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도둑.작은도둑???????????????????????

by 염준모 posted Sep 08,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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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도둑, 작은 도둑 “큰 도둑은 존경 받고 푼돈 턴 작은 도둑은 감옥 간다” 조세형이 11번째로 검거되기 직전인 82년 봄, 서울지검에 양복을 차려입은 30대 남자가 찾아왔다.<br/>'괴도(怪盜)' '밤의 퓨마'라는 별명으로 범죄꾼들 사이에 이름이 나있던 임춘삼(36)이었다.

1982년의 '대도 조세형 사건'은 이후 모든 강절도 사건의 기준이 됐다. 훔친 보석류가 그보다 많은 범죄자는 그 후 나오지 않았다. 규모가 제법 큰 도둑이 잡히면 언론은 "조세형에 버금가는 도둑"이라거나 "조의 제자 급"이라는 수식어를 붙였다. 그 사실만으로도 그는 한국범죄사에 한 획을 그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체포와 탈주, 재 검거 이후 이른바 '큰 도둑, 작은 도둑'론이 불거졌다. '의로운 도둑'론도 나왔다. "나라 훔친 큰 도둑은 존경 받고 푼돈 턴 작은 도둑은 감옥 간다."는 자조 섞인 표현이 시민 사이에 떠돌았다.

제 발로 경찰서 찾아온 '밤의 퓨마' 임춘삼

피해자의 신원과 피해품의 출처가 문제 되고 경찰은 또 그걸 축소하려 애쓴 것도 그때부터다. 어떤 사건이든 범인을 체포하면 가능한 범죄사실을 키우는 게 경찰의 생리. 피해액수를 포함한 범죄 규모가 크면 클수록 범인을 검거한 경찰의 공이 부각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도사건' 이후 유명인사 집이나 공공기관이 털린 사건은 피해자의 신원이 감춰지거나 피해액수가 "바람 빠진 풍선처럼" 줄어들었다. '정권 차원'에서 그걸 조정했다. 서민은 듣도 보도 못한 피해물품이 공개될 때마다 이른바 지도층과 서민 간 위화감이 커지고 "진짜 도둑놈은 누구냐"는 볼멘소리가 나왔기 때문이다.

15년동안 서울의 지붕밑을 제멋대로…괴도 임춘삼 자수
1982. 5.13 [동아일보] 11면

전과 10범 조세형이 11번째로 경찰에 검거되기 직전인 82년 봄. 서울지검 남부지청에 말쑥하게 양복을 차려입은 30대 남자가 찾아왔다. '괴도()' '밤의 퓨마'라는 별명으로 범죄꾼들 사이에 이름이 나 있던 임춘삼(36)이었다. 변호사까지 대동하고 나온 그는 "2년 전 가을, 서울 동작동의 한 주택에 몰래 들어가 롤렉스시계와 사파이어 반지 진주 목걸이 등 8백만 원어치를 훔쳐 달아났다"고 털어놨다. 그 사건 외에도 4건의 굵직한 범죄사실을 더 실토한 그는 바로 특수절도 혐의로 구속됐다.

검찰이 여죄를 캐면서 그의 범죄행각은 눈덩이처럼 불기 시작했다. '밤의 퓨마' 이름이 거저 붙은 게 아닌 걸 입증하듯 그는 말 그대로 "서울 일대 주택가를 '헤집고'" 다녔다. 어쩌다 형사대와 마주치면 담과 지붕을 타고 바람처럼 사라지곤 했다. 그처럼 날쌔지 못한 공범들이 붙잡힐 때도 그는 항상 잽싸게 튀기 일쑤였다. 바로 그 공범들이 심문을 받으며 웬만한 미제()사건은 "모두 임이 앞장서 저지른 도둑질"이라고 진술을 했다. 그래서 자수 당시 그의 범죄기록을 쌓아보니 그의 키 170cm만큼이나 불어 있었다.

탈영범으로 밝혀지면서 유야무야된 그의 도둑질

임춘삼과 조세형…괴도와 대도
1982. 12.15 [동아일보] 11면

그런데 조사를 계속하자 그는 1966년 군에서 도망친 탈영병임이 밝혀졌다. 그러니까 군에서 도망 나와 15년 동안 한 번도 붙잡히지 않은 채 서울의 지붕 밑을 제집처럼 털고 다닌 것이었다. 변호사를 대동하고 검찰에 자수한 것도 이미 억대 치부를 한데다 탈영병으로 군에 넘겨져 조사받게 된다는 걸 계산했기 때문이었다. 군의 수사는 사회의 그것처럼 알려지지 않고 범죄로 쌓은 치부를 빼앗지 못할 것으로 계산한 지도 몰랐다. 검찰은 범죄 사실을 제대로 입증도 못 한 채 그를 군 수사기관으로 넘겨야 했다.

그리고 얼마 뒤, '대도 조세형사건'이 터지고 물방울 다이아 등 고가품이 경제부총리 포함 유명인사 집에서 털린 것임이 밝혀졌다. 당연히 고가품 전문털이인 임춘삼의 범죄기록을 재검토해 고위관리나 정치인이 피해자 명단에 없는지 밝혀내야 한다는 여론이 일었다. 그러나 그를 끌고 간 군 수사기관은 철저히 입을 다물었다.

남부지청에서도 "수사기록을 모두 군에 넘겨 피해자 가운데 어떤 이가 포함됐는지 알 수 없다"고 말을 아꼈다. 15년간 잡히지 않고 도둑질을 했으니 임춘삼의 범죄 장물이 조세형 못지않게 많을 것이란 추측이 나돌았을 뿐 진실은 어둠에 묻혀버렸다.

공공기관까지 턴 대범한 도둑들

공공기관 도둑에 구멍
1989. 7.24 [동아일보] 15면

그러던 89년 7월 하순. 집권 민정당의 관훈동 중앙당사에 도둑이 들어 철제 캐비닛을 부수고 현금 수표 등 거액을 훔쳐 달아난 사건이 발생했다. 당사는 평소 70여 명의 전경이 경비를 서고 있었으나 범인들은 쇠창살을 뜯고 2층 경리실에 침입해 금고를 털어가는 대담성을 보였다. 경찰은 사건 발생 자체를 숨겼으나 언론의 탐문취재에 걸려들었다. 도난사실이 대대적으로 보도된 뒤 당은 뒤늦게 "금고 3개 중 1개가 털렸고 피해액은 10만원 수표 13장과 1만원 지폐 2백장, 도합 330만원"이라고 공개했다.

그러나 시중에선 "모 재벌이 낸 정치자금이 금고에 있다 모두 털렸다"는 말부터 "최소 1억 원을 도난당했다"는 소문이 광범위하게 퍼졌다. "실세 간 권력다툼과 알력 탓에 사건내용이 공개된 것"이란 풍문도 떠돌았다.

민정당은 "경찰에서 철저히 수사해 국민이 한 점 의혹도 갖지 않도록 하겠다."고 했으나 경찰은 왠지 미적거리기만 했다.이런 와중에 "그동안 감사원과 남북대화사무국, 서울지검 남부지청, 정신문화연구원 등 정부부처와 공공기관에도 최근 도난사건이 일어났으며 그동안 경찰이 쉬쉬하고 감춰왔다"는 사실이 여기저기서 봇물 터진 듯 삐져나왔다. 감사원의 경우, 민정당사가 털리기 4개월 전인 3월 초 도둑이 들었다.

감사원장실에 도둑
1989. 3.9 [동아일보] 15면

원장실과 차관급인 감사위원실을 포함 3개 층의 7개 사무실을 샅샅이 뒤져 현금 3백여만 원을 훔쳐 달아났다. 특히 범인들은 여러 곳 사무실에서 우유를 꺼내 마시거나 담배도 피우는 등 상당시간 머물러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 흔적도 남겼다. 이곳의 도난사실 역시 쉬쉬하며 숨겨왔으나 경찰이 전담수사팀을 꾸려 운영한 사실이 민완기자의 취재망에 걸려 세상에 공개됐다.

남부지청의 경우에도 범인들이 지청장과 차장검사실을 뒤져 현금 유가증권 등 1천5백만 원어치를 털어 달아났다. 무엇이 구린지 검찰은 경찰 대신 직접 수사에 나섰으나 정확한 피해액과 도난경위 등은 일체 비밀에 부쳤다. 기자들이 취재에 나서자 "당해범죄와 관계없는 사람들의 피의 사실이 알려지고 수사기밀이 유출될 수 있다"며 방해작전을 폈다. 검찰은 결국 범인을 잡지도 못하고 서둘러 수사를 종결했다. 남북대화사무국 정신문화연구원에 침입한 도둑들도 정확히 경리 쪽을 노려 현금 수표를 훔쳐갔으나 이들 기관 역시 도난 자체를 숨기거나 피해액수를 축소 발표해 물의를 빚었다.

김강용 사건으로 격화된 정치권 공방

국회에서는 야당이 연일 이 문제를 들고 나왔다. "경비가 삼엄한 여당 당사는 물론, 검찰청사까지 털릴 지경이니 민생치안은 어느 정도인지 알만 하다"는 건 약과고 정당 정부기관이 어디서 검은돈을 마련해 보관하고 있다 털렸느냐"는 비아냥거림도 끊이지 않았다. 전두환 정부가 정권을 강탈한 지 얼마 안 돼 발생한 조세형 사건 때는 직접적 표현을 삼가던 의원들이었지만 87년 민주화 항쟁 이후부터는 정권공격에 성역이 없었다. "정당 당사는 물론 온갖 정부기관에 무슨 꿍꿍이들이 그리 많아 금고가 널렸느냐"는 질문에다 "도난사실을 신고하지 못하거나 경찰수사도 공개리에 이루어지지 못할 것이란 점을 도둑도 노린 것 아니냐"는 추궁이 잇따랐다.

5공 시절 TV 연속극 대사로 나와 시중에 유행했던 저속한 일본말 "민나 도로보 데스(모두가 도둑놈이다)"라는 말이 다시 떠돌았다. 사회분위기는 싸늘하게 식었고 부정부패, 특히 관리들 주머니로 들어가는 검은돈을 찾아내야 한다는 여론이 일었다.

도둑과 고관 '뒤바뀐 공방'
1999. 4.17 [경향신문] 19면

그러나 정부 고위층은 물론 검찰이나 경찰은 납작 엎드려 있기만 할 뿐 속 시원한 답을 국민에게 내놓지 못했다. "국민이 워낙 정부를 믿지 못해 단순도난 사건조차 무슨 음모의 일단처럼 부풀려져 있다"는 항변도 나왔지만 이들 사건의 피해규모, 범인의 체포 여부 등 진실은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그리고 국민의 정부 시절인 99년 4월. 안양경찰서장 관사를 턴 혐의로 구속된 김강용(32)이 자신이 훔친 액수가 경찰이 발표한 것보다 훨씬 많다고 주장해 '큰 도둑 론'이 다시 불거졌다. 경찰은 피해규모를 늘려 잡고 도둑은 줄이기 마련인데 거꾸로 도둑이 더 많이 훔쳤다고 주장하는 사태가 일어난 것. 김은 "안양경찰서장 집에서 8백만 원을 훔친 것으로 돼 있으나 사실 내가 훔친 것은 그 7배인 5천8백만 원"이라고 주장했다. 서장 집 김치냉장고를 열었더니 1백만 원씩 든 봉투 58개가 있었으며 그중 22개는 붙잡힌 뒤 경찰에 압수당했으며 나머지는 자신이 갖고 있다는 것.

여야 '미스터리 대도' 공방
1999. 4.17 [동아일보] 3면

거기다 그는 한나라당에 편지를 보내 안양경찰서장의 집뿐 아니라 농림부장관 집과 전북지사 집에도 침입해 현금과 미화 12만 달러, 보석, 수억 원대 유명화가 그림 등을 훔쳤다고 주장했다. 단순절도 사건이 갑자기 도둑의 고관집 털이 주장에 따라 정치적인 사건으로 변모했다. 이즈음 전북지사 측은 "현금과 귀금속은 잃어버렸지만 미국 돈은 한 푼도 없었다."고 부인했다. 장관 쪽에서도 "탁본과 대학생이 그린 그림 2점을 잃었지만 유명화가의 억대 그림은 없다"고 주장했다.

국회에서는 이 사건을 두고 여야 공방이 뜨거웠다. 한나라당은 이재오 의원을 중심으로 진상조사단을 구성, 사건 뒤에 숨은 정권차원의 비리를 파헤치겠다고 주장했다. 특히 김강용이 전북지사와 농림장관 외에도 2명의 다른 장관 집과 김대중 대통령의 전 경호원 집을 털어 금괴 12kg, 수억 원대인에 비해 목소리는 현저히 낮았다. 여당 의원 몇은 "정권이 물러나는 스캔들로 비화할 수 있다"며 걱정했다.

'마약 복용' 등으로 반전된 김강용 사건

그러나 사건은 극적으로 반전됐다. 진상조사에 나선 검찰이 김강용이 대도 조세형의 흉내를 내 '의적 놀음'을 했고 마약을 복용하며 거짓 증언을 했다고 발표한 것. 또 김이 그림을 훔쳤다는 장관 집을 찾지도 못하고 엉뚱한 곳을 지목했으며 훔친 달러에 대해서도 출처나 사용경위에 대해 횡설수설하는 점을 들어 김이 '과대망상에 의한 허위진술'을 하고 있다고 결론지었다. 여당은 환호했으나 야당은 물론 국민들도 검찰의 결론에 의구심을 보였다.

김강용은 무기징역을 구형 받았으나 법원은 10년 징역에 보호감호를 선고했다. 그가 주장한 고관집 절도는 하나도 사실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농림부장관은 후일 "장관의 말은 안 믿고 도둑의 말만 믿는 현실에 서글픔을 느꼈다"고 했다. 그러나 여론조사 결과 많은 국민이 김강용 사건의 진실은 속 시원히 밝혀지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정부나 지도층이 믿음을 주지 못하는 한 대도와 괴도, 큰 도둑과 작은 도둑 공방은 언제든 다시 불거질 수 있다는 개연성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