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한미군과 기지촌 한국여성과의 `국내거주` 혼혈아, 2만명정도로 추산

by 염준모 posted Sep 05,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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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한미군과 기지촌 한국여성과의 `국내거주` 혼혈아, 2만명정도로 추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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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자의 슬픔/ 박후기

 

 

전신주 위의 애자가 몸을 떨고 있네

기지촌에 비는 내리고

먼 데서 달려온 뜨거운 전기가

쉴 새 없이 애자의 몸을 핥고 지나갔네

 

철조망에 매달린 물방울이 보이네

전선을 타고 흐르는 애자의 눈물이 보이네

고통은 길지만 지나가는 것이고,

생(生)은

애자의 몸을 시커멓게 더럽히며 사라진

찰나의 스파크 같은 것이라네

 

깨진 애자의 젖은 몸이 길 위에 뒹굴고

미제 험비*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불에 그을린 애자의 몸을 밟고 지나갔네

 

* 미제 군용 차량.

 

- 시집『종이는 나무의 유전자를 갖고 있다』(실천문학사,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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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신주 위의 애자(碍子)는 전기의 절연성 확보를 위해 이용되는 도자기 소재의 기구를 말하지만 여기선 기지촌 양공주 ‘애자’와 더불어 중의적 의미로 쓰이고 있다. 기지촌은 미군기지 주변에 형성된 상가와 유흥가를 통칭하는데, 박후기 시인이 나서 자란 곳이 평택이란 점을 감안하면, 이 시도 그 장소성과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그의 첫 시집에 실린「뒤란의 봄」에는 ‘보이저 2호가/ 해왕성을 스쳐 지나갈 무렵/ 아버지가 죽었다’ ‘미군 부대 격납고 지붕에서/ 땅으로 내리 꽂힌 아버지가/ 멀어져 가는 보이저 2호와 나와의 거리만큼이나/ 아득하게 느껴질 무렵,/ 겨울이 왔고/ 뒤란에 눈이 내렸다’는 대목으로 알 수 있듯이 시인은 미군부대에서 일하다가 사고사 당한 부친에 대한 아픈 기억을 갖고 있다.

 

그에게 미군기지와 기지촌의 내막은 시인으로서 감당해야할 현실이 되어 자연스레 그의 마음 밭에 아픔으로 스며들었겠다. 특히 별난 기지촌 환경에서의 유년기 경험이 그의 정서에 끼친 영향은 적지 않았으리라. 이 시는 ‘쉴 새 없이’ 찌릿찌릿 전기고문을 당하는 것과 같은 기지촌 양공주 애자의 비참한 생을 ‘깨진 애자’로 은유하고 있다. 절연되지 않은 애자의 젖은 몸속으로 눈물이 줄줄 흐르는데, ‘불에 그을린 애자의 몸’ 위를 ‘험비'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밟고 지나갔다. 이런 ‘애자’와 같은 양공주의 역사는 주한미군의 역사와 괘를 같이 한다. 해방 후 미군 2개 사단이 점령군으로 주둔하면서 ‘자연발생적인’ 수요에 의해 공급되기 시작했고,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양산되었다.

 

전쟁으로 살길이 막막해진 피난민들은 미군부대 주변으로 몰려들었고, 그 가운데 홀몸이 된 부녀자와 고아는 뭐든 해서 먹고 살아야했기에 미군과 잠을 자는 일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가족을 먹여 살리고 동생들의 학비를 마련하려고 자신을 희생하여 몸을 판 ‘누이’들도 생겨났다. 취직을 시켜준다거나 아는 언니가 놀러가자는 꼬임에 빠져 발을 들여놓은 처녀도 적지 않았다. 1960년대에는 미군 제2보병사단이 주둔한 동두천을 비롯해 전국 62개 기지촌에 양공주의 수만도 2만 명을 넘었다. 당시 점잖은 어른들은 그들을 ‘양색시’라고 불러주었지만, 대개는 ‘양갈보’라 부르며 그들을 경멸하고 손가락질 했다. 어쩌면 나도 키득거리며 그들의 붉은 입술을 얄궂은 눈으로 쳐다봤을지 모르겠다.

기지촌이 급격히 늘어난 데는 양국 정부의 ‘후원’도 큰 몫을 차지했다. 미군측은 가족을 데려오지 못한 미군들을 위한 서비스 품목으로 생각했다. 미군이 훈련할 때 양공주를 ‘담요부대’로 산에까지 데리고 가기도 했다. 산에서 요구에 응하지 않는다고 반항하다가 죽은 여인도 있다고 한다. 한국정부는 양공주를 남한의 자유를 수호하는 미군을 즐겁게 해주어 양국의 우호를 증진하고 외화벌이의 한 수단으로 보았다. 해당 군청 관계 공무원은 매월 실시하는 집합교육에서 “미군을 위안해 주고 달러를 벌어들이는 당신들은 애국자다. 양공주가 없으면 동네처녀들과 아줌마들이 다 당한다. 당신들이 미군에게 서비스를 잘 해야 나라가 편안하다”며 그녀들을 향해 귀에 딱지가 앉도록 훈시를 반복했다.

 

그녀들 때문에 나라가 얼마나 편해졌는지 모르겠지만 기지촌 양공주는 혼혈아 등 많은 사회문제를 낳았다. 오로지 국가는 미군을 상대하는 여성의 몸을 깨끗하게 만드는 데만 관심이 있는 것처럼 비쳐져 툭하면 페니실린을 맞았고, 그 쇼크 때문에 죽은 이도 적지 않았다. 현재 국내에 거주하는 미군과 기지촌 여성과의 혼혈인 수를 혼혈인협회에서는 2만 명 정도로 추산하고 있다. 정부에는 아예 통계치도 없다. 의무교육도 받지 못하는 혼혈인들이 30%가 넘을 만큼 극심한 차별을 받는다고 한다. 혼혈인들은 사회에서 철저히 버림받아 3대가 양공주가 된 집안도 있다. 양공주는 1980년대부터 미군감소와 함께 꾸준히 줄어들고는 있다. 전국 50여 곳의 기지촌에 만 여명이 있는데, 지금은 80% 이상을 러시아와 필리핀 등지에서 온 여성들이 그 자리를 메우고 있다. 하지만 그 수가 줄고 더 이상 혼혈아는 태어나지 않는다지만 여전히 그들의 속사정은 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

 

특히 과거에 ‘활동’했던 나이 많은 양공주들의 사정은 심각한 지경이다. ‘애자의 슬픔’을 그들만의 아픔으로 둘 것인가. 작년 이맘 때 평택의 한 문화센터에서 연극 '숙자 이야기'가 무대에 올려졌다. 칠순에 가까운 기지촌 할머니 10여명이 무대 위에 마련된 한 할머니 영정 앞에 장미꽃을 올려놓는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 무대와 객석은 온통 눈물 바다였다. 무대의 영정은 당시 기지촌의 쪽방에서 외롭게 버티다가 세상을 떠난 한 할머니였다. '숙자'는 연극에 출연한 한 할머니의 실명이었으며, 연극에 출연한 다른 할머니들 모두 나이 들어 일을 그만두고도 오갈 데 없이 기지촌 쪽방에 눌러앉은 분들이었다.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이 싫어 어제까지도 망설였는데 끝내고 보니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 후련하다”고 털어놓았다. 일종의 연극을 통한 심리치료였던 것인데 사회의 반향은 컸다.

 

그들 역시 경로와 의미는 다르지만 일본군위안부 할머니들과 마찬가지로 짓밟힌 역사의 희생자들이었다. 그들이 지금 또 다른 위기를 맞고 있다. 용산 미군기지 이전으로 인해 평택미군기지 확장이 본격화됨에 따라 안정리 일대의 땅값은 급등하였고 따라서 전월세 시세도 많이 올랐다. 신축건물이 들어서면서 연탄보일러를 떼는 월세방도 사라져가고 있다. 건물이 하나둘 철거되는 상황에서 대부분 기초생활보호대상자인 그 할머니들의 운명이 바람 앞에 등불이다. 기지촌은 지금 너무나 뚜렷하게 현재진행형이다. 한국전쟁부터 지금까지 기지촌을 거쳐 간 여성의 수를 관련 연구논문에서는 30만 가량으로 추산하는데, 파월장병 수와 비슷한 규모이다. 사회로부터 내몰린 독거 기지촌 할머니들의 비참한 삶이 과연 그들만의 책임일까. 그들 가운데 어느 소녀가 자신의 미래를 양공주로 꿈꾸었겠는가.

 

비루한 삶을 견디다 못한 많은 여인들은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60~70년대 동두천 송탄 등에서는 이따금 양공주의 장례가 일반인보다 훨씬 성대하게, 꽃상여를 타고 시내를 도는 등 화려하게 치러지기도 했다. 기지촌의 모든 양공주들이 한번 손님을 받을 때 3~10달러에서 몇 센트씩을 모아 생애 단 한번 마지막 가는 길만이라도 호화롭게 보내자고 자체 결의해 이루어진 퍼포먼스였다. 사실 한때는 양공주들이 벌어들인 외화가 나라 전체 외화벌이의 10% 가까이 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들을 쳐다보지 않았다. ‘숙자 이야기’에서도 평생 미군기지 옆에서 술 팔고 몸 팔며 살다 간 여인의 관이 장미꽃으로 가득 덮였다. 비통한 분위기도 잠시, 고인의 친구와 동생들은 관을 둘러싸고 화투판을 벌이다가 누군가의 선창으로 이미자의 ‘여자의 일생’이 흐느적거리며 이어졌다.

 

기지촌은 사실 정부로부터 허가받은 성매매 지역이었다. 1961년에 윤락행위등방지법이 제정되었지만 정부는 기지촌과 같은 특정 성매매 지역의 설치를 사실상 허용했고 특히 주한미군 기지촌 주변의 유흥업소에 대해서는 미군 대상의 성매매 여성들이 외화 획득에 기여한다는 논리로 면세 혜택이 주어졌다. 심지어 정부의 주도 하에 매매춘 주식회사가 설립되기도 했는데, 그것이 바로 군산에 있는 아메리칸 타운이다. 미군 전투 비행단이 주둔해 있는 군산에 만들어진 아메리칸 타운은 미군들이 필요한 모든 향락을 원스톱으로 즐길 수 있는 오로지 미군들만의 쾌락을 위해 폐쇄적으로 조성된 계획도시였다. 1969년 9월 문을 연 아메리카타운은 미군을 위한 클럽, 식당, 미용실, 각종 상점, 환전소에 기지촌 여성들을 위한 500여개의 방까지 갖춘 매매춘을 위한 자급자족형 신도시였다.

 

‘기지촌 정화운동’을 통해 우리는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사실상의 공창제를 운영하면서 힘없는 여성들의 몸뚱이를 담보로 국가안보와 외화벌이를 동시에 해결하고자 했던 불편한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미군의 추가 철수를 막기 위해 전전긍긍했던 우리 당국에게 다양한 경로로 미국은 기지촌 정비에 대한 요구를 해왔다. 미국대사관은 한국의 기지촌에서 흑인병사들을 인종차별 하는 것에 대한 우려를 표시했고, 미8군 측은 기지촌의 불결한 환경과 성병 문제를 제기했다. 자식을 군대에 보낸 부모들이 한국은 성병 발병률도 높고 인종차별도 심하다며 자식의 한국 배치에 극력 반대한다는 것이다. 주한미군 쪽은 독일이나 오키나와 등지의 쾌적한 기지촌의 예를 들며 한국 쪽에 대대적인 기지촌 정비를 요구했다.

 

전투력을 극대화하려면 병사들이 성적 스트레스를 풀어야 하되, 성병으로 인한 전투력 손실을 막기 위해 깨끗한 성을 공급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청와대 직속의 기지촌 정화위원회가 발족했다. 미국의 요구를 적극 수용해 기지촌 환경개선과 성병예방 및 치료 등에 팔을 걷어붙였다. ‘메이 아이 싯 다운’ 교양 영어도 가르쳤다. 하지만 그들은 ‘메이’는 무슨 놈의 얼어죽을 메이냐며 자신들에게 필요한 영어란 ‘렛스 고 숏 타임, 렛스 고 롱 타임, 하우 마취’면 족하다고 생각했다. 관심을 갖는 기지촌 여인들은 거의 없었지만, ‘검진증’을 뺏기지 않으려면 자리를 채워야 했다. 처음 기지촌 정화운동을 건의한 이재전 장군의 솔직한 고백도 있었듯이 그것은 기지촌 주민을 위한 것이 아니라 주한미군을 위한 것이었으며, 미국과 한국 두 국가가 긴밀히 협력하여 굳게 손잡고 추진한 국가적인 산업이자 정책이었다.

얼마 전 미군 기지촌 여성들 122명은 국가를 상대로 일인당 1천만 원씩의 배상을 요구하는 소장을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제출했다. ‘기지촌 위안부 국가배상 소송단’은 피해 내용을 성폭력, 구타, 감금, 성매매 강요, 인신매매, 마약 투여, 강제낙태, 업주와 공무원 유착 비리 등 총 18개 세부항목으로 나누었다. 그들은 기자회견에서 맨 먼저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괜히 나섰다가 일본 우익들만 좋은 일 시키는 거 아닐까?” 그들이 국가의 사과를 요구하며 손해배상 소송을 준비할 때 가장 큰 고민이 그것이었다. 자칫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뒤섞여 위안부 할머니들의 억울함과 아픔이 희석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분명히 그것과 이것은 별개의 문제지만 비슷한 동기와 속성에서 비롯되어 이해되는 부분도 없지는 않다.

 

미군 기지촌의 형성 과정에 국가의 어떤 정책이 영향을 미쳤고 그것이 옳았는지 혹은 불가피했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미성년의 소녀들이 기지촌에 팔려 오고, 그곳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국가가 계속 방치했다면 이설 없이 국가의 책임을 물을 수밖에 없을 듯하다. 학자들은 ‘어떻게 군 위안소로 흘러 들어갔는지도 봐야 하지만 여성들이 어떤 처지에 놓여 있었는지를 분석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자발적이건 강제로 들어갔건 여성들이 자유롭게 일을 그만둘 수 없는 상황을 국가가 방조했다면 국가의 책임을 물을 수 있다”는 것이다. 국회에서는 새정치민주연합 일부 의원들을 중심으로 ‘위안부 피해 진상규명과 지원 등에 관한 특별법’ 제정을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지금 일본 우익들의 행태처럼 기억하고 반성하지 않는 역사는 반복된다. 배상의 당위성 문제에는 이견이 있다손 치더라도 그들을 향해 굳게 닫혔던 우리들 마음의 문은 열어도 좋으리라.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불에 그을린 애자의 몸을’ 밟고 지나가도록 우두커니 내버려 둬서는 안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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