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수와 산골 할배 맞짱뜨다

by 조정래 posted Jun 12,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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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일류대학  국문학과 교수님이 안동지방 사투리  연구 문제로 교육부로 부터 제법 많는 연구비를 받았는데

연구비 지출명세를 꾸밀려면 나름 출장비 정산도 해야하고 해서 국문과 수제자들 몇 명을 데리고 안동 학가산 산 아래

너리티 마을을 갔습니다.


너리티 산골 사람들은 오일장 가는 길이 그리 쉽지 않습니다.


서북쪽 예천장을 가려면 산성리로 내려가 수계리를 지나서 보문 내린천 강물을  몸으로 건너 60리를 걸어가야 하고

동남쪽 안동장을 가려면 자품,이개리,명리 , 산골길을 쉬없이 걸어나와 겨우 서후천을 만나고 안동장으로 들어서려면  문디고개를 넘어야 합니다


그래서 너리티 사람들은 산성-죽전-악심이-만운동을 거쳐서 풍산장을 주로 다니는데..그도 돼지나 닭을 팔려 나가는 경우는

하루 전날 해거름에 집을 나서서  산아래 죽전이나 악심이 산골 마을에 사는 고모나 ,이모 혹은 먼친척 집에 미리 가서 잠을 잔 이후에 다음 날 새벽같이 일어나서 풍산 장을 오전 안에 보고 열심이 걸어야 해떨어지기 전에 너리티를 넘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 오지다보니 자연 아름다운 우리 언어가 오염되지 아니하고  아직도 고스란히  많이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교수가 학생들을 데리고 악심이 을을 지나가는데....방티이 밭에서 늙은 할배가 누렇게 익은 봄보리를 베고 있었습니다.

교수님이 가던 걸음을 멈추고


"할아버지 ..여기에 사시는 분이십니까?"

" 글리더"

"이마을에선  "갑자기" 라는 말을 어떤 말로 합니까?"


꺽인 부분이 뭉퉁한 조선 낫으로 누우런 보리를 한움큼 베어서 묶으면서 할배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곽-제 일하는 사람보고 물어 보이 지도 몰씨더"


학생들은 할아버지 말을 녹음하기도 하고 일부 학생들은 메모를 하였다.

산골에서 배움이 모자라서 자신의 질문에 답을 못 하는 것으로 생각한 교수는 더욱 당당한 얼굴로 다음 질문을 하였다.


"그럼 할아버지 이 동네에서는 "빨리" 를 뭐라고 표현 합니까?"


한참을 생각하던 할아버지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지가 늘거선가 당체 그키 곽제 또 물어보이 퍼-득 생각이 안 떠오르니더!"


당당한 교수님은 도저히 이 무식한 산골 할아버지와 더 대화를 해봐야 얻을 것이 없다는 것을 판단하고는 조금전 까지 그 노인 보리밭 모퉁이에 큰 비석과 봉분이 매우 커서  필히 이 지방에서 유명한 분일 것으로 짐작이가니 주인을 물어보고 혹여

자신이 아는 인물이라면 학생들 앞에서 교수 체면도 세우고 싶어서


" 할아버지 저 밭 위쪽에 있는 큰 비석의 주인은 누군지 아십니까?"


세번째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노인은 그 큰 묘를 처다보고는


"주사가 지한테 묻니더만 실상 지는 저 망자가 누군지 모르니더"

"저렇게 큰 묘인데도 마을에서 모르십니까?


교수님 말 음색에는 ...저렇게  큰 비석을 쓴 묘가 누군지도 모른다니! ..필히 어려운  碑文을 읽을 줄 몰라서 그러하겠지..그런 무시가 들어 있었다.


그런대 그 큰 묘 아래 아주 작은  묘가 보였다.

교수는 옷지절도 그러하고 체구도 작아 필히  아는 것이 전혀 없는 무지한 산골 노인일거라는 것에 이번에는 장난삼아


"그럼 할아버지 저 큰 묘 아래 작은 묘는 아십니까?"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노인은


"아니더..저 할배는 왜정시대 운보천방 술집에서 왜놈순사가 조선 각시를 놀리자 덴번에 땅바닥에 메치시기도 하고 , 예천 안동 씨름판에서 송아지도 많이 타서 ,동내 어려운 분들 다 도와주었던 황장군 묘씨더...참 훌륭한 분이씨더~남들은 별을 달아야 장군이라 호칭하지만 우리 마을 사람들은 그냥 별 안달아도 장군으로 부르니더"


큰묘는 모르는데  작은 봉분의 망자에 대해선 아주 잘 아셨다.


허나 교수님은 역시 배운 사람과 안배운 사람과의 대화다 보니 대화가 순조롭게 교수님 의도되로 가지 않는다는 점에

다소 실망했지만  나름 사투리 연구를 하기 위하여 내려 온 것이니 이번에는  이런 질문을 던졌다.

" 할아버지 이 동네 이름이 악심이라고 하던데...악은 큰산 岳에 마음心 으로 쓰지요?"

"아잇씨더 배울 學에 마음 心 쓰니더..어려운 시절 밥굼능기 흔하이 기력이 떨어져서 말소리도 바뀐니더.."


"동네 이름이 악심인데요? 혹 모르시고 말씀 하시는 것은 아닌지요?"

"지가 배운것이 없어 국문학은 모르니더만 갱상도 산골사람들이 어디 외지로 를락거리지 안아서 그런지 우리 말이 글짜하고 틀리게 발음하는것이 많니더..저 우게 산골을 도둑골 도둑골 하니더만 그것도 道德골이씨더 조선조에 한 선비가 상주서 와서 살았다 카디더"


그때 한 학생이 노인 말을 듣고 나서는


"할아버지 그렇게 실제 글자와 달리 변한 음을  기력보존 법칙이라합니다"


우리말도 잘 풀이 못하니 한문도 자연 모를줄 알고 교수가 질문했더니 의외로 노인은 한문을 아시는 듯 하여 교수가 조금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노인이 보리밭에 엎드리면서


아참 내가 늘거가이 아까 선상님 문답에 퍼득 답을 못했니더만 우리 마실에서


"갑자기를 - 곽제..라카고   빨리를 -퍼득...이라 카니더"



이런!  

국가 세금으로 연구비도 두둑히 받아서 안동지방 사투리 연구차 내려와서 처음 질문했던 것이 이미 노인은 답을 대화 속에 한것인데도 ..국문학 교수나 학생들은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노인이 말을 이어가셨다.


그카고

古仁塚上今人葬支라는 옛말이 없지는 안으나 저 우게 큰 비석 묘는 돈벌었다꼬 후손들이 저렇게 큰 비석으로 묘를 써지만 사실 저 묘터 자리는 이미   천년 흙집 터인데..후손이 없고 ..고마 무당이 터가 좋타 카이  돈주고 사서 훌 밀어내뿌고 저거 조상 묘는 저렇게 큰 비석을 세웠니더만 ㅡ  주자가례나 예상왕래를 제되로 아는 후손들이라면 비석을 묘에 세우려면 최소한 이 지방 삼 姓씨 문중에게


"우리 조상에게 이런 비문을 적은 碑를 세우려고 합니다"


하고 문의하고 다른 집안 어르신들이 죽은 고인의 덕망을 인정하여 화답승인이 나야 비석을 세우능기 안동양반들이 할짓거리인데.. 지가 봐서는 비석만 봐서는 크지만 다 헛끼씨더.. 아 그카고   조상  묘터를  무당이 터가 좋타카이 쓰능기 어데 있닛껴?

저기 하관 하던날 고인총이 두기나 나왔니더 ..명당은 명당이니 한 기도 아니고 두 기나 나왔지만 마카  요즘 돈 있다꼬 저꾸 지거 종상을 크게 맹근니  맹앵  路上行人口勝碑라 옛말이 말이 있지 않을씻껴?."


클코..우째 된 세상이  물미 터질 넘이나 안 터진질 넘이나 어중이 떠주이도  요새는 마카 대핵교 다닌다꼬 하지만 초면에 늙은이 보고 할아버지 호칭이 맞는지 아이마  어르신 호칭이 맞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어디 한둘있껴?


어디서 뭐하러 이 산골에 오신분들인줄 모르지만 암튼 이쯤 分道하시더!......

노인 말에 교수도 입을 다물었고 학생들도 조용했다.



노인은 ㄱ자 허리를 꿉혀서 다시 보리를 베기 시작했다.

할아버지 보리밭 건너 편에 선 홀딱새가 울고

학가산 정상에는  골매가 빙빙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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