삼원색을 하나씩 담당했다.
그 장치가 만들어낸 사진은 그때까지 볼 수 없었던 색의 재현성을 갖추었으며 이 두 사람은 그 장치로
특허를 획득하게 된다. 그러나 아직 그것은 실용화 될 수 있는 수법은 아니었다.
이후, 고도브스키는 UCLA에 입학하여 로스엔젤레스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바이올리니스트가 된다.
한편 마네스는 프로 피아니스트로 활동을 계속하면서 하버드 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한다.
아메리카 대륙의 동과 서로 서로 멀리 떨어진 두 사람이지만 보다 좋은 컬러사진 제작수법을 목표로
공동작업을 계속해 나갔다.
1922년이 되어 고도브스키는 캘리포니아의 일을 그만두고 뉴욕으로 돌아와,
그곳에서 음악가로서 활약하고 있던 마네스와 함께 음악활동의 여가시간을 이용하여 컬러사진의 개발에
전념하게 된다.
일이 있을 때에는 베토벤 등을 연주하고 연주가 끝나면 곧바로 실험실에 돌아가 사진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는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그들은 부엌이나 목욕탕을 연구실과 암실로 사용했기 때문에 그들 부모는
여러 가지로 성가실 수 밖에 없었다.
1922년 마네스가 유럽 연주여행을 떠났을 때에 벤쳐 투자 회사인 쿤앤레브사(Kuhn-Loeb and Co. )의
중요한 포지션에 있는 인물과 사귀게 된다. 수개월 후에 쿤앤레브사로부터 루이스 스트라우스
(30년후에 미국 원자력 위원회 위원장이 된 인물)라는 인물이 마네스의 아파트를 방문하게 되었는데
마네스와 고도브스키는 매우 놀랬었다고 알려지고 있다.
스트라우스는 그들의 컬러사진의 연구 성과를 자세히 관찰하고 돌아간다.
아파트가 추웠기 때문에 두 사람의 컬러사진 연구의 현상처리는 매우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쿤앤레브사가 두 사람에게 2만 달러를 투자하여 그 돈으로 연구에 알맞은 실험실을 만들게 되며
1924년에는 또 다른 특허를 받는데 성공한다.
쿤앤레브사의 이런 2만달러 투자는 이 회사 설립 사상 최고의 수익을 가져다 준 투자가 되었다고 한다.
1930년 이스트만 코닥은 이들의 발명과 그 성과에 커다란 관심을 기울이게 되어,
이들의 컬러필름에 관한 발명의 사용권을 취득, 그 뿐만 아니라 코닥 연구소 설립자인 케네스 메스 박사
(Dr. C.E. Kenneth Mees)에게 두 사람을 코닥으로 초빙하게 하여 두 사람을 위한 연구실을 설치하고
그들을 연구원으로 배치한다.
1933년까지 마네스와 고도브스키는 코닥 연구소의 스탭들과 함께 세계 최초의 시판 가능한 3색 감광층의
홈 컬러 무비필름과 그 현상 프로세스를 개발한다. 이 역사적인 대발명의 내용은 제라틴 롤필름에
세가지 감광제를 코팅한 것으로 그 감광제는 각각 레드 그린 브루(빛의 삼원색)에만 반응했다.
그리고 현상과정에 있어서 시안, 마젠타, 옐로(블루, 레드,옐로)의 색소를 각감 광제에 더함으로서
자연스러운 포지티브 화상이 완성되는 구조였다. 이 발명의 성공에 의해 코닥은 1935년 4월15일에
세계 최초의 실용 컬러 필름인 16mm 영화용 코다크롬을… 그리고 다음해인 1936년에는
(1935년이라는 설도 있음) 35mm 스틸 사진용 코다크롬을 발매한 것이다.
그럼 글 제목의 브람스는 언제 등장하게 되는가…??
이 코다크롬 발매 1년전, 아마 코다크롬 시판화를 향한 최종 연구단계인 1934년,
그들은 테스트 촬영필름의 현상처리를 컴컴한 연구실에서 행했다. 그들에게는 시간을 정확하게 체크할
필요가 있었지만 그 때 물론 시계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원래 프로 음악가인 두 사람, 그런 두 명의 아마추어에서 프로로 전향한 과학자들이 취한 수단이란…
브람스의 교향곡 1번, 제4악장의 한 브레즈를 2박을 1초씩으로 한 리듬으로 휘파람으로 불며(연주)
정확한 시간을 쟀던 것이었다. 이 두 사람은 코다크롬 발매 후에도 코닥연구실에서 연구를 더하며
1941년에 발매된 코다컬러 네가필름,1942년에 발매된 엑타크롬 (코다크롬과는 다르며 현재 주류가 된 색소를
유제에 미리 포함시킨 포지티브필름)의 초석을 세웠다고 한다.
두 사람은 그 후에 코닥을 떠나 원래의 음악가의 길을 걷는다. 마네스는 1939년에 코닥을 떠나지만
고도브스키가 코닥을 떠난 해는 확실하지 않다.
위의 이런 일화는 영어권에서는 전설로서 알려져 있다. 위대한 작곡가 브람스, 그리고 그를 애호하던
음악가가 없었다면 현재의 컬러필름은 탄생하지 않았거나 아니면 좀 더 다른 형태가 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자신이 찍은 사진들을 살펴보며 브람스를 한번 들어보면 어떨까…하는 생각을 한다.
유명한 팝 가수인 폴 사이먼이 불러 유명한 [코다크롬]….
그리고 코다크롬을 탄생시킨데 일조한 브람스의 교향곡1번 제4악장….[소위, 브람스의 코다크롬 멜로디]
코다크롬을 탄생시킨 유명한 연주가인 두 사람은 연주는 지금 시중에서 여러 장의 CD로 구해 들을 수 있다.
고도브스키는 샌프란시스코 교향악단 제1바이올린의 저명한 바이올리니스트로서 미국의 유명한 작곡가
거쉬인의 딸 프란체스와 결혼한다. ( 물론 잘 아시다시피 거쉬인의 대표작은 랩소디인 블루, 오페라 포기와 베스….
앤더슨이 부른 섬머 타임~~~이란 노래는 언제나 듣고 싶은 곡이다….등등)
또한 그의 부친도 (레오폴드 고도브스키-리트아니아 츨생)유럽에서 당대 최고 유명한 피아니스트 부조니와
쌍벽을 이뤘던 피아니스트겸 작곡가였다.
아버지 고도브스키는 당시 피아니스트중의 피아니스트라고 일컬어지던 초일류의 연주가였고 작곡가였는데
특히 쇼팽의 연습곡 편곡은 최고로 알려져 있다. 그외에 바하의 소나타와 파르티타의 편곡도 유명하다.
그런 초일류의 음악가의 아들이 이 시대의 생생한 역사를 기록했던 역사적인 컬러필름을 발명한 것이다.
고도브스키는 클래식 애호가라면 어디선가에서 그의 연주를 들어본 적이 있을 정도로 유명한 연주가이다.
한편 마네스는 줄리어드 음대 (전 인스티튜트 오브 뮤직 아트)에서 음악 이론을 가르치고, 후에 그의 아버지가
설립한 마네스 음악대학의 학장에 취임한다. 마네스 트리오라는 이름으로 피아노 트리오의 CD도 남겼다.
뉴욕 맨하탄에 있는 마네스 음악원은 줄리어드 음악원에 버금가는 음악원으로
우리나라의 지휘자 정명훈도 그 곳 출신이다.
특히 레오폴드 고도브스키 3세 (3대가 같은 이름을 사용)에 의해
“레오폴드 고도브스키 컬러 사진상 (The Leopold Godowsky Jr. Color Photography Awards)”이 설립되었다.
이 어워드는 컬러사진 분야에서 공적을 쌓은 인물에게 수여하는 상이다.
홈페이지 http://www.godowskycolorawards.org/2009/
에필로그…….
어떤 외국의 클래식 애호가는 브람스의 1번 교향곡을 마치 코다크롬의 발색 같은 색채감을 지녔다고도 한다.
색채감으로 넘치지만 경박한 색조가 아닌 매우 장엄하고 심연의 깊이가 느껴진다고 했다.
참고로 코다크롬은 현재 주류인 슬라이드필름 (후지크롬, 엑타크롬 등)과 비교해서 매우 독특한 발색을
내는 것으로 유명하며 그 경향은 차분하고 깊이가 있는 색조를 나타내 준다.
어느 외국인의 조사에 의하면, 이들이 휘파람으로 연주한 부분이 브람스 교향곡 1번 4악장의 중간부분.
음이 4분의 4박자로 C장조(C major)의 밝음 음조로 변하며 바이올린이 장려 우아한 멜로디를 연주하는 부분….
이곳이 아마도 2박을 1초로 휘파람을 불었던 부분일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그러나 명확한 근거는 없으니까 참고만 하시길 바란다.
그러나 비슷할 것이라고도 여겨진다. 만약 주위 가까이에 브람스 교향곡 CD가 있는 분들은 꺼내어
컴퓨터에 넣고 코다크롬의 전설과 브람스 교향곡 1번의 색채를 한번 느껴 보시길 권한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이 두 사람은 브람스의 심포니1번 4악장을70여년전 그 당시에 선곡했을까라는 의문이 생긴다.
견강부회일지 모르나… 아니 견강부회일 것이다.
앞서 언급한 외국인의 표현을 빌자면 두 사람이 연구에 착수한지 20년 가까이가 지났고 그리고 성공을 확신한다.
그런데 마침 브람스가 21세에 작곡에 착수해서 완성하기까지 21년이 걸린 걸작 심포니1번의 최종악장.
클라이막스를 향하는 도입부분, 마치 떠오르는 해를 연출한듯한 멜로디.... 음악의 프로인 그들로서는
당연한 선곡이었는지도 모른다.그 심포니와 같이 마지막 클라이막스를 거친 오늘날에는 컬러사진의
기나긴 어둠으로부터 해방되어 온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컬러사진의 은혜를 받고 있는 것이다.
그런 코다크롬이 내가 살아있는 이 시대에 사라진 것이다.... 정말 아쉽다....
환경문제를 해결해서라도 코다크롬 필름의 재발매와 현상이 지구상의 어딘가에서 이루워졌으면 하는
간절한 바램이 새해 벽두에 부질 없이도 생기고 있다. 현대과학으로도 해결 못하는 것일까....?
아니면 필름 사용자의 격감이란다면 어느 국가의 대기업들이 나서서 인수해 주었으면 좋겠다.
세계 인류의 문화와 역사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한국에서는 88올림픽당시 공식필름이었던 코닥사에서 코닥크롬 현상장비를 공짜로 한국에 설치해 주었었습니다.
덕분에 본인도 경제가 허락하는 범위내에서 실컷 사용했었는데 엑타크롬에 비해 노출관용도가 1/2밖엔 되지않아 애먹었습니다.
다른 슬라이드필름에 비해 다른 점은 보통의 필름이 내부의 화학물질을 처리해 발색을 하는 것에 반해, 코닥크롬은 발색제가 층층이 칠해져있어서
특정색을 발색하려면 그만큼 필름면을 깎아녹여야 합니다. 그래서 현상을 마친 필름의 뒷면을 보면 입체적인 그림이 보여집니다. 일본제 후지크롬도
이와 비슷한 방법을 사용하여 그 모습이 보입니다.
색상은 마치 농익은 과일처럼 진하고 깊은 맛이 납니다. 간접적이나마 그 품위를 보고 싶다면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자세히 보십시오.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코닥크롬으로 촬영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아쉬웠던 점이라면 코닥크롬은 어찌된 일인지 35미리 필름만 나왔고 120이나 4x5 사이즈로는 발매되지 않아 그 뛰어난 화질을 큰 사이즈로 맛보기 어려웠던 것입니다.
보관만 잘하면 100년이나 간다는 내구성 뛰어난 코닥크롬이 그 내구성이 다하기도 전에 지구상에서 사라지게 된 것은 심히 유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