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를 갈고 돌아온 미친 감독의 영화,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1979년 상영한 <매드맥스> 시리즈는 대중에게 큰 관심을 받지 못했으나 <매드맥스 3> 이후 30년 만에 이를 갈고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로 돌아온 감독은 대중을 열광시켰다. 맥스가 아니라 감독이 미쳤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흥행하지 못했던 자신의 영화를 자신이 리메이크작으로 만들었다. 철저히 자신을 부수고 새 것을 받아들인 결과였다.
정리. 김지혜 기자 window28@websmedia.co.kr
참여. 이종철 월간 w.e.b. 편집장, 김세중 젤리버스 대표
사진. 네이버 영화
★ 이 기사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핵전쟁으로 멸망한 22세기의 독재자 임모탄 조(휴 키스-번)는 살아남은 인류를 지배한다. 그의 폭정에 반발한 사령관 퓨리오사(샤를리즈 테론)는 임모탄의 여인들을 탈취해 도로를 폭주한다. 이를 알게 된 임모탄과 그의 부하들은 퓨리오사의 뒤를 쫓는다. 아내와 딸을 잃고 살아남기 위해 사막을 떠돌던 맥스(톰 하디) 또한 임모탄의 부하에게 납치돼 눅스(니콜라스 홀트)의 피주머니로 도로에 끼게 된다. 숨막히는 그들의 폭주는 어떻게 될 것인가.
김지혜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이전에 <매드맥스> 시리즈가 있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그 전의 시리즈를 봐야 하나 싶었지만 이 영화는 리메이크작이다. 이전의 시리즈에서 이야기에서 이어지는 게 아닌 것 같다. 그렇지 않아도 리메이크작만 봤을 때 충분히 설명은 가능하다. 감독이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다른 분들은 이 영화의 시리즈를 봤나.
김세중 나는 참고로 <매드맥스> 시리즈를 다 봤는데, 이전에는 독립영화 같았다. 그래서 매드맥스를 이상한 영화로 기억했다. 관심도 없었는데, 이 시리즈를 보고 이번 영화를 보고 나니 확실히 놀라웠다. 감독은 이전의 시리즈를 통해 자신의 판타지 세계관을 구축하는 감을 얻었다. 오랜 시간 자신의 생각을 구축하길 원해 이리저리 시도를 했는데 이번에는 그 감을 잡은 듯하다. 이전에는 기술이나 상황이 그것을 따라주지 못했고. 사실 이 영화의 스토리와 시스템은 현실적이다. 계급사회와 물의 희소성, 남녀 관계 등. 근데 이 영화를 보고 주목했던 건, 이번 영화와 그 전의 영화가 차이가 났다는 것. 감독이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 모르지만 다른 매드맥스를 만들었다.
김지혜 그런데 놀라운 건, 이미 기술이 많이 발전됐음에도 불구하고 감독은 거의 모든 액션신을 CG없이 직접 촬영했다는 것이다. 이 영화는 스토리보다 액션신이 돋보이는데, 감독이 그것을 잘 살려냈다.
김세중 이 영화는 자기만의 앵글을 갖고 있다. 눅스가 마지막에 아파 쓰러져 누워있을 때, 여자가 발견하고 같이 드러눕는다. 그리고 서로를 바라보는데 앵글이 같이 눕는 느낌으로 그들을 잡는다. 관객이 장면에 더욱 몰입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뷰 관점이 철저히 사람 높이에 있다. 이 영화에서는 추격전이 많이 나오니까 쫓아가는 느낌, 쫓아오는 느낌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감독이 이를 잘 활용한 것 같다. 태양의 서커스 애들이 차 위에 매달려 있는 것을 찍으면, 그 다음 장면에는 앵글이 양 옆으로 흔들린다. 철저히 주위상황을 활용한 결과다. 액션시퀀스로 보면 평범하지만 이를 극복하려고 액션신을 짧게 끊었고, 다이나믹하게 보이려고 시선을 최대한 활용했다. 전략적으로 잘 만든 액션 영화다.
이종철 액션신을 보면서 전통적인 액션 방식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의 액션방식은 액션을 잘하는 이소룡 같은 사람이 나와 싸우는 걸 그대로 찍었는데, 지금은 카메라워크가 좋아져서 시선을 따라가다가 시선을 돌리는 지점에서 빠르게 돌린다. 템포 조절로 생동감을 높이는 것이다.
김세중 시퀀스를 잘 짜는 사람들이 있다. 장면의 합. 액션 자체에 집중하는 감독들도 있지만 요즘은 거기에 집중하는 게 아니라 연출 기법에 집중한다. 시나리오는 비슷하니, 화면으로 차별을 두는 것이다. 다만 놀라운 건 이 감독이 70대 할아버지라는 것이다.
이종철 이해가 안 간다. 어떻게 가능하지, 할아버지인데. 마약한 게 틀림없다. 왜냐면 이 영화 연출이 B급도 아니기 때문이다. 완전 저질도 아니고. 괴상하면서 대단한 것 같다.
김지혜 온고지신이다. 이전에 흥행이 되지 못했던 요인들을 받아들이고 새롭게 돌아왔다. 액션도 그렇고, 스토리로도 그렇고.
김세중 스토리를 많이 바꿨다. 이 영화 제목이 매드맥스인데 맥스는 주인공이 아니다. 거의 퓨리오사의 조력자로 나온다. 왜 그랬을까. 그렇다면 이 영화의 제목은 ‘퓨리오사의 탈출기’ 혹은 ‘임모탄’ 이렇게 됐어야 했다. 감독이 말하길, 3탄에서 한계점을 느낀 게 맥스라고 했다. 이 한계점을 극복하기 위해 주변을 활용하기로 했고, 그래서 이 영화에 맥스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고 보이는 현실에 어떤 대립과 인물이 있는지에 집중했다고 하더라. 감독은 철저하게 <매드맥스>를 흥행에 성공하는 영화로 만들고 싶었다고 본다.
김지혜 맞다, 흥행에 성공할 조건을 갖췄다. 그런데 흥행에 성공하는 조건을 갖춰도 흥행하지 못한 영화가 많다. 개인적으로는 이 영화가 액션이 대단하지만 스토리가 기본적으로 탄탄하고, 메시지를 남기기 때문에 흥행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영화상의 시대는 22세기라고 설정돼 있지만 이 스토리는 현재의 은유로 읽을 수 있다. 영화의 부제목이 분노의 도로인데, 그들이 왜 분노로 도로를 질주하고 있는가. 가족의 얘기를 하고 있다. 가족을 빼앗긴 일에 대한 원한으로 퓨리오사는 임모탄의 여인을 데려가며, 임모탄의 가족과 싸우고 있다. 여기에 페미니즘, 유토피아-디스토피아(녹색의 땅-시타델), 종교까지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여지가 많다.
김세중 그렇게 시선을 설정해 페미니즘 얘기도 나오는데, 이 영화가 정말 페미니즘 영화인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퓨리오사만 보면 페미니즘 영화인데, 페미니즘의 요소를 넣긴 했어도 전체적으로 봤을 때는 페미니즘을 극대화해서 쓰려고 했던 건 아니라고 본다. 원래 퓨리오사의 캐릭터는 없었던 캐릭터다. 여자가 당하고 있는 과정에서 남자가 구출할 수도 있지 않나. 맥스가 할 수 있지만 맥스가 하기에는 설득력이 없었다. 그래서 퓨리오사의 캐릭터를 만든 것이다. 맥스는 보완제로 껴 넣은 캐릭터고.
이종철 페미니즘 얘기가 나오길래 생각을 해봤는데. 퓨리오사는 뭘로 바뀌어도 된다. 남자로 바뀌어도 된다. 거기서 스토리에 약간 문제가 생기는 게 그들이 어머니의 나라로 갔는데 어머니가 두 명이다. 레즈거든. 그래서 좀 헷갈렸는데 개인적으로는 페미니즘이라 생각하고 보진 않았다.
김세중 이게 왜 그렇게 됐냐면, 지구가 방사능에 노출돼 정상적인 사람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전제에서 시작한다. 소수의 정상적인 사람을 만들어내는데 임모탄의 아들은 비정상이고, 정상은 맥스 한 명과 여자는 다섯 명이나 있다. 거기에서 핵심은 여자다. 이 영화자체가 여자를 생산도구로 바라보고 있다는 게 쎄다. 그걸 극복하려다 보니 페미니즘 속성이 보이는 것이다.
김지혜 그렇다면 이 영화에서 중점으로 본 것은 무엇이었나.
김세중 잘못된 미래상과 계급사회가 가져온 일그러진 시민상이다. 마지막에서 그 장면이 나온다. 전쟁을 끝내고 그들이 임모탄 시체를 끌고 간다. 시민들은 놀라다가 문을 열어준다. 시민들은 여전히 수동적이다. 단지 지도자만 바뀐 것뿐이다.
이종철 임페라토르 퓨리오사라고, 임페라토르는 라틴어로 황제라는 뜻이다.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호칭이었는데, 황제가 되면서 사령관이었던 뜻이 그렇게 바뀌었다. 퓨리오사 역시 사령관에서 지도자로 바뀌지 않나.
김세중 이 영화는 애초에 카타르시스가 없다. 파괴와 새로운 건설. 파괴가 등장하지 않고 왕만 바뀌었다. 그 세상에는 기형아가 많고 부족한 사람이 많아 왕이 끌고 갈 수밖에 없는 구조다. 왜곡된 사회 전제를 깔았고, 맥스는 거기에서 살 수 없어 떠난다. 그래서 아마 다음 영화도 이와 비슷한 구조로 갈 것 같다. 맥스를 데리고 와서 새로운 문제 있는 상황에 집어넣는 옴니버스식으로. 감독은 자기 나이의 한계를 느끼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최상으로 적용했다. 다음 영화는 <매드맥스: 더 웨이스트랜드>로 예정하고 있다는데, 이 또한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