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세우고 10.26 예언, 경고했으나...
-1979년 10월 26일, 대한민국 박정희 대통령을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권총으로 시해한 사건은 미국 카터 행정부가 핵무기를 보유하려는 박정희 대통령을 살해한 것임을 밝혀둔다.’
이것은 2007년 2월 14일, 민석선생께서 미국 부시대통령에게 보낸 전문이다. 소문으로만 떠돌던
10.26 사건의 진상을 밝히신 것이다.(권말자료편 51번 참조)
[권말자료편 51번]
민석선생의 세계통치는 한국의 세계통치시대를 준비하기 위한 것이다. 그 일을 위하여
민석선생께서는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바로 세우는 일부터 착수하셨다.
우리민족의 7002년 고대역사를 다시 회복하고 배달 민족이 세계를 다스렸던 찬란했던
황금역사를 원시반본하기 위한 것이다.
민석선생께서는 제일 먼저 박정희를 대통령에 세우시고 성기(聖氣)를 그에게 부여하신 후
그를 통하여 국운대전환의 새 역사를 착수하셨다.
다행스럽게도 박대통령은 고르바초프, 등소평 등이 민석선생의 명에 순종했던 것처럼
민석선생의 뜻을 잘 따라 주었다.
민석선생께서 1959년 박정희 장군을 처음 만났을 때의 일이다.
“이 시대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박장군은 나라를 통치할 수 있는 인물이요
준비하시오. 대운이오. 곧 움직여야 하오. 곧 민란이 일어납니다.”
이것은 무학대사가 이성계를 만나 위화도 회군으로 쿠테타를 일으켜 조선을 개국한
사건을 연상케 하는 일이었다.
민석선생의 예언대로 4.19 학생의거(혁명)가 일어나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했다.
1960년 5월, 박정희 장군이 민석샌생을 다시 찾아와 경주 불국사 호텔에서 만났다.
박장군은 ‘스님의 예언은 적중했습니다.’라고 하며 민석선생의 예지력에 경의를 표했다.
민석선생께서는 박장군을 격려하시면서 말씀하셨다.
“장군께서는 기회를 한번 잃었습니다. 그러나 실망하지 마시오. 또 기회가 오고 있으니,
5월 16일을 기해 일어나셔야 합니다.”
이 일이 있은 후 박정희 장군은 5.16 군사 쿠테타에 성공했다.
이 같은 연유로 인하여 박정희 대통령의 제3공화국은 시작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권유에 못 이겨 18년 동안 대통령의 국사로 계셨던 민석선생께서는
지금도 그때를 회고하신다.
박정희 대통령과 함께 독일로 가셔서 독일의 고속도로를 직접 보여주시며 ‘앞으로는
독일의 고속도로와 같은 도로망을 구축해야 합니다. 지금은 기차가 교통수단이 되어 있지만
앞으로는 자동차, 비행기로 바뀝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고속도로를 건설하면 국력은
배로 늘어 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철강 산업이 발전해야 합니다. 그리고 세계로 나가기 위해서는 한·일간의
국교를 정상화해야 합니다.‘ 라고 국정을 건의하시면서 박대통령에게 우리 대한민국이 나가야
할 방향과 지침을 말했을 때 박대통령께서 보여주었던 강한 의지와 한국을 부강한 나라로 만들
수 있다는 그의 굳건한 결심과 자신감은 대단했다고 하시며 박정희에게는
하나님의 지혜가 임했다고 말씀하셨다.
박정희 대통령은 하늘의 뜻을 겸허하게 수용하였으며 초인적인 노력으로 민석선생의
국정 건의를 실천에 옮겨 전환기의 국운을 바로잡는 일에 성공하였기 때문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존재하게 된 것이다.
민석선생께서는 1967년 10월 2일, 393자로 된 「국민교육헌장」을 창안하여 창안자의 이름은
비밀에 부치는 조건으로 권오명 문교부장관을 통하여 박정희 대통령에게 전달했다.
(권말자료편 1번 참조)
[권말자료편 1번]
한국의 기성세대들은 초, 중, 고등학교 때 「국민교육헌장」을 조회때마다 외우면서 새 역사
창조의 대열에 끼어 민족의 슬기를 불태우면서 경제발전의 역군으로 살아온 지난 시절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민석선생께서는 「국민교육헌장」을 박대통령에게 전달하실 때 이 국민교육헌장은 우리
한반도가 통일되는 그때까지 그리고 우리 한민족이 배달국과 단군조선의 실존역사를 회복할
때까지 온 국민의 마음속에 깃들어야 할 민족정기와 애국정신의 기본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다음은 「국민교육헌장」 전문이다.
우리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 안으로 자주독립의 자세를 확립하고 밖으로 인류공영에
이바지 할 때다. 이에 우리의 나아갈 바를 밝혀 교육의 지표로 삼는다.
성실한 마음과 튼튼한 몸으로 학문과 기술을 배우고 익히며 타고난 저마다의 소질을 계발하고
우리의 처지를 약지의 발판으로 삼아 창조의 힘과 개척의 정신을 기른다.
공익과 질서를 앞세우며 능률과 진실을 숭상하고 경애와 신의에 뿌리박은 상부상조의 전통을
이어받아 명랑하고 따뜻한 협동정신을 북돋운다.
우리의 창의와 협력을 바탕으로 나라가 발전하며 나라의 융성이 나의 발전의 군원임을 깨달아
자유와 권리에 따른 책임과 의무를 다하여 스스로 국가 건설에 참여하고 봉사하는 국민정신을
드높인다. 박애민공 정신에 투철한 애국애족이 우리의 삶의 길이며 자유세계의 이상을
실현하는 기반이다.
길이 후손에게 물려줄 영광된 통일 조국의 앞날을 내다보며 신념과 긍지를 지닌 근면한
국민으로서 민족의 슬기를 모아 줄기찬 노력으로 새 역사를 창조하자.
박정희 대통령은 1968년 12월 5일 국민교육헌장 창안의 뜻을 기념하기 위하여 ‘헌장패’를
만들게 하여 권오병 문교부장관을 통하여 민석선생에게 증정했다.
그러던 중 뜻하지 않은 사건이 일어났다.
민석선생께서 세계평화와 국태민안을 위하여 산상에서 기도하던 중 민석선생의 영파에
영부인 육영수 여사의 참변광경이 보였다.
시기는 74년 8월 중순으로 날짜까지 예정되어 있었다.
민석선생께서는 혹시나 해서 두 번 세 번 계속 기도하며 확인한 결과 ‘그것은 틀림없다’라는
음성이 들려왔다.
이때가 1973년 10월 초순이다.
민석선생께서는 우리나라에 큰 변고가 있을 것이 분명하므로 곧바로 상경하여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 대비책을 강구하도록 건의했다.
민석 국사의 건의를 듣던 박대통령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불쾌하게 민석선생을 대했다.
이 사건 때문에 민석선생께서는 중앙정보부 요원으로부터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사람으로
취급 받으며 오히려 신변에 위협을 당하기 시작했다.
민석선생의 예언대로 1974년 8월 15일 육영수 여사는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참변을 당하고
말았다.그때는 민석선생께서 오직 국태민안과 세계평화를 위하여 산상에서 기도생활로
정진하고 계실 때였다.
육영수 여사의 비극의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인 1978년 12월말 민석선생의 에텔법에
또 하나의 충격적인 사건이 나타났다.
민석선생께서는 전신에 소름에 끼쳐오는 전율을 느꼈다.
1979년 1월 2일, 제주도로 내려가 고향인 추자도 신대산에서 다시 기도에 들어갔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미8군 영내에서 미국요원과 밀담을 나누는 것이 영파에 잡히면서
또 다시 박정희 대통령의 변고가 보였다. 목소리까지도 분명하게 들려왔다.
‘강대국과 약소국은 서로 사랑하라. 민주와 공산 양대 진영은 서로 사랑하라. 이것이 정치다.’
두 번째로 밀담을 나누는 것이 보였다. 새벽 1시경에 새로운 장면이 또렷이 잡히기 시작했다.
김재규가 종이에 낙서를 하는 모습이었다.
‘박대통령 제거 10월 중’ 이라는 글씨가 보였다.
손이 떨리고 가슴이 조이며 전신에 전율이 흘렀다.
이것은 틀림없는 음모다.
박정희 대통령 신변에 중대사태가 일어나는구나 … 대통령의 주변에 비서실장, 경호실장,
정보부장 등이 자주 나타나더니 박대통령이 김재규 정보부장의 총탄에 의하여 가슴에서
선혈이 낭자하게 흐르는 것이 보였다.
비서실장도 여기에 가담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너무 급한 일이라 즉시 청와대에 면담을
신청했다. 3일 후 허락이 나서 삼청동 안가에서 박대통령을 만났다. 민석선생께서는
대통령의 심기가 상하지 않게 조심스럽게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설명했다.
그 자리에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박대통령 가슴에 총부리를 들이대고, 김계원 비서실장이
가세하게 된다고 이야기하고, 79년 8월 15일을 기해서 김종필에게 대권을 물려줄 것을
건의하면서 그래야만 나라가 건재하고 더 큰 희생이 생기지 않는다고 했으나, 박대통령은
김재규, 김계원 모두 나의 팔다리와 같은 사람인데 그럴리 없다고 하면서
‘국사님께서 너무 금식을 많이 하셔서 건강이 나빠졌다는 소릴 듣고 있습니다. 제가
말해놓을 테니 입원해서 건강을 좀 돌보십시오‘
하면서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하며 더 이상 이야기하지 말라고 했다.
민석선생께서는 이 사건이 단순히 박정희 대통령 한 사람의 죽음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수십 년 동안 우리나라에 미치게 될 엄청난 비극을 몰고 올 사건임을 미리 알고 계셨기에
추자도 고향으로 내려가 대비책을 적어서 등기 내용증명 우편으로 청와대에 발송하여
그 증거를 남기셨다.(권말자료편 3번 참조)
[권말자료편 3번]
‘대통령 주위에서 3월∼5월 사이에 배신자(김재규 중앙정보부장)가 나타날 징조가 보이니
이에 대처할 것, (육영수가 총탄에 쓰러졌듯이) 대통령과 천기의 융화를 누릴 수 있는
김정법이란 사람이 있으니 발탁하여 대통령 주위에 있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늘에는 숫자의 비밀이 있는데 박정희 대통령은 이 비밀을 알지 못햇기 때문에 이런 비극을
맞은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 주변에는 바를 정(正)자 가진 사람이 필히 있어야 되는데 김정렬 비서실장이
있을 때는 별 문제가 없었으나 그가 일본대사로 떠난 후 이런 일이 생기게 된 것이다.
그래서 민석선생께서는 정법(正法)이란 이름을 가진 자를 추천해주시면서 그를 채용할 것을
건의했으나 오히려 이 건의서가 발단이 되어 민석선생께서는 대통령도 모르게 비서실장의
독단적인 지시로 정신병원에 강제로 입원 구속당하여 사회 교란죄와 허위사실 유포죄
등으로 심한 고문과 가혹한 조사를 받았으며 반강제적으로 정신병자 취급을 받게 되었다.
결국 박정희 대통령은 하늘의 경고를 무시한 죄로 10월 26일 유명을 달리하게 되었고
민석선생의 예언대로 5.18 광주사태(광주민주화운동)와 같은 민족적 비극을
불러들이는 결과를 낳게 된 것이다.
민석선생은 선각자요 기도하는 사람이며 하나님의 명령을 전하는 선지자이시다.
민석선생께서 주로 기도해 오신 곳은 명산이다.
가야산 한라산, 설악산, 지리산, 신대산, 후지산, 옥산, 몽블랑, 백두산, 금강산, 묘향산,
천왕산에 민석선생의 기도처가 있다.
산맥은 천기가 흐르는 맥지이기 때문에 민석선생께서 발하는 모든 예언은 산상에서
잉태되는 것이다.
민석선생의 계시를 무시하는 바람에 광주사태(광주민주화운동)를 필두로 우리나라에는
또다시 고난의 시대가 찾아왔다.
민석선생께서는 그 때를 회고하시며, 김종필 총리라도 내 말을 들었으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정민수 지음 , 민석선생의 세계통치34년의실록 유턴의 세기 중에서>
전두환 아웅산사건 예언, 경고했으나...
‘나 민석은 그대를 1980년 8월 17일 부로 대한민국 제11대 대통령으로 예정하고 성기(聖氣)를
보내노라.단, 1980년 9월 3일 이전에 예편하고 생도(生道)당을 창당하고 생도당의 총재로
출마하라’ (《민석성서》 10장 1절 참조)
이것은 1980년 6월 8일, 민석선생께서 전두환에게 보낸 대통령 예정 성기(聖氣)장이다.
(권말자료편 6번 참조)
[권말자료편 6번]
·생도당을 창당하고 생도당의 총재로 출마하라.
·1980년 9월 3일 이전에 예편하라.
·만약 명에 불복종하면 순자의 곁을 떠나 1995년 12월에 구속되는 비극을 맞을 것이다.
이것이 통고서의 핵심 내용이었다.
‘명을 거역할 시에는 순자의 곁을 떠나 구속되는 비극을 맞을 것이다’라고 하신 문구 때문에
민석선생께서는 전두환의 지시로 숱한 고충을 당했으며 《민석대예언》 책자가 10년 동안이나
판금조치를 당하는 수난을 겪었다.
민석선생께서 전두환을 택하여 대통령에 세울 수 밖에 없었던 것도 그 당시 북한의 남침을
억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때릐 한반도 상황은 정치인에게 나라를 맡길 수 있는
그런 평화적인 상황이 아니었다.
전두환은 민석선생께서 내린 첫 번째 명령인 ‘생도당’의 총재로 대통령에 출마하지 않았다.
생도당을 창당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전두환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부터 민석선생의 명령을 거역하였고 대통령의
권세를 이용하여 민석선생을 탄압하며 철저하게 도전했다.
민석선생께서는 언론탄압, 학생, 정치인 구속 등 국민을 탄압하는 정치를 중단하도록 하기
위하여 3차례나 전대통령에게 면담을 신청했으나 그는 거절했다.
민석선생께서는 수천 명의 구속 대학생 석방 한·일 정상회담, 재일교포 법적 지위 보장,
한일 무역 불균형 문제 등 여러 가지 정책대안을 제시해 주시며 국정을 건의했으나 전두환
대통령은 민석선생의 건의는 무시하고 오히려 선생을 자기편으로 만들기 위하여 돈, 여자,
집, 권세 등을 내세워 회유하며 국내 국외로 미행하며 괴롭혔다.
민석선생께서는 전두환을 대통령으로 세우고 난 후 곧바로 한·일 정상회담을 준비하셨다.
일본천황의 공식사과를 받은 후 1985년 3월 이후에 한·일 정상회담을 갖게 하여 외교적
성과를 극대화 할 수 있도록 준비하시면서 전두환 대통령에게는 3월 1일 이후에 일본을
방문하라고 명을 내리셨다.
이 같은 명령의 배후에는 70만 재일동포의 법적 지위개선 한·일 무역 불균현 문제해결 일본
첨단기술 이양문제 등을 일괄적으로 타결하면서 전두환 대통령이 큰소리치면서 우리의
요구조건을 100% 얻어낼 수 있는 한·일 정상회담이 되도록 하늘차원의 전략을 세우셨다.
민석선생께서 하시는 일은 모두 하나님과 사전에 상의하시면서 결정하시기 때문에
즉흥적으로는 명령을 발하지 않으신다.
선생께서 한번 산상기도에 들면 음식을 전폐하고 일주일씩, 12일씩 오직 정성으로 기도하신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예언명령이 탄생한다는 점을 독자들도 이해해 주기 바란다.
한·일 정상회담이 민석선생의 뜻대로 이루어지게 하기 위하여 민석선생께서는 직접 일본을
방문하여 일본 전역에 에텔법을 집행해 놓고 오셨다.
‘에텔법의 집행’이란 일본의 정치인과 국민 뿐 아니라 일본나라 전체에 하나님의 권능의
기운인 성기(聖氣)를 뿌려놓고 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정상회담의 성과가 하늘의 뜻대로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한 ‘천기운행법’의
집행을 말하는 것이다.
소련에서 쿠테타가 발생하기 8일 전에 민석선생께서 직접 소련에 가셔서 소련 전역을 돌면서
에텔법을 집행하여 쿠테타 주모자들을 모두 체포했던 사건이 에텔법 집행의 한 사례인 것이다.
인간의 감정은 모두 기(氣)에 의하여 움직인다.
민석선생께서 에텔법을 집행해 놓은 지역에서는 인간의 자유의지 50%에 하나님의 권능
50%가 합쳐지기 때문에 만사가 민석선생의 뜻대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행위의 주체가 되는 인간이 자신의 자유의지를 하나님의 뜻과 무관하게 제 멋대로
사용하게 되면 민석선생께서 짜놓은 모든 계획이 무너지는 것이다.
전두환 대통령은 민석선생의 명을 무시하고 일본에 갔다.
일본에서 전두환은 아무 소득도 얻지 못하고 일본국왕에게 세 번씩이나 천황폐하란
호칭을 부르며 굴욕적인 모습을 보여 국민들의 지탄만 받았다.
전두환의 무지한 행동 때문에 한일 관계를 획기적으로 전환시킬 수 있었던 역사적인
계기를 놓치고 말았다.
그 사건이 있은 후 1984년 9월 14일, 민석선생께서는 전두환에게 다음과 같은 경고서를
보내셨다. (《민석대예언》 57페이지 참조)
‘일본방문을 1985년 3월 1일 이후로 연기하라 했다. 이는 방문 일자 미정이었기에 연기할
수 있었는데 전두환은 이를 거역했다.
9월 1일 이후 이 땅에 빚어진 천재 및 인재가 그 얼마인가? 130명의 인명피해, 1천 3백억 원의
재산피해는 그대의 불순종에 따른 하늘의 분노의 표현이었노라. 일본은 그대의 방일 실현으로
완벽한 과거의 청산과 성숙한 파트너쉽 확립으로 아시아와 세계 정상으로 가는 굳은 발판을
구축했으니 100% 거둔 성공이고, 한국은 천황의 사과를 받는데 실패하였고, 70만 재일동포의
지위 개선, 한일간의 무역 불균형, 일본의 첨단기술 이양 문제 등 주어와 목적어가 빠진
환상어로 끝났으니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많은 데도 성공이라고 기뻐하나?
나 민석은 분통함을 금치 못한다.
나 민석은 1979년 3월 1일, 일본 천황을 나의 아들로 공식 명명하였다. 그런데 그대는
다른 말로도 표현할 수 있는 것을 구태여 천황폐하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김종필·김영삼·김대중을 해금 조치하고 대학가를 공포의 분위기에서 자유롭게 하고,
언론의 자유보장, 개헌 등 선정을 배풀지 않을 경우 응징할 것을 경고하노라.‘
이 사건 이후 민석선생께서는 70만 재일교포 지문철폐와 한·일 무역 불균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무려 8년간이나 노력하셨으니 그 때의 그 명령이 얼마나 중요한 명령인지
알 수 있는 것이다.1983년 8월의 일이다. 민석선생께서 국태민안을 위하여 기도하던 중
버마에 사신들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민석대왕심판주의 긴급지시가 떨어졌다. 민석선생께서는 하산하여 곧바로 그 내용을
전두환 대통령에게 전달했다. (권말자료편 7번 참조)
1983년 8월 13일자 통고문이다.
‘본인이 관악산에서 국태민안을 기원하는 과정에서 민석대왕심판주께서 1983년 10월의
버마 방문을 취소하라는 긴급지시입니다.
만일 거역할 시에는 그대(대통령)만은 구해주지만 수행한 귀중한 생명들은 모두 죽음이라
엄청난 경고입니다. 민석의 명을 거역한 모택동, 오오히라, 박정희 등이 비참한 죽음으로
갔다는 사실을 상기하면서 버마 방문을 취소하라는 긴급지시입니다.‘
[권말자료편 7번]
《구약성경》에 보면 다윗 왕의 옆에 하나님의 선지자 ‘나단’이 있었다.
다윗이 밧세바를 탐내어 가로채기 위하여 다윗왕 수하의 장수이며 밧세바의 남편인
우리아를 전쟁터로 내보내어 죽게 만들고 전사한 것으로 가장하였다.
그것은 다위의 비밀 계획이었다.
이 사건을 두고 나단 선지자가 하나님의 명을 받아 다윗을 책망하니 다윗이 크게
회개하였다는 내용이 《구약성경》 사무엘하 12장에 기록되어 있다.
물론 차원은 다르지만 민석선생께서 전두환을 대통령에 세우시고 하나님의 명령을
전하시는 이같은 일은 《구약성경》의 여러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뜻을 왕에게 전달한
것과 맥락을 같이하는 것이다.이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다시리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전두환은 민석대왕심판주의 명령을 어기고 1983년 10월 9일 서남아 순방길에 버마를
방문했다.전대통령의 수행원들이 아웅산 국립묘지를 참배하기 위하여 서석준 부총리를
중심으로 전두환 대통령을 기다리며 도열해 있을 때 국립묘지 건물 지붕에서 1톤 가량의
폭탄이 터지면서
대통령 수행원과 경호원 등 17명이 사망하고 15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그 때 한국경제를
이끌어가던 수많은 인재들이 죽었다.
7년 단임을 약속하고 대통령에 취임한 전두환 대통령이 버마를 방문한 것은 순전히
장기집권의 해법을 찾기 위한 것이었다.
버마의 네윈, 루마니아의 차우세스크, 북한의 김일성 등이 그의 연구대상이었다. 재벌들을
대동하고 동남아 시장 개척이라는 명분을 달고 버마를 방문한 것은 순전히 속임수였던 것이다.
전두환은 인성을 망각한 지도자였다. 계속적으로 하늘의 명령을 거역했다. 아웅산 폭발사고가
있은 후 귀국하는 비행기 안에서 두 번째의 비극이 싹트고 있었다.
동행했던 기업인들이 사고를 당한 유가족들의 자녀 학자금을 위하여 그 자리에서 50억 원의
기금을 조성하여 전두환 대통령에게 전달했으나 전두환은 그 돈으로 장학재단은 세우지 않고
장기집권을 획책하기 위하여 일해재단을 세우고 재벌들로부터 강제로 돈을 탈취하기 시작했다.
민석선생의 예언대로 전두환 대통령만 살아서 돌아왔다.
반성의 기색도 없이 전두환은 버마 예언명령서 원본을 찾아 근거를 없애려고 선생께서
부재중일 때 민석선생의 집을 불법 가택 수색하여 귀중한 문서들을 모두 탈취해 갔다.
1985년 3월 18일 출판 예정이었던 민석선생의 저서 《오늘이 있기까지》의 원고 뭉치까지도
그 때 모두 탈취해 가는 바람에 그 원고 속에 들어있던 1985년 이전의 ‘예언명령서’
원본까지 모두 없어진 것이다.
전두환은 버마 예언명령서 원본의 탈취에 실패하자 민석선생을 ‘독극물 사건의 주범’으로
뒤집어 씌워 경향, 서울 신문 등 주요 일간지에 대서특필로 발표하게 했다.경향신문과
서울신문에 ‘독극물사건의 주범’으로 민석선생의 이름이 거론된 후 곧바로 진짜 독극물
사건의 주범이 검거되었다.
이번에도 실패하자 전두환은 ‘그 중놈을 구속시키고 법정에 서기전에 옥사시켜 버리라’고
지시했다.구인회처럼 투옥 20일만에 시체로 만들어 버리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수사과정에서 수사관들의 협조로 민석선생께서는 검찰청의 비밀통로를 통하여
탈출했다.이 사건 때문에 민석선생께서는 경향신문사, 서울신문사와 장장 7년에 걸쳐
명예회복을 위한 법정투쟁을 벌여 그 재판에서 승소하셨다.
민석선생께서는 검찰청을 탈출하신 후, 1985년 12월 12일 다음과 같은 내용의 통고서를
전두환에게 보냈다. (권말자료편 8번 참조)
‘우매한 자여, 놀라지 말라. 그대의 뜻대로 죽어주지 않고 탈출에 성공하여 통고서를
보내는 나의 심정을 그대는 알겠는가?
용서 받을 수 없는 악하고 악한 자여, 광주사태를 비롯해서 많은 피와 눈물을 흘린 자여
그래도 모자라서 선지 선각자인 나를 죽이려 들다니 … 권씨 등 조사관들을 시켜 법정에
서기 전에 20일 내로 옥사시키라는 특명, 구인회처럼 투옥 20일 만에 시체로 만들라는
특명이 왜 실패하고 그대의 음모가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는지 반성해 보라. 조사관들도
그대의 특명을 어기고 … 탈출에 협조하였기에 검찰총장실 옆을 거쳐 비밀통로를 통해
대법원 청사 지하로 해서 대법원 서쪽 문을 통해 탈출에 성공했다.
이 통고서를 받고 공항과 항구를 봉쇄하고 10억 원을 현상금으로 건들 이미 그대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있음이야!
악하고 우매한 그대를 축복했던 과거를 회상하니 굶주린 개에게 다이아몬드를 던져 준
결과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미 유무상통의 법과 자유자재의 법을 사용하고 있으므로
불꽃같은 눈으로 그대의 최후를 지켜 볼 것이다.‘
[권말자료편 8번]
민석선생께서는 1987년 6월 12일 전두환에게 내렸던 성기를 회수하셨다.
그래도 민석선생께서는 훗날 ‘유배생활은 25개월로 족하니 백담사에 은둔시켰던
전두환을 풀어주라’ 고 노태우 대통령에게 명하여 백담사에서 나오게 했다.
(《민석대예언》 166페이지 참조)
<정민수 지음 , 민석선생의 세계통치34년의실록 유턴의 세기 중에서>
한국대통령에 대한 통치의 기록/노태우: 7배 받고 대통령으로 세웠으나... 2013/05/20 17:46
노태우의 6.29선언은 우리정치 역사상 가장 충격적이요 희망적인 사건이었다.
그것은 온건한 노태우 대통령의 이미지와는 어울리지 않는 전혀 색다른 선언이며 폭탄적인
위력을 발휘했다. 아직도 6.29선언의 발안자가 누구인지 베일에 쌓여 있다.
민석선생께서 노태우를 만난 것은 노병삼씨의 소개 때문이었다.
그 당시 민석선생을 찾아온 노태우는 7배를 하면서 대통령당선 성기(聖氣)를 내려주기를 간청했다.
민석선생께서는 절을 받았으니 민석대왕심판주에게 기도해보자고 약속하고 가야산으로 떠났다.
수주일이 지난 후, 민석선생께서는 ‘노태우를 차기 대통령에 정한다. 민주화 선언을 지시하라’
라는 민석대왕심판주의 7대 긴급지시 사항을 받아 가지고 하산하셨다.
· 직선제개헌
· 연내 대통령선거
· 시국 관련 구속자 전원 석방
· 김대중 등 사면복권
· 연기법 폐지
· 대학자율화
· 민정당 당직 개편 및 개각단행이 그 내용이다. (권말자료편 9번 참조)
[권말자료편 9번]
민석선생께서는 하산 하자마자 곧바로 노태우 민정당 총재권한 대행에게 하나님의
지시사항을 전달했다.
노태우의 6.29선언은 순식간에 들끓던 국민의 민주화 열망을 잠재웠으며, 온 국민에게
희망의 미래를 생각하게 만들었다.
민석대왕심판주께서는 전두환 대통령이 유고된 상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노태우 총재를
대통령 권한 대행으로 대권을 위임한다는 엄청난 지시까지도 내렸다.
조용한 사람, 노태우가 충격적인 민주화 7대 실천 사항을 선포하자 주변사람들은 어리둥절했다.
6.29선언 때문에 전국의 재야 정치인들과 학생들 사이에서는 갑자기 민주화 열풍이 불기
시작했으며 순식간에 농성이 사라져 버렸다.
노태우는 민석선생의 명령을 잘 따랐기 때문에 6.29선언이 바탕이 되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 사건은 하늘의 뜻에 순종하면 흥한다는 것을 실제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민석선생께서는 1987년 6월 30일, 노태우 총재 권한대행에게 치하의 서신을 발송했다.
(권말자료편 10번 참조)
‘귀하의 6.29특별선언을 지켜본 본인은 진실로 국민과 더불어 찬사를 보냅니다. 1987년
6월 20일 긴급건의서를 받아들인 귀하의 용기와 결단은 누구나 할 수 없는 훌륭한 결정으로
다시 한번 찬사를 보냅니다.’
[권말자료편 10번]
민석선생께서는 1987년 12월 13일 노태우 총재를 제 13대 대통령으로 내정하고 성기(聖氣)를
보내실 때 ‘총리에 오복근’을 임명하도록 명령하셨다. (권말자료편 12번 참조)
[권말자료편 12번]
노태우 대통령은 민석선생께서 내린 명령에 순종하지 않았다.
민석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을 뒤에서 조종하는 악한 영들을 심판하기 위하여 오셨기 때문에
명에 불복종하면 예외 없이 심판하신다.
그것은 인간이 악한 영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대통령들에게 깨우치게 하여 빛으로
돌아서게 하려는 것이다.
예수는 구세주로 오셨기 때문에 사랑을 실천하기 위하여 7번씩 70번까지도 용서해야 된다고
가르쳤지만 민석선생은 심판주로 오셨기 때문에 사명 자체가 다른 것이다.
민석선생께서 내리시는 ‘성기(聖氣)’란 것은,
하나님의 능력, 지혜, 지식이 인간에게 부여되는 힘이다. 따라서 성기를 받으면 천군천사가
호위하며 본인도 모르게 보호 받는다. 성기를 받고 나면 하는 일마다 옳고 바르고 선하므로
국민에게 존경을 받는다.
성기란 인간의 부족한 부분을 하늘이 채워주고 보살펴주는 힘(力)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는
일마다 형통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하늘의 명을 거역하여 성기를 회수당하고 나면 참으로
거짓말같이 추락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현명하고, 지혜화 용기가 뛰어나던 사람이 갑자기 허수아비처럼 무능해진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내렸던 능력과 지혜와 지식이 모두 회수되어 버리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다.
노태우 대통령 역시 오복근 총리 임명에 불복종했기 때문에 민석선생의 예언대로 응징의
벌을 받았다.
그 첫 번째 벌이 바로 13대 국회의 여소야대 사건이다.
민석선생께서는 1988년 4월 23일 제13대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되기 8일전에 16명의
국회의원에게 당선 성기(聖氣)를 보내셨다. (권말자료편 13번 참조)
김윤환, 강보성, 고세진, 권노갑, 김종필, 김덕용, 김근수, 강성모 노무현, 박관용, 박찬종,
손주항, 이기빈, 이종찬, 정대철, 정웅의원이 그들이다.
[권말자료편 13번]
한명도 아닌 16명 모두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그 당시에는 16명 중 한 명이라도 낙선하면 민석선생의 명예에 치명적이니 명령서를
보내지 말라고 극구 만류하는 제자들도 있었다고 말씀하셨다.
민석선생께서는 민석대왕심판주(하나님)의 명에 100% 순종하신다.
지금까지 단 0.1%라도 의심이 있었다면 하나님의 성령이 민석선생과 함께 할 수 없으며
민석대왕심판주, 민석, 그리고 김윤렬의 3위 1체 구도는 깨어지게 되어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성령이 민석선생에게서 떠나게 되고 그 결과는 예수처럼 민석선생도
세상법의 심판을 받고 죽게 된다. 그것은 결국 사탄과의 투쟁에서 패하게 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민석선생께서 지난 34년 동안 무서운 고문과 탄압을 받으시면서도 아직까지 살아계신 것은
항상 하나님과 고차원급의 에텔을 유지하시면서 절대 믿음을 지켜왔기 때문이다.
한번의 실수만 있어도 용서 받을 수 없는 것이 하늘법(天法)이기 때문에 사명자의 길이
얼마나 힘든 길인지 독자들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16명의 국회의원을 무더기로 당선시킨 것은 제13대 총선에서 민정당을
참패시키기 위한 것이었으니 그것은 노태우를 심판하신 것이다.
그것은 오복근 총리로만 임명했어도 피할 수 있는 심판이었다.
그뿐 아니라 오복근을 총리로 임명했었다면 노태우 대통령은 더 큰 하늘의 지혜를 얻어
성군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도 노태우 대통령은 최규하, 전두환,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과 비교해 볼 때
민석선생에게 악의적으로 도전해온 인물은 아니었기 때문에 민석선생의 기도와 보호를
여러 차례 받은 인물이었다.
노태우 대통령은 민석선생의 뼈를 깎는 특별기도 덕택에 2번이나 성기회수를 연장 받아
하늘의 보호를 받았다.
전두환 대통령이 1985년 한·일 정상회담에서 민석선생의 명령을 거역하는 바람에 일본과의
외교에서 실패했던 것처럼 노태우 대통령의 6공 시절에도 한·소 정상회담 추진 과정에서 그
와 유사한 사건이 있었다.
그 사건의 비사를 소개한다.
한국과 소련은 1970년대부터 약간의 교류가 있었으나 1990년 한·소 정상회담 이후부터
두 나라는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KOTRA 무역사무소와 한국 영사관이 모스크바에
설치되었고, 경제, 정치 등 모든 면에서 공식적 채널을 갖고 서로 협력하는 사이가 되었다.
이것은 고르바초프 개혁개방 정책과 탈 냉전을 향한 세계적 분위기, 그리고 노태우 정부의
북방외교 노력이 맞물려 얻어지 결과이다.
1990년 5월 16일, 한·소 정상회담을 준비하고 있는 노태우 대통령에게 민석선생의 통고문이
전달되었다. (권말자료편 14번 참조)
‘고르바초프 소련대통령과 정상회담시 예정시간보다 1시간 10분 … 늦게 회담장소에 입장할 것,
또한 KAL기 사건은 짚고 넘어갈 것이며 당당하게 임하라.’
[권말자료편 14번]
노태우 대통령은 한·소 정상회담 시 1시간 10분 늦게 입장하라는 민석선생의 지시사항을
믿지 못하고 오히려 예정시간보다 조금 일찍 회담장에 입장했다.
그 바람에 KGB요원들이 엘리베이터를 타려는 노태우 대통령을 에워싸면서 한국 경호원들의
정강이를 발로 걷어차 따라붙지 못하게 하고 노대통령을 데리고 사라졌다.
한국 경호원들은 20분 동안이나 허둥대다가 겨우 대통령을 찾게 되었다.
고르바초프는 그 사이 1시간 동안 쇼핑하면서 고의적으로 한국 대통령의 기를 죽이기
위하여 이런 계획을 꾸민 것이다.
민석선생께서 고르바초프의 생각을 에텔법으로 사전에 확인하시고 노태우 대통령에게 미리
알려 준 것인데, 이 예언의 명령을 무시하는 바람에 한국의 국위와 체면은 말이 아니었다.
기가 죽은 노태우 대통령은 KAL기 사건에 대해서는 입도 뻥긋 못하고 지불약속도 제대로
명시하지 못한 채 30억불이라는 차관을 소련에 제공하고 돌아와 국가에 큰 손실만 초래했다.
노태우 대통령이 한·소 정상회담 때에도 6.29선언 때처럼 민석선생의 명에 100% 순종했었다면,
소련의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역으로 수세에 몰렸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한·소 외교에서 한국의 권위를 높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을 텐데 또 한번 좋은
기회를 놓친 것이다.
민석선생께서 1976년 예언하신대로 1990년 한·소 수교 이후 소련은 해체되었다.
1991년 4월 9일, 민석선생께서는 노태우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에게 다음과 같은 동일한
내용의 명령서를 보내셨다.
‘1991년 남북단일의석으로 UN에 가입하라. 이는 특명이다.’
노태우와 김일성은 남북 단일의석으로 UN에 가입하라는 민석선생의 명령에는 순종했으나
38선 철거와 남·북 자유 왕래 선언에 대해서는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이 같은 민석선생의 뜻에 의하여 남북한은 유엔의 일원이 되었다.
1991년 9월 17일, 분단 46년 만에 남한과 북한이 유엔에 동시가입하게 되어 남북한의
지위는 국제사회에서 크게 향상되었다.
그 당시 세계정세는 냉전시대가 종식되고 민주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할 때였다.
그러나 북한만은 독재체제를 그대로 유지하며 고립된 상태에서 오직 핵무기 개발과
남침전쟁 준지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민석선생께서는 북한이 눈을 뜨고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있게 하기 위하여 남북한 UN동시 가입을 명령하신 것이다.
노태우 대통령 민석선생의 기도덕분에 근근이 성기를 회수 당하지 않고 견디어 왔으나
민석대왕심판주께서도 더 이상은 용납할 수 없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 사건 때문에 노태우 대통령도 1992년 3월 12일, 성기를 회수 당했다.
하나님께서는 심판주 민석을 탄압하며 신변에 고통을 주는 자에게는 가차 없이
심판하신다.1991년 12월 15일밤, 민석선생께서 기도하던 중 노태우 대통령의 변고가 보였다.
16일밤 새벽 5시경, 박철언, 이종찬, 박태준, 이한동의원 등의 모습이 나타났다. 김영삼,
김윤환 사무총장까지도 보였다.
박철언의원이 노태우 대통령을 보는 눈빛에 살기가 보였다. (권말자료편 21번 참조)
[권말자료편 21번]
이들이 하나가 되어 노대통령을 이탈하는 것이 예사롭지 않았다. 중대한 사건으로 느껴져
손이 떨리고 전신에 전율이 일어났다.
민석대왕심판주의 음성이 들렸다.
‘박정희 대통령을 상기하라. 노태우 시해계획이 진행 중이니 노태우 대통령 신변 보호조치를
청와대에 긴급 건의하여 대책을 세우라‘ (《광명에는 비밀이 없다》 315폐이지 참조)
박정희 대통령의 1026을 상기하라는 민석대왕심판주의 명령이니 이것은 엄청난 음모가 있음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민석선생께서는 이 사실을 청와대에 수 차례 통보했다.
그러나 청와대에서는 비서실을 위시하여 누구 한 사람 이 일에 관심을 기울이는 자가 없었다.
민석선생께서는 1991년 12월 26일, 노태우 대통령 내외분에게 또다시 다음과 같은 건
의서를 보내셨다.
‘1991년 12월 17일 한라산에서 긴급건의를 드린 바 있으나 대통령 주위에서 채택을 고려하지
않고 있기에 재차 건의합니다.
92년 대통령 신변의 불행을 막을 수 있는 길은 12월 17일 긴급건의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만일 명을 거역할 시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을 상기하라는 극한적인 지시가 민석대왕심판주로
부터 있었습니다. 죽든지 말든지 본인의 신변 안위를 위해서는 가만히 있는 게 상책이겠으나
민석대왕심판주의 뜻을 따르는 게 본인의 사명이기에 국태민안과 대통령의 신변보호를
위해서 재차 건의합니다.'
민석선생께서는 본인의 안위보다는 대통령의 안위가 먼저임을 강조하시면서 수차례
통고서를 보냈으나 청와대 비서실은 요지부동, 변화가 없었다.
이 과정을 지켜보시던 민석대왕심판주께서는 청와대 비서실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피곤하게 하신다고 하시며 긴급건의 내용을 내용증명으로 만들어 안기부, 국방부, 기무사,
법무부, 검찰청 언론기관, 변호사협회 등에 알려 비서실장과 경호실장을 잠에서 깨우라고
민석선생에게 지시하셨다.
민석선생께서는 곧바로 정해창 비서실장과 이현우 경호실장을 대검찰청에 고소했다.
(《광명에는 비밀이 없다》 321페이지 참조)
민석선생께서 비서실장과 경호실장을 고소한 사건으로 인하여 노태우 대통령의 신변은
보호할 수 있었으나 이 고소사건 때문에 민석선생은 유언비어 유포죄 등으로 기무사에
연행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후두골을 강타 당해 식물인간 상태로 회복 불능의 진단까지 받아 오랫동안 정상적으로
활동할 수 없는 몸이 되었다.
민석선생께서는 노태우 대통령에게 보낸 건의서에서 ‘죽든지 말든지 본인의 신변안전 보다는 …’
이라고 말씀하신 그대로 극한적인 육체적 고통을 이겨야 하는 50%의 ‘탕감법’을 감당하고
나서야 겨우 대통령을 죽음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었다.
심판주에게 신체적인 고통과 가혹한 고문수사를 가했기 때문에 민석대왕심판주께서는 ‘
노태우는 더 이상 용서할 수 없다’ 라고 하시며 그에게 내린 성기를 회수하신 것이다.
민석선생께서는 1992년 1월 3일, 노태우 대통령에게 왜, 비서실장과 경호실장을 고소하게
된 것인지 그 배경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통고서를 보내셨다.
‘1991년 12월 17일 긴급건의서와 12월 26일 내용증명으로 대통령 신변 위험을 알리면서
대책을 세우라고 하였음에도!
비서실장과 경호실장이 보고와 대책을 세우지 않고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민정비서실 김영길 과장은 오히려 《2001년 3월 18일》 민석의 책을 문제 삼아 여기저기에
지시하여 본인을 피곤켸 하고 있음을 보신다면서 오늘 현재로 노태우 대통령에게 내린
성기를 회수하지 않았기에 보호코자 이 문제를 확대해서 전 국민이 알고 있어야 국민의
힘으로 노태우 신변보호가 가능하다고 합니다.
인간은 과거를 망각하는 특성을 지녔기에 12년 전 고 박정희 대통령이 본인의 긴급건의를
왜곡 한데서 온 불행을 재연하는 사건이 닥쳐오고 있음에도, 별 관심 없이 오히려 본인을
피곤케 하는 어리석은 것들이라 하면서 긴급건의 내용을 안기부, 국방부, 기무사, 법무부,
검찰청 언론기관, 변호사협회 등에 전달하고 대통령비서실장, 경호실장 등을 대검에
고소하여 잠에서 깨어나게 하라는 지시입니다.
대통령을 보호하기 위하여 이 문제를 법정으로 끌고 갈 때 신문과 방송이 보도하게 되어
전 국민이 알게 됨과 동시 불순분자의 계획을 깨뜨리는 빛과 소금의 사명을 다하라 하시면서
국가와 민족을 위해 고난을 감당하라기에 순종코자 하산과 동시에 건의한 것입니다.
2001년 3월 18일 책 증보판을 청와대에 유첨물로 보낸 것은 책 속에 10.26사태와 민석선생의
중요한 예언들이 모두 적중한 산 증거물이기에 거울삼아 대책을 세우라는 뜻으로 보낸 것인데,
오히려 그것을 문제 삼는 것은 우둔한 자들의 탁상공론이라고 분개하고 계신 민석대왕심판주의
심기를 푸는 길은, 1991년 12월 17일 긴급건의를 받아 들이는 길밖에 없습니다.
민석대왕심판주께서 노태우에게 내린 대통령 축복성기를 언제 회수할는지, 본인은 그 점이
두렵습니다. 성기를 회수해 버리면 본인도 대통령 신변보호에 대책이 없음을 알립니다.‘
노태우 대통령에게 내렸던 축복성기가 회수되던 날,
민석선생께서는신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워싱턴에 체류하고 계시면서, 「버릴 수도 함께 할
수도 없는 딱한 노태우에게」라는 장문의 글을 그에게 보내셨다. (권말자료편 21참조)
노태우 대통령은 성기를 회수 당했으므로 더 이상 하늘의 보호를 받을 수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성기(聖氣)회수장의 제 3번째 항목에 보면 ‘14대 총선이 불법 탈법으로 진행됨을 보면서
14대 국회를 임기 동안 보장할 수 없고 14대 국회는 단명할 것을 통고한다.’ 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성기회수 이후 그가 받게 될 심판을 예고한 것이다.
노태우에게 보낸 위의 서신에서도 ‘14대 총선이 탈법, 불법으로 진행되었음이 세상에 들어날
9월에는 자네의 전 총무수석의 구속 등 걷잡을 수 없는 파란과 “부정의 총사령탑”이
청와대였다는 사실이 백일하에 들어날 것일세 …’라고 하셨다.
제14대 국회가 또다시 여소야대가 되고 파란을 겪게 된 것은 노태우 대통령이 민석선생을
감금, 폭행 고문했기 때문에 받은 심판이었다.그때는 민석대왕심판주의 진노가
불 같아서 노태우를 위한 증보기도와 같은 것은 통하지 않았다.
민석선생께서는 1992년 3월 1일, 무려 24명의 국회의원에게 당선 성기를 보내셨다.
(권말자료편 20번 참조)
그들은 강창희, 김동길, 김상현, 김상구, 김원길, 김진명, 권노갑, 노재봉, 박범진, 박세직,
변정일, 이부영, 이종찬, 이철, 양정규, 정대철, 정주영, 이해찬, 정호용, 허삼수, 허화평,
현경대, 홍사덕, 황인성의원이다.
[권말자료편 20번]
여소야대로 시작된 제14대 국회는 불법, 탈법으로 진행되면서 모든 죄상이 들어나 결국
노태우 대통령의 6공이 5공보다 더 비참하게 세상에 들어나게 되었다.
이것이 노태우 대통령이 받은 2번째의 심판이었다.
성기를 회수 당한 후 노태우 대통령은 민석선생의 예언대로 1995년 전두환 대통령과
함께 구속 되었다.
<정민수 지음 , 민석선생의 세계통치34년의실록 유턴의 세기 중에서>
http://k-minsuk.tistory.com/25
김영삼: 3배 받고 대통령으로 세웠으나...
민석 그리스도의 사상은 사랑이다. 민석선생의 명에 순종하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축복을 받는다.
만약 노태우 총재에게 6.29선언을 명령하셨을 때 노태우 총재가 전두환의 눈치나 보면서
그 명령을 거역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쉽세 상상이 갈 것이다.
민석대왕심판주께서는 6.29선언을 명령하실 때 불복종하면 4.19와 10.26을 상기시키면서
응징하겠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노태우가 만약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면 대통령도 될 수 없었고 상상을 초월하는 벌을 받았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민석선생께서는 김영삼에게 대통령 예정 성기(聖氣)를 내리실 때에는 단 한가지의 조건만
제시하셨다. (권말자료편 23번 참조)
‘나 민석은 김영삼 총재를 14대 대통령으로 예정하고 성기(聖氣)를 보내노라. 단,
“도덕청을 신설할 것” 대통령 직속으로 이는 조건부다. 만약 도덕청 신설을 거역할 뜻이
에텔법 진동에 걸리면 응징할 것은 물론이고 12월 12일부로 축복했던 성기를 회수할 것을
경고한다. 가야산을 거쳐 창경궁에서 1992년 10월 17일 오늘 결정하고 성기를 보내노라.‘
[권말자료편 23번]
민석선생께서는 김영삼에게 도덕청을 대통령 직속으로 신설하라고 명하셨다.
김영삼 대통령은 민석선생의 명령을 가볍게 보고 웃어 넘겼다.
민석선생께서 예언하거나 명령하시는 것은 인간의 부족함을 하늘이 대신 채워주고 앞으로
일어날 일에 지혜롭게 대처하여 국민을 올바로 다스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께서 고속도로와 철강산업을 일으켜야 국가가 발전 할 수 있다고 하신
민석선생의 건의에 순종한, 우리나라의 국운이 얼마나 발전했는가?
김영삼은 일찍부터 한국을 이끌어 나갈 정치지도자가 될 수 있는 축복권까지도 지니고
있었던 인물이었으나 결국 그는 하늘의 뜻을 져버렸다.
민석선생께서는 야당생활을 계속해 온 김영삼을 주의 깊게 지켜보시다가 김영삼 총재가
국회에서 한 연설에 큰 비중을 두시고 1979년 10월 4일 다음과 같은 서한을 김영삼에게
보내셨다. (권말자료편 4번 참조)
‘나 민석은 1979년 10월 4일 국회에서 행한 모든 것을 잘 보았다. 12년 후에는 너를 세우겠다.’
[권말자료편 4번]
민석선생께서는 그를 박정희 대통령과 동급 지위로 높이시고 12년 후에는 대통령으로
세울 것이니 소신을 갖고 일하라고 격려했다.
그 명령 이후, 1992년 김영삼은 민석선생으로부터 제14대 대통령 예정 성기를 받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민석선생의 예언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했다. 그러나 김영삼 대통령은
민석선생께서 명령한 「도덕청」을 세우지 않았다.
「해양청」을 세우라는 명령도 거역했다.
민석 그리스도의 명령을 가차 없이 무시했다.
민석선생께서는 김영삼 대통령에게 큰 기대를 걸고 그가 선정을 베풀어주는 대통령이
되어주기를 바랬으나 김영삼은 대통령에 당선된 후로는 민석선생의 국정건의를 무시하며
오히려 귀찮아 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서울의 인구분산정책, 수도권 정비계획, 환경대책, 민생치안, 그린벨트정책,
농어촌대책 등에 관한 민석선생의 건의를 하나도 수용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민석선생에게
변호사법을 적용하여 남부법원에서 실형을 선고하고 영등포 구치소에 감금시켰다.
심판주 민석에게는 죄가 있을 수 없다.
민석 그리스도께서는 심판주로 오셔서 전우주와 지구전체를 통치하고 계시기 때문에
세상법에 따라 심판을 받을 일이 없는 것이다.
아무죄도 없는 하나님의 사자를 강제로 잡아들여 1년 동안이나 감옥에 가두어 놓았으니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컸겠는가?
수갑을 채우고 감옥에 쳐 넣은 것이 꿈이 아니요 현실이 되었으니 김영삼 대통령은
천벌을 자청한 꼴이 되고 말았다.
민석선생께서는 영등포구치소에 수감되어 있을 때 김일성을 사망의 세계로 보내셨다.
그 이유는 김일성 주석이 김영삼 대통령을 살해하기 위한 음모를 꾸미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민석선생께서는 김일성이 획책하는 남침계략을 보시고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범죄자로
규정하고 1994년 7월 8일 김일성 주석을 사망의 세계로 보내신 것이다.
1994년 7월 3일, 민석선생께서는 김영삼 대통령에게 7월 8일 김일성의 영혼을 관장하기로
했다는 내용이 담긴 서신을 등기우편으로 보내셨다.
이 서신을 받아본 김영삼 대통령은 감옥에서 잠꼬대하는 소리로 치부하며 웃어 넘겼다.
김일성 주석은 민석선생께서 내린 경고명령을 수 차례 받은 장본인이기 때문에 민석
심판주의 권능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익히 잘 알고 있었지만 기회만 있으면 계속해서
남침 전쟁을 획책하던 인물이었다.
김일성을 사망의 세계로 보낼 수밖에 없었던 배경은 이러하다.
1994년 7월 8일 김일성은 묘향산 별장에 있었다. 민석선생께서 영등포 구치소에 계시면서
북한 김일성의 생각을 훑어보니 다음과 같이 나타났다. 민석선생께서 변호사법 위반으로
구속되어 있으니 이 기회에 남침을 단행하기로 마음먹고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이
영파에 잡혔다.
그 계획의 요점은 이렇다.
‘김일성 주석이 오진우와 극비리에 상의하고 있었다. 1995년 통일을 성사시키기 위해
군 강경파 중 간부급 5명과 비밀리에 작전 지시를 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남북정상회담
장소를 평양이 아닌 묘향산으로 옮기고 김일성 주석이 제안하는 95년 남북통일에
김영삼이 무조건 합의를 하도록 요구하라. 김영삼 대통령이 불응하면 우발적인 총기사고로
위장하여 김영삼 대통령과 수행원 전원을 몰살시키고 남침을 강행하라'
이 사건은 남북정상회담을 일주일 앞두고 일어난 일이다.
묘향산에서 김일성이 별안간 심장마비를 일으키자 의사 3명과 경호원 3명이 두 대의
헬리콥터에 나누어 타고 묘향산 김일성 별장으로 떠났으나, 의사들이 탄 비행기는
원인 불명으로 추락하여 전원이 사망하고 경호원만 도착, 김일성은 치료도
받아 보지 못하고 사망했다.
하나님께서는 민석선생에게 변호사법을 적용시켜 남부법원에서 실형을 선고한 데 대하여 진노
하시며 김영삼에게 당장 사자를 원상복귀 시키라고 수차례 명령했으나 김영삼은 듣지 않았다.
민석선생께서는 매순간마다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실천에 옮겨야 하는 하나님의 사자요, 명령
집행자이시다. 이 같은 하나님의 신탁자를 강제적인 방법으로 감옥에 수감시켜 놓고도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한 충현교회의 장로인 김영삼 대통령은 1994년 3월 18일 성기를
회수당하고 무능한 대통령으로 전략하여 IMF까지 끌어들이는 결과를 초래했으며 오운육기의
대심판을 받고 희대의 사고 정부로 추락했다.
김영삼은 한·일·중 영해 분쟁에서도 어업권을 타국에 일부 빼앗기고 어민을 도탄에 빠지게 했다.
1994년 7월 14일, 민석대왕심판주께서 김영삼에게 보낸 진노의 글을 보면 1994년 7월 27일까지
하나님의 사자를 석방하지 않으면 오운육기법으로 심판하겠다고 사전에 경고하셨음을
알 수 있다. (권말자료편 26번 참조)
[권말자료편 26번]
다음은 그 때 하늘이 응징한 주요사건들이다.
엽기적인 지존파 살인사건, 유람선 화재, 성수대료 붕괴, 삼풍백화점 참사, 한여름 이상고온과
가뭄(사상최고 온도 갱신 47회), 대학교수 부친 살해, 한약상 아들 박한상 가족 몰살사건,
씨프린스호 기름유출사건, 무궁화 위성발사 실패, KAL기 추락사건, 일본 7.9도 강진, 소련에
8.3도 강진, 미국 여객기 추락사건, 에스토니아 여객선 침몰 참사사건 등 국내 및 전세계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사건들이 줄줄이 터졌다.
이것이 바로 오운육기의 심판인 것이다.
민석선생께서 명하신대로 도덕청만 신설했어도 이 같은 인성을 망각한 사건들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민심이 천심이란 말이 그냥 나온 것이 아니다. 그때 국민들은 너나할 것 없이 ‘김영삼이
하늘에 무슨 큰 죄를 진 것이 틀림없다’ 고 말하는 사람이 많았다.
민석선생께서는 1994년 7월 3일 김영삼에게 다음과 같은 경고 명령서를 보내셨다.
‘그대 충현교회의 장로인 김영삼이 나의 뜻을 거역할 때에는 모세가 바로의 아들을 심판
했듯이 그대를 심판 하겠노라.’
결국 김영삼의 교만과 무지함 때문에 그의 아들과 측근들은 감옥에 가고 IMF사태까지
끌어들여 국민들만 큰 고통을 당하게 된 것이다.
<정민수 지음 , 민석선생의 세계통치34년의실록 유턴의 세기 중에서>
http://k-minsuk.tistory.com/26
김대중: 7배 받고 시한부 대통령으로...
‘취임과 동시에 너의 비자금 전액을 국가에 헌납하라.’
민석선생께서 김대중을 30개월 시한부 대통령에 세우신 것은 마지막으로 국가를 위하여
애국할 수 있도록 기회를 만들어 주신 것이었기 때문에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대통령들에게
내려졌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명령이 담긴 통고서를 그에게 보내셨다. (권말자료편 35, 38번 참조)
‘비록 늙고 병들고 돈과 유착된 김대중이지만 지난 날의 옥고를 위로함과 정치 지도자들의
심장부가 썩었음을 보여주고 지역감정을 청산하려 함이다. 나의 명을 거역하여 나라를
이 지경으로 만든 전, 노, 3김 정치를 청산하고자 함에 있어 대중이 너만은 총리나 국회의장
한번 못해보고 옥고생활만 하였기에 불쌍히 여겨 30개월 시한부 대통령으로 명하니 취임과
동시에 너의 비자금 전액을 국가에 헌납하고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3대 정권의 핵심인물과
재무장관, 은행장, 국방장관, 군 최고 지휘관, 재벌총수, 언론사 사주 등의 정, 경, 관, 언론
유착의 부정액 총액 80조원, 해외에 도피한 550억 달러를 국고로 환수하여 국민 전체의 10%가
90%를 못살게 한 오늘의 범죄 집단을 바로잡아 도덕정치 국가를 정도로 이끌어가는 기초를
세워놓고 하야할 경우, 30개월 대통령이 5년 대통령보다 역사에 빛날 것을 명심하라.’
[권말자료편 35번]
[권말자료편 38번]
민석선생께서 1997년 12월 12일 김대중에게 보낸 명령서 제3항에 보면
‘이인제는 마지막 12월 9일까지 나의 명에 거역하였다’란 내용이 있다.
(피고 대한민국, 갑제 91호증의 1호 참조)
이것은 제15대 대한민국의 대통령을 세우실 때 김대중보다 먼저 이인제를 염두에 두고
계셨음을 알 수 있게 하는 내용이다.
왜, 이인제가 민석선생으로부터 대통령 예정 성기(聖氣)의 축복을 받지 못했는지 숨겨진
비화를 소개한다.
김영삼 정권 말기 50대의 참신한 인물론이 정가에 파다하게 퍼지기 시작했다.
3김 정치에 식상한 국민들은 젊은 정치인을 원했으며 김영삼 대통령이 신선한 인물을
차기 대통령 후보로 키우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지고 있었다. 그 장본인이 바로
경기도지사 이인제였다. 그 역시 지혜가 뛰어났으며 여론 그대로 참신한 인물이었다.
민석선생께서는 그에게 성기를 내리고 차기 대통령으로 축복하기 위하여 이인제를 만나셨다.
민석선생께서는 성기 내릴 때의 관행대로 이인제에게 ‘하늘의 뜻에 순종 하겠다’라는
서약서를 작성하고 본인의 도장을 찍어 오라고 했으나 이인제는 민석선생의 명에 따르지
않고 후일을 대비한다는 변호사 출신다운 생각으로 그 서약서에 본인의 무인을
찍지 않고 부인의 무인을 대신 찍어 제출했다가 심판주로부터 심판을 받게 된 것이다.
이같은 사건 때문에 민석선생께서는 이인제를 탈당 출마하게 하는 극단적인 조치를 취하신
후 김대중을 30개월 시한부 대통령으로 임명하게 된 것이다. (권말자료편 38번 참조)
이 사건 이후 이인제에게서는 하나님의 성기가 떠났기 때문에 대통령이 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하류 정치인으로 추락하게 된 것이다. 하늘 앞에서 거짓은 용서 받을 수 없는 것이다.
이 사건은 김대중에게 대통령 예정통고서를 보내기 불과 3일전에 일어난 일이다. 김대중은
대통령에 당선되자마자 민석선생의 기대를 저버리는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김대중은 1998년 2월 25일 대통령 취임식에서 자신의 비자금 문제는 검찰의 무혐의 결정을
빙자하여 일언반구 거론하지 않았으며 민석선생께서 부정축재와 탈세로 추징금을 환수
하도록 명령한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등을 로얄박스에 앉히고 참신한 사람들은 하단에
앉혀 마치 죄인들의 잔치인양 신성한 취임식장을 범죄 집단의 기념식장처럼 만들었다.
이 광경을 지켜보시던 민석선생께서는 김종필 총리 인준을 부결시키고 앞으로 지켜보면서
다음 조치를 취하겠다고 통고하신 후 30개월 시한부로 김대중에게 내렸던 성기를
1998년 5월 7일부로 회수해버렸다.
김대중은 민석선생의 권능을 익히 잘 알고 있는 정치인이다. 한편으로는 두려워 피하면서도
민석선생의 명령에는 철저하게 불복종했다. 김대중은 말 따로 행동 따로의 이중적인
기만술로 국민을 속이는 일을 일삼았다.
민석선생께서는 국군포로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우리체제를 파괴하려는 간첩부터
풀어주는 김대중의 반국가적인 행위를 보시고 김대중의 햇빛정책은 잘못된 것이라고
경고하셨다. (권말자료편 37번 참조)
[권말자료편 37번]
북한의 김정일은 민석선생의 명령에 따르는 척하면서도 그의 부친 김일성처럼 기회만
주어지면 남침의 야욕을 버리지 못하하는 도전적인 인물이다. 민석선생께서는 김정일의
정책에 휘말려 끌려가고 있는 김대중 대통령에게 누차 경고하시며 햇볕정책의 허구성을
깨우쳐 주었지만 김대중은 민석선생의 명을 무시했다.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의 남북정상회담은 2000년 6월 13일 이루어졌다.
남북정상회담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그 내막을 여기서 밝힌다.
평양의 남북정상회담은 김정일 위원장이 민석선생의 명령을 받고 6번째의 남침계획을
포기한 데 대한 대가로 받은 것이다. 따라서 남북 정상회담은 처음부터 민석선생의
지시에 따라 추진된 것이다.
김정일은 1999년 8월 15일, 대대적인 남침 계획을 세우고 전쟁을 일으키려고 준비하고
있었다.이 사실을 탐지하시고 민석선생께서는 긴급명령을 발동하여 ‘1999년 8월 15일의
남침계획을 2000년 1월 31일까지 철회하지 않으면 김정일을 사망의 세계로 보내겠다’
고 통고했다. (권말자료편 39번 참조)
[권말자료편 39번]
민석선생의 명령 때문에 남침계획을 취소한 데 대한 순종의 대가로 받은 것이 평양의
남북정상회담이었던 것이다.
민석선생께서는 김정일에게 남북정상회담을 베이징에서 개최하지 말고 평양으로
김대중 대통령을 직접 초청하여 회담을 갖도록 명했다. (권말자료편 40번 참조)
[권말자료편 40번]
정상회담이 13일로 하루 연기된 것도 민석선생의 지시에 따른 것이다. 또한 직접 순안
비행장에 나가서 김대중 대통령을 영접하게 되면 김정일이 전 세계에서 명분과 실리를
얻게 될 것이니 80세 노인 김대중을 정중히 모시도록 지시했다.
이와 같이 민석선생의 명에 의하여 철저하게 김정일 주도하에 진행된 것이 역사적인
평양 남북정상회담인 것이다.
평양 남북정상회담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은 없다. 모두 민석
그리스도의 지시에 따라 김정일이 세운 계획대로 움직였을 뿐이다. 그러나 남북정상회담은
김대중을 세계적인 인물로 부각시켰다. 남북정상회담의 공적이 모두 김대중에게 있다고
판단했다. 그것은 그가 젊어서부터 민주화운동을 펴왔던 정치인이었기 때문이다.
이 같은 과정을 통하여 김대중은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게 된 한국의 첫 번째 정치인이 되었다.
민석선생께서 김대중의 평생소원이었던 노벨평화상을 받게 해준 것이다. 그런 김대중
대통령이 민석선생을 살해하기 위하여 두 번씩이나 살해팀을 조직하여 죽이려고 하였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민석선생과 같이 본인이 세우신 대통령들로부터 생명의 위협과 함께 고난과 핍박을 받으면서도
그들과 싸워 승리한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민석선생께서 제16대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 노무현을 정하고 그에게 보낸 긴급건의서
제3항에 보면 (권말자료편 45번 참조)
‘2002년 12월 17일 교만한 이회창을 버리고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결정했다’ 라는
내용이 있다.
[권말자료편 45번]
이것은 김대중 대통령이 민석선생을 죽여야만 하는 당위성과 무관하지 않다.
민석선생께서는 2002년 6월 21. 김대중에게 다음과 같은 공개서한을 보내셨다.
‘한 가지 경고해 둔다. 2002년 7월 25일부터 8월 15일 사이에 이회창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에게 가할 음모를 7월 21일까지 철회하라. 만일 철회하지 않고 계획에 착수하면
용서하지 않고 에텔법으로 심판할 것을 경고해 둔다‘ (권말자료편 42번 참조)
[권말자료편 42번]
김대중 대통령은 이회창이 대통령이 되면 후가 심히 걱정되므로 이회창이 대통령이 되지
못하게 하려고 극비음모를 꾸미다가 민석선생의 에텔법에 걸려 경고를 받게 된 것이다.
이 같은 김대중의 음모가 진행괴고 있을 때 민석선생께서는 이회창을 대통령에 세우기로
결정하고 성기(聖氣) 부여 준비를 하고 계셨다.
민석선생께서는 ‘김대중 대통령이 당신을 해하려 하고 있으니 주위의 경비를 강화하라’ 고
이회창에게 미리 알려 주었다.
이회창은 그 내용과 함께 민석선생께서 자신을 대통령에 세우기로 했다는 하늘의 비밀을
김대중과 이회창 사이에 양다리를 걸치고 왔다 갔다 하는 안기부 고위직에게 말했다.
그 사람이 김대중에게 가서 그 사실을 보고하자 김대중 대통령은 민석선생을 죽이지 않으면
안되겠다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특히 이희호 여사가 더욱 더 옆에서 충동했다.
이회창의 경솔한 행동이 에텔법 진동에 나타나자 민석선생께서는 이회창의 영혼을 불러
그의 마음과 생각을 다시 확인하셨다.
‘나는 예수를 믿는 천주교인이기 때문에 여기에 서명할 수 없습니다’라는 이회창의 교만한
생각이 나타났다.
이 같은 연유로 인하여 민석선생께서는 이회창에게 내리기로 했던 대통령 예정
「성기장」을 찢어 버리셨다.
결국, 이회창의 천기누설 때문에 민석선생은 김대중과 이희호가 죽여야 할 살해의
대상이 되고 만 것이다.
민석선생께서 이회창을 지명하면 이회창이 대통령에 당선될 것이 확실하다. 그렇게 되면
자신에게 불어 닥칠 후환이 불 보듯 뻔하니 지금 죽이지 않으면 안 된다고 판단하고
두 팀의 살인조를 결성하여 민석선생 죽이기에 나선 것이다.
역대 고위층과 대통령들의 비자금, 정치자금, 외국으로 빼돌린 조단위의 부정부패를
척결하기 위해서 이회창을 대통령에 세우기로 결정했던 민석선생께서는 이 같은 사건으로
인하여 2002년 12월 17일 교만한 이회창을 버리고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결정하게 된 것이다.
김대중의 첫 번째 「민석살해팀」은 김윤진, 최석호 조였다.
김윤진, 최석호 조는 국가특수기관원들과 함께 민석선생을 미행하면서 죽일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이 사실을 알고 민석선생께서는 2002년 7월 9일 경고장을 김대중에게 보내시면서
그들을 당장 철수시키라고 명령했다. 경고장의 내용이다. (권말자료편 43번 참조)
‘김윤진, 최석호 조로 하여금 김민석을 제거하려고 이희호가 국가특수기관을 동원하다니 …
얼빠진 놈아. 감히 너희들이 선지, 선각자인 민석을 제거하려 들다니 … 7월 16일까지
김윤진, 최석호를 당장 철수 시켜라.’
[권말자료편 43번]
첫 번째 살해계획이 실패하자 김대중 대통령은 120억원을 준비하고 박지원과
임동원팀에게 민석선생을 죽이라고 재차 지시를 내렸다.
박지원과 임동원은 민석선생 정도야 쉽게 죽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종교월간지
《현대종교》에서 발행한 《한국의 신흥종교》란 책에 ‘김민석 교주가 막노동 판에서 일하다가
생활고로 죽었다’ 라는 허위기사를 게재케하여 완전범죄를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다음은 민석선생께서 2002년 12월 4일. 김대중에게 보낸 경고문이다. (권말자료편 44번 참조)
‘김민석이 있는 한 ’이회창‘ 이 대통령이 될 것인데 하고 고뇌 끝에 결정이 ’살인교사‘ 라니 …
박지원과 임동원을 시켜 살인교사 하다니 … 하늘이 진동하고 땅이 통곡할 일이다 ….
민석대왕심판주께서 성동구치소에 가있으라고 방법을 계시하였기에 이처럼 살아서
공개서한을 보낸다.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 이 시간 시체가 되어 흙속에 암매장 되었을
것이니 … 하나님께 감사의 영광을 올린다.‘
[권말자료편 44번]
김대중 대통령이 두 번씩이나 민석선생을 죽이려 했기 때문에 그것을 깨닫게 해주기
위하여 민석선생께서는 김대중의 두 아들을 구속 시켰다.
나는 김대중의 죄를 용서한다. 그러나 하늘은 결코 잊어버리는 일이 없다. 타인에게 행한
것은 분명히 다시 돌아와 괴롭힌 자가 괴로움을 받게 된다는 《민석성서》 27장의 말씀이
앞으로 김대중에게 임할 것이라고 말씀 하셨다.
민석선생께서는 김대중과 그의 아들들이 숨겨놓은 수조원에 달하는 비자금들이 앞으로
속속 밝혀질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2005년 7월, 한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삼성그룹 정치자금에 관한 녹음테이프 공개사건도
그 중의 하나이다.
민석선생께서 2000년 1월 2일, 김대중 대통령에게 보낸 명령서를 보면 ‘1997년 대선 때
중앙일보 회장을 통해 받은 삼섬그룹의 정치자금 내용도 밝히고 국민에게 사과하라’
고 명했다. (권말자료편 38번 참조)
그때 그 예언의 실상이 MBC, KBS의 녹음테이프 공개 사건으로 세상에 밝혀진 것이다.
<정민수 지음 , 민석선생의 세계통치34년의실록 유턴의 세기 중에서>
노무현: 이회창 천기누설로 대통령에...
민석선생께서는 2002년 12월 17일 노무현을 대한민국의 제16대 대통령으로 임명 하시면서
취임 3일 후 민주당을 탈당할 것과 8억불 북송금 관련자 김대중을 비롯한 전원
사법처리할 것. 그리고 말조심 할 것 등 3가지를 당부했다.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 역시 민석선생께서 내린 명령에 불복종했다.
민석선생께서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지명한 것은 대통령 선거일이 거의 임박 했을 때였다.
그 당시만 해도 이회창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될 것이 거의 확실시 되었으나 2002년 12월
17일자로 대통령 당선 성기(聖氣)를 보내자 곧바로 상황이 바뀌기 시작했다. 정몽준 후보가
민주당 노무현 후보와 후보단일화를 약속하여 대선정국을 뒤집어 놓은 후 정작 본인은 투표
하루 전날인 2002년 12월 18일, 밤 10시경 약속을 철회해 버리는 사건이 일어났다.
다음은 2003년 8월 19일, 민석선생께서 노무현 대통령에게 보낸 경고서 내용이다.
(권말자료편 46번 참조)
‘노무현은 나 민석이 민석대왕심판주의 긴급지시로 노무현에게 지시한 1항과 2항을 무시했다.
취임 후 3일 내로 민주당을 탈탕할 것과 8억불 북송금 관련자 김대중을 비롯한 전원 사
법처리할 것, 그리고 당부한 말조심이다. 나의 명을 거역했으므로 나 민석은 오늘부로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라 했다.
[권말자료편 46번]
노무현은 민석선생으로부터 무관심의 심판을 받았다.
심판주의 심판을 받으면 갑자기 무능해지기 때문에 하는 일마다 국민의 지탄을 받고
국민으로부터 외면당한다.
민석선생께서는 다시 한 번 노무현 대통령에게 기회를 주기 위하여 2003년 11월 10일
두 번째 명령서를 재차 보내셨다. (권말자료편 47번 참조)
[권말자료편 47번]
행정수도 이전계획의 포기, 대선자금 전면수사, 야당이 낸 특검법의 철저 수사,
재신임의 철회를 명령했다.두 번째 명에 따르면 첫 번째로 내린 심판인 ‘대통령으로
인정하지 않겠다’ 라는 명령을 2003년 12월 25일부로 철회해주겠다고 최종 통보하고
대선자금 및 특검법을 수사하도록 명하셨다.
민석선생께서는 2005년 3월 18일 선생께서 저술하신 책, 《하나님의 나라 – 대한민국》의
「맺는 말」을 통하여 대한민국의 여당과 야당에게 다음과 같은 심판의 말씀을 하셨다.
‘대한민국 57년 정치사에서 지금처럼 한심한 여당과 야당은 없었다.'
민주와 인권을 위해 투쟁 했노라 라고 하는 노무현 정권은 유엔의 북한 인권 결의안
표결에서 기권을 했다.
예를 들자면 고문 당한 김근태 편을 든 것이 아니라 고문기술자 이근안 편을 든 것이다.
여당은 그렇다 치고 선진화 개혁을 추구해야 할 야당인 한나라당이 제 구실을 하지 못하고
있다. 한나라당은 스스로 여론을 창출하지 못하고, 그것에 끌려가고 있다. 참다운 지도자는
여론에 끌려가기보다 여론을 창출한다. 지도자는 다수 여론이라는 것을 거슬러 자신의
소수 의견을 온 몸으로 설파하는 선지자의 고난을 기꺼이 선택한다.
석가, 공자, 예수가 언제 여론 조사하면서 진리 운동 했는가?
오늘의 한나라당은 정반대로 심리학의 열등생이라 할 수 밖에 없다.
수도 이전하면 나도 수도이전, 김정일에게 돈 퍼주자 하면 나도 퍼주겠다, 상대방이 보수
타도 하면 나도 보수 그만하겠다고 ….
여론을 창출하기는 커녕 늘 상대방이 창출해 내는 여론 뒤꽁무니를 따라가기에 바쁘다.
이런 식이라면 한나라당은 더 이상 야당으로서 존속할 이유가 없다. 당을 해체하던지,
열린우리당과 합당하던지! 결국 북한 인권에 등을 돌리는 따위는 선지화 개혁이 아니다.
<정민수 지음 , 민석선생의 세계통치34년의실록 유턴의 세기 중에서>
미국 대통령 빌 클린턴에게!
98년 1월 8일에는 세계은행총재와, 캉트쉬 IMF 총재에게도 경고하겠지만, 1997년
12월 3일 이후 국제 금융계는 한국의 경제위기를 자기들의 수익을 올리는 장사기회로
이용하는 배후에 ‘클린턴 정부의 재무부장관이 서울에서 지휘하고 있음을 보았노라!’
이는 “세계은행 50년 역사와, IMF 50년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국제
금융질서를 ‘교란’시키는 악행위다.
고로 클린턴 대통령은 책임지고 1998년 1월 4일에는 세계은행총재와 IMF총재에게
“98년 5월 25일까지 통상적인 세계은행 대출 금리로 재협상” 하도록 하라.
만일 1월 4일까지 행동으로 옮기지 않을 시 나 민석의 명을 거역한 것으로 단정 즉시
“성기(聖氣)”를 회수함과 동시 “응징”할 것이다. 제니퍼 풀러워스, 폴라 존스, 모나카
르윈스키 등과의 사건을 문제 삼아 98년 5월 25일까지 “권좌”를 향해 응징할 것이니
물러나지 않으려면 5월 25일까지 ‘재협상’하도록 최선을 다하라!
이는 특명이며 “에텔법”으로 집행하겠노라.
1997. 12. 16.
서울 창덕궁에서
민 석 대 왕 심 판 주
간디 인도 수상에게 많은 곳에서 “간디”의 생명을 빼앗으려는 불순분자가 있음에도 방어 못하는 상태에 있기에 긴급명령을… 그대를 살해하려는 심복, 시트완ㆍ비트싱을 10월 25일부터 31일까지 1주일 간 투옥하고, 주위의 경호원들을 경계하라.
http://www.minseok.net/zboard/view.php?id=prophecy_f&page=5&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 |
중공 지도자들에게
나 민석은 그대들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한다.(민석성서 44장 13절 참조) :
「나 민석은 말하거니와 나의 예언을 말씀을 순종치 않는 개인과 정부는 계엄령보다
수십 배나 무서운 5운 6기법으로 다스릴 것이다.」
1. 아시아의 중앙지대에 위치한 대국을 통치하는 그대들은 미국과의 외교관계를 정상화할
책임이 있으며, 이는 미소간의 전쟁예방에 필요하다. 뿐만 아니라 그대들은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가능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2. 만일 불순종할 때에는 중공에는 강진이 일어 막대한 인명과 재산의 피해가 따를 것이다.
이는 5운 6기(한ㆍ열ㆍ건ㆍ습ㆍ우)의 하나이다.
그리고 모택동은 1976. 9월 중에 타계할 것이다.
1976. 6. 25
민석의 사자(윤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