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신자들의 뒷이야기 (승마잔치)

by 김명기 posted Oct 23,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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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신자들의 뒷이야기 (승마잔치)

* kbs 뉴스 - 그들만의 ‘승마 잔치’
  http://news.kbs.co.kr/news.php?kind=c&id=1649206
* kbs 뉴스 - 비인가 불법 승마장 ‘환경오염 무방비’
  http://news.kbs.co.kr/news.php?kind=c&id=1649241

대부분의 영화에서 보면 배신자들의 말로는 늘 비참하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개운함을 지닌 채 영화관을 나오고, 또 다시 영화를 찾는 것이다. 어쨌든 영화는 길어야 1~2시간이내에 끝나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은 어떨까? 평온하게 살아가는 우리를 실망시켰던, 가슴에 대못을 박았던 현실의 배신자들은 어떻게 될까? 인생은 길고 결론은 그리 쉽게 나지 않는다. 우리는 선현들과 어른들의 교훈으로만 몇몇, 유명한 배신자들의 이야기를 알고 있다. 맞아 정말로 그렇게 될 거야. 그것은 우리의 희망사항 일 뿐, 세상은 좀처럼 정의를 보여주지 않는다.

배신자 L은 몇 년이나 내가 직접 데리고 있던 사람이다. 모 협회로의 취업도 내가 주선했다. 몇 해 전 그는 내가 국내 최초로 구간경기를 하려고 기마단 대학생들과 경기 룰을 번역하고 연구한 결과를, 슬그머니 정부에 제출하여 지원금을 받고 여기저기서 경기를 개최했다. 물론 그 파급 효과는 내 예상대로 대단했다.

L은 그 결과도, 그로 인하여 진행 될 파급 효과도, 다음에 구간경기가 나갈 방향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그저 남의 아이디어를 도용했을 뿐이니까. 정부에서 지원을 해주고, 각 지자체에서 너도나도 돈을 싸들고 와서 경기를 유치하고자하니, 야아 이건 대박이 났구나! 하고 세상이 돈짝만 해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그리 만만치가 않다.

먼저 일반 국민들에게 승마의 유용함을 알리고, 말 산업이 일으킬 파급효과와 차근차근 한걸음씩 일을 풀어 나가 일반인들이 느낄 거부감을 없애야만 했다. 그러나 경기 개최까지만 자료를 도용한 L이 그 뒤의 일을 알 리가 없다. 결국 수 십 억의 지원금으로 전국을 돌며 떠들썩하게 경기를 개최했다.

또 한 명의 배신자 S는 함께 동업을 하기로 하고, 투자 된 돈이 다 떨어지자마자, 함께 하기로 했던 다른 사업을 저 혼자 하겠다고 어이없는 선언을 했다. 물론 그 사업에는 새로 돈이 들어 온 상태였다. 나는 이해했다. 아니 납득했다. 저렇게 사람 같지도 않는 배신을 하는 사람과는 더 이상 어떤 일을 해도 다 사상누각이 되리라. 설혹 S가 배신으로 잠깐 손에 돈을 쥐게 된다고 해도 세상은 단편적으로 끝나지 않는다.

게다가 S는 또 다른 K와 함께 나를 속였다. 말을 맡겨 두었던 K가 길길이 화를 내며, S도 싫고 나도 싫으니, 기마단의 말을 가져가라고 한단다. 그러나 다음날 S는 K와 함께 달콤한 꿈을 꾸고 있었다. S는 이곳저곳에서 말을 수배해서 K의 마방에서 승마장을 하려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S에게 말했다.

아직 젊은 사람이 세상을 그토록이나 어리석게 살다니, 당신이 인간인가? 인생은 길어. 세상 사람들이 다 바보도 아니고. 당신은 학교의 명예 같은 건 생각지도 않고 있지? 정식 승마장에서 수업하는 비용으로 수업료를 받은 뒤, 개인의 배를 불리려 승마장도 아닌 파밭 갈아엎은 곳에서 불법으로 승마 수업을 하는 것. 나중에 당신에게 승마를 배운 사람들도 여기저기 승마장 다녀 보면 당신이 어떤 짓을 했는지 다 알게 될 텐데. 뒷감당을 어쩌려고 하는지 모를 일이로군. 물론 내가 지금 당장 고발이라도 한다면 당신은 끝장이겠지만, 그렇게 하지는 않을 거야. 내 손을 더럽히지 않아도 당신은 저절로 파멸하게 될 테니까.


그러니까, 며 칠 전까지 그 두 배신자들의 이야기는 여기까지였다. 나는 승마에 대한 연구도, 마필산업을 위한 특강도 멈추었다. 아무리 연구해도 결국 욕만 먹고, 엉뚱하게 도용될 것이 명약관화한 상황이었다. 나는 내가 하는 일에만 몰두했다. 그래도 대체로 내게만 무심한 세월은, 바람결에 몇 가지 소식이 들려주었다.

L이 여기저기서 경기를 개최하고 잘 나간다는 소식. 가짜 이력서로 입사한 L의 밑에서 순진한 후배가 일하기로 했다는 소식. L이 더러운 돈을 챙긴다는 소식.

S는 내게 단체문자를 보냈었다. ‘35억 짜리 승마장을 Open 합니다.’ 내 주변의 사정을 아는 사람들은 코웃음을 쳤지만, S는 여전히 주변을 교묘하게 잘 속이고 있는 모양이었다. S가 남의 연구결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는 소식. 결국 K와도 결별하고 미사리에 새로운 불법 승마장을 Open 했다는 소식.

간간히 들리는 소식들은, 어쨌든 지금까지는 배신자들의 선택이 옳았다는 것들이었다. 배신자들도 자신의 선택이 옳았다고, 의리나 정의 따위를 무시하고 자신의 이익을 선택한 것은 정말로 잘 되었다고 확신했을 것이다. 언제든 또 기회만 생기면 남을 배신하고, 가슴 아프게 하고, 이 달콤한 배신의 결과를 누려야지. 배신자들은 슬그머니 미소를 흘리며 오른 손을 가슴께로 들어 올려, 주먹을 단단히 쥐며 결심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직불금 문제로 세상이 시끄러운 요즘, 인생의 다른 모든 사건들처럼 일은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터졌다.

TV 봤어?
아뇨? TV 잘 안보잖아요.
승마계 난리가 났어.
무슨 난리요?
인터넷에서 TV 한 번 봐.

kbs 뉴스 두 꼭지를 한꺼번에 보았다. L의 상사는 TV에 이렇게 인터뷰했다. ‘승마 경기를 통해 마필 산업을 홍보하고, 국산 말 생산과 수요를 늘려서 승마산업을 일으킨다.’ 그건 빙산의 일각일 뿐이고, 인터넷에 다 떠돌고 있는 이미 4년 전의 낡은 이론이다. 그는 국민정서에 맞는 컨텐츠가 문제라는 것을 전혀 짐작도 못하고 있었다. 요즘 한창 회자되는 소통의 문제. 그들은 그동안 단 한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것이다. 연구하고 노력하기 보다는 지구력 경기의 달콤한 결과를 누리고 있었겠지.

어쩌면 예상치 못한 국민저항에 부딪친 정부에서는, 마필축산과 승마산업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 대대적인 감사를 할지도 모른다. 지원 된 예산이 제대로 쓰였는지를 파악하기 위해. 물론 콩고물이 묻은 손은 감추기 쉽지 않다. 호주머니에 넣어도 콩고물은 여기저기서 묻어날 테니까.

공교롭게도 ‘환경오염 무방비의 불법 승마장’은 S가 새로 불법으로 승마장을 시작한 지역에 초점을 맞추어 집중적으로 취재하고 있었다. 아마 S는 지금까지 상당한 투자를 했고, 또 순진한 대학을 속여 자신의 배를 불릴 계획을 진행하고 있었을 것이다. 당장 수업에도 지장을 받을 것이고, 대학에서는 TV에 취재된 불법 승마장에서 수업을 하다 문제가 생길 것을 원치 않을지도 모른다.

농민들에게 돌아갈 직불금이 지주들에게 돌아간 부조리한 상황. 국민들의 승마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승마 대중화와 발전을 위하여 국민들과 농민들에게 돌아갈 지원금을, 일부 승마인들이 대회 개최비와 상금이라는 명목으로 그들만의 잔치를 벌인 상황. 그래도 이 행성에 자정 능력은 있다. 분명히 있다. 영화처럼 단시간에 똑 떨어지게 끝나지는 않지만.

물론 배신자들이 아주 망하지는 않을 것이고, 멀쩡하게 또 일상을 이어갈지도 모른다. 그러나 점차 더 많은 사람들이 문제점을 이야기 할 것이고, 그들의 전횡과 거짓말을 제한할 것이다. 그들은 세상으로부터 신용을 잃고, 조금씩 조금씩 아주 복잡한 단계를 거쳐, 서리 맞은 배추 이파리처럼 말라비틀어질 것이다.

나는 그 결과를 볼 수 없을 것도 안다. 그것은 평생을 두고 벌어질 일들이고, 배신자들의 개인적인 불행이며, 쉽게 풀기 어려운 저주이기 때문이다.


고성(古城) 아래 별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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