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장,국민장

by 염준모 posted Aug 15,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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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장,국민장

 

 

Ⅰ.서 론


 국가원수의 직(職)에 있었거나 국가·사회에 현저한 공훈을 남김으로써 국민의 추앙을 받은 자가 서거하였을 경우에는 고인에 대한 애도와 경의를 거국적으로 표시하기 위하여『국장·국민장에 관한 법률 및 동법 시행령』이 정하는 바에 따라 국장(國葬) 또는 국민장(國民葬)으로 거행하게 된다. 국가적으로 가장 격이 높은 장례의식이 국장이며, 그 다음이 국민장으로 분류할 수 있다.

 국장·국민장의 장례의식은 발인제·영결식·장례행진·안장식과 조기(弔旗) 게양 등의 의식으로 나누어 집행되나, 사망자의 유언 또는 유족 대표로부터 특별한 의사표시가 있을 경우에는 의식의 전부 또는 일부를 생략할 수 있다. 또한 고인이 특정 종교를 가지고 있었을 경우에는 본인의 유언이나 유가족의 의사에 따라 그 종교의식을 반영할 수 있다.

 이외에도 사회적으로 명망이 있거나 국가·사회에 끼친 공훈이 클 때에는 민간단체가 중심이 되어 추진하는 사회장(社會葬)이 있다.




Ⅱ. 본 론



1. 국민장



 국가 또는 사회에 대한 공적이 크거나 국민의 신망과 추앙을 받은 사람이 사망했을 때, 국민 전체의 이름으로 고인의 명복을 빌며 지내는 장례식이다. 국민장 역시 국장과 마찬가지로 1970년 6월에 제정된 국장 · 국민장에 관한 법률 및 1989년 11월 개정된 시행령에 따라 국무회의 심의를 거쳐 대통령이 결정한다.

 국민장과 국장의 다른 점은 국장은 국가의 명의로 거행하는 장례 의식이나, 국민장은 국민 전체의 이름으로 장례를 치루며 경비의 일부를 국가에서 보조하며, 장의 기간은 국장보다 2일이 적은 7일 이내로 되어 있다. 또 조기(弔旗)는 국민장 당일에 게양하도록 되어 있으나 국민장 기간에도 조기를 게양하도록 정부에서 조처할 수 있다.

 기타 장의위원회의 인원 구성, 자문에 응하기 위하여 고문의 지명, 집행위원회 기구 및 그 역할, 일반 국민의 애도 표시 등은 국장의 의식과 다름이 없다. 의식 절차 역시 국장과 같이 영결식· 장례행진· 안장식(安葬式)의 순으로 구분하여 거행하는데 의식 방법도 유족이나 유족대표의 의견을 참작해서 결정한다.


 국민장의 선례로는 전 임시정부 주석인 김구(金九)를 비롯해서 전 부통령 이시영(李始榮), 김성수(金性洙), 함태영(咸台永), 장면(張勉), 전 국회의장 신익희(申翼熙), 전 대통령 후보 조병옥(趙炳玉), 전 국무총리 장택상(張澤相), 박정희대통령 영부인 육영수(陸英修)의 국민장이 있었다.

 

이런 면면의 인물로 보아 국민장은 일반적으로 전직 대통령 · 국회의장 · 국무총리 · 대법원장 · 대통령영부인 등이 서거하였을 때 거행하는 것이 관례로 보인다.


 광복 후 최대의 국민장으로는 1949년 6월 26일 사망한 백범(白凡) 김구(金九)의 장례식이 있다. 경교장(京橋莊)에 모셔진 백범선생은 백건(白巾)으로 몸을 싸고 안면을 내어놓고 조객을 받고 6월 29일 입관하였다. 7월 5일을 국장일로 하고 집집마다 조기를 달고 오전 10시 30분 경교장에서 발인제가 있었다. 서울 시립교향악단 및 군악대의 조악에 이어 경례와 취여(就輿)가 있은 후 행진이 있었다. 행렬은 경교장에서 종로 경유 동대문에서 서울운동장에 이르렀다.

 

 

 운구행렬은 6명의 기마경찰대, 12명의 경찰간부, 16명의 태극기 운반대, 합동군악대, 100명의 영여의장대(靈輿儀仗隊), 영여차(靈輿車), 영차후장대(靈車後仗隊), 사진전구의장대(寫眞前驅儀仗隊), 령영(靈影), 사진후구의장대(寫眞後驅儀仗隊), 악대(樂隊), 장의위원(葬儀委員), 명정, 영구전호양위대(靈柩前護讓衛隊), 영구(靈柩), 영구후구호위대(靈柩後驅護衛隊), 상주, 복인(服人), 국가요인(國家要人), 문상객의 순이었다.

서울운동장에서 오후 1시 영결식(永訣式)이 있었다.

 

 

 영결식은 조포(弔砲), 국기경례(國旗敬禮), 애국가봉창, 조악(弔樂), 식사(式辭), 약사보고(略史報告), 조가(弔歌), 분향(焚香), 헌화(獻花), 배례(拜禮), 조문(弔文), 조사(弔辭), 상주분향, 묵상(默想), 조악, 조총(弔銃) 그리고 폐식(閉式)의 순이었다. 서울운동장을 떠난 장례행렬은 을지로로 하여 남대문(南大門)을 경유, 용산서(龍山署)를 돌아서 효창공원에 이르렀다.

 

오후 5시 효창공원에서 하관식(下棺式)이 있었다.

하관식은 개식(開式), 애국가 봉창, 조악, 분향, 헌화, 제문(祭文), 상주분향, 조악, 하관식, 입토(入土), 배례, 조가, 묵상, 그리고 폐식이었다.


 이후 53년도에 이시영(李始榮) 전 부통령, 55년도에 김성수(金性洙) 전 부통령, 56년도에 신익희(申翼熙) 전 국회의장, 60년도에 조병옥(趙炳玉) 민주당 대통령후보, 64년도에 함태영(咸台永) 전 부통령, 66년도에 장면(張勉) 전 부통령·국무총리, 69년도에 장택상(張澤相) 전 국무총리, 72년도에 이범석(李範奭) 전 국무총리, 74년도에 육영수(陸英修) 박정희대통령 영부인, 그리고 가장 최근의 사례는 1983년도 10월에 당시 전두환대통령의 해외순방의 수행원으로 갔다가 미얀마(당시는 '버마')의 아웅산 국립묘지에서 북한의 사주를 받은 한 테러범의 폭탄테러로 인하여 순직한 17명에 대한 국민장이었다. 이 가운데에는 서석준(徐錫俊) 부총리, 이범석(李範錫) 외무부장관, 김동휘(金東輝) 상공부장관, 서상철(徐相喆) 동력자원부장관, 함병춘(咸秉春) 대통령비서실장 등 정부의 아까운 인재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함태영(咸台永) 전 부통령과 함병준(咸秉春) 대통령비서실장은 부자지간으로서 부자 모두 국민장으로 장례의식을 치른 사례를 남겼다.









2. 국 장



 나라에 현저한 공적을 남긴 사람이 사망했을 때 국가에서 모든 경비를 부담하고 국가의 명의로 거행하는 장례의식이다. 왕조사회의 국상(國喪)에 해당하는 의식이다.

 

 이에 관해서는 1970년 6월에 제정된 국장· 국민장에 관한 법률 및 1989년 11월 개정된 시행령에 따라 국무회의 심의를 거쳐 대통령이 결정한다.

 

 

 국장으로 결정되면 정부에다 국장위원회(國葬委員會)를 두어 장의(葬儀)를 준비하는데 그 구성인원을 보면 위원장 · 부위원장과 필요한 수의 위원을 두되 사회의 저명인사나 고인의 친지 및 공무원 중에서 위원장이 위촉한다. 위원장은 회무를 통리하고 위원회를 대표하며 회의를 소집하여 그 의장이 된다. 부위원장은 위원장을 보좌하며, 위원장이 사고가 있을 때는 위원장이 지명한 부위원장이 그 직무를 대행한다. 또 장의에 관한 자문에 응하기 위하여 고문 약간 명을 두는데 이 역시 위원장이 위촉한다.

 

 

 장의위원회에서는 국장 의식의 방법· 일시· 장소는 물론 묘지 선정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항을 결정하게 되는데, 이 결정 사항을 집행하기 위하여 집행위원장 1명과 집행위원 약간 명을 둔다. 집행위원장 및 집행위원은 위원 중에서 위원장이 지명한다.

 

 

국장의 장의기간은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국무회의 심의를 거쳐 대통령이 정하는데 9일 이내로 하고 이 기간 내에는 밤낮 구별 없이 조기를 달며 국민 모두가 경건하게 애도의 뜻을 표한다. 만일 국장 대상자가 서울특별시 이외의 지역에서 서거한 경우에는 당해 지역을 관할하는 지방자치단체의 장(長)이, 외국에서 서거한 경우에는 당해국(當該國) 주재공관장(駐在公官長)이 장의업무를 개시할 때까지 영구봉안(靈柩奉安)에 관한 필요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

 

 

 국장 의식은 영결식· 장의행진· 안장식(安葬式)의 순으로 거행한다. 의식 방법을 결정할 때에는 사망자의 유언이나 유족들의 의견을 참작하며 만일 사망자가 종교인일 경우에는 종교의식을 장례의식에 포함해서 거행할 수 있다. 설령 종교인이 아니라 해도 종교의식을 장례의식에 포함해서 거행하기도 한다.


영결식은 많은 인원이 참석할 수 있는 옥외에서 거행하며 그 진행요령은 다음과 같다.


① 개식(開式)

② 국기에 대한 경례

③ 고인에 대한 묵념

④ 고인의 약력 보고

⑤ 조사(弔辭)

⑥ 종교의식

⑦ 고인의 육성 녹음 근청

⑧ 헌화 및 분향

⑨ 조가(弔歌)

⑩ 조총(弔銃)

⑪ 폐식(閉式)


 영결식이 끝나면 곧바로 장지까지 장의행진을 한다. 장의행진은 고인이 마지막 가는 길이니 가급적이면 도심의 번화가를 모든 국민이 지켜 본 가운데 서서히 행진한다. 운구 행렬이 장지에 도착하면 정해진 장소에 관을 내려놓고 안장식이 거행되는데 안장식의 진행 요령은 다음과 같다.


① 개식

② 고인에 대한 경례

③ 종교의식

④ 헌화 및 분향

⑤ 하관(下棺)

⑥ 성분(成墳)

⑦ 조총(弔銃)

⑧ 묵념 · 진혼나팔

⑨ 폐식


 정부수립 이후 국내에서 가장 격이 높은 장례의식인 국장으로 장례한 사람은 지금까지 '고'박정희(朴正熙) 대통령 한 사람 밖에 없다. 과거 조선왕조시대에 왕이 별세하였을 때 국장으로 거행하던 유습이 오늘날까지 계승되어 온 것으로 보인다.

 '고' 박정희 대통령의 국장에 대하여 간략히 살펴보기로 하자.

 

 

 그는 1961년도에 육군 소장으로 있으면서 5·16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집권에 성공, 5대에서 9대까지 18년 간 대통령에 재직하면서 경제개발이라는 긍정적 평가와 민주주의를 일보 후퇴시켰다는 부정적 평가를 동시에 받으며 우리나라 현대사에 큰 족적을 남겼는데, 1979년 10월 26일 저녁 청와대 인근의 한 청와대 부속건물에서 김재규(金載圭) 중앙정보부장이 쏜 총에 의해 별세하였다. 갑작스런 박정희 대통령의 별세는 국가적으로 당시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으며, 이에 최규하(崔圭夏) 국무총리가 대통령권한 대행이 되어 위기 수습에 나섰다.

 

 

 정부는 긴급 국무회의를 소집하여 장례의식은 '9일장'으로 하여 11월 3일에 '국장(國葬)'으로 치르며,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하기로 결정한 후 총무처를 중심으로 실무작업단을 설치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청와대에 빈소를 설치하고 또 당시 중앙청 광장을 비롯한 전국 각 시·도와 시·군까지 분향소를 설치하며, 전국적으로 관공서 등에 조기(弔旗)를 게양하는 등 전국은 추모와 애도의 물결이 넘쳐흘렀다. 이 때 장례위원장은 당시 최규하(崔圭夏) 대통령권한대행이, 부위원장에는 국회의장과 대법원장이 각각 맡았으며, 장례식장에서 고인에게는 건국훈장대한민국장(建國勳章大韓民國章)이 추서(追敍)되었다.

 

 

 전 국민의 애도 속에 1979년 11월 3일 당시 중앙청 광장에서 영결식이 엄수된 후 장례행진이 세종로와 서울역 앞을 지나 국립묘지에 도착하여 안장(安葬)의식을 거친 후 '국가원수 묘역'에 안장되었다.





3. 사회장



 국가와 사회에 공로가 큰 저명인사가 사망하였을 때 그 사회의 모든 단체의 대표가 연합하여 자발적으로 모여 사회의 명의로 거행하는 장례 의식이다. 사회장은 국장이나 국민장과는 달리 법률적인 근거는 없으나, 우리나라의 발전에 현저한 공훈을 남김으로써 국민의 존경을 받는 인사가 별세하였을 때 고인이 생전에 종사했던 분야의 관련단체가 중심이 되어 각계 인사를 망라한 장의위원회를 구성한 후 치르는 사회 관습상의 한 장례의식이다.

 

 

 지금까지는 대개 애국지사, 전직 3부요인 또는 정당대표, 기타 정치·사회·문화·경제 등의 발전에 현저한 공훈을 남긴 저명인사들이다.

 일단 사회장으로 결정되면 해당 장의위원회가 주관이 되어 장례의식을 준비하게 되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국가 또는 지방자치단체에서는 과거 선례에 따라 장례행렬 통과 시 조악대(弔樂隊)를 파견하거나 교통편의 등 행정적인 지원을 할 수가 있다.

 

 

 이 사회장은 국장과 국민장의 다음으로 예우를 갖추어 거행하는 장례이다. 그러나 정부에서는 직접적으로 장례 절차와 방법에 관여하는 일도 없을 뿐 아니라 국민장처럼 경비의 일부를 국가에서 보조하는 일도 드물다. 단 생존 시의 고인의 업적을 감안하여 훈장을 추서(追敍)하기도 한다.

 

 

 사회장도 국장· 국민장과 같이 장례위원회를 구성하여 장례 절차와 방법 및 장지 등을 결정하여 거행하되 장례의식은 고인의 유언이나 유족 대표의 의견을 따르며 종교인일 경우 종교의식을 영결식에 포함한다. 사회장의 경우 장의 기간도 국장이나 국민장처럼 명시된 바 없고 일반인과 같이 3일장이 될 수도 있고, 5일장이 될 수도 있다. 의식 절차는 역시 영결식 · 장례행진 · 안장식의 순으로 하되 국장이나 국민장에 비해서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영결식의 진행 요령은 다음과 같다.


①개식 

②고인에 대한 묵념

③약력 보고

④조사(弔辭) 또는 식사(式辭)

⑤종교 의식

⑥헌화 및 분향

⑦폐식의 순으로 한다.


 장지로 가는 운구행렬은 별로 다름이 없으나 일부러 고인과 인연이 많은 장소를 거쳐서 가기도 한다. 장지에서 거행하는 안장식 역시 정해진 일정한 격식이 없고 사가(私家)에서 거행한 의식 절차에 따라 거행된다.

 

 

 우리 나라에서 거행된 사회장의 선례로는 서예가 오세창, 대법원장을 지낸 김병로(金炳魯)와 국회의장을 지낸 곽상훈(郭尙勳), 이화여대 총장을 지낸 김활란(金活蘭), 그리고 3 · 1 민족대표 33인의 한사람인 이갑성(李甲成), 성균관대 총장을 지낸 김창숙(金昌淑), 애국지사 이강(李堈) 등의 사회장이 있었다.

 

 

 최근의 예로, 2001년에 있었던 청암 송건호 선생 사회장은 다음과 같다. 선생의 영결식은 2001년 12월 24일 오전 8시 서울 송파구 풍납동 서울중앙병원 장례식장에서 유족인 부인 이정순 여사와 각계 인사 추모객 등 4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사회장으로 엄수됐다.

 1시간30분간 계속된 영결식에는 장례위원장을 맡고 있는 한승헌 전 감사원장을 비롯, 최학래 한겨레신문사 대표이사, 박권상 한국방송공사 사장, 시인 고은씨 및 노무현, 이부영, 권영길 씨등 언론인과 정치인 등이 참석했다.

 

 

 영결식은 한승헌 전 감사원장의 장례 인사에 이어 최학래 한겨레신문사 대표이사, 박형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김태진 동아언론자유수호투쟁위원회 전회장, 이상기 한국기협 회장의 추도사, 유족 및 추모객들의 헌화 등의 순으로 진행됐다.

 

 

 

※참고 인터넷 사이트


http://www.koreasymbol.co.kr   코리아심볼


http://seoul600.visitseoul.net   서울육백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