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일지] 백범과 노무현; 억울하면 싸워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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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시절
백범일지를 읽고 백범에 깊이 빠졌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다시 읽은 뱀범일지는 나로 하여금 또 생각하게 한다. 백범일지는 소설이 아니다. 첩보영화
시나리오도 아니다. 지금으로써는 상상할 수 없는 당시의 시대상을 읽다보면 '설마'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러나 백범이 서두에서 밝혔듯 그가
자라며 겪은, 사실에 바탕을 둔 일지다. 당시 시대적 상황에서 스스로 선택한 그의 삶은 후대의 우리를 숙연케 한다. 현대를 사는 한국인이,
아니 인류가 읽어야 할 필독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백범은 글을 배우며 사회에 눈떴다. 교육이야 말로 독립의 밑거름이라 생각한 백범은 이후 민중교육에 전념했다. 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치던 백범은 당시 안중근의사의 사촌동생인 안명근 등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체포되어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지독한 고문 등 견디기 힘든 옥고를 치루었다. 15년형에서 감형받아 5년의 감옥생활을 마친 백범은 이후 본격적인 독립운동 길로 들어섰다.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임정의 문지기를 자처한 백범은 이후 주석의 지위에 올라 독립을 위한 다양한 일을 추진했다. 이봉창열사와 윤봉길의사를 통해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했고 광복군을 조직하여 자주독립의 초석을 깔았다. 백범을 비롯한 임정이 주도한 자주독립이 목전에 있었으나 안타깝게도 미국 등 연합군의 히로시마 원폭투하로 일제가 패망, 조선의 독립은 미국에 의존하여 마치 한순간 이루어진 모양이 되어 버렸다. 미국과 소련 등 열강의 힘에 의해 남북은 각 단독정부를 수립했다. 그러나 백범은 미/소의 한반도 철군과 통일정부 수립을 주장하며 남북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했다. 결국 백범 김구선생은 반대진영의 테러에 의해 시해되었다. 한반도에 들어선 미/소는 세계냉전을 이끌며 독일과 일본 제국주의 패망 이후 동과 서를 나누어 세계를 지배하는 국가로 군림했다. 미국이 조선의 독립 이후에도 한반도에 38선을 긋고 여전히 상주하게 된 이유는 한반도가 그들 이념의 마지노선이기 때문이었다. 백범이 하늘에서도 원통해 할 일이다. 백범의 사상과 철학은 <나의 소원>에 잘 드러나 있다. <나의 소원>에 나타난 김구선생의 철학과 나의 그것은 싱크로율 100%다. 백범은 독립운동가들이 이념쟁투로 서로 등돌릴 때 이념에 앞서 독립우선의 원칙을 주장했다. 독립이 우선이고 이후 이념대립하라는 뜻이다. <<"네 소원이 무엇이냐?"하고 하나님이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오"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하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오"할 것이요,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하는 세번째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오"하고 대답할 것이다. 동포 여러분! 나 김구의 소원은 이것 하나밖에는 없다.>> 누구나 학창시절 읽었을 백범의 <나의 소원> 도입부다. 그렇다고 백범이 국가주의자는 아니다. 민족주의자일지언정 민중 개개인 보다 국가를 우선시하는, 그러한 국가주의자는 결코 아니다. 그의 민족주의가 다른 국가에 우월적인 것도 아니다. 세계인이 서로 돕고 장래에는 한 집이 되어 사는 것은 좋은 일이라며 세계평화주의를 긍정하는 철학이다. 다만 <<우리나라를 어느 이웃 연방에 편입하기를 소원하는 자가 있다 하니, 나는 그 말을 차마 믿으려 아니하거니와 만일 진실로 그러한 자가 있다 하면, 그는 제정신을 잃은 미친놈이라고밖에 볼 길이 없다. 나는 공자/석가/예수의 도를 배웠고 그들을 성인으로 숭배하거니와, 그들이 합하여서 세운 천당/극락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 민족이 세운 나라가 아닐진대, 우리 민족을 그 나라로 끌고 들어가지 아니할 것이다. 왜 그런고 하면, ... (중략) ... 둘 이상이 합하여서 하나가 되자면 하나는 높고 하나는 낮아서, 하나는 위에 있어서 명령하고 하나는 밑에 있어서 복종하는 것이 근본문제가 되는 것이다.>>라고 함으로써 민족주의를 전적으로 배제한 세계주의적 사고도 경계한다. 아마도 이러한 그의 철학은 '억울함'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일제에 의한 식민생활과 교육에 터잡아 깨달은 철학으로 보인다. 물론 당시 배움이 없던 대다수 민중은 일제의 만행을 직접 겪고서야 독립의 필요성을 깨달았을 것이다. 즉 대다수 민중에게 독립은 부당한 억울함이 아니라 불편에 의해 요구되었을 것이다. 왜 억울한지 민중으로 하여금 깨닫게 하는 게 백범의 과제였다. 그 때문에 민중 교육에 심혈을 기울였던 듯하다. 이러한 억울함은 동서양을 불문하고 모든 혁명의 모토가 된다. 쿠바의 전설적 혁명가 체 게바라가 의사로서 편한 삶을 버리고 총을 들게 된 이유도 이와 같다. 남보다 풍요롭지 않아도 살지만 억울하게는 못산다. 내 민족이 세운 나라와 세계가 서로 도와가며 사는 것은 좋은 일이라며 긍정하나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라며 백범은 다른 나라로부터 지배 받기를 거부할 뿐, 다른 나라를 지배하려 하지 않는다. 백범일지는 그의 어린시절부터 시작된다. 철 없던 어린 시절 이외에는 성장 과정에서, 물론 과하게 표현되지는 않으나 반상지위의 억울함에 대하여, 이후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들어서는 일제지배에 대한 억울함을 강하게 표출하고 있다. 시대가 그러하지 않았다면 그의 호 백범과 같이 그저 평범한 노인으로 살다가 생을 마감했을 수도 있다. 시대가 그를 그리 만들었다. 그러나 그의 시대정신은 우연히 즉흥적으로 가지게 된 게 아니다. 끊임 없이 분노하고 끊임 없이 억울해 했다. 그의 분노와 억울함이 지금의 우리를 있게 한다. 여기서 노무현 대통령 이야기를 잠깐 해야 겠다. 노무현은 대한민국 대통령 지위에서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을 청구한 유일한 대통령이다. 또한 그와 관련한 헌법재판사건이 역대 대통령 중 가장 많다. 그런 이유로 조중동은 노무현을 분란의 주범으로 지목하며 "노무현 탓"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처럼 분란의 주범으로 낙인찍힌 노무현은 사실 국민에게 기본권 행사하는 방법을 알려주었던 것이다. 대통령인 나도 국가로부터 억울함을 당하면 이처럼 권리행사하는데, 당신들 국민은 도대체 뭐길래 국가로부터 아무리 억울함을 당해도 속으로 삭히고만 있느냐는, 무언의 가르침이었다. 백범의 민중교육과 노무현의 헌법소원에는 공통점이 있다. 억울하면 분노하고 싸우라는 것이다. 설사 그 대상이 국가라할지라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