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전 대통령을 암살한 김재규, 그의 점에 대한 일화!

by 염준모 posted Sep 08,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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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전 대통령을 암살한 김재규, 그의 점에 대한 일화!

 

박정희 전 대통령을 암살한 김재규, 그의 점에 대한 일화!

 

박정희 전 대통령을 암살한 김재규, 그의 점에 대한 일화!

 

박정희대통령은 1979년 10월26일 밤 궁정동 안전가옥에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쏜 총을 맞고 서거했다. 그 며칠 전. 공화당 신형식사무총장은 광주에서 한약방을 하는 '동촌선생'의 다급한 전갈을 받았다. 인편으로 보낸 메시지는 매우 언짢은 내용이었다. "박대통령 신상에 지극히 위중한 괘가 나왔다. 당분간 절대로 서울을 떠나서는 안 된다. 내가 직접 올라가 대통령을 만나 설명할 테니 당장 헬리콥터를 보내 주면 좋겠다."

대통령 신상과 나라의 운세를 봐주던 '동촌'

정치인과 점
1990. 12.21 [동아일보] 19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동촌'은 능히 그런 전갈을 보낼만한 사람이었다. 그는 수시로 청와대에 드나들며 대통령 신상과 나라의 운세, 즉 시운()점을 봐줬다. 박대통령은 그의 점이 잘 맞는다며 자주 청와대로 부르곤 했다. 그러나 결과론적 얘기지만 그해 10월 동촌을 서울로 '모실' 헬리콥터는 광주에 가지 않았다. 그리고 박대통령은 26일 충남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에 참석했다. "서울을 절대 뜨면 안 된다"는 점괘를 어긴 것이다. 그는 그날 밤 안가에서 술파티를 벌이다 총을 맞았다.

그때 왜 신총장이 광주로 헬기를 보내지 않았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동촌의 일화는 평소 점괘에 관심이 많던 이충환 신민당 최고위원 귀에 들어갔고 그를 통해 정치권에 알려졌다. 10.26 직전이라면 부산 마산에서 민주항쟁이 거세게 일어 계엄령, 위수령이 내려지고 "까짓 것, 탱크로 확 밀어버리자"는 험한 말(차지철 청와대 경호 실장)까지 나왔던 때다. 나라 전체가 흔들리고 뒤숭숭했으니 "한갓 '점쟁이' 말을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헬기를 띄우는 모험은 누구라도 하기 어려웠을 것"이란 얘기가 돌았다.

'유신' 날짜도 점괘에 의해 정해졌다?

숨은 실력자 정재계 고위층의 막후…단골 역술인은?
1991. 6.30 [경향신문] 21면

그러나 그 일로 인해 박대통령이 점을 끔찍이 신봉했고, 중요한 정치행사도 점괘에 따라 실행했다는 얘기들이 속속 새나왔다. 본격적으로 철권 정치의 막을 연 72년 '10월 유신' 날짜도 점괘에 의해 정했다는 얘기가 돌았다. 당시 중앙정보부 판단기획실장으로 역술에 능한 김성락 씨(유신정우회 1기 의원)를 시켜 세검정의 한 유명 점술가로부터 받아온 10월 17일을 유신 단행일로 잡았다는 것이다. 그날 저녁 7시를 기해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국회를 해산, 정치활동을 중지시키는 초헌법적 조치를 취한 것이다.

대통령 직선제를 폐지하고 통일주체국민회의 간선제로 바꾼 이 유신체제를 지탱하려고 이후 긴급조치가 아홉 차례나 내려졌다. 국민의 비판과 판단, 선택권을 봉쇄하고 상호감시체제를 가동하기 위해서였다. 한국현대사를 옥죈 비극적 사건 날짜가 미신적 점괘에 의해 잡혔다는 건 참 서글픈 일이다.

HR '대통령 선거 사령부' 가동
1991. 5.10 [동아일보] 19면

사실 알고 보면 70년대, 유신 긴급조치 치하는 점복과 미신이 성행한 시대였다. 현실은 불투명하고 개인의 삶이 어떻게 변할지 종잡을 수 없었다. 정치와 생활에 어린 불안감 탓에 사람들은 쉽게 역술과 점복에 의존했다. 불확실한 민심에 모든 걸 걸어야하는 정치인의 경우는 더욱 심했다.

71년4월 7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박대통령 참모들은 국내외 용하다는 점쟁이를 두루 찾아다녔다. 후에 유신 날짜결정에 한몫을 한 김성락 씨는 이때 점쟁이들을 만나며 '김운학'이란 별명을 얻었다. 자신의 성에다 유명한 역술인 백운학 씨의 이름을 붙인 애칭이었다. 그 '김운학' 등은 정치인 6명의 운명감정을 의뢰했다고 한다. 박정희 김대중 유진산 김종필 김영삼 이철승이 그들로 이름은 밝히지 않고 사주만 건네 점을 치게 했다. 점괘를 종합하니 "김대중은 박정희 상대가 안 된다"는 것이었으나 선거에서 진땀승리를 한 박대통령이 결국 직선제를 버리고 유신을 택했다는 얘기가 돌았다.

정치인들, 풍수지리로 묏자리 정하기도

박대통령이 공개적으로 신뢰를 표하며 점을 본 사람으로는 지창용 전 한국역리학회장이 꼽힌다. 앞서 동촌선생의 실명이 전해지지 않은 것과 달리 그는 특이한 경우다. 그와 박대통령의 인연은 5.16 군사쿠데타의 성공여부를 점치기 위해 처음 만났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그는 육영수여사의 국립묘지 유택을 잡았고 79년엔 '평생 단골'이던 박대통령의 자리 역시 육 여사 옆에 잡아주었다. 김대중 대통령 부모의 이장 묏자리를 봐준 육관 손석우 씨와 함께 그는 한국 풍수지리의 양대 산맥으로 불렸다. 99년 별세하기 얼마 전 "이승만 대통령, 이병철 삼성 창업주의 묏자리도 내가 잡았고 30대 기업을 포함 300여 공장부지의 풍수를 봐줬다"고 말해 화제를 모았다.

지 씨의 풍수는 몰래 보는 게 아니었다. 언론에 공개적으로 지세를 설명하는 등 자신감이 넘쳤다. 육영수여사 묏자리를 잡은 후 기자들에게 "이곳은 공작이 알을 품고 있는 공작 포란()지세다. 게다가 뒤로 병풍처럼 둘린 산은 장수요, 앞으로 한강물이 군병처럼 넘쳐 굽이치는 산장 수병( )형의 명당"이라고 공언했다. 5년 뒤 박대통령이 육 여사의 바로 오른쪽에 묻힐 때도 그곳이 "'공작 포란'이자 이른바 좌청룡 우백호 명당자리"라고 거듭 강조했다. 그는 83년 미얀마 아웅산 묘역 폭탄테러로 숨진 외교사절들의 유택작업에도 국립묘지 전문자문위원으로 참여했다.

선거 날짜 결정에도 역술 애용

무속 역술 열풍…'대선의 해' 정계 실력자 몰려든다
1997. 1.4 [동아일보] 7면

묏자리뿐 아니라 선거날짜를 잡는데도 정당들은 역술을 애용했다. 지금은 공직선거법에 대통령선거는 '임기만료 전 70일 이후 첫 수요일', 국회의원 선거는 '임기만료 전 50일 이후 첫 수요일' 등으로 날짜가 못 박혀 있지만 90년대 초까지는 그러지 않았다. 민심의 향배와 투표성향까지 고려해 선거일을 제 좋은 날로 결정하는 것이 집권당의 프리미엄이었다. 민주항쟁을 통해 쟁취한 대통령직선제의 첫 선거를 치른 87년 선거일도 당시 청와대와 여당이 역술인들이 찍어준 날짜를 잡은 것으로 전해진다.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후보가 겨룬 그 선거를 앞두고 청와대와 여당은 용하다는 점쟁이는 다 찾아다니며 결과를 탐문했다. 과거에도 몇 차례 선거일자 결정에 한 몫을 해 여권의 전문 선거점쟁이처럼 된 '청운동 도사'는 당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12월 16, 17일 중 아무 날을 잡던 노태우 후보가 당선된다. 단 16일은 표차가 많으나 자식이 적고 17일은 표차가 적지만 자식은 많다." 알쏭달쏭한 이 말 뜻은 그 이듬해에 풀렸다.

87년 12월 16일 치러진 대선에서 노태우 후보는 김영삼 김대중 후보를 멀찌감치 따돌리고 당선했다. 그러나 88년 총선에선 헌정사상 처음으로 여당 국회의원이 야당보다 적은 여소야대 국회가 탄생했다. 청운동 도사가 말한 "자식이 적다"는 것은 집권당 의석이 적게 나오는 것을 의미한 것이었다. 꼭 점괘가 그렇게 나와서 그랬다기보다 당시 상황은 그런 결과를 빚을만한 부분이 있었다. 우선 3김 씨는 대선에 이어 국회의원 총선에서까지 참패하면 정치생명이 끝날 것이므로 거의 죽을힘을 다해 뛰었다.

반면 노태우 대통령과 집권 민정당은 "여당이 국회에 너무 많이 진출하면 오히려 정국운영에 걸림돌로 작용할 수도 있다"며 느슨한 선거운동을 벌였다. 일설에는 당시 사무총장이던 S의원에게 노대통령이 직접 '너무 세게' 하지 말 것을 지시했다고도 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헌정사상 첫 여소야대 국회를 만든 선거패배 책임은 온통 S의원에게 돌아갔다. 게다가 그는 "자식이 적다"는 점괘를 받았던 바로 그 당사자였다. 대통령은 물론 여권 전체로부터 왕따가 되다시피 한 그는 결국 화병을 앓다 세상을 뜨고 말았다.

정치적 고비마다 화제가 된 '점'

김일성 사망 유명 역술인 정확히 예측
1994. 7.10 [매일경제] 23면

큰 선거가 있을 때마다, 또 정치적으로 중요한 사건이 있을 때마다 '정치와 점'의 관계가 화제가 됐다. 92년 대통령 선거일은 12월 18일 금요일이었다. 이걸 두고 야당에서는 "12+18은 <30>이고 <금>요일이니 거꾸로 읽으면 김영삼 아니냐? 어느 점쟁이에게 얼마나 주고 선거날짜를 잡았는지 모르나 당선은 안 될 것"이라고 주장해 많은 사람을 웃겼다. 94년엔 북한 김일성 주석이 갑자기 사망하자 변고를 예고했던 역술인들이 유명세를 타고 그 점집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육관 손석우 씨는 풍수 책 '터'를 통해 김 주석이 그해 9월에 변을 당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시흥의 여류점술인 심진송 씨는 월간지 인터뷰를 통해 "빠르면 음력 5월, 늦어도 동지섣달을 넘기기 힘들다"고 정확히 예측했다.

도깨비 점집을 하는 조자룡 씨도 "사고사는 아니고 노환의 형태로 사망할 것"이라고 한 것이 사실로 드러나자 호황을 누렸다. 정치인들이 그 영업장에 수시로 들락거렸고 특정 정치인과의 관계가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역술인이 본 대권 방향
1997. 7.25 [동아일보] 45면

97년 대선을 앞두고 역술인들은 김대중 이회창 이인제 후보 중 누가 당선될 것인지를 놓고 치열한 '점 겨루기'를 했다. 일부 후보 진영은 점쟁이들이 예언한 내용을 구두로 전하고 다니며 소위 '대세론'을 확산하기도 했다. 김대중 후보는 부모 묏자리를 이장한 것이 화제에 올랐고 이회창 후보의 선산에 누군가 쇠말뚝을 박은 것을 두고도 역리적으로 추측하는 말이 나돌았다.

그렇게 불붙은 '점치기'는 2002, 2007 대선도 예외가 아니었다. 체육관선거로 누구나 뻔히 결과를 알 수 있었던 간선제와 달리 끝까지 승리를 알 수 없는 직선제이니만큼 점괘 등이 사람들 마음을 자극했을 수도 있다. 선거 때만 되면 점집이 호황을 누리고 어떻게든 정치 연줄을 잡아보려는 사람들이 이상한 부적까지 만들어 보스에게 갖다 바치는 일도 일어났다.

2012년엔 4월에 국회의원 총선거, 12월에 대통령선거가 있는 선거의 해다. 대선의 경우 이미 출사표를 던진 것이나 마찬가지인 후보들이 적잖다. 벌써부터 점집에 정치인들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는 얘기가 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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