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기

어린 연인들에게 헌정한 또꼬마 6V6 싱글

by 항아리 posted Dec 10, 2014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제 아들놈은 원래 지난 6월30일에 입대해야 대한민국 병무행정 일정에 맞습니다.
 2014년 6월30일 입영 통지서엔 분명히 대전지방병무청장의 직인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녀석이 6월초에 자전거를 타던 중 갑자기 달려나온 행인을 피하느라 넘어지면서
손바닥으로 콘크리트 바닥을 짚었는데 네다섯번째 손등뼈가 부러지는 바람에 일 년이 연기되어
대한민국의 병무행정에 같잖은 차질을 끼쳤습니다.

 

 더 큰 문제는 그  녀석이 그 뒤로 집으로 돌아와 민폐의 본보기가 된 것입니다.

"군대 가기 전까지 아빠 하고 지내려고."
 낮12시 전엔 일어나는 법이 없고 밤12시 전엔 자는 법이 없습니다.
 그것만으로도 밤 9~10시면 잠들어서 새벽 4~5시에 깨는 오랜 제 규칙적인 생활이 엉망이 되었습니다.
 

 "아빠, 우리 편의점 옆에 까페 있잖아."
 무위도식 하던  녀석은 요즘 무슨 일인지 인근의 24시간 편의점에 알바를 다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인 바뀌었어."
 "그래서?"
 "전에 까페 여자애 아빠가 되게 싫어했잖아."
 "몹시 이상한 애였지."
 "이번에 새 주인들은 어린 남매지간인데 여동생이 완전히 천사 같아. 완전 달라. 이젠 아빠도 거기 갈 수 있을 거야."
 "아빠는 이제 커피를 직접 내려마신다. 지구상의 어떤 까페도 내가 직접 내려마시는 커피 보다 맛있는 커피를 만들 수 없어."
 "정신차려, 아빠. 있다가 거기 가 볼래?"
 
 아들과 그 까페를 갔습니다.
 동글동글 조약돌처럼 귀여운 여자애와 눈매가 진한 깨끗한 인상의 청년이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여기 열심히 사는 젊은이들이 또 있었구나.

 "귀엽지?"
 "귀엽군."
 "아빠, 저기 좀 봐."
 녀석이 가리키는 카페의 한쪽,
 조그만 노트북, 더 조그만 빵조각만한 앰프내장형 컴퓨터용 스피커.
 거기서 음악 비슷하고 소리 비슷한 것이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들어오면서 봤담마."
 "어떻게 생각해?"
 "무슨 뜻이냠마."
 
 녀석이 여자애와 청년에게 저를 소개했습니다.
 "우리 아빠."
 남매지간인지, 그러나 남매지간 같지 않은 둘은 과도하게 반갑게 인사를 했습니다.
 뭔가 이상하다 싶은 순간,
 "아빠, 여기도 앰프 하나 만들어 주지 그래? 당연히 공짜로. 내가 미리 말은 해놓긴 했거든."
 녀석이 명령했습니다.
 복창도 하기 전에 여자애가 뛸듯이 기뻐했고, 녀석의 입가엔 득의의 미소가 머금어졌습니다.
 어떻게 돌아가는 일인지 눈치채기 어렵지 않았습니다.
 이 개샠....

 

 "네 눈엔 그 두 애가 남매지간으로 보이냐?"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녀석에게 물었습니다.
 "아빤 또 뭘 본 거야? 그 남자를 오빠라고 부르는 거 못들었어?"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지면서 화가 났습니다.
 "네 엄마가 아빠를 평생 오빠라고 부르던걸 잊었단 말이냐."
 녀석의 놀라고 당황한 얼굴에 앰프를 만들어주기로 결정을 했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가장 작은 케이스를 골랐습니다.
 그리고 거기 얹을 부품들을 골랐습니다.
 집에 와서 제 방에 처박혔던 녀석이 슬그머니 기어나왔습니다.
 "만들어 주려고?"
 "방향이 그렇게 흘렀어. 운명이다."
 "기왕 하는 거 소리좋게 만들어 줘봐. 아빠가 전에 만들어줬던 유부녀 것 보다 거 좋게."
 아, 이 개샠....

 
 전원트랜스는 220v가 되는 또 아카이 전원트랜스.
 초크는...마침 다른 써줄만한 게 없어서 어디서 났는지도 모르는 바닥을 뒹굴던 국산으로.
 견고한 플라스틱 보빈, 첨단기술의 총아인 자동권선기로 단번에 후루룩 감은 권선에 영원히 변치 않을 것 같은 똥코어,
복수다, 개샠...
 출력트랜스는 마침 있던 미제 장전축 싱글트랜스로. 이것은 나의 양심.

 볼륨은 치울 쓰레기더미에 섞여 있던 알프스 볼륨을 골랐다가 진공관의 특성을 잡아먹고 깎아먹는 그 못된 성향이 떠올라

차마 못쓰고 AB 100K 스테레오 볼륨으로.  좀 아깝...
 초단관은 미니앰프에 걸맞게 6au6, 출력관은 6v6, 정류관은 6AX5,
 멀티콘도 폼으로 하나 올려주고,
 안에는 소리를 위해서 오일콘도 넣고, 부품들도 가진 것들 중에 가급적 잘 안쓰던 것들 중에서 좋은 것들로.

 

 용도가 바뀌어 버린 케이스이므로 맞춰서 구멍 뚫고 지지고 볶고... 

 

 스피커는 장터에 나온 미제 8인치 페라이트 자석의 풀레인지를 구했는데, 가격도 저렴하고 무엇보다 통이 함께 있어서...
 받아보니 가장 싫어하는 가운데 입술이 하나 더 있는 고깔형.
 가차없이 입숧을 도려내고 가운데는 배꼽만 남긴 뒤 함께 따라온 통에 재장착.

 

 컴퓨터 사운드 출력에 꽂을 미니 스테레오잭과 RCA형 인터케이블을 연결할 수 있는 Y어댑터,

그리고 길이가 좀 필요한 스피커선은 튜브링크에서 엄청난 생색을 내면서 마지못해 협찬.
 "한쪽은 동선, 한쪽은 주석선, 그것이 훤히 보이는 투명비닐피복, 아...이 개같은 스피커줄은 무엇인가?"
 "이 정도면 좋아 죽지. 애들이 보면 눈이 휘둥그래질 초하이엔드 스피커선인데."

 "그 뻔뻔함이 튜브링크를 지탱하는 비결인가?"

 "누가 뻔뻔한지 모르겠네. 괜히 와서 무작정 어댑터하고 긴 스피커줄 내놓으라는 사람이."
 
 "아빠, 그거 뭐야? 컴퓨터에서 바로 앰프로 연결하려고?"
 아들녀석이 내내 저를 감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럼마?"
 "전에는 USB DAC도 달아줬잖아. 그 아줌마...아니, 누난가?"
 "옛날 일이얌마."
 "아빠 차별 쩐다."
 "니가 뭘 알아, 색꺄. 이게 앰프 케이스 더 좋지, 스피커도 8인치로 더 크지. 같은 동네 애들이라고 신경에 신경을 쓰고 있구만."

 "이 스피커는 어디 건데?"

 "몰람마. 그냥 미제야."

 "아빠 양심을 보겠어."

 "넌 내 양심 못봠마."

 

 며칠만에 다 갖추고 어느 정도 테스트를 하고 소리를 잡은 뒤 앰프와 스피커를 싸들고 까페로 갔습니다.
 
 "어머, 어머, 어멋. 너무 좋다."
 여자아이는 감탄사를 연발하고 청년은 싱글벙글 웃음을 참지 못하는 것을 보니 덩달이 흐뭇해지면서 됐다, 싶어집니다.
 
 "달라요?
 녀석이 여자아이에게 묻습니다.
 "완전 달라요. 노래가 귀에 쏙쏙 들어오면서도 귀가 너무 편해. 신기해요. 정말 신기해. 그치, 오빠?"
 "응."
 아이들을 구경하면서 사람의 귀는 다 똑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고마워요. 정말 감사합니다, 아버님."
 아버님? 

 음........
 
  "우리동네 까페다. 그 둘이 잘되길 바라는 마음 정도로 만족하는 것도 좋은 일이야."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녀석에게 말했습니다.
 "둘이 정말 좋아하는 걸 보니까 나도 좋더라."
 "그램마. 그걸로 된 거야."

 
 
 
 
 


Articles

1 2 3 4 5 6 7 8 9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