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 군사정변

by 염준모 posted Sep 05,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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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군사정변

1961년 5월 16일 새벽, 박정희 소장이 이끄는 일단의 쿠데타군이 수도 서울 일원을 점령해 모든 국가 권력을 장악하는 정변이 일어났다.

해병대와 공수부대를 선봉으로 한 쿠데타군은 새벽 3시쯤 한강교에서 진입을 저지하는 헌병을 제압하고 서울 입성에 성공했다.

이어 주요 기관과 언론사를 완전 장악한 쿠데타군은 오전 5시 방송을 통해 6개 항목의 혁명공약을 발표했으며 오전 9시 군사혁명위원회 포고령으로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이 군사정변은 초기에 미8군사령관 맥그루더 장군의 반대와 야전군사령관 이한림 장군의 동조 거부로 잠시 난관에 부딪치기도 했으나 장면 내각의 총사퇴와 혁명위원회에 정권 이양 의결, 그리고 윤보선 대통령의 혁명에 대한 국민적 지지와 협조 호소로 군사 쿠데타의 성공이 공식적으로 확인됐다.

5·16 군사정변의 배경을 보면 먼저 정치권의 부패와 무능, 그리고 민생 궁핍과 안보적 불안을 들 수 있다. 다음으로는 국군의 비약적 발전에 따른 군부 세력의 비대와 국가 발전에 대한 선도 의식과 군 내부 부패 요소에 대한 자가 숙정 실패에 따른 누적된 불신과 불만, 그리고 정치성이 강한 일부 군인들의 정권욕을 들 수 있다.

쿠데타의 중심 인물인 김종필 중령을 위시한 일부 육사 8기생들은 정군을 위한 자신들의 요구가 하극상으로 몰려 입지가 불안하던 차에 3·15 부정선거 음모가 구체적으로 나타나자 당시 부산 군수기지사령관인 박정희 소장을 추대해 거사를 하기로 모의했으나 4·19혁명으로 그 명분이 사라지자 일시 유보하게 된다.

그들은 4월 혁명 이후 정정 불안이 계속되고 있어 4·19혁명 1주년을 기해 대규모 데모가 일어날 것으로 예상됐기 때문에 진압을 위해 군이 동원되면 그때 정부를 전복, 정권을 장악할 계획을 갖고 있었으나 이 계획도 예상했던 소요가 발생하지 않아 실패하게 된다.

결국 그들은 여건의 성숙만을 기다릴 수 없다는 결론 하에 5·12 쿠데타 계획을 추진했는데 이 과정에서 비밀이 누설, 일단 훗날로 연기했지만 수사기관의 추적과 주모자 체포령 등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는 상황에 몰리게 되자 5월 16일을 거사일로 결정하고 행동을 개시했다.

쿠데타의 성공으로 군사혁명위원회가 국가 전권을 장악하게 됐고 혁명위원회 의장은 당시 육군참모총장 장도영 중장이, 그리고 부의장은 2군 부사령관으로 쿠데타를 주도한 박정희 소장이 맡게 된다.

사흘 뒤인 5월 19일에는 군사혁명위원회를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칭했다. 그러나 쿠데타 핵심 세력은 그들이 혁명공약에서 내건 ‘민정 이양과 군 본연의 임무 복귀’를 실천할 움직임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러한 문제로 갈등이 노정돼 민정 이양 쪽으로 기울고 있던 장도영 의장이 해임되고 박정희 소장이 의장에 취임해 드디어 군사 정권의 전면에 나서게 된다.

결국 장도영 의장은 반혁명 사건의 중심 인물로 지목돼 그의 추종자 44명과 함께 체포돼 투옥됐다. 이로써 장도영 세력은 제거됐고 박정희 의장이 완전히 전권을 장악하게 된다.

그리고 1962년 12월 대통령 중심제와 단임제를 골자로 하는 헌법을 국민 투표를 통해 개헌하고 1963년 8월 31일 각본에 따라 박정희 의장은 민주공화당 총재와 대통령 후보가 됐고 10월 15일 선거에서 윤보선 후보를 불과 16만 표 차이로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 제3공화국을 탄생시켰다.

지금도 5·16이 혁명이냐, 아니면 군사 쿠데타냐 하는 논쟁과 함께 박정희라는 인물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다만 경제 부흥과 안보적 업적에 앞서 군이 정치에 개입하는 나쁜 선례를 남긴 것과 장기 집권을 통한 독재와 인권 탄압 등으로 민주정치가 유린되고 도덕주의가 함몰된 역사의 퇴행은 냉정하게 곱씹어 보아야 할 것이다.

<김영이 군사평론가>

[출처] 5.16 군사정변 |작성자 롱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