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으로 구운 고기

by 김명기 posted Nov 20,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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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으로 구운 고기

장작 난로가 어지간히도 마음에 드셨나보다. 어른은 며칠 동안 참나무 장작을 만드시느라 바쁘시다. 고장 났던 체인 톱을 고치고, 전기톱도 하나 장만하셨다. 물론 새 도끼도.

아이고, 그 꼴난 거 하나 장만해가꼬, 돈을 도대체 을매나 쓰노?
아니에요. 요새 장작 값이 얼마나 비싼데요. 한 짐에 돈 만원도 더 할 거예요. 난로 겨우내 때려면 장작은 직접 만드는 것이 최고지요.

오두막 주변에 넘어진 마른 나무들을 모두 잘라 차곡차곡 정돈해 두었다. 동그란 나이테를 보이며 쌓인 장작더미는 보기에도 아름답다. 어린 시절, 초가지붕아래 쌓여있던 노란 장작들과 불쏘시개 소갈비(솔잎)더미. 동그랗게 눈이 쌓인 초가지붕의 처마에는 고드름 녹은 물이, 댓돌 위 엷고 맑은 살얼음으로 통통 소리를 내며 방울방울 떨어져 내리곤 했다.

8살짜리 오빠는 5살짜리 여동생과 함께 마당과 장독대를 덮은 하얀 눈을 바라보다, 어깨에 한기가 들면 부엌 아궁이로 달려가 부지깽이로 남은 재를 들썩인다. 하얀 재속에 숨어있던 빨간 숯불이 파란 불 꽃을 피우며 살아 오른다. 부엌 한 쪽에 놓은 마대 자루를 열어 감자 몇 알을 꺼내고 재를 헤친 구덩이에 넣어둔다. 어린 콧구멍들은 감자가 익어가는 구수한 향기를 맡느라 반짝반짝 벌름거린다.

장작이 많이 쌓이면 부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하나씩 빼 쓰면 아깝구요.
괘안타. 여는 지천에 널린 게 나무아이가? 나무 솎아 주면 면사무소에서 표창할끼라. 소나무 살리기 해야 한다꼬.

어제 오늘 갑자기 싸늘한 추위가 찾아왔다. 어른은 오히려 신이 나셨다. 드디어 장작 난로의 위력을 보일 때인 것이다. 장작 몇 개를 넣고 새로 개발하신 구이용 삽을 들고 나서셨다. 참나무 장작이 활활 타오르는 난로 속에 삽을 넣고 잠시 달군다.

두텁게 자른 돼지고기에 굵은 소금을 탁탁 털어 뿌리고, 20~30초간 넣어둔다. 치이익! 삽시간에 고기가 구워지며 연기가 솟아오르고, 고기에서 배어 나온 기름은 난로 속에 떨어져 불기둥이 되어 타오른다. 고기 구워지는 고소한 냄새가 주변을 풍요롭게 채우는 순간, 재빨리 고기를 뒤집어 다시 넣는다. 이 타이밍을 놓치면 고기는 숯이 된다. 참나무 장작 난로의 화력은 대단하다.

오빠야. 감자 진짜 맛있다.
타서 딱딱하게 된 부분은 떼어 버려. 강아지 먹게.
감자 더 굽자. 맛있어.
그래. 불을 더 피워야겠다.

끝에 조그만 불이 붙은 부지깽이를 들고 소갈비를 가지러 간 오빠와 동생은, 소갈비 더미에 불을 붙여 본다. 조그만 불길이 금새 파지직! 타오른다. 몇 번 불을 붙이고 끄고 하며 놀던 오누이는 불이 조금 더 커질 때까지 기다려 본다. 어라? 불은 삽시간에 감당 못하게 커져 버렸다. 어린 여동생의 눈도 사발만 하게 커졌다.

오빠야 어떻게 해?
도망치잣!
불이야!

결국 불은 제대로 붙어서 불기둥이 지붕 위까지 솟아올랐다. 온 동네 아저씨들이 모여들어 간신히 불을 껐다. (왜 아저씨들은 낮에도 집에 있었지? 일요일이었나?) 애들 장난으로 커진 불길은 부엌 반쪽을 완전히 태워 먹었고, 오누이는 저녁때까지 집에 들어가지 못했다. 우리는 앞집 뒷문에 숨어 눈을 가리고, 이 소동을 귀로만 듣고 있었다. 이미 40여 년 전 이야기다. 지금은 미국에 있는 여동생. 그녀는 이 소동을 기억할까?

초벌로 익은 고기를 잘라 난로 위에 놓고, 찬찬히 다시 익히며 잘 삭은 백김치에 소주 한잔. 출출하던 입안에 참나무 향기와 부드러운 고기의 결이 크래커처럼 부서져 녹아내린다. 잠깐 고기 맛을 음미하시던 어른이 한 말씀 하신다.

어제 죽은 놈들은 마카 등* 신 인기라.
왜요?
이런 즐거움도 모르고 죽은기 아이가?
하하하, 아마 살았어도 이렇게 즐기지는 않았겠지요.

장작불에 구운 돼지고기 몇 점. 좋은 사람들과 나누는 소주 한 잔. 눈만 돌리면 시리도록 아름다운 초겨울의 산골 풍경. 코끝에 싸아 하게 와 닿는 차갑고 맑은 공기. 그래 맞다. 옛 어른 말씀에도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고 하지 않는가? 목표를 만들고 열심히 일하면서 얻는 삶의 즐거움도 있지만, 저절로 얻어지는 즐거움도 적지 않은 인생이다. 그러니 살면 된다. 눈 질끈 감고, 살아내고, 버텨내고, 그러면 된다.

낙엽마저 떨어져 앙상한 겨울 들녘, 겨울이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는 팔공산. 나뭇가지를 스치는 바람소리, 산까치 울음과 어른의 웃음소리. 소주 한잔에 근심과 시름을 녹인 가산산성 아래 오두막 장작난로 굴뚝엔, 폴폴 하얀 연기가 솟아오른다.


고성(古城) 아래 별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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