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통신 IIX-IV (취객)
첫 번째 소식 - 가을걷이
저녁 무렵 칠곡에 일이 있었다. 낡은 마티스는 거친 산길에 파도처럼 흔들흔들 언덕길을 내려간다. 저녁 안개가 옅게 낀 산골엔 농부들의 가을걷이가 바쁘다. 그러다 문득 추수를 마치고 논 한가운데 앉아 막걸리 잔을 기울이는 농부들을 보았다.
나는 잠깐 차를 멈추고 카메라를 꺼냈다. 일 년 농사를 마무리 지으며 동료와 함께 나누는 막걸리 한 잔. 마른 논 한가운데 앉은 농부들의 행복과 기쁨이 내게도 그대로 전해 온다. 그때 익숙한 음성이 내게 말을 걸어온다. 바로 내 안의 나다.
어때? 너 지금 행복해?
글쎄. 차분한 하루. 삼겹살에 소주도 마시고, 힘들지만 열심히 일할 수 있고. 아이들과 젊은이들의 미소를 마음껏 볼 수 있다는 것. 그게 행복이라면 나는 분명히 행복한 것이겠지.
응, 조금 시니컬한 표현인 걸? 그건 지난 10년 동안도 그래왔잖아?
아 그래, 덧붙여서 열심히 내조하는 아내와, 팔공산의 사계를 유화처럼 감상 할 수 있는 것. 힘들지만 돌탑을 쌓듯 조금씩 이루어 가는 일. 나의 신념과 성실, 신뢰를 믿어 주는 벗들. 그래, 당장 큰돈과 보다 안락한 삶과 멋지게 지은 내 개인 주택에 살지 못한다는 것을 불행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아. 언젠가는 이루겠지만, 서둘러서 될 일은 아니지.
다행이네. 제법 철들었군. 너는 이미 그 모든 것을 손가락 사이로 빠져 나가는 모래알갱이처럼 바람에 날려버린 기억이 있잖아.
맞아, 그땐 모든 것들이 너무나 당연했지. 그래서 소중한 줄 전혀 몰랐어. 이젠 적어도 그런 바보짓은 하지 않겠지.
지금은 땀 흘리며 일하는 순간이나, 아주 작은 성취가 다가오는 그 순간들을 차근차근 잘 기억해 두려해. 어쩌면 모든 것이 이루어질 그 순간보다. 지금의 이 조심스러운 시간들 일 분 일 초가, 하나하나 소중한 행복 알갱이들 일지도 몰라. 그 때 지금의 이 소중한 순간을 기억하지 못한 다면 너무 허무하지 않겠어? 아마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마티스는 다시 덜컹덜컹 언덕길을 내려가고, 나는 막걸리 생각이 간절하다. 그 농부들에게 슬쩍 한 잔 얻어먹고 올걸 그랬나? 하지만 나는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머리를 흔든다. 지금은 그들의 행복을 지켜 본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 막걸리는 그들의 땀으로 빚은 그들의 막걸리다. 이방인인 내가 섣불리 얻어 마신다고 해도, 그들이 지금 느낄 그 맛을 그대로 느낄 수는 없다. 나는 내 손으로, 나만의 가을걷이와, 나만의 막걸리를 빚어야 하는 것이다. 그 결과뿐만 아니라, 과정 역시 충분히 행복할 것임을 이미 짐작한다.
두 번째 소식 - 중년의 길
나 요즘 일 나간다.
일이요? 갑자기 무슨 일이요?
응, 건물에 세도 잘 안 나가고, 다들 어려우니까, 동네 아주머니들하고 같이 대관령에 당근 캐러 다녀.
그래요? 힘들지 않으세요?
아유, 돌아오면 그만 착 꼬부라진다. 새벽 4시에 일어나서 밥해 놓고, 5시에 모여서 대관령으로 출발해. 둘이서 한 조가 되어 앞에선 캐고, 뒤에선 줄기 자르고 하면 하루에 한 고랑 겨우 캔다니. 저녁 5시에 끝나는데 한 10시간 일하고 3만5천원 받는다.
너무 힘들면 그만 두세요.
야아, 그런 소리마라. 그것도 일자리가 없어서 난리다. 일이 계속 있었으면 좋겠는데, 있다없다 해서 한 달에 한 30~40만원은 버나보다. 그게 어디냐?
올 해 66세. 나는 가슴이 먹먹해 온다. 굳이 일 안하셔도 되겠지만,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재미에 그러시나보다 하기엔 고향 동네의 경제 사정이 녹록치 않다. 그렇다고 간신히 보내드리는 용돈을 더 올려 드릴 수도 없고, 나는 짐짓 볼 멘 소리를 낸다.
아니 아버지랑 막내 녀석은 뭘 한대요?
일이 있으면 놀겠니? 일이 없어. 취로 사업도 한 살이라도 어린 사람들이 다하고, 요샌 건방 피며 노는 젊은이들도 별로 없다. 뭔 일이라도 있으면 다 하려고 달려들지. 큰일이다. 세상이 어떻게 되려고 자꾸 힘들어 지는지.
서울도 상황이 장난 아니에요.
TV에서 봤다. 어쨌든 니가 빨리 출세해야지. 우리 집엔 니가 자리 잡아야만 한다. 그래야 우리 집도 제대로 한 번 피지.
갑작스런 어머님의 당부에 제대로 인사도 못하고 전화를 끊었다. 나이 든 장남이라는 단어의 무게는 점점 더 무겁게 어깨에 올려지고, 세월은 내 사정 같은 것은 알 바 아니다. 오늘 손에든 잡지에서, 하루 17시간씩 밥 먹을 시간도 없이 일하고, 한 달 150만원 받는다는 환경 미화원의 기사가 떠올랐다. 세상살이 정말 쉬운 일 아니다.
술을 줄여야겠다. 시간을 좀 더 집중해서 써야겠다. 내가 조금 방만했던 것은 아닌지 또 한 번 돌아본다.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조금이라도 마음을 놓으면, 그만큼 힘들어 지는 중년의 시간이다.
잠시 갓길에 차를 멈추고 차창을 연다. 검은 하늘엔 달이 환하지만, 중년의 길은 좀처럼 뚜렷하게 보이지 않는다.
세 번째 소식 - 대화
오랜만이다.
잘 지냈니?
그럭저럭. 넌 여전히 잘 나가네.
잘나가긴, 사업 죽 쑤고 있다.
그래도 로드스터에, 최고급 수트에... 재는 누구니?
응, 오가다 만난 애.
재주 좋다. 이미 중년인데, 저런 영계랑.
부러워할 일은 아니지. 재도 필요에 의해 나를 만나는 것 아니겠어?
무슨 필요?
돈, 섹스, 맛난 음식, 명품 선물, 허영심.
너무 심하게 말하는 것 아냐?
난 여자들이 온순한 초식 동물들인 줄 알았다? 그런데 흡혈귀들이 더 많아. 아예 삶을 통째로 갉아먹지.
그건 무슨 소리야?
이혼 한 뒤로는 어쩐 일인지 여자들이 떼로 덤벼들더라. 대개는 순진한 눈빛으로 눈물을 흘리며 사랑을 구걸하지.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었어. 그게 그녀들의 방법이야. 한동안 일용할 먹이를 포획하는 방법. 그녀들은 그저 그런 방법으로 자신의 욕구를 채울 뿐이야. 사랑? 개나 먹으라고 해.
에이 그럴 리가?
야! 그게 아니라면 나는 이미 아이가 한 타스쯤 될 걸? 어린 여자들은 때가 되면 아이를 낙태하고 떠나는 거야. 유아살인, 중세엔 사형이었다든데. 하여튼 나는 유목민이 아니야. 나는 언제든 멈추고 싶어. 정말 나를 사랑하는 여자와 오순도순 살고 싶은 그런 남자야. 매번 그런 여자인줄 알고 만나지만, 결국 자신의 욕구를 채우고, 내게 더 나올 게 없다 싶으면 슬그머니 떠나가지. 단 한 명이라도 진짜 나를 사랑한 여자가 있었더라면, 내가 여태 이렇게 살겠니?
오랜만에 나가 본 인사동. 옆자리의 대화는, 화장실에 갔던 동키 파마머리의 귀여운 아가씨가 돌아오자 끝났다. 서울이라는 세상은 정말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 간단하게 일어나는 곳이다. 나는 생맥주 한 잔을 단숨에 마셔 버리고 흔들거리는 세상으로 걸어 나왔다.
네 번째 소식 - 미소
도대체 왜 그랬냐구?
현실에서 소리를 치며, 나는 꿈에서 깨었다.
웬 일이었을까? 마치 다락방을 열어 먼지를 털어내 듯, 몇 년 동안이나 봉인해 두었던 기억들이 꿈속에서 하나씩 단단한 마개를 열고 뛰어나왔다. 배신에 관한 어둡고 아픈 기억들이었다. 그리고 오랜 세월 왜 그랬을까? 가슴 속의 상처로 방치 된 모진 기억들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물었다.
이렇게 저렇게 하자고 시작했지? 그리고 나는 이렇게 했어. 그게 약속이었으니까, 그런데 도대체 왜 그랬어? 일을 이렇게 망쳐도 되는 거야?
목이 잠겼다. 그 당시 상황에 대한 기막힌 기억들, 안타까움과 분노와 부서져 버린 일과 꿈들에 관한 머리 속의 단어들이 말이 되어 입 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러자 그들은 한결 같이 웃었다. 그것은 시니컬한 영화의 한 장면이었다. 어쩌면 우리가 영화를 너무 많이 본 탓인지도 모를 일이고, 영화의 감독이나 제작자가 바로 지금과 같은 상황을 당해 보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들의 답변은 모두 그 야비한 미소에서 딱 멈추었다. 어찌나 분노했는지, 잠에서 깨어서도 손이 떨렸다.
결국 꿈이고, 하나마나한 나만의 결론이 된 것일지도 모른다. 힘들게 괴로운 기억을 열어서 묵비권을 행사하는 피고들에게 개인 적인 화풀이를 하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 스스로 정리를 하게 된 것이다. 뇌 속에서 ‘이건 이제 그만 담아두자’ 라고 결론을 내린 것이겠지. 그래 이건 이제 그만 두자.
어둠 속에 손을 뻗어 전등 줄을 잡아 당겼다. 몇 번이고 깜빡이던 형광등이 간신히 잠에서 깨어난다. 손의 떨림이 멈추고, 어깨의 떨림이 멈추고 천천히 마음은 평정을 되찾는다. 창밖엔 취객들의 아우성이 들리고 도시 한가운데 잠이 깬 나는 좀처럼 다시 잠들지 못한다.
다섯 번째 소식 - 스트레스 해소
새벽 3시 37분
회식을 하러 나간 사람은 돌아오지 않는다. 물론 연락도 없고 연락이 되지도 않는다. 어이없다. 배려에 대한 이야기는 아예 생각지도 않는다. 기다리는 것은 내 스타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들이 사는 삶의 모습이 나는 진실로 어이가 없는 것이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사람들. 소위 선생들. 어째서 이렇게 까지 그악스럽게 스트레스 해소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일까? 만약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 극에 달한 스트레스를 어떻게 푼다는 것일까? 그 악에 받친 사람들이 가르친다는 학생들은, 도대체 무슨 교육을 받고 있는 것일까?
오늘은 확실하게 놀고 올 거다.
어디서 어떻게 노는 것이 확실하게 노는 것일까? 우리들에게 금기시된 것들을 깨고, 평온한 일상을 깨고, 자신의 도덕과 신념 따위를 깨고 노는 것이 확실하게 노는 것일까? 나는 가엾다. 그런 식으로 밖에 자신 속에 쌓인 화를 풀지 못하는 것도, 그렇듯 악에 받친 스트레스가 쌓인다는 것도, 삶이 그토록 찌들어 있다는 것도.
숲 속. 음악을 듣거나, 술을 마시거나, 책을 읽거나, 12시 이전에 꼭 잠이 들곤 하는, 일정한 삶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신데렐로의 입장에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어둠과 야합한 짐승의 밤이다. 결국 사람은 동물의 일종인가? 멀리 산사에서 들리는 새벽 염불소리. 어쩐지 부질없다.
마지막 소식 - 취객
등나무 아래 고기를 굽다, 잠시 책에 눈을 돌렸다. 그 잠깐 사이 식탁위에서는 불청객이 불의의 사고(?)를 당하고 있었다. 초대하지 않은 말벌 한마리가, 슬슬 맥주를 훔쳐 먹다 그만 맥주잔에 빠졌다. 술꾼으로서는 부럽기 짝이 없는(?) 상황이지만, 말벌로서는 목숨이 경각에 달린 일이다.
말벌은 과음으로 죽게 되는 것일까? 그대로 두면 간이 뽀개지도록 맥주를 마시겠지만, 아무래도 익사할 확률이 더 크다. 고기 점을 집던 젓가락으로 말들에게 구명의 손길을 뻗는다. 해안 구조대처럼 헬기로 물에 빠진 사람을 건지는 멋진 광경은 아니지만, 어쨌든 이 도둑이며 술꾼인 말벌은 무사히 구조 되었다.
바위 위에 올려놓으니 몸을 털고, 앞발로 얼굴을 닦고 부산하다. 하지만 슬슬 흔들거리는 것이 제법 많이 취했나 보다. 짜식, 맥주 과음하면 숙취가 장난 아닌데, 내일 아침이 더 죽을 맛일 거다.
이 말벌이 과감히 술을 끊고, 예쁜 암벌을 만나 행복하게 잘 살지는 모를 일이다. 그러나 이 가을, 행복하기에도 부족한 시간에 죽기엔 생명이 너무 아깝다. 고난의 한 가운데서 포기하고 죽는 주인공 따위는 없다. 우리 모두의 동화는 계속 되어야 한다. 그래서 그 둘은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답니다. 동화는 마땅히 그렇게 끝나야 한다.
한 손엔 소주잔을, 또 한 손에는 책을 들고 잠시 말벌을 바라보는 수채화 같은 정오. 멀리 언덕 아래에서 노인의 기침처럼 칵칵 거리며 경운기가 올라오고, 다락논의 벼들은 햇살 아래 누워 쉬고 있다.
고성(古城) 아래 별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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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소식 - 가을걷이
저녁 무렵 칠곡에 일이 있었다. 낡은 마티스는 거친 산길에 파도처럼 흔들흔들 언덕길을 내려간다. 저녁 안개가 옅게 낀 산골엔 농부들의 가을걷이가 바쁘다. 그러다 문득 추수를 마치고 논 한가운데 앉아 막걸리 잔을 기울이는 농부들을 보았다.
나는 잠깐 차를 멈추고 카메라를 꺼냈다. 일 년 농사를 마무리 지으며 동료와 함께 나누는 막걸리 한 잔. 마른 논 한가운데 앉은 농부들의 행복과 기쁨이 내게도 그대로 전해 온다. 그때 익숙한 음성이 내게 말을 걸어온다. 바로 내 안의 나다.
어때? 너 지금 행복해?
글쎄. 차분한 하루. 삼겹살에 소주도 마시고, 힘들지만 열심히 일할 수 있고. 아이들과 젊은이들의 미소를 마음껏 볼 수 있다는 것. 그게 행복이라면 나는 분명히 행복한 것이겠지.
응, 조금 시니컬한 표현인 걸? 그건 지난 10년 동안도 그래왔잖아?
아 그래, 덧붙여서 열심히 내조하는 아내와, 팔공산의 사계를 유화처럼 감상 할 수 있는 것. 힘들지만 돌탑을 쌓듯 조금씩 이루어 가는 일. 나의 신념과 성실, 신뢰를 믿어 주는 벗들. 그래, 당장 큰돈과 보다 안락한 삶과 멋지게 지은 내 개인 주택에 살지 못한다는 것을 불행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아. 언젠가는 이루겠지만, 서둘러서 될 일은 아니지.
다행이네. 제법 철들었군. 너는 이미 그 모든 것을 손가락 사이로 빠져 나가는 모래알갱이처럼 바람에 날려버린 기억이 있잖아.
맞아, 그땐 모든 것들이 너무나 당연했지. 그래서 소중한 줄 전혀 몰랐어. 이젠 적어도 그런 바보짓은 하지 않겠지.
지금은 땀 흘리며 일하는 순간이나, 아주 작은 성취가 다가오는 그 순간들을 차근차근 잘 기억해 두려해. 어쩌면 모든 것이 이루어질 그 순간보다. 지금의 이 조심스러운 시간들 일 분 일 초가, 하나하나 소중한 행복 알갱이들 일지도 몰라. 그 때 지금의 이 소중한 순간을 기억하지 못한 다면 너무 허무하지 않겠어? 아마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마티스는 다시 덜컹덜컹 언덕길을 내려가고, 나는 막걸리 생각이 간절하다. 그 농부들에게 슬쩍 한 잔 얻어먹고 올걸 그랬나? 하지만 나는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머리를 흔든다. 지금은 그들의 행복을 지켜 본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 막걸리는 그들의 땀으로 빚은 그들의 막걸리다. 이방인인 내가 섣불리 얻어 마신다고 해도, 그들이 지금 느낄 그 맛을 그대로 느낄 수는 없다. 나는 내 손으로, 나만의 가을걷이와, 나만의 막걸리를 빚어야 하는 것이다. 그 결과뿐만 아니라, 과정 역시 충분히 행복할 것임을 이미 짐작한다.
두 번째 소식 - 중년의 길
나 요즘 일 나간다.
일이요? 갑자기 무슨 일이요?
응, 건물에 세도 잘 안 나가고, 다들 어려우니까, 동네 아주머니들하고 같이 대관령에 당근 캐러 다녀.
그래요? 힘들지 않으세요?
아유, 돌아오면 그만 착 꼬부라진다. 새벽 4시에 일어나서 밥해 놓고, 5시에 모여서 대관령으로 출발해. 둘이서 한 조가 되어 앞에선 캐고, 뒤에선 줄기 자르고 하면 하루에 한 고랑 겨우 캔다니. 저녁 5시에 끝나는데 한 10시간 일하고 3만5천원 받는다.
너무 힘들면 그만 두세요.
야아, 그런 소리마라. 그것도 일자리가 없어서 난리다. 일이 계속 있었으면 좋겠는데, 있다없다 해서 한 달에 한 30~40만원은 버나보다. 그게 어디냐?
올 해 66세. 나는 가슴이 먹먹해 온다. 굳이 일 안하셔도 되겠지만,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재미에 그러시나보다 하기엔 고향 동네의 경제 사정이 녹록치 않다. 그렇다고 간신히 보내드리는 용돈을 더 올려 드릴 수도 없고, 나는 짐짓 볼 멘 소리를 낸다.
아니 아버지랑 막내 녀석은 뭘 한대요?
일이 있으면 놀겠니? 일이 없어. 취로 사업도 한 살이라도 어린 사람들이 다하고, 요샌 건방 피며 노는 젊은이들도 별로 없다. 뭔 일이라도 있으면 다 하려고 달려들지. 큰일이다. 세상이 어떻게 되려고 자꾸 힘들어 지는지.
서울도 상황이 장난 아니에요.
TV에서 봤다. 어쨌든 니가 빨리 출세해야지. 우리 집엔 니가 자리 잡아야만 한다. 그래야 우리 집도 제대로 한 번 피지.
갑작스런 어머님의 당부에 제대로 인사도 못하고 전화를 끊었다. 나이 든 장남이라는 단어의 무게는 점점 더 무겁게 어깨에 올려지고, 세월은 내 사정 같은 것은 알 바 아니다. 오늘 손에든 잡지에서, 하루 17시간씩 밥 먹을 시간도 없이 일하고, 한 달 150만원 받는다는 환경 미화원의 기사가 떠올랐다. 세상살이 정말 쉬운 일 아니다.
술을 줄여야겠다. 시간을 좀 더 집중해서 써야겠다. 내가 조금 방만했던 것은 아닌지 또 한 번 돌아본다.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조금이라도 마음을 놓으면, 그만큼 힘들어 지는 중년의 시간이다.
잠시 갓길에 차를 멈추고 차창을 연다. 검은 하늘엔 달이 환하지만, 중년의 길은 좀처럼 뚜렷하게 보이지 않는다.
세 번째 소식 - 대화
오랜만이다.
잘 지냈니?
그럭저럭. 넌 여전히 잘 나가네.
잘나가긴, 사업 죽 쑤고 있다.
그래도 로드스터에, 최고급 수트에... 재는 누구니?
응, 오가다 만난 애.
재주 좋다. 이미 중년인데, 저런 영계랑.
부러워할 일은 아니지. 재도 필요에 의해 나를 만나는 것 아니겠어?
무슨 필요?
돈, 섹스, 맛난 음식, 명품 선물, 허영심.
너무 심하게 말하는 것 아냐?
난 여자들이 온순한 초식 동물들인 줄 알았다? 그런데 흡혈귀들이 더 많아. 아예 삶을 통째로 갉아먹지.
그건 무슨 소리야?
이혼 한 뒤로는 어쩐 일인지 여자들이 떼로 덤벼들더라. 대개는 순진한 눈빛으로 눈물을 흘리며 사랑을 구걸하지.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었어. 그게 그녀들의 방법이야. 한동안 일용할 먹이를 포획하는 방법. 그녀들은 그저 그런 방법으로 자신의 욕구를 채울 뿐이야. 사랑? 개나 먹으라고 해.
에이 그럴 리가?
야! 그게 아니라면 나는 이미 아이가 한 타스쯤 될 걸? 어린 여자들은 때가 되면 아이를 낙태하고 떠나는 거야. 유아살인, 중세엔 사형이었다든데. 하여튼 나는 유목민이 아니야. 나는 언제든 멈추고 싶어. 정말 나를 사랑하는 여자와 오순도순 살고 싶은 그런 남자야. 매번 그런 여자인줄 알고 만나지만, 결국 자신의 욕구를 채우고, 내게 더 나올 게 없다 싶으면 슬그머니 떠나가지. 단 한 명이라도 진짜 나를 사랑한 여자가 있었더라면, 내가 여태 이렇게 살겠니?
오랜만에 나가 본 인사동. 옆자리의 대화는, 화장실에 갔던 동키 파마머리의 귀여운 아가씨가 돌아오자 끝났다. 서울이라는 세상은 정말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 간단하게 일어나는 곳이다. 나는 생맥주 한 잔을 단숨에 마셔 버리고 흔들거리는 세상으로 걸어 나왔다.
네 번째 소식 - 미소
도대체 왜 그랬냐구?
현실에서 소리를 치며, 나는 꿈에서 깨었다.
웬 일이었을까? 마치 다락방을 열어 먼지를 털어내 듯, 몇 년 동안이나 봉인해 두었던 기억들이 꿈속에서 하나씩 단단한 마개를 열고 뛰어나왔다. 배신에 관한 어둡고 아픈 기억들이었다. 그리고 오랜 세월 왜 그랬을까? 가슴 속의 상처로 방치 된 모진 기억들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물었다.
이렇게 저렇게 하자고 시작했지? 그리고 나는 이렇게 했어. 그게 약속이었으니까, 그런데 도대체 왜 그랬어? 일을 이렇게 망쳐도 되는 거야?
목이 잠겼다. 그 당시 상황에 대한 기막힌 기억들, 안타까움과 분노와 부서져 버린 일과 꿈들에 관한 머리 속의 단어들이 말이 되어 입 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러자 그들은 한결 같이 웃었다. 그것은 시니컬한 영화의 한 장면이었다. 어쩌면 우리가 영화를 너무 많이 본 탓인지도 모를 일이고, 영화의 감독이나 제작자가 바로 지금과 같은 상황을 당해 보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들의 답변은 모두 그 야비한 미소에서 딱 멈추었다. 어찌나 분노했는지, 잠에서 깨어서도 손이 떨렸다.
결국 꿈이고, 하나마나한 나만의 결론이 된 것일지도 모른다. 힘들게 괴로운 기억을 열어서 묵비권을 행사하는 피고들에게 개인 적인 화풀이를 하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 스스로 정리를 하게 된 것이다. 뇌 속에서 ‘이건 이제 그만 담아두자’ 라고 결론을 내린 것이겠지. 그래 이건 이제 그만 두자.
어둠 속에 손을 뻗어 전등 줄을 잡아 당겼다. 몇 번이고 깜빡이던 형광등이 간신히 잠에서 깨어난다. 손의 떨림이 멈추고, 어깨의 떨림이 멈추고 천천히 마음은 평정을 되찾는다. 창밖엔 취객들의 아우성이 들리고 도시 한가운데 잠이 깬 나는 좀처럼 다시 잠들지 못한다.
다섯 번째 소식 - 스트레스 해소
새벽 3시 37분
회식을 하러 나간 사람은 돌아오지 않는다. 물론 연락도 없고 연락이 되지도 않는다. 어이없다. 배려에 대한 이야기는 아예 생각지도 않는다. 기다리는 것은 내 스타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들이 사는 삶의 모습이 나는 진실로 어이가 없는 것이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사람들. 소위 선생들. 어째서 이렇게 까지 그악스럽게 스트레스 해소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일까? 만약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 극에 달한 스트레스를 어떻게 푼다는 것일까? 그 악에 받친 사람들이 가르친다는 학생들은, 도대체 무슨 교육을 받고 있는 것일까?
오늘은 확실하게 놀고 올 거다.
어디서 어떻게 노는 것이 확실하게 노는 것일까? 우리들에게 금기시된 것들을 깨고, 평온한 일상을 깨고, 자신의 도덕과 신념 따위를 깨고 노는 것이 확실하게 노는 것일까? 나는 가엾다. 그런 식으로 밖에 자신 속에 쌓인 화를 풀지 못하는 것도, 그렇듯 악에 받친 스트레스가 쌓인다는 것도, 삶이 그토록 찌들어 있다는 것도.
숲 속. 음악을 듣거나, 술을 마시거나, 책을 읽거나, 12시 이전에 꼭 잠이 들곤 하는, 일정한 삶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신데렐로의 입장에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어둠과 야합한 짐승의 밤이다. 결국 사람은 동물의 일종인가? 멀리 산사에서 들리는 새벽 염불소리. 어쩐지 부질없다.
마지막 소식 - 취객
등나무 아래 고기를 굽다, 잠시 책에 눈을 돌렸다. 그 잠깐 사이 식탁위에서는 불청객이 불의의 사고(?)를 당하고 있었다. 초대하지 않은 말벌 한마리가, 슬슬 맥주를 훔쳐 먹다 그만 맥주잔에 빠졌다. 술꾼으로서는 부럽기 짝이 없는(?) 상황이지만, 말벌로서는 목숨이 경각에 달린 일이다.
말벌은 과음으로 죽게 되는 것일까? 그대로 두면 간이 뽀개지도록 맥주를 마시겠지만, 아무래도 익사할 확률이 더 크다. 고기 점을 집던 젓가락으로 말들에게 구명의 손길을 뻗는다. 해안 구조대처럼 헬기로 물에 빠진 사람을 건지는 멋진 광경은 아니지만, 어쨌든 이 도둑이며 술꾼인 말벌은 무사히 구조 되었다.
바위 위에 올려놓으니 몸을 털고, 앞발로 얼굴을 닦고 부산하다. 하지만 슬슬 흔들거리는 것이 제법 많이 취했나 보다. 짜식, 맥주 과음하면 숙취가 장난 아닌데, 내일 아침이 더 죽을 맛일 거다.
이 말벌이 과감히 술을 끊고, 예쁜 암벌을 만나 행복하게 잘 살지는 모를 일이다. 그러나 이 가을, 행복하기에도 부족한 시간에 죽기엔 생명이 너무 아깝다. 고난의 한 가운데서 포기하고 죽는 주인공 따위는 없다. 우리 모두의 동화는 계속 되어야 한다. 그래서 그 둘은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답니다. 동화는 마땅히 그렇게 끝나야 한다.
한 손엔 소주잔을, 또 한 손에는 책을 들고 잠시 말벌을 바라보는 수채화 같은 정오. 멀리 언덕 아래에서 노인의 기침처럼 칵칵 거리며 경운기가 올라오고, 다락논의 벼들은 햇살 아래 누워 쉬고 있다.
고성(古城) 아래 별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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