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에 어머니와 함께 찍은 사진
피셔 디스카우는 1925년 5월 28일 베를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교장, 어머니 역시 교사였고, 세 아들 중 막내로 태어나 어릴 때는 알버트 디트리히 피셔로 불렸다. 피셔 집안은 교사, 의사, 건축가, 성직자를 여럿 배출한 전형적인 '전문직 중산층'에 속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어머니 집안은 '폰 디스카우'라는 귀족가문이었고, 아버지는 1934년 집안 성(姓)인 피셔에 자신의 어머니쪽 성 '디스카우'를 줄표로 덧붙였다.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는 피셔 디스카우의 친할머니쪽 조상이었던 이 폰 디스카우의 의뢰로 1742년 [농부 칸타타]를 작곡했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노래를 잘했던 피셔 디스카우는 16세가 된 1941년부터 리트와 오라토리오 분야에서 유명했던 게오르크 발터에게 제대로 성악 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2년 후인 1943년 2차 대전에 징집된 그는 1945년에 연합군 포로가 되어 이탈리아에서 2년간 수용소 생활을 했고, 전쟁 중에 병약했던 형이 나치의 수용시설에서 굶어죽는 등 집안이 몰락하는 불행을 겪었다. 포로수용소에서 풀려난 뒤 1947년부터 피셔 디스카우는 다시 베를린에서 헤르만 바이센본에게 성악을 배웠다. 전쟁 통에 제대로 음악 공부를 하지 못했는데도 그는 그 해에 이미 브람스 [레퀴엠] 솔리스트 대타로 나서 리허설 없는 완벽한 가창으로 주목을 받았다. 곧 라이프치히에서 첫 리트 독창회를 열 수 있었고, 베를린 '티타니아 팔라스트'에서 콘서트를 가져 대단한 성공을 기록했다. 20대의 이 젊은 바리톤은 패전으로 빈곤과 절망, 무력감에 시달리던 독일인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었다.
동서로 분단된 베를린의 서쪽 '베를린 시립오페라'와 주역가수로 전속계약을 맺은 그는 [돈 카를로]의 포자 후작으로 데뷔했고, 그때부터 독일 오페라 무대가 그에게 활짝 열렸다. 이 시립오페라는 1961년에 베를린 도이체 오퍼(Deutsche Oper Belin)로 이름을 바꿔 오늘날까지 독일을 대표하는 오페라극장의 하나로 인정받고 있으며, 피셔 디스카우는 오페라 무대에서 은퇴한 1978년까지 30년간 이 무대에서 노래했다.
1956년에 독일 남부 바이에른주 Ansbach에서 열리는 바흐 음악 축제(Ansbach Bach Week)에 참가하여 팬들에게 사인하고 있는 피셔 디스카우
1949년, 스물넷의 피셔 디스카우는 첼리스트 이름가르트 포펜과 결혼한다. 그리고 아들 셋이 태어난다. 첫째 마티아스는 무대디자이너, 둘째 마틴은 지휘자, 셋째 마누엘은 첼리스트가 되었다. 아들들은 아버지가 만들어준 인형극장, 아버지와 처음으로 피아노 앞에 함께 앉았을 때 등을 선명하고 행복하게 기억한다. 그러나 이들의 어머니 포펜은 셋째를 난산 끝에 얻고 세상을 떠난다. 2차 대전 이후 또 한번의 타격이었다. 첫 번째 아내와 함께 했던 15년간 피셔 디스카우는 리트 가수로 또 오페라 가수로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피셔 디스카우는 바르토크의 오페라 [푸른 수염의 성(Bluebeard's Castle)] 타이틀 롤을 불렀고 음반으로 남겼다. 마치 이 오페라의 주인공 '푸른 수염'처럼 그 역시 네 번 결혼했다. 우리나라의 경우라면 아무리 뛰어난 예술가라 해도 네 번 결혼한 사람을 바라보는 세간의 시선은 곱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피셔 디스카우의 이력에서는 이 결혼들이 그리 주목을 받지 않는다. 엄청난 에너지를 지닌 예술가이면서도 조용하고 내성적인 성품의 인물이었기 때문일까? 알마비바 백작이나 돈 조반니 같은 모차르트 주역 바리톤을 노래하는 그의 모습은 타고난 바람둥이처럼 보이지만 그건 탁월한 연기력 덕분일 뿐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대단한 명성을 누리던 중에 아내를 잃은 그는 1965년부터 67년까지 인기 여배우 루트 로이베리크와 두 번째 결혼생활을 했고, 크리스티나 푸겔 슐레와 68년부터 75년까지 세 번째 결혼을 유지한 뒤 1977년에 헝가리 계 루마니아 소프라노 율리아 바라디(1941~ )와 결혼해 여생을 함께 했다. 경쾌하고 선명한 음색과 남다른 연기력을 지닌 바라디는 모차르트, 치마로사 오페라의 주역 등으로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를 비롯해 세계 유수의 오페라극장에서 활약했고, 치마로사 [비밀결혼]의 큰 딸 엘리세타 역, 라이만의 [리어 왕]에서 리어의 딸 코딜리어 역을 맡아 피셔 디스카우와 호흡을 맞추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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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68년 10월 9일 크리스티나 푸겔 슐레와 결혼하는 디트리히 피셔 디스카우 2 디트리히 피셔 디스카우와 네 번째 부인인 소프라노 율리아 바라디(Julia Varady) |
무엇이 그를 불멸의 존재, 음악사를 대표하는 성악가로 만들었을까? 평론가 옌스 말테 피셔는 그의 '한결같은 수준'을 이유로 꼽았다. 유명한 성악가라 해도 어떤 무대에서는 탁월한 기량을 보이지만 다른 무대에서는 야유를 받는 경우도 있고, 이 배역으로는 뛰어나도 다른 배역은 기대에 못 미치기도 한다. 하지만 피셔 디스카우는 모든 배역, 모든 무대에서 한결같은 안정감과 최고의 수준을 보여주었다. 타고난 재능으로 이미 20대에 명성을 얻었지만, 새로운 작품을 연구하고 연습하는 일에 잠시도 게으름을 부리지 않았기 때문에 얻을 수 있었던 결과였다. 전 세계를 빛의 속도로 돌아다니며 충분한 리허설 없이 무대에 서는 요즘 인기 성악가들을 그는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작품을 대하는 그의 진지하고 학구적인 태도는 '성악가가 절대로 작곡가를 앞질러가서는 안 된다'라는 그의 주장에도 반영되어 있다. "우리(성악가)는 주인의 포도밭에서 일하는 일꾼입니다. 그 이상은 아니죠." 물론 성악가가 오늘날 슈베르트나 말러의 가곡을 자신만의 독창적인 해석으로 노래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피셔 디스카우는 악보에 보이는 작곡가의 연주 지시에만 맹목적으로 충실했던 연주자는 아니었다. 그는 작곡가가 진정으로 전달하려고 했던 감정과 의미를 깨닫게 될 때까지 작곡가와 작품을 탐구했고, 무대 위에서는 아주 조심스럽게 공들여 그 결과를 펼쳐 보였다. 물론 그 이전에도 훌륭한 리트 해석자들이 존재했지만, 피셔 디스카우를 통해 비로소 독일 가곡은 오페라 분야와 거의 비중이 같은 성악 장르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1964년 잘츠부르크에서 미국가수 그레이스 범브리(Grace Bumbry)와 베르디 [맥베스] 작품 공연
https://youtu.be/WhiAS7MRcZc
Schubert · Winterreise · Fischer Dieskau · Brendel Subtitles Spanish and Bulgarian
그가 시대를 뛰어넘어 감상자들에게 변함없는 사랑을 받을 수 있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그의 자연스러움일 것이라고 평론가들은 입을 모은다. 리트 무대 위의 그는 결코 요란한 제스처나 변화무쌍한 표정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런데도 그가 노래하는 슈베르트의 '마왕'은 전율을 느낄 만큼 드라마틱하다. 희극 오페라 무대 위의 그는 말할 수 없이 유머러스하지만, 그의 표정이나 동작에는 어떤 과장도 없다. 자유자재로 변화하는 음색과 톤으로 순간마다 적절한 감정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관객이 저도 모르게 웃게 되는 것이다.
피셔 디스카우는 현대 작곡가들의 작품을 세상에 알리는 데도 크게 기여했다. 아리베르트 라이만 뿐만 아니라 벤저민 브리튼, 한스 베르너 헨체, 고트프리트 폰 아이넴, 비톨트 루토스와브스키 등 다양한 현대 작곡가들의 작품 초연에 나서서 참여했기 때문이다. 1993년에 68세로 은퇴선언을 한 뒤 젊은 성악가들을 가르치며 지휘자, 저술가, 화가로 활동한 피셔 디스카우는 2012년 5월 18일, 87회 생일을 열흘 남긴 채 자택에서 자다가 조용히 영면했다. 곁을 지킨 아내 바라디는 '그가 편안히 세상을 떠났다'고 세상에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