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무성은 왜 미국에서 큰절을 했을까
김무성과 그의 아버지 친일파 김용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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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을 방문한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우리를 부끄럽게 한다. 여느 정치인이 아니라 집권여당의 대표이자 대통령 후보 지지도 1위이기에 더욱 그렇다. 커다란 몸집과 당당하던 태도는 태평양을 건너자 한없이 작아지고 말았다. 넙죽넙죽 올리는 ‘큰절’은 환영은커녕 비웃음만 사고 있다.
아프리카 추장 같다거나 아예 부채춤을 추라는 조롱마저 날아간다. 그런데도 그는 내년에 또 큰절을 하겠다고 한다. 그는 도대체 왜 그러는 걸까?
김무성 대표 아버지의 친일 행적에서부터 발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자료를 뒤적여보기 시작했다. 아뿔싸. 선친 김용주의 과거 친일 의혹은 빠르게 지워져가고 있었다. 대신 절세의 애국자로 변모하고 있다. 친일이 애국으로 둔갑하는 현실을 막아보고자 김 대표 부친의 과거 친일 발언을 공개한다. 천황폐하를 위해 자식의 목숨을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고약한 내용이며 A4 용지 3장 분량이다. 그런 부친의 과거를 바꾸려는 시도나 미국에서 하는 큰절이나 모두 한뿌리에서 나온 콤플렉스의 발현일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천황폐하 찬양…아들은 미국 장군묘에 “감사합니다”
지난달 26일 워싱턴의 알링턴 국립묘지를 방문해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월턴 워커 장군의 묘비에 절하는 새누리당 김무성과 동행 의원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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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무성 대표의 선친 김용주의 일제 때 발언을 보면 그가 상당한 인텔리임을 알 수 있다. 일본의 고대사부터 메이지유신에 이르는 역사를 넘나들며 일본과 조선이 한민족 한뿌리임을 설파하고 있다. 하지만 모든 발언의 귀결은 조선의 젊은이들이 태평양전쟁에 용감하게 나서라는 것이다. 화랑 관창처럼, 사육신 성삼문처럼 목숨을 바치라고 요구한다. 다만 그 충성의 대상이 일본 천황일 뿐이다. 천황을 위해 벚꽃같이 지라고 한다.
미국을 방문중인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의 ‘기행’을 보면서 “왜 저러지?” 하는 궁금증이 일었다. 정치부 기자들은 ‘국내 보수층의 지지를 다지려는 의도’라고들 많이 분석하는데, 선뜻 납득이 되지는 않는다. 김 대표는 이미 새누리당 지지층에서 부동의 1위 아닌가. 표를 얻으려면 왼쪽으로 가야지 왜 오른쪽으로, 오른쪽으로만 가는지 설명이 안 된다. 분명히 손해 보는 짓인데 말이다. 그래서 ‘아! 계산이 아니라 본능이구나’ 하는 느낌이 든다.
김 대표가 초대 미8군 사령관 월턴 워커 장군의 묘 앞에서 큰절을 두번 올리고 나서 묘비에 묻은 진흙과 새똥을 직접 손수건으로 닦으며 “아이고, 장군님 감사합니다”를 연발했다는 기사를 보고 퍼뜩 든 생각이다. 이명박 대통령을 두고 ‘뼛속까지 친미·친일’이라고 평가한 친형 이상득의 말도 떠올랐다.
“그런데 저래도 되나?”라는 게 이어진 의문이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김무성 대표의 아버지 김용주(1985년 작고) 전 전남방직 회장 때문이다. 내가 알기에 김용주 회장은 일제 때 친일 행적이 분명한 사람이다. 해방 뒤에는 미군정청의 지원을 받았고 일본인들이 두고 떠난 ‘적산’ 전남방직을 전쟁중에 불하받아 부자가 되었다.
유시민 전 장관은 그런 가계도 때문에 김무성 대표를 ‘친일-반공-보수세력의 총아’로 지칭한 적이 있다. 그러니 김 대표는 심리적 부담 때문에라도 눈에 드러나는 친미 행위는 피해야 할 처지다. 그런데 영 반대로 가고 있어 의아해한 것이다.
새누리당 김무성과 수행의원들이 미국 워싱턴 드블트리바이힐튼호텔에서 열린 한국전참전용사 리셉션에 참석, 참전용사들에게 큰절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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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는 2년 전 ‘친일행적’ 정정한 적 없어
하도 이상해서 네이버에 김무성, 김용주, 친일 등의 단어를 쳐놓고 검색을 해봤다. 내 눈이 의심스러웠다. 김용주 회장은 친일을 의심받기는커녕 절세의 애국자로 둔갑해 있었다. 각종 기사와 블로그 글들이 김용주의 친일을 해명하고 애국을 칭송하고 있는 거다. 2년 전쯤 분명히 같은 검색어로 찾아봤는데 그때하고는 하늘땅 차이였다. 글들을 클릭해서 읽어보고는 더 놀랐다. 그런 변화에 나 ‘김의겸 기자’가 적잖은 기여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건의 발단은 이렇다.
2년 전쯤 ‘백년전쟁은 계속되는가?’라는 제목의 칼럼을 쓴 적이 있다. 김무성 대표를 거론하면서 “부친인 김용주는 일제 때 경북도회 의원을 지냈고, 조선임전보국단 간부로서 ‘황군에게 위문편지를 보내자’는 운동을 펼쳤다”고 비판한 것이다. 김 대표는 즉각 언론중재위원회에 제소했는데 내 나름으로는 김 대표의 요구를 선선하게 받아줬다.
내 잘못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칼럼에서 “김 의원이 ‘빨갱이’란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고 표현했는데, 알고 보니 종북주의자, 좌파, 김정일의 꼭두각시라고는 했어도 빨갱이란 단어는 쓰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이 부분은 ‘확인 결과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습니다’라고 정정해줬다.
부친의 친일 행적 부분도 반론을 보도해주는 걸로 쉽게 합의를 봤다. 그래서 “이에 대해 김 의원은 ‘당시 경북도회 의원들은 조선인 농민들의 편에 서서 조선총독부의 정책을 비판하고 반대하였으며, 김 의원의 부친은 사재를 털어 조선인 한글교육 야학을 개설하고 일본 자본에 맞서 조선상인회를 설립하는 등 애국자적 삶을 살았고, 친일인명사전에도 없으므로 친일파가 아니다’라고 밝혀왔습니다”라는 반론보도 문구를 김 대표의 변호사와 함께 작성했다. 반론보도는 정정보도와는 성격이 다르다.
정정보도는 기자가 사실보도의 착오를 인정하고 내용 자체를 바로잡는 것이다. 그러나 반론보도는 양쪽의 주장을 독자가 판단할 수 있도록 상대방에게 방어할 기회를 주는 것이다. 기자인 나야 사실관계가 틀림이 없고 친일파라는 생각에 변함이 없지만 아들인 김무성 대표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을 테니 반론할 기회를 주는 게 공정하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또 칼럼을 쓸 당시는 김무성 대표의 행위(노무현 전 대통령의 엔엘엘(NLL) 발언 왜곡)에 분개했지만, 돌아가신 부친까지 끌어들인 건 나도 나중에 마음에 걸리던 차였다.
이런 곡절을 거쳐 ‘김무성 의원 부친 관련 반론 및 정정보도’가 지면에 실렸다. 그 직후 김 대표가 출입기자들에게 돌린 문자가 나한테도 한 다리 건너 전달이 됐다. 김 대표가 반론보도문의 성격을 자기한테 너무 유리하게만 해석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더 이상 보도가 확산되는 걸 막으려는 걸로 이해하고 그냥 넘어갔다. 그리고 잊고 살았다. 네이버 검색을 하다가 경악하기 전까지는.
2년 동안 생산된 기사나 블로그 글들의 제목을 몇 가지만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김무성 “우리 부친은 친일파 아닌 애국자”
-김무성 친일 논란 정리, 해촌 김용주 선생의 애국활동
-김무성 대표 부친, ‘해촌(海村) 김용주’ 선생…공작 속에 묻혀버린 ‘애국자’
-김무성 대표 아버지가 친일파가 아닌 13가지 이유!
-“아버지가 친일파라고…차라리 나를 모욕하라” 김무성 의원이 직접 말하는 ‘나의 개인사와 가족사’
2년 전만 해도 인터넷에는 김 대표의 가족사를 거론하며 친일 의혹을 제기하는 글들만 있었는데 이제는 생태계가 완전히 뒤바뀌었다. 김 대표의 적극적인 대응이 있었을 것이다. 김 대표는 어느 인터뷰에서 선친 문제와 관련해 “지금까지는 무시하거나 관용으로 대했지만 이제는 언론중재위에 제소하거나 고소 등 조처를 할 계획”이라고 밝힌 적이 있다. 하지만 대응이 방어 차원을 넘어서 아예 공세로 넘어간 모양새다. 친일파가 아니라는 해명을 넘어 애국자, 애국활동으로까지 미화되고 있다.
김 대표 쪽의 적극적인 언론 접촉과 논리 제공이 있었을 테고, 가까운 언론매체나 지지자들이 글을 양산했을 것으로 짐작이 간다. 이런 환경 변화에 힘입었는지 김무성 대표의 공식사이트에도 ‘나의 아버지’가 비중있게 소개되는데, 부제가 ‘나라와 민족을 사랑한 해촌 김용주’다.
경이로운 변화다. 게다가 내가 내보낸 ‘반론보도문’이 이런 세태 변화에 공헌하고 있다는 게 당혹스럽기 그지없다.
김 대표의 블로그에 들어가보면 이런 글이 실려 있다. “당시 한겨레가 사설을 통해 해촌 선생이 친일행적을 보였다고 보도하자 김 대표는 ‘당시 경북도회 의원들은~애국자적 삶을 살았다’고 강조하며 언론중재위원회에 정정을 요청했다. 결국 한겨레는 지난 2013년 10월 언론중재위 조정에 따라 <김무성 의원 부친 관련 반론 및 정정보도>를 냈다.” 정정을 해준 건 빨갱이 부분일 뿐인데 이는 거론조차 하지 않고 마치 친일 부분이 정정된 것처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글은 이어서 “해촌 선생의 친일 의혹은 특정세력의 명백한 정치 공작”이라고 주장한다. 기자인 내가 졸지에 공작 정치의 하수인이 되고 말았다. 김 대표 부친의 친일 의혹을 간단하게 거론하는 <오마이뉴스>의 어느 기사를 보니 중간에 엉뚱하게 내가 작성한 반론보도문이 끼어들어가 있었다. 그것도 원문이 아니라 첨삭이 된 문장이었다. 아마도 오마이뉴스 쪽에 기사 정정을 요구하며 그 반론보도문을 들이댄 모양이다. 내가 별생각 없이 합의해준 반론보도문이 나도 모르는 새 다른 언론의 재갈을 물리는 데 쓰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한겨레와 내가 조롱감이 되는 건 당연한지도 모른다. 어느 기사에서는 이런 치욕적인 글귀를 발견했다. “한겨레는 이전에도 김무성 대표와 관련된 기사에서 오보를 게재한 적이 있었다. 김무성 의원의 부친이 친일파라는 보도와 김무성이 ‘빨갱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닌다는 허무맹랑한 글을 올렸던 적이 있다. 그래서 그때도 정정보도를 낸 적이 있었다.” 내가 허무맹랑한 기자가 되는 건 문제가 아닌데 회사마저 망신을 사고 있는 것이다.
대통령 후보 지지도 1위 여당 대표 선친의 친일행적 의식했다면 방미 중 발언과 행위 안 나왔을 것 친일 콤플렉스 떨쳐 버린건가 굴욕적 친미발언과 큰절이라니
“진정한 내선일체…충실한 황국신민 …야스쿠니 신사에 받들어질 영광” ‘미영 격멸’ 공직자대회 보도한 1943년 10월3일치 <매일신보>와 대회기록집에 김용주 상세 발언
A4 용지 3장 분량으로 드러난 김용주 발언
알고 보니 김무성 대표에게 반격의 기회를 제공한 건 나만이 아니었다. 배재정 민주당 대변인도 김 대표의 부친이 ‘친일인명사전에 대표적인 친일파로 등재됐다’고 논평을 냈다가 뒤늦게 동명이인임을 깨닫고 김 대표에게 사과를 하기도 했다. 친일인명사전에 올라 있는 김용주는 만주에서 활동하던 사람이니 전혀 다른 인물이다. 그러니 “김무성 부친 친일인명사전 민주당 거짓말! 사실 부친 김용주는 애국자” 등의 글들이 즐비하게 된 거다.
인터넷 경제전문지인 <스페셜경제>는 당시 “김무성 대표 부친 ‘친일 의혹’…거짓 속에 묻혀버린 진실. 알고 보니 애국자였다…친일 의혹 ‘명백한 공작’”이라는 단정적인 기사를 내보내기도 했다. 그 기사에서는 “아울러 배 대변인의 거짓 논평뿐만 아니라 한겨레신문 역시 친일 의혹에 대해 정정보도를 하면서 김 대표 부친의 친일 의혹은 사실무근인 것으로 드러났다”고 자신했다.
그래서 나는 이제 김 대표 선친의 친일 행적을 정면으로 문제 삼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내몰리게 됐다. 지난 2년 동안 사정을 몰랐을 때야 어쩔 수 없지만 알고 나서도 계속해서 침묵한다면 나는 역사 왜곡의 공범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친일을 감추고 싶어하는 것과 친일을 애국으로 탈바꿈하는 것은 너무도 다르다. 또 나와 내가 몸담고 있는 한겨레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뭔가 조처를 취해야 하는 상황에 맞닥뜨린 거다.
1941년 12월7일 대구부 욱정공립국민학교에서 열린 조선임전보국단 경북지부 결성식에 참석한 김용주 경북도 도회 의원이 “황군장병에게 감사의 전보를 보낼 것”을 제안해 만장일치로 가결됐음을 알린 <매일신보> 12월9일치 3면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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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실 김무성 대표 선친의 친일 행적을 뒷받침하는 최소한의 자료를 이미 2년 전에 확보하고 있었다. 김 대표가 “법적 대응에 임할 것”이라며 내용증명까지 보낸 판이라, 기존에 가지고 있던 1941년 12월9일치 <매일신보> 말고도 더 많은 자료를 찾아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언론중재위원회에 나가서 새로 입수한 자료를 언급하지는 않았다. 확전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식민지-미군정-전쟁-독재로 이어지는 뒤틀린 우리 역사에서 정리되지 못한 부분이 한두 군데가 아닌데 그 후손들을 다 문제 삼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정서에서다. ‘아버지는 아버지고 아들은 아들이다’가 아직도 기본적인 내 생각이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게다가 김무성 대표가 여느 정치인인가. 집권 여당의 대표이고 대통령 후보 지지도 1위를 달리고 있다. 차기 대통령 자리에 가장 가까이 다가가 있는 인물이다. 그가 선친의 친일 행적을 의식하고 있었다면 방미 중의 발언과 행위가 나오지 않았을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
친일 콤플렉스를 완전히 떨쳐버렸기에 긴장이 풀린 상태에서 굴욕적인 큰절이 나오고 “우리는 중국보다 미국”이라는 발언을 태연하게 뱉을 수 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니 ‘또 친일 타령이냐’거나 ‘웬 연좌제냐’는 얘기를 듣는 한이 있더라도 입을 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1943년 10월2일 징병제 시행 감사와 미국 및 영국의 격멸을 결의할 목적으로 부민관 대강당에서 열린 전선공직자대회를 보도한 <매일신보> 10월3일치 2면 기사. 이 자리에서 김용주는 “징병제 실시에 보답하는 길은 일본 정신문화의 앙양으로 각 면에 신사(神社)와 신사(神祠)를 건립하여 경신숭조 보은감사의 참뜻을 유감없이 발휘하도록 하여야 하며 미영 격멸에 돌진할 것을 촉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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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역사학자의 도움을 받아 찾아낸 건 <매일신보> 1943년 10월3일치 2면의 기사다. 징병제 시행을 고마워하며 미국과 영국 격멸을 결의할 목적으로 부민관 대강당에서 열린 전선공직자대회(全鮮公職者大會)를 다룬 기사로서, 제목은 ‘총후의 전열에 총립, 제2일 공직자대회에 멸적의 열화창일, 각 의원들의 열론’(銃後의 戰列에 總立, 第二日 公職者大會에 滅敵의 熱火漲溢, 各議員들의 熱論)이다.
이 자리에서 김 대표의 부친 김용주(일본명 金田龍周, 경북도회 의원)는 “징병제 실시에 보답하는 길은 일본 정신문화의 앙양으로 각 면에 신사(神社)와 신사(神祠)를 건립하여 경신숭조 보은감사(敬神崇祖 報恩感謝)의 참뜻을 유감없이 발휘”하도록 하여야 하며 “미영 격멸에 돌진할 것을 촉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1943년 10월2일 징병제 시행 감사와 미국 및 영국의 격멸을 결의할 목적으로 부민관 대강당에서 열린 전선공직자대회를 보도한 <매일신보> 10월3일치 2면 기사. 이 자리에서 김용주는 “징병제 실시에 보답하는 길은 일본 정신문화의 앙양으로 각 면에 신사(神社)와 신사(神祠)를 건립하여 경신숭조 보은감사의 참뜻을 유감없이 발휘하도록 하여야 하며 미영 격멸에 돌진할 것을 촉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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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가 간단해서 더 구체적인 자료가 없을까 찾다가 이 대회 사무국이 1944년 1월에 발간한 <징병제시행 감사 적미영격멸 결의선양 전선공직자대회기록>(徵兵制施行感謝 敵米英擊滅 決意宣揚 全鮮公職者大會記錄)을 발견하게 됐다. 그 책자에는 김용주의 발언이 상세하게 실려 있다. 옮기고 보니 A4 용지로 3장이 넘는 분량이나 몇가지만 추려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이날 회의에서 첫번째 의제는 “징병제 실시에 즈음하여 그 완벽을 기함과 함께, 2천500만 민중에게 고마우신 성지(聖旨)를 철저하게 젖어들게 하도록 구체적 시책 의견”이었다.
김용주는 박수를 받으며 등단해 “먼저 가장 급한 일은 반도 민중에게 고루고루 일본 정신문화의 진수를 확실히 통하게 하고, 진정한 정신적 내선일체화를 꾀하여 이로써 충실한 황국신민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고 말하며 구체적 방책들을 제안한다.
그 가운데 하나는 “각 면에 신사(神祠)를 건립하여 모든 민중으로 하여금 신을 공경하고 신앙생활을 하게끔 하면 일본 정신의 진수에 철저히 젖어들게 할 수 있습니다”이다. 그는 이어 “앞으로 징병을 보낼 반도의 부모로서 자식을 나라의 창조신께 기뻐하며 바치는 마음가짐과 귀여운 자식이 호국의 신으로 야스쿠니 신사에 신으로 받들어 모시어질 그 영광을 충분히 인식하여 모든 것을 신께 귀일하는 신념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신에 대한 신앙을 철저히 하여 현세의 신이신 천황께 귀일하는 것입니다”라고 주장한다. 조선의 부모들이 천황폐하를 위해 기꺼이 자식의 목숨을 바칠 수 있도록 면 단위마다 신사를 세워 신앙심을 고취시키자는 고약한 내용이다. ‘일본동맹통신사’에서 발간한 자료를 보면 김용주는 말만 내세운 게 아니라 실제로 대구신사를 건립하는 데 2천원을 기부한 것으로 나온다.
더 심한 건 신라시대 화랑 관창과 조선시대 사육신 성삼문의 사례를 들며 “우리는 이처럼 의용충렬한 선조를 갖고 있습니다. 그 자손인 자가 분투하여 굳건한 각오를 갖는 게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라는 논리를 편다. 우리 조상들의 충성심과 의기를 오늘에 되살려, 일본 천황을 위해 떨쳐일어나자는 얘기다.
2년 전 김무성 아버지 김용주의 친일행적 비판한 ‘한겨레’ 칼럼 반론기회 줘 반론보도문 게재 그뒤 인터넷 포털에서 김용주는 친일은커녕 애국자로 둔갑했다
김무성 대표 쪽은 언론중재위에서 “매일신보 믿을 수 없다”고 반박 한데 그 아버지는 “매일신보가 반도의 민지 계발에 공헌한다”며 한글판 추가발행까지 제안하기도
김용주는 자서전에서 친일행적 숨겨
김용주는 이어서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의 한글판을 매주 1회 발행하자고 제안하며 그를 통해 “영미화란의 과거 수백년 동아침략의 실정 및 과거 현재에 통틀어 약소하고 전쟁에 패한 국가민족의 말로가 얼마나 참담하고 슬프고 애달기 짝이 없는 것인지를 명시하여 정부를 향하여 나아가는 길을 제시하고 일억 국민은 굳게 단결하여 죽어서라도 승리하겠다는 결심을 확고하게 해야 할 것”이라는 말로 연설을 맺는다.
김용주는 두번째 안건에도 등장해 발언을 한다. 안건은 “대동아전쟁 바야흐로 저편과 이편이 결전양상으로 바쁘고 어지럽고 맹렬하게 됨을 돌아보고, 더욱 미영격멸의 결의를 새롭게 하고 조선서 필승 신념을 고양하며, 전력증강, 전시생활의 확립을 한층 심화 철저히 하는 건설적 의견”이다.
그는 이 의제와 관련해 “반도 2천500만의 반수인 부녀자의 생산방면 활동”을 높이기 위해 “취사는 아침 밤 2번으로 하고, 점심은 도시락제로 할 것” “요릿집, 음식점 등 유흥음식 시간을 미영격퇴까지 당분간 2시간 이내로 제한할 것” 등을 제안하기도 한다. 위안부 문제를 거론하지 않은 게 그나마 다행으로 여겨질 정도다.
이 자료를 통해 <매일신보>를 바라보는 김무성 대표 부자의 시각차가 드러나 쓴웃음을 짓기도 했다. 나는 2년 전 칼럼에서 1941년 12월9일치 <매일신보>를 근거로 “김무성의 부친인 김용주는 조선임전보국단 간부로서 ‘황군에게 위문편지를 보내자’는 운동을 펼쳤다”고 썼다. 실제 그날치 신문 기사를 보면, 김용주는 대구부 욱정공립국민학교에서 열린 조선임전보국단 경북지부 결성식에 참석한다. 거기서 그는 ‘황군장병에게 감사의 전보를 보낼 것’을 제안했고, 이는 만장일치로 가결된다. 그리고 그는 조선임전보국단 경북지부 상임이사에 선출되는 걸로 나온다.
하지만 김무성 대표 쪽은 “<매일신보>가 당시 조선총독부의 기관지였고 당사자가 작성하지 않은 기고문조차 매일신보 기자가 임의로 작성해 보도한 사례가 있는 만큼 믿을 수 없다”고 언론중재위에서 반박했다. 그런데 그 아버지는 “<매일신보>는 반도의 민지(民知) 계발에 크나큰 공헌을 하고 있다”며 <매일신보> 한글판을 추가로 발행하자고까지 했으니 우리 역사의 씁쓸한 한 단면이다.
김용주도 해방 이전 자신의 행적을 숨긴다. 그는 작고 1년 전인 1984년 <나의 회고록: 풍설시대 80년>을 펴내는데, 일제 말 행적에 대해 이렇게 적어놓고 있다. “이러한 시국하에서는 만사에 있어 조심스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새삼스레 일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1943년부터는 일제 치하의 모든 면에서 스스로 후퇴하여 8·15 해방에 이르기까지 칩거생활로 들어간 것이다.” 1943년의 전선공직자대회(全鮮公職者大會) 발언은 깨끗하게 지운 것이다.
긍정적 평가할 대목도 있겠지만…
나는 이 자료로 인해 김용주 전 회장이 단박에 ‘친일파’가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김용주 전 회장의 일대기 가운데 후손들이 평가해야 할 대목 또한 많이 있기 때문이다. 조선인들이 교육받을 곳이 점점 줄어드는 것을 우려해 경영난으로 존폐위기에 처한 영흥학교를 새롭게 설립한 점이 그렇다.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 직전에 당시 주일공사였던 김용주가 맥아더 장군을 찾아가 5대 궁궐과 4대문 등을 하나하나 지도에 표시해가며 우리 역사 유물과 주요 문화재들을 보호해줄 것을 간곡히 요청했다고 하니 크나큰 공로다. 단지 이 자료를 계기로 있는 사실은 있는 그대로 보자는 거다.
시인 김수영이 ‘역사는 아무리 더러운 역사라도 좋다. 진창은 아무리 더러운 진창이라도 좋다’(<거대한 뿌리>)고 노래했듯이 친일과 독재라는 우리의 아픔을 받아들이고 끊임없이 고쳐나가려는 용기만이 우리를 진창의 역사에서 구원해줄 거라고 믿는다. 큰 꿈을 꾸는 김무성 대표가 그런 자세를 가질 때에라야 열강의 틈바구니를 헤쳐나가는 지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