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남침전쟁이 남긴 아픈 추억의 파편들
우선, 소리전자회원분께 양해드리고 재미없지만 저의 글을 끝까지 보아 주시기 바랍니다.
이 글은 자작 글로 써 지난 한달 전에 인터넷에 올린적이 있습니다만 소리 전자에 올리려니 속도가 느려서 포기 했으나 오늘 올리게 되었습니다.
휴전 60주년이 지난 27일이니 아직 효력이 있는 글이라 생각하고 용감히 올립니다.
악풀 사양!!! 요즈음 소리전자 씨이트가 정치적으로 흐르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6.25남침전쟁이 남긴 아픈 추억의 파편들(홍문도)
나는 1943년생이니 올해 나이가 벌써 71살이 되었다. 순식간에 지나간 세월이다.
해방을 맞이 한지 5년이 지나고서 38선 이북에 있던 김일성이 1950년 6월 25일 남침을 한다.
이 나라는 폐허가 되었다. 사람도 많이 죽었다.
한국 전쟁은 1950 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 3년 1개월 2일 동안 벌어졌다
미군(유엔군 포함)사망자 5만 8천 여명, 부상자 48만 여명, 실종자와 포로까지 포함하면 총 54만 6천 여명,
먼저 한국군 사망자 13만 8천 여명, 부상자 45만 여명, 실종자까지 모두 포함하면
60만 9천 여명, 북한군 사망자와 부상자 52만 여명, 실종자까지 모두 포함 80만 명,
우리의 부모.형제가이 땅에서 사라졌다.
내 목숨 아깝지 않는 사람도 있을까?
적과 싸우다 목숨을 잃은 모든 분과 이름도 알려 지지 않은 동양의 작은 나라에서 민주주의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워 준 참전국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서울에 진입한 북한 괴뢰군 탱크
나는 전장(戰場)에는 있어보지 못했하고 후방(後方)에서 자랐다.
전쟁 중에 내가 본 여러 사건들은 아직도 내 머릿속에 각인 되어 있어 늙은 나이 임에도 쉽게 기억해
낼 수 있다.
나는 긴 문장의 글은 세번째 써 본다.
무엇을 어떻게 써야 할지 걱정이 몰려와 술한잔 부터 들이 키고 독수리 타법으로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한다.
만약, 내가 이 글을 쓰지 않으면 전쟁 중 무슨 일이 벌어 졌는지 영원히 묻혀 버릴 수도 있다.
부끄러운 과거도 역사의 일부인 것이고 챙피한 과거를 아무리 덮어 버린다 해도 없어지지는 아니한다.
세월이 흐르다 보니 6.25를 겪은 세대들도 거의 죽어가고
이제 내가 아니면 누가 또 이런 글을 쓰겠는가?
서투른 글이라 언잖게 보지 말고 그 시대의 참상을 들어 주었으면 한다.
진해시가지
나는 경남 창원군 진해읍(현 청원시 진해구) 구이동 372번지라는 도심에서 10리 떨어진
작은 농촌 마을에서 태어 났다.
어릴 적에는 짚신을 신고 삼베로 된 옷을 입고 밥 세끼도 먹기 벅찼었다.
해방이 된지 4,5년이 지난 때라 국가라 하기도 챙피할 정도여서 먹는 것, 입는 것, 전기, 모두가 부족하여
국민들은 하루살이 곤충이 였다.
일본은 로(러시아)-일 전쟁에서 승리하고 조선에서의 해군기지를 물색하던 중 섬으로 둘러 싸여 있어
군항 으로 최고의 입지 조건을 가진 진해(鎭海)를 선택 했다.
탑산(제왕산)에는 로-일전쟁 전승(戰勝)기념탑도 만들었다(후일 리승만대통의 지시로 부셔 버렸다.)
진해에 소재해 있던 자연 부락(농촌) 40여개 주민을 모두 쫓아내고 세계적으로 2번째(첫번은 워싱턴 )로
계획 도시를 만들었다.
진해 시가지는 중원로타리를 중심으로 해서 팔방향으로 8개의 도로가 뻗어 있다.
이것은 일본 욱일승천기(일본 해군깃빨이기도 하다)를 의미 한것이고 일본군함이 정박해 있는 근처에
만들어 졌다.
주민의 70%가 일본인이었고 한국(조선)인은 변두리로 밀려 났다.
진해는 근대 문물이 일본인을 통해서 일찍이 찾아 왔지만 농촌은 그 혜택이 아주 미미했다.
나는 일본인이 만들어 놓고 간 병산국민학교(초등)에 입학 한지도 얼마 되지 안된 때인데.
어느날 학교에 갔더니 분위가 이상하고 선생님들도 불안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일찍이 돌려 보냈다.
학교도 며칠 쉬었다.
놀기 좋아하는 우리에게는 어쨋던 신나는 일이었다.
어른들은 빨갱이들이 쳐 내려와 전쟁이 났다고들 했다. 안 그래도 살기 어려운데..
전쟁이 나고 며칠 후 신작로(도로)옆에 있는 우리집 앞으로 경화역(지금은 벚꽃으로 유명)에서
내린 피란민들이 길을 꽉 채우고 지나갔다.
나보다 더 어린애들도 이불. 돗자리,솥,살림도구를 매고 힘들어 했다.
피난민들은 도회지에서 온 사람들인지 우리와는 좀 모습이 달랐다.
입은 것도 초라하지 않고 얼굴색도 우리동네 사람들과는 비교 되지 않을 정도로 고왔다.
아마 서울에서 피란 온 사람일 게다.
거제,부산으로 갔거나 우리 동네에도 여러 가구가 남기도 했다.
고생길,피난길.
<짬빵>이라는 먹거리의 탄생
전쟁이 나자 모든 것들이 변해 갔다. 처음 보는 서양인(미국군인)이 보이기 시직했다.
하얀색 사람, 까망색 사람. 머리 색깔도 노랑,흰색. 눈알도 파랗었다.
키는 어마 어마하게 컸고 더 놀란 것은 주먹 만한 코였다.
외국인을 처음 보는 동네 사람들도 놀랄 뿐이다.
우리는 그냥 그들을 <코쟁이>라고 불렀다.
진해 시가지에서 20리정도 외곽에는 K-10이라는 작은 비행장이 있는데 이것도 일본군이 대평양전쟁때
닦아 놓은 것을 미국공군이 사용했었다.
전쟁에 참전한 미국 비행기도 자주 뜨고 내리고, 동네 앞바다에 있는 <작은 대(竹)섬>이란
무인도에 폭탄투하와 기총훈련도 매일 했다.
항공모함이라는 무지무지한 큰 배에서 실려 왔다고 하고 항공모함은 일본 군함 몇채도 물속에 쳐 넣었다고
소문도 돌았다.
퉁퉁거리며 제자리를 맴도는 신기한 잠자리비행기(헬리콥터)도 처음 보았다.
듣도 보지도 못한 물건이 나를 놀라게 했다.
조용하던 동네가 갑짜기 소란스럽고 씨끄러워 졌다.
전쟁이 치열하게 붙음에 따라 미군 인원도 점점 불어나고 K-10 기지 내에 온갖 전쟁물자를 싣고
온갖 수송기와 전투기들이 이륙하고 착륙했다.
그러니 기지내에는 불용품(쓰레기)도 불어 났다.
처음에는 K-10부대 내에서 소각하던지 음식쓰레기를 바다에 버렸지만 더 이상 버티기 힘들어 진 것이다.
어느날 우리동네( 구이동;기지에서 약2Km)에 위치한 밭주인에게 미군이 찾아와 돈을 줄테니 쓰레기를
버리게 해 달라고 부탁했었다.
밭 주인들도 어리둥절 했으나 농사 지어서 남는 돈보다 많이 준다니 허락했다.
그 다음날 부터 군용트럭이 수십대씩이 들어와 물건을 내려 놓고 갔는데 그것은 쓰레기가 아니라
<황금 덩어리>였다.
폭탄을 포장했던 큰 목재 .종이박스. 철(포장용, 비행기에서 나온 부품),비행기바퀴,깡통,병, 빈 드럼통.
음식쓰레기와 조리하고 남은 음식재료(쏘시지, 함박 스테이크,칠면조. 빵.우유 등) 모두가 우리가 처음보는
것들이였다.
그래서 쓰레기장 이름이 정해 졌다. <돈굴>! 돈이 굴러 다니는 곳이라고..
꿀꿀이 죽(짬빵)을 사 먹는 사람들
우리는 그냥 <똥꿀>이라고 불렀다. 온갖 잡동산이에서 부터 똥까지 나오는 곳이라는 뜻이다.
그 중에 미군 장병들에게 제공하고 남은 음식 재료와 음식쓰레기는 최고의 가치를 가졌다.
사용하지 않은 식재는 비싼 값으로 도회지로 팔려 나갔고 남은 음식쓰레기는 <짬빵>이라는
이름으로 배고픈 우리를 먹여 살려 큰 인기였다.
음식쓰레기는 2가지가 있다.
미군들이 먹고 남긴 식판음식을 버린것으로 닭,소,칠면조 뼈.감자.마카로니,온갖소스,
담배 꽁초, 이쑤시게 까지...
현재 회사,군인식당의 잔반통 음식쓰레기인 셈이다.
짬빵통은 허리 정도 높이고 양쪽에 손잡이가 있고 통에는 세로로 홈이 파져 있다.
우리가 카메라,혹은 핸드폰에서 "삭제"기능를 을 표시하는 아이콘 모양인데 미군이 트럭에서 10여개씩
내려 놓으면
아주머니들이 쓰레기장 주인으로 부터 사가지고 옷을 걷어 부치고 손을 통에 넣어서 휘저어
고기 조각이나 소시지 조각이 걸리면 따로 모아서 보관했다.
이걸 물로 씻어서 도회지 식당으로 팔았다.
이것이 현재의<부대찌게>의 재료가 되었나?
날이 더워지면 상해서 시큼한 냄새가 나기도 하고 온 동네 파리들이 운동회를 할 정도다.
식빵들도 곰팡이가 핀 것을 햇볕에 말려 검게 변한 곳을 긁어 내고 팔았다.
우리 아이들은 말리는 중에 주인 몰래 한움큼 쥐고 튀기도 했다.
이것도 처음 맛보는 빵이라 구수하고 맛이 있었다.
그러니 정작 파는 짬빵(꿀꿀이 죽)은 작은 건더기만 있는 껄쭉한 음식쓰레기다.
내가 처음 먹게 된 짬빵은 이웃에 사는 박O자(우리반의 여자 아이) 엄마가 근처를 맴돌던 나를 보고
"문도야~ 어서 온나! 이것 먹어 보래이~~."
면서 짬빵통에서 건져내어 내 입에 쏙 넣어 준 것은 온갖 쏘스가 묻은 주황색 고구마 였다.
처음 먹는 음식의 황홀한 맛은 지금도 생각 날 정도다.
농사만 짓고 조용하게 지내던 농삿꾼의 아내, O자 엄마도 세파에 밀려 억척 아줌마가 되어
짬빵 장수로 변한 것이다..
커다란 짬빵통 앞에서 비닐을 앞치마 삼아 둘러고 짬빵을 퍼주는 양재기를 손에 들고
손님을 기다린다.
통끝으로 삐져 나온 음식찌꺼기를 손으로 닦아서 연방 입으로 넣고 있는 걸 보니,
배고픔에는 체면이고 나발이고 없어진다는 옛말이 맞았다..
양식이 부족한 사람들은 돈이 모자라 한,두양재기로 가족의 저녁을 해결하기도 했다.
그것도 물을 더 부어 량을 늘리니 머얼건 죽으로 변한다.
상한 것이니 끓여도 좋지 않은 냄새는 그대로 남는다.
처음 느껴 보는 맛!
달콤하고 새큼하고.. 뻐더,치즈 냄새와 온갖 쏘스가 섞여진 오묘한 맛, 보리밥과 된장국이나
생선국이나 먹던 사람들은 그 맛에 중독 되어 버렸다.
음식 쓰레기 또 한가지는 식판그릇을 씻은 물이다.
이것은 거의 꾸정물 수준이라 돼지 먹이로 팔려나가고 가끔 고기덩어리도 들어 있어면 건져
개울 물에 씻어 양념해서 팔기도 했다.
나의 나이 또래의 그 때의 아이들 모습
어느날 미군장교(아마 책임자인 듯) 외 몇명이 jeep차를 타고 찾아 와서 쓰레기장 운영을 둘러본 것이다.
미군장교는 그들이 먹다 버린 음식(짬빵;꿀꿀이죽)을 한국사람들이 맛있게 먹는 것을 보고 기겁을 했다.
<No!! 절대 먹으면 안됩니다!! 이것은 동물에게나 먹이시요!,>
아무리 이야기해도 한국인들은 들은 척도 안했다.
우린 배가 고파 굶어 죽을 판인데 버리라니? 말도 안돼!
미군과 서로 의견이 엇갈렸다.
다음날 부터 짬빵 속에는 옷갖 쓰레기가 다 들어 있었다.
바닥 청소한 쓰레기와 씹다 버린 껌, 껌종이,담배꽁초. 휴지, 흙,돌조각, 이쑤시게, 심지어 피묻은 붕대,
주사기까지 나왔다.
그리고 <이것을 절대 사람이 먹지 마시오>.라는 쪽지도 붙어 있었다고 한다.
또 며칠 후, 또 그 장교가 확인차 다시 나와서 보니 또 기가 막힐 노릇이 벌어지고 있었다..
비닐 앞치마를 입은 아줌마들이 일일이 담배꽁초나 주사기,붕대 등,쓰레기를 맨손으로 휘져어며
줏어내고 팔고 있었기 때문이다.
온동네 파리는 새까맣게 모여들어 자기들도 서양맛을 보겠다고 윙윙거리는 것을 보고
그들은 머리를 싸매고 돌아갔다.
지금으로 말하면 완전 <멘붕>상태가 되었겠지.
다시 그 다음날 음식쓰레기는 한결 깨끗해 졌다.
들리는소문에 의하면 부대에 돌아가서 부대장과 관계자와 회의를 하면서 그 장교는 아무리 먹지
못 하도록 해도 먹으니 버릴때 좀 청결하게 해서 버리고 이물질이 들어가지 않게 버리도록 명령했다는
것이다.
지금 젊은이의 눈으로 본다면 사람이 먹지 못할 것을 먹도록 도와 주었으니 비인도적인 사람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나. 그 때의 사정으로는 우리에게 참 고마운 사람임이 분명했다.
그 짬방을 여러분의 할머니,어머니들이 먹고 영양분이 가득한 젖이 되어 아버지에게 전달되고,
그 아버지는 힘을 내어 열심히 일해서 자식을 키우고 공부시키고...뼈빠지게 일하고.....
그래서 지금의 노인들이 골병이 들어 온갖 고통에서 시달린다.
점점 세시대가 바뀌니 옛날 얻어 먹던 일은 영영 잊었는지 <미군 물러 가라>
<미군기지 철수하라> <미국 쇠고기 먹지 마라!.><미국놈 물러가라>
왜? 미국소가 우리한테 뭔 죄지었나?
미군들이 C레이션 음식을 먹인 후 사진을 찍다
감자껍질과 청소부 아줌마들
어느날 동네가 왁자찌껄 했다.
누구 아버지와 몇명이 부대 노동자에서 해고 당하고. 청소 아줌마들이 부대정문에 퍼질러 앉았다는
이야기다.
미군부대에서의 식량은 거의 본토에서 배로 들어온다.
전쟁이 길어 지면서 미군도 날로 늘어 나고 전선은 남쪽 아래로 밀리고 만 있었다..
그래서 한국인 노동자들을 많이 고용했다.
당시 직업이나 일자리를 갖는다는 것이 큰 행운이다.
이렇게 먹고 산 어린이가 지금의 당신의 어머니가 되었을지도..
누구 아버지는 부대식당에서 감자를 깍는일을 한국인 몇명과 했단다.
당시에는 현재의 감자칼이 발명되지 안됐는지 칼로서 손으로 일일이 깍았다.
이 깍고 난 감자껍질은 똥꿀(쓰레기장)에 버리면 가난한사람들은 그것을 사 먹는다.
껍질에는 제법 감자 속살이 많이 붙어 있어 물로 께끗이 씻어 흙물이 뺀다.
소금을 살살뿌려 쪄 먹으면 허기도 달래주면서 그 맛도 일품이었다.
감자분이 솔솔 나고 구수한 냄새는 침을 흘리게 했다.
한국인이 감자껍질을 먹는다는 것을 안 미군감독관이 한국인 감자깍기 노동자를 무더기로 해고했다.
그 이유는 한국인(동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고의적으로 감자를 두껍게 깍았다는 것이다.
좋은 직장을 하루 아침에 잃고 가족을 먹이 살리자니 어려워 한탄하며 눈물도 많이 뿌렸을 것이다.
그깟 감자 껍질 때문에..
지금 생각하면 남(동포)을 위해 그럴 수도 있었겠다는 마음도 들지만...어쨋건 억울한 일이다.
전쟁만 나지 않았어도 이런 비극이 있을 수 있었겠는가?
부모들은 자식을 위해 고통과 슬픔을 참았다,
미군부대에 다니는 여성들은 대개 아줌마 였다.
미혼 여성들은 타이피스트( 타이프로 글자를 찍는 사람)로 고용 되었다.
아줌마들은 주로 청소부.식당 등에서 일을 하고 부대 내에서는 남은 음식은 아무리 많이 먹어도 되나
가지고 나갈 수는 없다.
그래도 집에서 배고픔에 시달리는 애기를 위해 음식물을 비닐로 싸서 부피를 최소로하여
겨드랑이나 배에 차서 가지고 나왔다.
정문을 무사히 빠져 나오고 나면 점점 욕심이 생겨 다음 부터 돈벌이에 눈을 뜬다.
친한 미군에게 부탁해서 PX에서 파는 담배,커피,초코랫,아이보리 비누,과자를 가지고 나와
비싸게 팔곤 했다.
이것이 소문이 나서 거의 모든 부대근무 여성들이 이짓을 했다.
숨겨나온 것 중에는 주인 몰래, 군인 몰래 창고에서 훔쳐 나오기도 했는데 아무 죄의식도 없었다.
이 도둑질을 그냥 <얌생이 몰았다>고 했다.
도둑질을 좋게 포장한 말이다.
얌생이는 염소의 경상도 사투리인데 <얌생이 몰다>라는 어원은 각자 해석이 분분했다.
물건을 훔치려 들어 갔다가 걸리면 키우던 염소가 없어져 찾으려 왔다고 둘러 댔다는 설도 있었다.
그러니 아주머니들은 물건을 숨겨 나오기 편한 몸빼바지를 거의 다 입고 다녔다.
정문 검문소 MP(미 헌병)들이 예전에는 여성이라고 대강 대강 눈으로만 감시하는 시늉만 했었다.
가지고 나오는 물건은 젖가슴으로 위장하고 허리띠, 겨드랑이, 심지어 사타구니에 생리대를
가장하기도 했다.
차츰 이런 수법을 안 정문 경비헌병들은 과감히 몸 수색을 한 모양이다.
몇명은 발각되어 해고까지 당했다.
이러니 생계에 지장을 받은 여성근무자들이 항의를 하는 뜻으로 정문앞에서 퍼질러 앉으면서
몸수색을 한국인으로 바꾸어 해 달라고 떼를 썼다
한국인이면 동족이라서 조금이라도 더 봐 줄것 같아서 였다고 한다.
항의이유는 검색시 미군이 과도하게 몸을 만졌다는 것이다.
요즘 말로< 성추행> 당했다고 주장한 것이리라고..
편대를 지어 적진을 향하는 미 해군기들
불쌍한 전투기 조종사들
먼저, 이역만리에 와서 생전 처음보는 한국인을 위해 목숨을 잃었거나 부상을 당한 미국,
유엔군 조종사에게 감사의 기도를 합니다.
전쟁은 우리군군과 유엔군(미군등)의 피튀는 반격에도 불구하고 낙동강도 넘보고 마산 근처에 까지 왔다.
이 낙동강 전선이 무너지면 피할 곳은 제주도나 일본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일본을 우리를 절대 받아 주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 나라 전쟁으로 일본은 태평양 전쟁 후 최대 호황기를 누리고 있었다.
미국이 전쟁물자를 거리 상으로 제일 가까운 일본으로 부터 구입하니,미국의 병참기지 역활을 했다.
우리가 목숨을 걸고 울부 짖을때 그 나라는 웃음소리로 가득했다.
한국 전쟁이 없었다면 패전국 일본은 현재 쯤은 한국보다 훨씬 못살고 있을 것이다.
한 조각 남은 낙동강 이남의 아군땅. 국군과 미군을 위시한 유엔군이 필사의 전투를 벌렸다.
인천 상륙작전이 성공 못했다면 오늘의 대한민국은 없다.
전선이 진해와 가까이 되니 비행장의 전투기 소리는 밤낮이 없이 우르렁 거렸다.
밤에도 <써치 라이트>가 적기를 찾아 이리 저리 움직였다.
얼마나 밝은지 마을이 환할 정도여서 우리는 그 신비한 빛을 <미국달>이라고 불렀다.
플로펠러 작은 전투기들은 4대씩 짝을 지어 사이좋게 적진으로 출격한다.
한,두시간 후에는 4대가 차례차례 활주로에 내려 앉지만 어떤 때는 2대만,
혹은 3대만 돌아올 때도 자주 생겼다.
아마 전투 중 추락 했을 것이다.
어떤 때는 3대가 돌아온 후 한참 있다가 한대가 흰 연기를 뿜으며
절뚝거리 듯 날개를 흔들며 겨우 겨우 활주로에 불시착 하기도했다.
그땐 구경하던 모든 사람들이 박수를 치기도 하고 어린이들은 만세도 불러 주었다.
가장 마음 조렸던 것은 앞 랜딩기어(바퀴) 한쪽이 나오지 못해서 착륙을 못하고 기름이 소비 될때 까지
공중에서 맴돌고 있을 때다.
그 조종사의 마음은 얼마나 불안 했을까.
겨우 마음을 다잡고 한쪽 바퀴마저 집어넣고 동체착륙을 하지만 불행히 뻘건 불에 휩싸이고
소방차와 앰부란스가 출동하고...난리가 난다.
어느날 또 한 대의 미군전투기가 적탄에 맞았는지 비틀거릭며 공중을 맴돌다 착륙 시도했으나
착륙각도가 맞지 않아 실패하고 다시 공중에서 맴돈다.
조종사가 부상을 입었는 모양이다.
이 때는 지상에 있던 비행기가 떠서 같이 동행하면서 자기를 따라서 내리도록 유도한다.
비행장 근처로 온 동네 어른,아이들.. .그리고 수많은 엿장사까지 까마귀 같이 모여 든다.
만약 비행기가 추락하면 알미늄 파편이나 쇠붙이를 주어 엿과 바꾸고 돈을 벌기 위해서다.
남의 불행이 돈을 벌 좋은 기회가 된 것이다.
우리 어린이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목숨을 걸고 있을 때 제발 추락하여 알미늄 한 조각이라도 손에 쥐었으면....
그리고 달콤한 엿이 혓바닥을 즐겁게 해 주었으면..하는 마음 뿐이다.
지금 생각하면 우리나 어른들은 모두 못 된 놈들이었다.
적진에 추락한 미군기
안내를 하던 앞쪽 비행기는 무사히 착륙했으나, 결국 부상 당한 전투기는 활주로 30m를 앞두고
논에 쳐 박혔다.
한쪽 날개가 뿌러져서 사방으로 튀고 기체는 불이 붙었다.
곧 구조대원들이 조종사를 꺼냈는데 멀리서 본 나의 눈에도 팔이 새까맣게 탓는 듯했고
고통에 못이겨 팔을 흔드는 것도 확연이 보였다.
자기의 고국에 있는 가족 들은 그 시간에 무엇을 하고 있을까?
부모는 자식이 전장에서 돌아오는 꿈을.
아내는 첫돌맞이 아들에게 군복 입은 아버지 사진을 보여 주고 있을지도 모른다.
모여든 군중들은 쉽사리 흩어질 줄을 모른다.
구경도 구경이지만 알미늄 한 조각이라도 손에 넣으려는 것이다
경비병들은 구경꾼들을 흩어지라고 소리 질렀으나 잠깐 흩어졌던 사람들이 다시 모이고
아이들은 논두렁에 엎들어서라도 추락 한 전투기 근처로 간다.
그건 비행기가 추락하면서 날개 일부가 튕겨져 나오는 알늄조각을 보았기 때문이다.
참다 못한 추락 한 전투기를 지키던 경비병들이 총을 쏘기 시작했다.
총소리도 별 효과가 없다.
우리는 그들이 쏘는 총알은 공포탄이 거나 공중에다 쏘는 것을 이미 알고 있기에..
어느듯 태양은 서쪽 너머 탑산에 걸릴때 즈음 한,둘씩 흩어졌다.
엿장수도 그날 공쳤을 것이다.
북한군들이 죽이고 간 주검들, 가족이 시체라도 찾으려고...
아들을 보내고서 평생을 곡(哭)하고 돌아가신 <언동할매>
나의 바로 옆집에는 나를 아주 예뻐하는<김수열>라는 형이 있었다.
동네 애들이 줒어 갈까봐 두 그루가 있는 감나무에서 떨어진 감꽃을 가장 먼저 줍도록
나에게 배려했다.
그 당시 감꽃은 우리의 유일한 간식이자 먹거리다. 약간 떫은 맛과 달달한 맛이 났다.
우리는 목숨 걸듯 남의 집 감꽃을 탐을 냈다.
유일한 간식 재료였 던 감꽃으 당시에는 큰 인기품이라서 감꽃을 파는 장사도 있었으니까.
점점 국군이 전사하여 줄어드니 어린 나이의 수열이 형에게도 18세에 징집영장이 나왔다.
한참 전쟁 중이라 나가면 전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전장으로 떠나는 아들에게 무언가를 먹이고 애처럽게 쳐다본다.
수열이형 어머니는 <언동 아주머니>라고 불렀다. 고향이 <언동>이라는 동리다.
언동 아주머니는 영장을 받고 기절도 몇번하고 통곡으로 밤을 세웠다.
입영하는 날, 우리집 앞 도로에 장대에 흰 깃빨 단 군용 GMC트럭이 서 있었다.
이미 트럭에 반이나 찬 장정들이 머리 띠에 '멸공" 혹은 태극기를 어께에 둘러고 발을 구르며
군가를 불렀다.
입은 노래를 부르지만 눈에는 눈물이 가득하고 남이 볼쎄라 얼른 닦기도 했다.
아마 살어 돌아오지 못하거나 상이군이 될 것을 예측했을 것이다.
가족들도 모두 나와 울고 불고, 어머니들은 차가 떠나지 못하도록 신작로에 두러 눞거나
검정 고무신으로 땅을 치고 통곡했다.
잘 기억은 안나지만 "어머니, 아버지, 안녕히 계세요..... 중략.... 백골이 되어서 돌아 오리다."란
노래도 불렀다.
수일이 형이 올라 타자 이웃 사람들도 목놓아 울었다.
언동아주머니는 기절해 버려 자식의 마지막 가는 길도 보지 못했다.
소란스러움도 잠깐, GMC 트럭 먼지에 묻혀버리고 그는 떠났다.
수일이 형이 다시 돌아 오는데는 시간이 많이 걸리지는 않았다.
몇달 뒤 하얀 태극기 보자기에 상자가 되어 다시 부모의 품으로 왔다.
그날부터 언동할머니는 아침부터 밤까지 곡을하며 울었다.
'수열아~~수열아~` 너 어디 갔나?'
전기가 없어서 깜깜한 밤에는 그 통곡 소리가 들리면 무섭기도 하고 소름이 끼친다.
며칠쩨 유골함을 안고 울던 수열이 엄마는 갑자기 유골함 뚜껑을 뜯었다.
내 자식의 뼛가루라도 만질려고..
상자 속에는 뼛가루 한줌 없고 하얀 작은 봉투가 있었다.
봉투속에는 손톱, 발톱과 약간의 머리카락 뿐이 었다. 그래서 장례도 치러지 못해서 무덤도 없다.
당시 훈련 받을 때 미리 자기의 흔적을 남겨 놓고 시체를 찾 못하면
이것으로 유골을 대신 한다고 했다.
유골이 든 상자를 받는다고 해도 자식의 유골이라고 단정 할 수도 없었다.
전사자가 많으면 몇십구,몇백구씩 한군데 모아 휘발유로 불을 붙여 화장 한 후 임의로
한줌씩 넣어서 전사자 가족에게전해 졌다는 것을 그 당시 참전한 군인에게서
들은 적도 있다.(이것은 확인 안된 소문일 수도 있으니 오해 마세요)
그 후로 부터 <언동아주머니>는 늙어 <언동할머니>로 변하고 90살이 넘게 곡(哭)만하고
사시다가 돌아가셨다.
눈이나 감고 돌아 가셨는지 고향을 떠나 온 나는 그 이후의 소식을 모른다.
피난 중 쓰러진 딸에게 어머니는 일어켜 세우는 일 외는 아뭇것도 할 수 없었다.
문명에 무식했던 우리
식민지로써 몇십 년을 살았으니 농촌 지역은 미개인이라고 할 만큼 문명과 문화에
그늘이 져 있엇다.
전쟁이 터지고 미군이 주둔하면서 우리 사회도 많은 변화가 왔다.
특히 미군기지 주변에 살던 나에게도 새로운 일들이 많이 벌어졌다.
6.25전에는 놀이라고는 돌멩이 치기.자치기.땅따먹기. 딱지치기.공기놀이.팽이,연날리기 뿐이 였는데
새로운 놀이가 생겼다.
병정놀이다.
제일 힘센 놈이 대장이 되고 나이 순서에 따라 계급도 정해지고 밖에서도 우연히 만나면 경례도 했다.
어른들이 눈치 못채게 손을 펴서 배꼽에다 척 붙인다. 부대 본부도 만든다.
보리 타작을 하고 남은 보리대짚 더미에 동굴 같이 파거나 친구집 창고(헛간)도 이용 했다.
똥꿀에서 나온 나무외 쇠 파이프로 소총,권총도 만들고 목검(木劍)을 만들어 써로 칼싸움도 하고
밤에는 포복하는 훈련도 했다.
동네마다 병정놀이 부대가 있어서 달 밝은 밤이면 보리밭에 나가 한판씩 붙는다.
코피도 터지고 머리통도 찟어 질 때도 있었다. .
그리고 아이들이 모여 노래를 목청 껏 불러댔다.
'전우의 시체 넘어 앞으로... 부터 해병대군가(동네 옆 경화동에는 해병대 훈련소가 있다.)
또 당시에 유행하던 가거라 삼팔선,전선의 총소리,연분홍 어쩌구 하는 향기품은 군사편지,
줄줄이 이어서 합창했다.
▲장진호 전투에서 전사한 미군
학용품은 거의 볼품이 없었고 있어 보았자 <백두산>이라는 연필인데 소나무와 석탄 가루로 만들어
쓰면 글자도 잘 보이지 않아 침을 연방 묻혀 가며 글씨를 썼다.
공책 역시 회색빛으로 중간 중간에 작은 구멍도 뚫린 재생 종이다.
우린 이것을 <똥종이 공책>이라고 불렀다.
그림 그릴 때 쓰는 <크래용;지금의 크레파스와는 완전 다르다>은 양초에 색소를 넣어 만들어
아무리 칠해도 미끈그거리고 색은 짙어지지 않했다.
수채화 물감은 맥주병 뚜껑 같이 생긴 곳에 12색이 담겨 있었다. 이 깡통 역시 통조림통으로 만들어 졌다.
돼지 털로 만든 어설픈 붓으로 칠하면 모래알이 섞인 것 같기도 하고 이리 미리고 저리 밀려
사물을 표현 할 수 도 없다.
재료가 없으니 겨우 물감 흉내만 낸 것이다.
부라운(갈색)색은 실제 황토 흙을 잘게 부수어 아교를 섞어 만드는 기술의 수준이다.
나는 마침 그림에 소질이 있었는지 우리반(60명)에서 제일 잘 그렸다.
아니 전교에서 1등이었다.
경상남도에서 주최하는 사생 대회도 참석 했다.
우리학교에서 10리 떨어진 진해 도심지였다.
개인 물감이 없으니 학교에서 대회에 나가는 학생들에게 일본제 <사쿠라>라는 수채화 물감을
제공 해 주었다.
그것도 아주 귀한 물감이라고 개인 파랫트에 12색을 병아리 똥 만큼씩 짜 주었다.
사생대회는 여름이라 록색은 학교에서 준 물감으로는 부족 했다.
모자란 녹색은 주위에 있는 있는 크로바 풀을 뜯어 칠했다. 완전 자연 물감이다.
다행히 도회지에 있는 학생과 겨룬 결과 경상남도에서 2등을 받고
그 당시에는 아주 귀한 나의 키와 같은 거울도 부상으로 받아 동네 사람들로 부터 칭찬도 많아 받았다.
쓰레기장(동꿀)에서 재활용 할 것을 다 골라내면 마지막으로 동네 공터에 진짜 쓰레기가 버려진다.
우리들은 학교만 갔다오면 쓰레기를 뒤졌다.
작은 막대로 쓰레기 더미를 뒤지면 온갖 것들이 나왔다.
쓰고 버린 면도날. 이것은 연필 깍을 칼도 없을 시대에 아주 유용했다.
아이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 주는 미군
전시 개인식품(C레이션)에서 나온 작은 포장의 커피.설탕.강통에 말라 붙은 쨈이라도 발견하면 횡재다.
그 중에서도 처음 맛 본 <빛좋은 개살구 >가 있다.
제법 큰 깡동에 절반 쯤 남아 있는 빨간 홍시감 모양이 음식 같은데 맛을 보면 씨큼하고 별맛도
없고 상한것 같아 몇손가락 찍어 먹어 보고 만다. 우리는 그것을 먹으면 배탈이 난다고 과감히 버렸다.
그것이 바로 토마토 캣첩인 것이다.
봉지에 든 까만 가루도 먹는 물건이란 것 같은데 쓰기만 하여 어른들에게 물어도 아무도 대답을 못하고
어른들도 우리가 가져온 꽁초만 받고 커피는 도로 버렸다.
나의 한 친구의 어머니는 미군이 주는 어린애 배게만한 크기의 불룩한 봉지 하나를 받고서
좋아라고 집에 와서 포장을 뜯으니 시커멋고 맛이 쓴 가루가 있었 단다.
배고픈 시절이라 미군이 설마 못먹을 것을 주었겠느냐 하면서 솥에 물을 가득 채우고 그 내용물을
통채 넣고 끓여서 가족 모두가 한,두사발씩 마셨다.
음식이 아니면 보약이 겠지 하면서...
그날 밤 그친구 가족은 잠 한숨 못자고 한밤을 꼴딱 새웠다... 그건... 원두 커피가루였다.
또 희얀한 물건은 듀브에 남아있는 하야얀 것인데 맛을 보니 코를 자극하는 박하향이 가득 났다.
너도 나도 한입씩 핥는다.
학교에 가면 선심 쓰듯 남학생이고 여학생에게 한번씩 핥아 보게 하면 인기를 얻었는다.
그것은 바로 쓰고 버린 치약이였다,
선생님도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다. 처음 본다고 하셨다.
당시는 소금이나 고급으로는 가루로 된 치약 뿐이었다.
미군들은 트럭을 타고 가면서 강통을 따서 마시면 우리는 트럭 꽁무니를 쫓으면 달라고
신호를 하면 던져 준다.
땅에 굴르는 것을 얼렁 줏어면 달콤하고 톡쏘는 코카콜라가 들어 있어면 횡재를 하지만,
대부분 버드외이즈 맥주 였다. 맛이라도 보면 소오줌 냄새가 나고 쓰다.
술이 라는 것을 알고 어른들에게 주면 어른들 역시 뛔뛔뛔...웬 미국놈들은 잘산다면서
소오줌맛 술을 먹냐?
참, 더 놀라운 것은 껌의 등장이다.
껌은 6.25전에도 논에서 익지 않은 생밀(밀가루용)을 오래 씹으면 껌모양이 되고
전봇대가 썩지 말라고 발라둔 아스팔트를 떼어서 씹기도 했다.
피난 나온 어린이들
미군들이 가끔씩 주는 바둑알 같은 사각형 껌의 맛은 환상적이다. 달콤하면서
향기가 나서 정말 인기 였다.
이제 껌의 맛을 안 우리 친구들은 밤에 껌을 찾아 나선다.
목표는 양색시가 사는 포주집 마당이다.
미군들이나 양공주누나가 씹다가 버린 껌을 줍는 작전이다.
우선 흙마당에 납짝 엎드려 기어가면 껌의 실루엣이 보이면 막 줍는다.
들킬가봐서 잽싸게 도망 나와서 친구들과 밝은 불빛 아래서 껌에 붙은 모래, 흙을 털어내고
얼른 입으로 직행,
혹시 단물이라도 덜 빠졌으면 횡재한 거다.
여러개를 모아서 씹으면 탁구공 크기로 된다.
다음날 학교에 가면 여학생이고 남자애들은 서로 나누어 달라고 쌔까만 작은 손을 내민다.
그렇게 얻은 껌은 밤에는 벽이나 기둥에 붙여 놓았다 며칠이고 씹었다.
나도 누나에게 많이 주었지만 양색시 포주 마당 출신의 껌이란 것은 절대 말하지 않아았다.
양공주들.그들은 한국의 유일한 달러 박스였다
새로운 장난감이 등장한다.
어느날 어느친구가 좋은 장난감이 있다고 했다.
바람을 불어 넣으면 보름달 보다 더 큰 공이 된다고 했다
당시 공은 귀한 물건이고 동네에서 돼지나 잡으면 오줌보(방광)에 공기를 넣고 차는게 전부였다.
그런데 그것은 양공주가 사는 포주집 뒷간(재래식 ;푸세식 화장실)에 가야 구할 수 있다고..
우리는 대나무 장대를 들고 의기 양양하게 그곳으로 향했다.
똥퍼는 구멍으로 보니 얇은 고무 같은게 여럿 있었다.
<또 이것은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왜 하필이면 구데기가 잔뜩 우글거리는 똥위에 있을까?
조심스럽게 몇게를 건져 올려서 부리낳게 곧 개울가로 간다,
우선 이것을 몇번이고 정성들여 씻었다.
다만 똥통에서 나온 거라 입에다 가져가기 더러워서다.
우리는 이것의 용도를 전혀 몰랐고 어른들도 희안한 물건 다 본다고 하고 아무도 알지를 못했다.
콘돔이란 이름도 모르니 그냥 <미국놈 X마개>라고 불렀다.
이것은 참 좋은 우리의 장남감으로 탄생했다.
한껏 입으로 바람을 불어 넣어면 투명한 큰 공이 된다.
다만 위 끝부분에 젖소 젖 같은게 있어서 입으로 빨고 얼굴에 비비기도 했다.
야들 야들한 촉감에 뾰드덕 뾰드덕 소리가 나와 기분이 좋았다.
축구는 못해도 배구공으로는 쓸만 했다.
우리가 이런 공놀이를 하고 있을 때 트럭을 다고가던 한무리의 미군들이 손뼉을 치며 웃고서
우리들에게 손가락질 했다.
차를 세우고 사진까지 찍어 댔다.
그때 찍힌 사진이 미국 어느 집에 있다면 제발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기 바란다.
우리는 더욱 신나서 놀이를 즐겼고 다음에도 자주 포주집으로 갔었다.
지금 생각하면 우리를 미개인으로 취급 당한 것이 부끄럽기도 하다.
그런데 어른들, 선생님도 아무런 소리를 안했다. 그들도 그 용도를 모르기는 마찬가지..
공놀이가 끝이 아니다.
콘돔이 터지면 그 조각들을 서로 가지려고 한다.
학교에 가면 여학생들에게 인기품이다.
고무 조각을 양손으로 넓게 펴서 입에 대고 빨면 작은 꽈리가 만들어 진다.
서로 얼굴이랑 머리에다 눌러면 빵하면 소리를 내며 터지는게 재미 있어서 였다.
지금의 풍선 껌놀이라 할까?
얻어 먹는게 버릇이 되다.
인천 상륙 작전을 지휘하는 맥아더 장군
전쟁이 한참 일때는 굶는 집이 많아지고 거의 두끼의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학교는 군인들의 병원으로 내 주고 우리는 일제 때 지은 폐공장이나 얕은 뒷동산에서 공부를 하기도 했다.
맥아더장군의 인천 상륙 작전의 성공으로 한국은 약간의 허리를 폈다.
낙동강 전투에 밀리고 인천 상륙작전이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 김정은이 밑에서 살고 있을지도..
아찔한 위기 상황이였다.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킨 맥아더장군은 우리의 우상이 되었다.
실제 그는 우리를 살린 은인인데도 한때 맥아더 때문에 통일이 되지 못됬다고 외치는 사람들이 있었다.
사실 맥아더는 중국 국경을 넘어서 라도 김일성정권을 괴멸 시키려 한 분이다.
나는 인천의 맥아더 동상철거를 외치는 사람들을 보고 배은망덕한 것들이라고 욕한 적이 있다.
당시 살아 보지도 겪어 보지도 않은 젊은이들은 무슨 뜻으로 철거운동에 동참했는지,
"니들이 무엇을 알아? 전쟁의 고통을 너 부모들이 더 잘알고 있어!!"
우리의 살길은 오직 외국 구호품에 달려 있었다.
차츰 전선이 위로 올라가면서 학교에 주둔해 있는 군대병원도 학교를 떠났다.
떠나고 난 자리는 피비린내와 소독약냄새와 함께 붕대조각 피묻은 거즈조각으로 어지러웠다.
그래도 마침 세계 각 나라에서 지원한 구호품들이 우리의 허기를 달랬다.
밀가루가 배급되어 수제비와 국수라도 먹게 된 것이다.
우리 국민(초등)학교에도 그 혜택이 돌아 왔다.
그당시 우리들은 연필도 귀해서 책을 찍을때 쓰는 납으로 된 활자나 납조각으로
질 나쁜 종이에 침을 묻혀 쓰고는 했는데 구호품으로 나온 빨강고무 모자를 쓴 노란 연필이
하나씩 공급되었다.
옆에는 금박으로 U.S.A.라고 적혀 있었다. 그리고 쓰레기장에서 나오는 몽당 연필과 면도용 칼,
그것만으로도 우리 학교생활은 즐거웠다.
미군 GMC 트럭
보름에 한번씩 GMC군트럭이 와서 우유가루 몇통씩 운동장에 내려놓고 가면 그 다음날은 잔칫날이다.
한사람에게 맥주컵으로 2개씩 한가득 줄을 서서 배급 받는다.
외국에서는 어린 젖먹이 동물에게 먹이는 것이라지만 우리에겐 꿀맛이었다.
(이 우윳가루 이야기는 내가 몇년전에 쓴글을 아래에 연결해 놓았음)
휴전 후 졸업한 6학년 졸업사진(지금은 중앙초등학교로 흡수됨)
우리 학교는 도로 옆에 있는 작은 학교다.
각 년마다 1개반. 한반은 남자 30명 ,여자 30명으로 구성되었다.
일본이 그들만의 엘리트 양성학교로 만들기 해 일부러 작게 지었고 학교 교육자재는 무척 많았다.
병에 담긴 토끼 해부표본, 두루미 박제.
미술시간에는 석고로 만든 발모양도 교재로 나올 정도였다.
쉬는 시간이면 여자 대부분은 고무줄 놀이를 하고 남학생들은 <꼬창받기>를 한다.(현 래스링과 비슷하다.
흙바닥에 뒹굴면서 상대방 목을 조르거나 하면 괴로운 쪽이 먼저 <꼬창!!>.이라고 소리지르면
이기는 장난이다.)
이것은 차를 타고 가던 미군들이 맨발에다 흙투성이로 싸우는 걸보고 웃으며 신기한지 사진을
찍어 댔다.
사진촬영 후에는 운동장에다 사탕(캔디)을 몇 주먹씩 던진다.
던지는 즉시 남,여학생들은 그것을 줍기 위해 머리가 서로 박치기 할 정도로. 비둘기가 모이를
쫏듯 모여 들어 아프리카에서 들소떼가 지나가듯 흙먼지가 날린다.
남의 주먹에 있던 사탕도 뺏으려하고 빼앗기지 않을려고 싸움도 벌어 진다.
던질 때 마다 운동장은 작은 전쟁터로 변했다.
미군들은 박장대소를 하고 사진을 찍고서 휭하며 가버린다.
이것이 소문이 났는지 그들에게는 인기 놀이가 된 모양이다.
다음 날도, 그 다음날도 그 비슷한 일이 벌어 지고 사탕종류도 달라질 때도 있고 껌도 던져 주었다.
카메라를 든 미군도 더 늘어 났다.
이런 사진이 미국 어디 어디서 라도 존재 할것이라고 생각하니 부끄럽기 짝이 없다.
이렇게 되니 수업시간도 지루해 지고 쉬는 시간만 기다려 졌다.
나중에 선생님 귀에도 들어가서 쉬는 시간에는 도로 옆에서 지키고 서서 미군들 이런 행동을 제지했다.
외국인에게 제자들의 창피한 모습을 보여 주지 않겠다는 자존심이 였을 것이다.
십수년이 지나고 월남에 파병된 된 친구도 가난한 월남 아이들에게 과자를
나누어 주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들도 역시 미군과 다르지 않게 사진도 찍었단다.
까만 두손을 펼치고 필사적으로 서로 먼저 받겠다고 하는 사진을 보았을 때
과거의 우리들을 모습을 보는것 같았다고 했다.
.
고아.구걸을 위해서는 통조림 깡통은 필수품 제 1호였다.
피난민이 내려오자 학교도 학생수가 불어 났다. 교실이 부족해 지기 시작했다.
미군이 이 소식을 듣고 비행장에 있던 공병대를 시켜 기존 교실 옆 에 가건물 처럼 교실 2개를
지어 주었다. 재료는 폭탄을 포장해 온 목재도 사용되였다.
지붕은 루삥(뚜꺼운 종이에 아스팔트를 바른 후 모래를 뿌린 방수 종이)로 만들어
소나기라도 오면 수업 진행이 어려워 선생님의 목청만 높았다.
복도도 없고 바닥은 흙바닥이어서 우리반(3학년)에는 책걸상이 공급되고 고학년에는 그것도 없이
맨 마루바닥이었다.
처음 미군을 볼때는 많이 두려웠는데 차츰 친숙해 지기 시작했다.
길을 가다 만나면 거지 같이 입은 우리들을 스스럼 없이 번쩍 안아 올리기도 하고
때가 꼬꼬질한 우리의 손도 잡아 주며 껌이나 쪼코랫도 쥐어 주기도 했다.
그리고 고향에 보낸다면서 사진을 같이 찍자고도 했다.
그들도 쬐끄만 동양인 아아들을 처음보니 신기하기도 했을 것이다.
현재의 외국인들과는 격이 달랐다. 가난한 우리를 진심으로 도우고 위로해 주는 순수한 사람들로 기억된다.
부드럽고 친절했다.
전쟁터의 아이들
우리의 영어 실력도 늘었났다. "오케이 "'노오" 만 말하던 우리는 "헤이~ 츄잉검 ,쵸코랫트 기브 미" 를
만나는 미군에게 인사처럼 하고 다녔다.
그때는 딸라의 가치를 몰랐는지 <머니>란 말은 쓰지 않았다. 설사 그들이 1쎈트짜리 동전을 주어도
쓸 데가 없었다.
생활의 변화
미군이 들어오자 조용했던 우리 사회도 별별 직업이 생겼다.
미군 부대 노동자,꽁초를 주어 파는 사람, 슈산보이(구두닦이), 우리 또래 보다
조금 위(14세~18세) 아이들은 <하우스 보이>가 되었다.
미군 숙소에서 먹고 자며 그들의 잔심부름도 하며 청소도 한다.
월급은 딱이 얼마라고는 없지만,양키물건(양담배.커피,설탕,생활 일용품)들을 가져 나와서 팔았다.
영어도 몇마디씩 할 줄아니 우리들에게 부러움도 받았다.
간혹 미군의 귀여움을 받아 미국에 가자는 권유도 받고 실제 군인이 퇴역하면서 미국으로
데려간 일도 종종 있었다.
기지촌의 양공주들 누나들
엉뚱하게도 전쟁은 새 직업을 하나 더 만들었다.
필요 악(惡)이라는 여자 문제다.
학교수업을 마치고 도로를 걷다 보면 가끔 미군을 만난다.
우선 <헬로?>라고 하며 거인 같은 미군이 우리에게 접근한다.
우리의 키는 그들의 허리끈에도 닿지 않을 정도다.
우리의 쌔까만 작은 손은 푸대자루만한 군복바지 주머니를 들락거린다.
껌이나 과자가 있으면 빙긋이 웃으며 먹어라는 시늉을 하면 우리는 더욱 신이 나서
그들에게 "색시?'라고 묻는다.
SEX와 발음이 비슷하기에 얼른 뜻이 통한다.
미군이 들어온 초기에는 양색시집(포주가 운영하는 성영업집)도 드물어 그들도 위치를 잘 모르기 때문에
우리에개 알려 달라는 것이다.
집창촌이 없기 때문에 일반 가정집(기와집도 드물고 해서 초가집)에서 영업을 하여 찾기 어렵다.
사탕을 얻어 먹은 댓가로 그 집을 안내하는 것이다.
양공주 누나들은 손님을 대려와 주었다고 머리를 쓰다듬으며 고마움의 표시로 껌을 주기도 했다
.사실 지금으로 보면 죄가 될 수도 있다. 성매매 알선죄? 후후`~~
이 짓을 말리는 어른도 없고...
대강은 짐작은 가나 구체적으로 무슨 행위가 이루어 지는지
우리들은 몰라 궁금하기도 했다.
어느날 이웃집 친구 할머니가 우리 아버지에게 욕을 하시면서 고함을 질렀댔다.
귀한 자기 손자 박통(머리통)을 깨어 놓았으니 어쩔거냐고 ... 읍네 병원으로 데려다 주던지!!
옆에는 내친구 박XX가 겁에 질린 듯 할머니 손을 잡고 있었는데 피묻은 광목천으로 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상처부위가 불룩하니 틀림없이 된장을 붙였을 것이다.
머리 깨진데 상처에는 약이라고는 된장 밖에 더 없을 시절.
박XX와 친구 두명이 양색시집 봉창문(흙벽에 나 있는 작은 창문으로 대나무로 문살을 만들고
창호지를 붙임)을 손가락에 침을 발라 뚫고 미군과 양색시들이 무슨일을 하는지 정신없이 보고 있을때
마침 논에 다녀 오시던 우리 아버지 눈에 띄인 것이다.
화가 나면 무섭고 성질 급하신 우리 아버지는 괭이자루로 애들을 머리를 때리면서 쫓아아 내다가
머리통이 터진 것이라고..
휴~~ 내가 거기에 끼었더라면... 생각만 해도 앗찔!
지금은 성매매업소는 강제적으로 포주나 조폭 감시하에 운영되어 여성이 인권이 유린되고 있지만
그 당시 우리눈으로 보아도 미군 성매매가 강제라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양색시 누나들이 자발적으로 택했다고 본다.
일제때의 강제적으로 한국여성을 납치하거나 기망해서 시행한 종군 위안부(성노예)와는 완전히 다르다.
일본도 패전후 미국인을 상대로 한 양공주(위안부)를 활용해 많은 달러를 벌어 들이고 있었다.
가난한 집 딸이나 피난 나와 가족을 책임져야 할 누나들,
가족을 잃은 고아 출신이면 직업을 구하지 못하여 양공주의 길을 택한다.
간혹 사치에 물들어 미제 화장품이나 옷을 쉽개 구하려 들어간 누나들과 미군과 사귀다 결혼하여
그 미군이 귀국할때 묻어서 미국으로 가기 위해서 계획적으로 양공주를 택한 일도 가끔 있었고
일부는 성공하여 미국으로 들었갔으나 대부분 이혼을 당했다고 한다.
포주들도 공생(共生)관계라서 대우를 잘해 주었는지 양공주들이 <엄마!>라고 부르는 걸 보았다.
아마 하숙비를 받고 음식과 잠자리 재공만 하고 착취라곤 없는 듯 했다.
자기들 마음대로 외출하고, 맛있는 것 사먹고 이집 저집 옮기기도 했다.
어린 나이 (보통 16세부더 30세미만) 탓인지 항상 자기들 끼리 웃고 떠들며 생활을 즐기는듯 살았다.
거인 같은 미군 어께에 매달리며 항상<워츄 메러 유? what matter you> .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우리 귀에는 "오쭈메러 유 '로 들리고 실제 그렇게 발음하는 누나도 보았다
차츰 미군이 늘어 나면서 우리 동네에도 두군데가 더 생기더니 그 후에는 기지 정문 앞에
큰 집창촌 동네가 생겼다.
정기 검진도 미군 병원에서 해준다는 말도 있었다.
처음 우리와 사람들도 <갈보> <X깔보><양깔보>로 부르던 것이 돈을 잘 버는 직업이 되고,
대한민국의 외화 수입은 거의 이들로 부터 이루어 지다보니 한격 높혀서
<양색씨,양공주>로 불리게 되었다.
하루의 식사는 이 한그릇의 국수가 전부다. 이 사진을 보고 눈물을 흘리지 않을자가 있는가?
생활에 변화가 오다.
미군(유엔군 포함)이 주둔하면서 우리나라가 수십년이 되어야 할 변화가 한번에 빨리 찾아 온 것이다.
쓰레기장에서 나온 물건은 우리에게는 온갖 자원이 되었다.
보르박스(종이 포장박스).천막조각은 피란민들이 움집을 만드는 훌륭한 재료가 되었다.
한두평 땅에 한가족이 기어 나오고 기어 들어가는 하꼬방(움집)을 짓는데도 이 모두가 동원된다.
특히 캔맥주,코카콜라 깡통 양끝을 잘라내 손바닥 만크기로 만들어 서로 사방으로 모자이크로 이어 붙여
판자집 지붕으로 탄생 시켰다.
지금시대에 그것 본다면 전위예술의 조각작품이라도 할 것이다..
알록 달록 수십 가지의 깡통 색깔이 조화를 이루면 이것이 예술 작품이지.
팝아트가 따로 있나?
큰 통조림 깡통도 많은 용도로 썼다. 우물의 두레박에 부터 거자들의 구걸통으로 또는 피란민들의 솥으로.
또 그것을 두들겨 펴서 만든 물뿌리개,. 함지박,곤로(기름으로 쓰는 화덕) 물바가지 등등.
시골에서는 밭에다 거름으로 인분을 뿌리는데 바가지로 하니 자꾸 깨어지다 보니 철모(군인의 머리에쓰는
쇠로 된 방탄 모자)나 화이버(철모 안에쓰는것)가 대신해 주었다.
옷차림도 차츰 변했다.
한복 바지 저고리만 입던 어른들도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군복을 고쳐 입었다.
너무 커서 줄이지 않으면 윗옷 주머니가 허리에 올 정도다.
군복을 그냥 입다가 헌병에게 걸리면 등에 커닿랐게 먹물로 <염색>이라고 써 준다.
까맣게 다시 염색해서 입거나
돈이 없으면 부끄러워도 그냥 입기도 한다
우리 아이들도 미 군용 담요로 옷을 해 입기 시작했다.
부잣집 아이들만 입었으니 이것도 사칫품이 되었다.
겨울에는 솜 바지저고리만 입던 사람들도 양털로 짠 헌내복이라도 구하면 입이 찢어 졌다.
미공군에서 폐기되어 나온 낙화산은 여성들에게는 아주 좋은 옷감이 되었다,
잠자리 날개 같이 얇고 부드럽고 질겨서 인기기 많았다. 다만 바람이 통하지 않아서 땀을 많이 흘렸다.
한국에 나이롱천이 첫 등장 한 것이다.
미국을 위시한 선진국에서는 전쟁으로 고통과 가난에 시달리는 대한민국 국민을 위해서 못쓰는
옷.신발.모자,장갑,양말. 식료품 등..
구제품(救濟品; 지금의 舊製品)과 혼돈 말것)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서양사람이 입던 옷이라 몸에 맞지는 않으나 우리나라에도 새로운 옷. 즉 ,양장(洋裝)이 등장했다.
신발도 군용 워커에서부터 헤어지긴 했지만 남자구두, 혹은 뾰쪽구두도 신게 되었다..
남이 신었거나 입어서 구멍이 나 떨어져도 상관이 없었다.
고치고 재활용하는 한국 국민의 기술이 발휘된 것이다.
세상에서 버리는 물건은 없다.
미군이 타다 버린 트럭은 망치 하나로 드럼통을 때리고 펴고 용접해서 근사한 버스도 만들었다.
못 만드는 것이 없었으니 그 손 기술이 지금껏 이어와 현재의 대한민국을 발전 시키는
밑거름이 되었다고 본다.
투명비닐도 우리가 처음보는 물건이었다. 그것은 판자집의 유리 창문을 대신해 주었고
폐지는 다시 재생되어 새 종이로 탄생했다.
플라스틱은 발명한지가 얼마 되지 않아 전투기 케노피(조종사가 타는 위에 덮는 뚜껑) 와
자부이 있는 찦차의 창문이나 영화 필름 정도만 사용되었다.
우리들이 많이 가져 놀아 본 것은 필름이다.
전투기에서 사격이나 폭탄을 투하하면 8mm의 영상이 찍힌다.
이 폐기된 필름(당시는 필림으로 불렀다)은 우리의 간식 거리다.
감광액이 묻은 한쪽을 빨면 달달한 맛이 느껴졌다.
산화은(銀)으로 만들어 진 중금속을 빨고 있었다니? 완전 미개인이지..
조종사가 물에 빠지면 구조용으로 초록색 형광물질을 퍼지게 하는 신호용 물건이 있었다.
이것을 한 조각이라도 물에 떨어지면 물이 초록색으로 변하여 멀리 펴져 나간다.
이것을 온 동네 우물에 장난으로 집어 넣어 동네 사람들이 물를 못 마시게 되었다.
그 피해는 당장 우리에게 왔다. 물이 없어 밥도 못해 개울물로 해결했다.
한번의 장난으로 끝나고 다음부터는 하지 못하였다.
동네 어른들이 우물 물을 전부 퍼내 버리는 것을 보고 반성한 것이다.
또 농촌에 큰 혜택을 준 것은 전투기에서 나온 폐 부속품이다.
바퀴에서 나오는 제동장치 같은데 약 30cm정도의 링을 대장간에서 낫으로 만들었다.
쇠의 질이 아주 좋아 1등 제품이란 평을 받았다. 과거의 낫은 무쇠로 만들어 잘 부러지고
무디었다.
전투기 바퀴는 주기적으로 새것으로 교환하기 때문에 쓰고 난 것이 많이 나와 수레에 많이
사용 되었다.
쓰리쿼트와 GMC바퀴는 우마차에 쓰였다. 과거 나무 바퀴에 철을 덧씌운 바퀴에 비하면
고급세단이 된 격이다.
군용 전화선은 시장바구니로 탄생되고 폭탄을 포장했던 나무는 판자집의 기둥역활을
단단히 해주었다.
전쟁이 휩쓸고 간 자리에 미군복을 입은 고아가 구걸을 한다.
쓰레기장 이웃에 벙어리 삼형제가 어렵게 살고 있었다.
제일 큰형이 30세정도 되었을까?
이중 큰형은 솜씨가 아주 뛰어나 한번 보았으면 만들지 못하는 것이 없다.
깡통으로 주로 물뿌리게, 두레박,손잡이 물바가지. 심지어 아주 정교한 기름 곤로(기름으로 쓰는
화덕) 까지 만들었다.
곤로는 진해서는 기름(디젤유)이 좀 흔하기 때문에 수요가 많았다.
해군기지 공창(배 정비창)에는 영외 근무 하사관과 군속(군무원)이 수백명이 근무하는 데
주로 자전거로 출퇴근하며
자전거 짐받이에 1겔런 사각깡통을 매달고 다녔다.
매일 퇴근할 때 한가득 채우고 집에와서 사용하거나 팔기도 했기 때문이다.
아마 워낙 박봉이라 살기 힘드니 정문(경비초소)에서 묵인한 모양이었다.
이 기름은 미군함이나 한국군함에 원조품으로 나온 경유였다.
옥수수 잎도 더위에 지쳐 축 늘어진 한여름 어느날 2시 쯤인가?
<꽝>하는 폭탄소리가 온 동네를 울렸다.
나는 급하게 그 곳으로 달려가니 우리집 고구마밭 옆에 사는 벙어리 집에서 핀 연기가 자욱
펴져 올랐다.
그 벙어리형은 마루에서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어께 밑을 잡고 동물 같은 괴성을 질렀다.
,(벙어리는 말은 못해도 소리를 낸다)
이미 오른쪽 팔은 날아가고 없었다, 아마 불발탄을 분해하다 터졌을 게다.
불발탄을 분해하면 철이 나와서 비싸게 팔리나 위험해서 보통 이것을 취급하는 사람은 드물다.
곧 미군 MP차가 도착하고 앰블런서도 왔다.
그 후에도 병어리 형은 왼팔 하나로 또 다시 무언가를 만들고 있었다.
전쟁 고아들. 옷은 거의 미군복을 입었다. 모자도 군모다.
불발탄 이야기 하나 더.
비가 아스랑거리는 오전. 우리 친구 몇명이 비를 피해 문약국집 대문 아래서 놀고 있었다.
갑자기 우리 옆으로 울부짓는 거지 아이가 쌔가만 몰골로 뛰어들어 왔다.
다리쪽을 보니 바지는 거의 타고 벌겋게 익은 다리에서 연기가 무럭 무럭 나면서 살이 타는 역겨운
노린냄새가 났다.
화장터에서나 나던 냄새 같았다.
그 살타는 노린 냄새가 얼마나 고약하고 그 몰골이 불쌍한지 지금도 마음에 걸린다.
겁을 잔뜩먹은 동그란 눈으로 아픔을 못참아 부들 부들 떨기만 했다.
그러나 어른들은 아무도 도와 주지 않았다. 병원에서 거지를 받아 주겠는가?
병원비를 물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운이 좋으면 미군병원에서나 치료해 주었을까.?
그 위급한 상항인데도 구걸용 깡통만은 팔에 걸고 있었다.
상처보다 먹는 것이 최우선 순위! 아~`이 슬픔의 시대. 1952년이여..
거지들은 고철이나 병을 쓰레기에 뒤지고 밥은 집집이 돌아 다니며 <밥 좀 주소!>하면서 연명한다.
불발탄을 잘 못 만지거나 불붙은 쓰레기 옆에 있다가 불발탄이 터지면서 이런 사고를 당한다.
나 또래의 그 아이가 지금은 나와 같은 머리가 하얀 노인이 되었을 것인데, 그 아이는 죽었을까?
아니면 다리를 잘라내고 전쟁의 아픔을 안고서 평생 불구로 살고 있을까?
전쟁이 이 어린이 운명을 결정해 버린 것이다.
신작로(도로)에서 생긴일
우리집 앞에는 일본이 만든 진해와 부산간 도로가 있었다.
이 도로는 군항에서 내린 군수품이나 열차로 도착한 비행기 연료를 K-10비행장으로 실어 나르는
중요한 도로이다.
2차선 도로로써 비포장으로 자갈이 깔려 있어 차 한대만 지나가도 온통 먼지를 뒤집어 써야 되고
비가 오면 큰 웅덩이가 이곳 저곳에 생겨 행인들에게 흙탕물 벼락도 선사해 주었다.
도로의 구조가 우리집을 중심으로 약 50미터가 커브길이 어서 서로 마주 오는 차가 서로 잘 보아지
않아 교통사고가 자주 난다.
미군이 주둔하니 갑자기 교통량이 많아졌다.
유류를 작뜩 실은 트럭부터, 쓰리쿼트, 대포를 단 전차. 특히 찝프차는 더 속도를 내어서 달렸다,
한번 길을 건너려면 이쪽 저쪽 잘 살피고 쨉싸게 건너야 한다.
미 군용 찦프차
하루는 끼익~~ 하고 찝프차가 급정거 했다. 구경꾼들이 모여 들었다.
한마리의 누렁이가 앞바퀴 옆에서 앞다리 2개가 잘려진 채 피퉁이가 되어 울부짖고 뒹굴면서 얼마나
아픈지 상처난 다리의 피를 핥았다.
이 차에서 3명의 미군이 황당히 하며 내리더니, 자기들 끼리 몇마디 주고 받았다.
한명이 차에서 칼빈 소총을 꺼냈었다.
탕! 탕!
두번의 총소리가 난후 개는 편한자세로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이마에 두방 맞은 개는 안락사 당한 것이다.
우리는 미군이 총을 꺼낼때 부터 개가 죽을 것이라 예상은 했지만 우리의 관심은 온통
쏜 탄피가 '어디에 떨어 질것인지' 그리고 내가 꼭 줏어야지 하는 마음 뿐이 였다.
장난감이 부족한 우리들에게는 그것이 아주 좋은 물건이기 때문이었다.
아무도 개주인이라고 나서지 않으니 누렁이 옆에다 지폐 한장을 놓고 작은 돌을 눌러 놓고
말없이 쌩하고 먼지 한뭉텅이를 안기고 찦차는 사라졌다.
보상금이 1딸러나 될려나?
개 주인이 금방 나타나지 않자 동네 어른들은 얼른 시체를 끌고 사라져 버렸다.
몇접시의고기와 보신탕으로 변한 것이다.
이름도 모르는 한마리의 누렁이도 김일성이 만든 침략 전쟁의 희생물이 또 되었다.
우리집 길거너에는 피난나온 아낙이 5살쯤 아이를 데리고 혼자 살았다.
이 아이도 미군 차에 치어 군 병원으로 실려가다가 숨이 끊겼다.
며칠간 엄마의 울음소리가 들리 더니 어디로 훌쩍 떠났다는 것이다.
아들이 사고난 자리가 눈앞에 보여지니 얼마나 괴로웠을까? 보상은 거의 없었다
피해자 과실로 결론을 내 버리기 때문이다.
유족에게는 미군용 식품이나 C레이션 한박스 받으면 끝난다.
어느날 밖에서 놀고 있을 때 100미터 왼쪽 도로에서 사고가 났었다,
무슨 구경 났다고 나는 급히 달려갔다.
찦프차 바퀴 아래는 동네 친구인 XX가 옆으로 쓰러져 있고 귓구멍에서 서서히 피가 뿜어 나오더니
온 얼굴을 적셧다,
즉사한 것이다.
아버지가 동네구장(동장)이면서 외동아들로 누나도 한명 있고 제법 부자로 살았다.
다음 날 장례가 치러 졌는데 학교에서 친구가 되는 몇명에게 운구를 도와 주라고 수업을 빼 주었다.
어린 친구들이 산으로 매고 가는 친구의 상여는 장난감 처름 작고 예뻤다.
그날부터 부모들은 정신을 잃고 가세도 기울어 결국 동네를 떠니고 후일 소문에는 부모도
화병으로 몇년 사이를 두고 돌아 가셨단다..
그의 누나도 충격으로 결혼도 포기한채 혼자 살았다. ,
곱던 그 누나도 지금쯤 80세의 할머니로 변해 있겠지...전쟁이 선물한 슬픈 역사이다.
같은 반에 있는 XX는 참 운이 좋은 친구이다.
찝프차가 허벅지를 타고 지나 갔다. 바퀴자국도 선명히..
미군병원에서 약간의 치료를 받고 보상금이라고는 C레이션(미군전투식량) 한박스,
그는 그후 육사를 졸업하고 전방에서 근무했다.
처참한 교통사고도 났다.
해가 지고 어둠이 깔릴 무렵. 신작로 중앙에 얼굴 형태는 없고 골이 엊깨어져 허연것이
생선의 곤니(숫것의 정소) 처럼 보였다.
허벅다라도 거의 짓물러 으깨진 상태의 시채가 우리집에서 20미터 떨어 진곳에 누어 있었다.
구경꾼들은 새까맣게 몰려들고 미군 헌병들이 발전기 까지 동원해서 현장에 불을 밝히고
사고조사를 하고 지나가는 미군트럭 마다 세워서 바퀴 부분에 피가 묻었는지 조사를 하고 있었다.
미군트럭이 사람을 치고 뺑소니 친 사고다.
얼굴이 없어니 죽은 사람의 신원이 쉽게 밝혀지지 않았다. 그 당시 옷차림도 각자 특색이 없었다.
흰 바지저고리 차림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여러 정황으로 보아서 건달이면서 노름(도박)꾼이며 항상 술을 먹고 비틀대면서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사람들에게 횡패를 부리던 공xx 씨가 틀림 없었다.
어떤 이들은 <그놈 잘 뒈졌다. 퉤!!>
우리 아이들은 무섭지만 호기심으로 어른들의 다리사이로 기어 들어가 거적에 쌓인 시체를 보았다.
미군에서 나온 전문사진사들도 여기 저기 휴랫쉬를 떠트리며 사진을 찍어 됐다.
당시 카메라휴랫쉬는 은색 부채꼴 반사판 가운데 작은 전구(마그내슘)에 전기를 흘리면 강한 불빛이 난다.
사진을 찍고 다시 다른 전구를 갈아 끼게 된다.
1회용 소모품이다.
이 쓰고난 전구도 우리의 귀한 장남감이라 사진사가 버리면 뜨거운데도 불구하고 얼른 집어서 도망 간다.
혹시 빼낄까 봐 그런 행동을 했다,
전쟁으로 집을 잃은 자들의 슬픔. 지긋지긋한 판잣촌 생활.
모든 아이들이 시체 구경 보다 휴랫쉬 전구에 우선 관심이 있었다.
그런데, 우리 옆집에 사는 나보다 한살 어린 XX는 시체 머리 근처에 동그랗고 빤짝이는 물건을 보았다.
무섭지만 얼른 그것을 집어 들고 튀었다.
밝은 곳에서 보니 그것이 죽은 사람의 공 XX의 눈알이었다.
기겁을 하고서 그 이후 밤에는 길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죽은 공 XX는 매우 가난하여 초상도 치를 여유가 없어 동네사람들이 거적에 싸서 산 귀퉁이에 묻어 주었다.
나는 그의 무덤을 안다. 나의 어머님의 묘소에 가는 입구에 있었다.
몇십년을 돌보는 사람이 없으니 자연적으로 흔적이 없어져 버렸다,
이제는 그를 기억하는 사람도 다 죽고 나만이 그의 인생의 싦을 안다.
그에게는 나보다 한 8살 정도 나이가 많은 딸이 있었다.
아버지의 폭력도 심하고 가난하여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했지만 상냥하고
얼굴도 예뻐서 동네사람들이 더 측은히 했다.
아버지가 사망하자 가족들은 동네에서 사라졌다.
그 누나가 다시 나타난 것은 약 4,5년 후 인것 같다. 외지에서 돈을 좀 벌어 왔다고 소문이 났다.
나도 궁금하여 그집 근처에서 그 누나를 보았는데 옷도 좋은 것 입고 화장도 살짝해서 더욱 외모가
예뻐 보였다.
사춘기의 나의 마음을 설래기에도 충분했다.
살길이 막막하니 부산으로 가서 양공주로 살다가 온 것이다.
지금. 그 누나도 옛날 일은 모두 잊고 손자손녀 재롱을 보며 고운 할머니로써 곱게 늙어 갔으면...
낙동강까지 전선이 내려오자 열차와 군함에서 실려 온 전차,대포.
무엇보다 전투기 연료를 가득 실은 트럭들이 우리집앞 도로를 쉴새 없이 지나 갔다.
도로는 자갈길이라 곳곳에 웅덩이가 패어져 지나는 차들은 매우 털컹 거렸다.
연료를 비행장에 내려 논 GMC트럭은 빈 드럼통을 다시 싣고 반납하고 새 기름을 싣고 왔다.
어느날 빈드럼통을 싣고 속도를 내어 달리던 GMC트럭에서 웅덩이를 통과하다 털컹하는
소리와 함께 빈드럼통이 떨어져 땅에 굴렀다.
운전사는 이것도 모르고 가버렸다.
용케도 이웃집 영감, 수열이 아버지가 드럼통을 가지게 되었다.
빠른 동작으로 헛간(재래식 화장실인데 불태운 재들 보관)에 숨겼다.
드럼통만 건져도 큰 횡재인데 그 안에는 몇갤런의 항공유(휘발유보다 강하여 라이터 기름으로 쓰임)
까지. 그때에는 군대에서 나온 <지포>라는 라이터가 좀 보급되어 있었다.
동네사람들은 그에게 기름을 사려고 야단이다.
한 순간에 복이 굴러온 것에 더 욕심이 생겼다.
전쟁에서 아들을 잃은 것에 보상을 받은 양. 입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올치! > 머릿속에 멋진 아이디어가 잠깐 번쩍였다.
깜깜한 밤을 이용해서 도로에 강제로 구덩이를 파기를 여러 곳.
계산도 철저히 해서 장소도 택했다.
이 지점에 바퀴가 빠지면 털컹하며 드럼통이 떨어지며 굴러가는
거리도 철저히 계산했다.
다음날 부터 혼자 회심의 미소를 지어며 도로 옆에서 지나가는 트럭을 감시했다.
이틀 후 계획한 일이 성사 되었다. 드럼통도 건지고 항공유도 팔고.. 세번째 까지 성공했다.
한편 미군 수송대에서는 기름 인수 인계자 사이에 타툼이 잦있다고 했다.
기름통을 보낸 숫자와 돌아 온 빈드럼통의 숫자가 자꾸 줄어 든다는 것이다.
수사관 까지 동원되어서 조사가 시작 되었다.
결론은 도로 사정이 나쁜데다 빈드럼통을 가로로 싣고 고속으로 다니다 여기 저기 흘린 것이다.
수열이 아버지의 이야기의 정보를 입수한 수사관은 헛간에 숨겨진 드럼동을 발견하고 즉시 압수했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수열이 아버지는 무릅을 꿇고 체포하려는 미군 MP에게 살려달라고 싹 싹 빌었다.
이 역시 좋은 구경꺼리라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다행이 수사관이 MP에게 풀어주라고 명령했다.
만약 수사관이 영감이 고의로 땅을 팠다는 것을 알았다면 체포되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알면서도 입을 다물었고 엄청 놀란 수열이 아버지는 바지를 적시고
똥가지쌌었다고 소문이 났다.
그 사건 이후로는 미군도 드럼통을 세로로 세워서 싣고 감시병 1명이 더 타고 다녔다.
아이들과 미군들
처음에는 미군이 무서웠다. 그 중에도 흑인이 더 무서웠다. 못생기도 했지만 아주 석탄 같이 새까맣다.
지금은 미국인이라도 아주 까만 사람은 보기도 드물다.
60년 세월 동안 미국에서도 흑인 혼혈인이 많이 생기고
또 그 자손들이 백인이나 제2 혼혈인과 결혼하여 자손이 태어나니 피부색 색상도 많은 변화가 되어
옅어 진 것이다.
그리고 혼혈의 결과로 파란 눈알의 백인도 요즈음 보기 힘들어 졌다.
그 때만 해도 군대에서 흑인은 차별대우를 받은 것 같다.
미 공군에서는 조종사는 거의 흑인이 없으며 전화선이나 운전병,정비병등 어려운 일만 한거 같다.
그래서 스트레스가 쌓여는지 우리들에게 유난히 화를 잘내고 소리도 질렀다.
미군들은 처음에는 과자과 껌도 자주 주었는데 차츰 약아지기 시작했다.
비행장 철조망 안에서 야구를 하면 수많은 아이들이 철조망에 달라 붙는다.
야구규칙도 모를 뿐더러 즐기기 보다 오직 잘못 친 공에만 관심이 있다.
철조망으로 넘어오면 주어서 잽싸게 도망간다.
아무리 미군이 달라고 해도 그 귀한 장난감(야구공)을 누가 되돌려 주겠는가?
그들도 머리를 썼다.
공이 밖으로 나가면 야구 방망이와 교환 하자고 손짓한다.
공과 1;1로 바꾸자는 것이다. 철조망 사이로 바꾸면 공을 준 아이는 금방 울음보가 터지기 5초전이 된다.
야구 방망이가 양쪽으로 쪼개 진 것을 멀쩡한 것인양 손으로 잡고서 속인 것이다.
이 후로는 절대 미군은 야구공을 되돌려 받지 못했다.
미군용 야전 전화기
전쟁의 공포 때문인지 미군들도 우리에게 욕을 하거나 골탕을 먹이기도 했다.
통신병들은 신작로 옆 전봇대도 오르내리며 정비를 하다가 우리가 모여 들면 귀찮은지 내 쫓는다.
쫓아내도 잠시 , 파라처럼 다시 모여 빙 둘러서 신기한 눈으로 그들 작업을 지켜 본다.
군용 전화기에서 나오는 모기소리만한 말소리가 신기하기도 했지만, 그냥 막연한 호기심이다.
한국인이 오지에 선교하러 가면 현지인들이 구름 같이 모이는 것과 같다.
<케라 어웨이!!>라고 말하면 가라는 뜻으로 알아 들었다.
정 화가 나면 <갓뎀! 싼어브 비치!son of a bitch개자식, 개새끼>라고 하며 쫓아내었다.
우리도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갓뎀! 싼나가 비치!>하고 맞받으며 쑥떡(욕하는 시늉/ 한손을
주먹을 쥐고 다른 한손에 밀어 냄/ 아마 sex행동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 )을 먹였다.
나중에 미군들도 우리에게 이 행동으로 맞받았다.
전쟁이 언제 끝난 줄 모르고 자기의 목숨도 담보하기 어려우니 최고로 신경이 곤두 선 상태였다.
어느날 통신병이 친철하게 우리를 불러 모았다.
천먹천으로 싸인 군용 전화기 + - 단자에 자기 두손가락을 대고 잔화기 옆 발전기 손잡아를 돌리면서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우리에게도 손을 대 보라고 꼬셨다.
아마 자기는 한 손가락을 살짝 단자애서 땐 것인데 우리는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호기심 많은 어느 아아가 손가락을 전화기에 내 밀었다.
이때다 싶은 미군은 손가락을 단자에 꾹 눌러 있어라고 하더니 순시간에 발전기 손잡이를 잡고 돌렸다.
앗! 소리와 함께 그 놈은 나가 떨어지고 얼굴은 눈물천지가 되어 도망을 쳤다.
수십볼트에 감전이 된것이다.
그 이후 우리는 통신병 근처도 가지 않았으며 멀리서 그들이 보이면 <갓뎀! 싼나가 비치!>하고
쑥떡욕을 먹였다.
전쟁터에서 어린 동생을 업은 어린이. 누나로 보이는 아이가 이미 할머니가 되고 업힌 아이는
한국을 발전시킨 산업용사가 되어 이 나라를 잘 살게 한 장본인일지도...지금은 전철공짜 승객으로
눈총을 받으며 살아 간다.
서로 점점 앙숙이 되어갔다.
길가에 짚프차라도 서 있어면 남의 밭에서 무를 뽑아다 배기통에 박아 넣어
시동이 걸리지 않게 하거나, 밧떼리를 방전 시키는 것이다.
옛날 차에는 스타트모타를 돌리는 페달이 있는데 모터를 돌린후 악세레터를 눌러게 되어 있다.
우리는 스타트모터 (당시에는 쎄루모타라고 했다) 페달을 밟기를 어러번 했다.
차가 웅렁하고 움직이는 듯한 재미가 있어 계속 눌러게 되고 밧떼리눈 완전방전이 되어 차는 움직이지
않는다
운전수는 우리의 장난인 걸 알고 또 <썬 오브 삐치!!>라고 외친다.
할수 없이 엔진앞에 꺽쇠 모양의 기구로 몇번 돌려서 엔진을 걸고서 다시 욕 더하고 가 버린다.
배기구에서 나오는 파란 연기에서 나는 휘발유 냄새가 좋아서 차가 출발하면 아이들은 차 꽁무니를
한참 따라 갔다. 무식한 아이 놈들..매연이 지금은 1급 독성물이 아닌가.
또 바퀴의 바람도 뽑았다.. 작은 못으로 공기 주입구를 눌러면 쒸익 하고 바람이 빠져 나오는 것을 즐겼다.
바람을 빼면 또하나의 구경꺼리가 생긴다.
<자키>라는 것을 자동차 아래에 넣고 그 무거운 차를 들어 올리는 것도 신기하고 스페어 바퀴로
갈아 넣는 행동도 큰 구경거리다.
지금 생각하면 우리를 도와 목숨을 바치는 그들을 왜 미워했는지?
아마 가슴 깊이 새겨진 잘사는 사람들에 대한 작은 질투심이 발동한 것이 겠지.
우리는 죽도 먹지 못하는데 그놈들은 껌 씹고 고기 많이 먹고 술마시고 양색시와 즐기고...
그러나 크리스마스가 닥아오면 분위기가 좋아진다.
24일 크리스마스 이브에는 몇대의 GMC트럭들이 양공주들을 싣고 뽀얀 흙먼지를 날리고 부대로 들어 간다,
기지 정문앞 양공주들이 모자라 멀리 해군기지 근방의 양공주들을 투입하는것이다,
양공주들은 크리스마스 파티 파터너가 된다.
실려가는 양공주들도 짙은 화장도 하고 화려한 옷을 입고 마음이 들떠 우리에게도 손을 흔들어 준다.
선물을 받고 즐거워 하는 아이들
크리스마스 당일,
고만 고만한 아이들은 교회로 간다. 미군 트럭이 대기하고 있다가 아이들을 부대로 대려가 맛있는 음식도
먹이고 선물도 주며 하루를 즐겁게 놀게 해 준다.
우리가 생전 보지 못한 장난감. 학용품. 태옆을 돌리면 움직이는 인형이나 강아지 들이다.
더 재미난 것은 뒤로 살짝 당겼다가 손을 놓자 말자 쏜살 같이 앞으로 나가는 꼬마 자동차..
모두가 즐거운 하루가 되었다.
불행이도 나는 그 행사에 한번도 참석하지 못했다. 아버지께서 너무 엄하셔서 얻어 먹는 것이나
받는것을 매우 싫어 하셨기 때문이다.
굶주리는 아이들,양지 바른 곳에서 추위를 이기고 있다.
맥아더 장군이라는 분이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하여 손바닥한 만한 남한땅이 넓어 지고 미군도 일부는
위쪽으로 올라갔는지 미군이 조금 줄어 들어 갔다.
미군이 줄어드니 가정경제도 더 어려워 지고 있었다.
전쟁이 계속 이기고 있다고 작은 L-19정찰비행기는 삐라를 매일 뿌렷다.
삐라 비행기가 뜨면 삐라가 어디쯤에 떨어질 것인가 점을 친다.
몇 뭉텅이가 뿌려지면 마치 함박눈이 쏟아지는듯 아름다운 광경이 펼쳐졌다.
웬 쟁 중 축하비행? 지금 생각하면 우습지만 우리는 죽기 살기로 삐라를 줒어 모았다.
많이 줏으면 전리품인양 뻐겼다. 손이나 산에 떨어져도 끝까지 가서 줏어온다.
아이들에게는 재미있는 오락도 없으니, 미군부대에서 나온 쓰래기 중 쇠로된 포장태이프(무기나 폭탄)로
권총도 만들고, 화약이나 탄피가 흔하니 남자아이들은 권총을 만들었다.
나무 권총에 총열도 파이프로 만든다. 고무줄로 단단히 고정하고 격발장치도 만든다. .
총열에 M1실탄에서 빼낸 화약을 넣고 작은 돌맹이도 넣어서 쏘면 개구리는 흔적없이 날리는
무기가 되었다.
화약을 많이 넣고 쏘다가 한쪽손 절반이 날아가는 사고도 이곳 저곳에 생겨 신문에도 났다.
아이스께기 장사. 옷차림새로 보아 휴전 후 몇년이 후 모습 같다.
점점 생활이 어려워 지고 었었다.
이제는 미군도 잘 배풀지도 않았다. 공짜 껌,쵸코랫도 얻지 못하고
기지앞 덕산이라는 동네에 양색시 집창촌이 생기니 미군을 안내하고 얻는 과자도 없어졌다.
우리 어린이들에게도 불경기(?)가 찾아 온 것이다.
어려운집 아이들은 너도 나도 <아이스케끼>장사에 매달렸다.
아이스케키 공장에 이름,학교 학년을 적어놓고 아이스케끼를 받아와서 그 여름 땡볕에서
무거운 통을 메고
이골목 저골목을 누비며 "아~이스 케끼!!'를 외친다.
키가 작은 애들은 통끝이 발목까지 내려오고 어께가 아프니 연신 다른 어께에 바꾸어 맨다.
잘팔리기는 역시 포주집 앞이다. 미제 초코렛도 시원한 아이스케기에 밀렸다.
팔면 공장과 비률에 따라 이익금을 나누는 데 어떤놈은 목마른 걸 참지 못해 몇개를 먹으면
이익은 커녕 도로 빚을 지게된다.
통안에 있던 어름이 녹아 아이스케기가 변형되어 버리면 이것도 판매한 애의 돈에서 얼마를 떼간다.
이익금이란 한 가족 한끼를 때울 수제비 끓일 정도의 밀가루를 살돈 밖에 안되었다.
어느날 친구XX가 오늘은 <아이스께끼> 팔아서 돈을 많이 벌었다고 자랑을 했다.
그리고 케키 2개도 먹었다고 했다.
모여던 친구들도 부러워 하면서 장사를 잘한 이유를 물었으나 얼굴만 붉어 질뿐 말을 하지 않았다.
모든 친구들이모두 가고 나서 나도 흥미가 있어 캐물었더니.
약간 쑥스러워 하면서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을 하고서 살짝 입을 나의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소문은 안내기로 약속하고서..
오늘 해가 져서 어두울 무렵 몇개 남은 아이스케끼와 통을 반납하려 신작로 갓길 걷고 있었단다.
마침 뒤에서 따라 오던 미군이 무엇이라고 꼬부랑 말을 하고 돈을 내 보이며 주겠다고 하면서
도로옆 언덕 아래로 잡아 끌었단다.
가끔 미군차만 헤드라이트를 켜고 먼지를 날리고 지나 갈 뿐 주위는 어둡고 전부가 논이라 무척
무서웠다고 했다.
잠간 숨을 고르더니 더 작은 목소리로 <그냥 만져 주었어!.>
그말 뿐이였다. 무엇을 만져 주었는지는 구체적으로 말해 주지는 않았다.
다만 그는 땅바닥에 침을 자주 뱉기도하고 가끔 목구멍 깊이 있는 가래까지 끌어 올리는 행동을 하니
평소와는 확연히 달랐다.
나도 어린 나이라 잘 이해가 잘 않갔으나 미군들이 양색시 집을 찾는 이유는 대강 알고 있어기 때문에
더 이상 묻지는 못했다.
그 일은 그와 내가 입을 열지 않았으니 영원한 비밀로 숨겨졌다.
요즈음으로 말하면 <유사성행위>를 했다는 이야기다.
돈을 지불하고 친구도 거부의사를 밝히지 않았는데 미성년자 어쩌꾸 저쩌구... 그 당시의 잣대로 보면
별일 아니게 취급 됬다.
세계 최고의 곡예단이 한국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듯 무너진 다리를 개미 같이 건넌다.
생각 나는 대로 두서없이 적어 본 글이다.
6.25는 대한민국이 공산주의자에게 철저히 유린 당한 역사상 최대의 비극적인 사건이다.
일부에서는 전쟁의 책임은 미국에 있다고 주장 한다.
우선 38선을 그은 책임은 미국에 있는 건 확실하다.
다만 38선 만을 그었다고 전쟁이 났겠는가?
사실, 우리가 영원히 식민지로 살뻔 했는데 일본의 패전으로 우리는 자력의 힘이 아닌 미국의 힘으로 해방을
맞았다.
그러면 미국의 입장에서 보면 한반도는 일종의 전리품이라고도 오해하는 이가 있었을 것이고,
쏘련은 사실상 일본과는 전쟁도 하지도 않고 한반도 문제와는 거리가 먼데도 대국이라는 명목으로
38이북을 자기들이 통치하겠다고 미국을 압박한 것이다.
쏘련은 미국과 함께 독일이 점령 대상이지 한반도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쏘련은 김일성이를 내세워 남침을 했으니 김일성이 첫째 전쟁책임자요
둘째로 전투무기를 제공 한 쏘련에게 막강한 책임이 있다.
최종적으로 중국은 중공군을 파병시켜 조국통일 일보 직전에 통일을 무산시켜서
우리의 철천지 원수가 된다.
국군과 유엔군이 압록강 두만강까지 점령한 상태고 리승만대통령과 맥아더는 중공까지 폭격 해야 된다고
주장했었다.
6.25전쟁은 1950년 6월 25일에 시작되어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을 끝으로 막을 내렸습니다
지금도 6.25가 대한민국이 미국과 결탁해서 일으킨 북침 전쟁이라고 우기고
우리나라의 해방을 도운 미국을 원망하며 원수 대하듯 하는 요즈음 세태를 보면 그 시대를 살아 본
나는 많은 안타까움을 느낀다.
또 북한을 정권을 찬양하는 일부 사람들은 사실에 눈을 떠고 장님의 생활에서 벗어 나야 한다.
다시 말하건데 수많은 국민과 유엔군을 죽인 책임은 김일성집단. 당시 쏘련, 중국(중공)에 있고
북한은 휴전 중 상태이니 잠깐 제외 하더라도 지금의 러시아(구쏘련)와 중국은 한국에게 정쟁의 피해를
금전적이라도 보상해 주어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 한마디..
미군을 너무 미화한 나를 철저한 친미주의자라고 욕해도 좋다.
63년 전의 미군과 외국인은 약아 빠지고 범죄에도 연루되고 폭행사건을 일으키는 요즈음 시대의
외국인(미군 포함)과는 인품이 달랐다.
때묻지 않은 순수한 인도주의자들이라 진정으로 우리나라의 실태를 가여워하고 사랑하여 목숨을 받쳤다.
그들도 고향에 부모가 있고 사랑스러운 어내와 자식이 있었을 것이다.
가난과 피팍(일제 강점기,북한)에서 견디고 6.25전쟁에서 전,후방에서 싸우고 월남전에서
목숨을 바치고 얻은 것은목숨과 흥정한 딸러다.
그 딸러는 참전자 개인은 물론 사회의 기반 경제의 기초가 되었다.
서독에서 간호사로 ,혹은 광부로 고생하고, 열사의 사막에서 죽을 힘을 다해 일하여
피나는 딸러를 벌어 6.25후 파탄난 우리나라를 부강하게 만든
지금 할아버지 할머니 세대들을 <보수주의자.수구 꼴동, 꼰대.>라고 비하 하며
<지하철 공짜 타는것>도 아깝다고 왜치는 애놈들을 보면
<에라이~~ 쌍. 너놈들도 늙어 보아라~~. 미국놈 짬빵 먹고 산 너의 부모들 . 자존심도 없없는 줄 아나?>
그리고 너들은 국가를 위해 무엇을 했느냐? 고 묻고 싶다.
20개월 군복무도 길다고? 온갖 비리로 병역을 피하고.,,
나는 휴전이된지 10년도 되지 않아 공군에 자원 입대하여 36개월 고생하고 나왔다.
밥을 적게 주어서 항상 배를 골았다! 병장 봉급 5백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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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올라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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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글은 몇년전(2005년)에 쓴 글입니다. 우윳가루 배급에 관한 이야기
.
<나의 추억담>
50년 전.빗속의 하얀 江은 지금도 내 가슴속에서 뱀처럼 꾸불거리며 흘러가고 있다.
진해 병산 초등학교 졸업사진. 전재이 끝나고서 몇년 후
50년전...
그날도 오늘 처럼 여름 소나기가 줄기차게 내리고 있었고
작은 운동장엔 한얀 강물(白江)이 크고 긴 뱀처럼 꾸불거리며 흘러고 가고 있었다.
......
6.25전쟁이 터지고 5년.
전쟁의 상처로 모두 가난에 찌들려 있었다.
우리 4학년 1반 아이들은 대부분이 누더기같은 옷을 입었고 누구나 얼굴에는 곰팡이가
군데 군데 피어 있었다. 영양 부족으로 생겨난 마른 버짐이다.
점심시간이 되면 밥을 싸올 형편이 안되서 각자 집으로 밥을 먹어러 간다.
어떤 애는 고구마 두개를 점심으로 가져 왔다가 놀림을 당하고 그 자리에서
"고구마"란 별명도 얻었다. 그래서 인지 점심을 안가지고 다닌다, 아니, 싸올 수가 없는 것이었다.
밥먹으려 집으로 간다해도 꽁보리밥이라도 먹고오면 다행이다.
일 나가신 엄마가 커다란 무쇠솥에 넣어둔 고구마 두,세개..그게 곧 점심이다.
그것도 기막히게 맛이 있었다.
고구마건 감자건 무지하게 맛있게 먹고들 다시 학교로 모인다.
형편이 더 어려운 애들도 집에가도 먹을 것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자존심 때문에 일단 집으로는 간다.
한바가지의 샘물로 배를 채우고서 밥을 굶지 않은 척하지만 애들은 금방 눈치를 채고 만다.
오후에 남자 애들은 장난치기가 뜸해지고, 여자들은 쉬는 시간에 책상에 엎드려 있기 때문
이다.
우리학교는 진해시가지에서 십리정도 떨어진 작은 국민학교(초등)이였다.
각 학년마다 남,녀 각 30명씩. 학년이 올라가도 담임선생님이 바뀌는 것 이외는 달라 지는 건 없었다.
어떤 해는 그 선생님이 같이 올라가기에 더욱 그렇다.
모두가 전쟁으로 가난하게 살아가지만 우리반 학생 중 "O석"이란 친구는 더 가난한 것 같았다..
아버지가 배타고 고기잡으러 갔다가 돌아가시고 엄마 혼자서 어렵게 형제를 키우고 있었지만.
그런 환경에서도 0석이는 공부는 잘해서 3,4등을 한 걸로 기억된다.
0석이는 뒷통수가 남보다 유난히 더 튀어나와 까만 빡빡머리가 독사의 삼각형 머리와 닮았다고
해서 별명을 "독새대가리(독사머리)"라고 짓고 머리에 꿀밤 까지 주면서 놀렸다.
어느 추운 겨울날 . 독새대가리 O석이가 유난히 앞섭을 가린채 꼼짝하지 않고
제자리에 앉아 있기만 하고 어찌 불안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4학년 개구장이들이 그런 O석이 행동를 보고 가만히 있을리가 있는가?
몇명이 힘을 합쳐 억지로 그의 윗옷의 단추를 끌러 가슴을 헤쳤다.
앗!!! 놀람.. 우리는 못볼 것을 본 것이다.
0석이는 옷고름이 달린 하얀 무명천 여자저고리를 속옷 대신 입고 있었던 것이다.
그 날 0석이 엄마는 내복이 없는 아들에게 자기의 저고리를 내복으로 입혀 보낸것이다.
철없는 우리 남자애들은 여자 옷을 입었다고 놀려대고 여학생들도 여기 저기서 수군거렸다.
0석의 엄마의 가슴 아픈 사연을 모르고 놀리고 웃고 한 우리는 얼마나 나쁜 놈들이었나.
지금도 그때의 행동이 마음에 걸린다.
독새대가리는 다음 수업시간이 되기전 자기 자리에서 사라지고 한 2주일 후에 쭈삣거리며
다시 학교에 나왔다.
영영 퇴학하고 말거라고 생각했는데 참 다행이었다.
진해는 남쪽이지만 영상 4,5도 라도 바닷바람이 거세기에 옷깃을 파고 드는 추위는 이루 말
할 수 없을 정도로 춥다.
우리들은 군용 내복이라도 줄여서 입고 다녔다.
소매 길이가 길다보니 항상 겉밖으로 빠져 나와 쌔까맣게 때꾹에 절어 있었지만 어찌했건 따뜻하기만 하면 최고인걸. .
그 동안 0석이는 옳게 생긴 내복도 입어 보지 못하고 추위를 참으며 학교를 다닌 것이다.
날이 갈 수록 학교앞의 해병대 훈련소 군가 소리는 크게 들리고, 모든 사람들은 전쟁후유증
으로 더욱 가난해 져만 갔다.
그 와중에서도 반가운 것은 학교에서 한달에 한번씩 우유가루를 두컵씩 배급해 주는 것이다.
어른들은 미국에서는 어린동물 사료로 쓰는 것이라고 했지만 우리들은 맛있기만 했다.
G.M.C. 군용 트럭이 학교 운동장에 우리들 키만큼 한 종이드럼통을 몇개 내려 놓고가면
그 다음 날이 우유가루를 먹는 잔치날이다.
트럼통 겉에는 악수하는 두손이 그려져 있고 손뒤에는 마국을 상징하는 푸른 바탕에
흰별, 아래로 내리 그은 흰줄과 붉은 줄.
그 통을 열면 비닐 푸대안에는 밀가루 보다 더 곱고 노르스럼한 우유가루가 우리를 반기고 있다.
모두들 큰 을 가져 가지만 실제로는 1/4도 되지 않는 양을 준다.
배급날, 번호 순서 대로 집에서 가져온 깡통이나 그릇을 가지고 줄을 서면 선생님은
정확히 두컵(맥주잔 크기)씩 부어 주신다.
미쳐 그릇이 없는 애들은 공책을 찟어 부라보 콘 그릇 같이 세모꼴로 만들어 받기도 한다.
이 종이컵이 떨어져서 땅바닥에라도 쏟게되면 곧 눈물로 이어진다. 아까워라... 얼른 엎드러
강아지처름 바닥을 햛기도 한다.
자기 차례를 못참아 먼저 탄 애들에게 나중에 물어 주기로 하고 한입 빌려먹는 애, 한입에
너무 많이 넣다 목이 메어 기침하는 통에 친구 얼굴에 하얀 분칠도 해준다.
모두 모두가 손과 입이 하얗다. 짓꿎은 놈들은 여학생 얼굴에다 우유가루 분을 발라 주고 도
망치면서 낄낄거리기도 한다.
그 날은 수도물도 불티가 나고 아무리 조심해서 먹어도 옷은 우유배급날이란 흔적을 만들어
준다.
모두 모두 즐거운 날이 된다 . 정말 맛있는 음식을 먹는 잔치날이 따로 있으랴..
항상 우리들은 달리는 차에 탄 미국 양키들만 보면 주먹과 팔뚝으로
쑥떡(지금은 보지 못하지만 그때는 아주 흔한 욕: 한손을 주먹을 쥐고 다른 손으로 감싸며
밀어 낸다)을 먹였는데 그날만은 고마움의 표시로 그것도 아낀다.
그런데, 결석이 잦은 O석이가 하필이면 우유 배급날인 오늘도 결석을 했다.
참 재수 없는 놈이지...
우유가루 배급을 탄 다음날은 영양가 있는 우유를 먹었으니 혈색이 좋아야 하는데
대부분이 얼굴이 더 나빠 보이고, 뻥하니 구멍 하나만 뚫린 변소도 많은 손님을
맞이 하기에 바쁘다.
굶주린 뱃속에 기름기 있는 우유가 들어가니 밥통이 놀라고 창자는 그냥 통과. 곧바로 밖으
로 내 보낸 것이다.
어떤 놈들은 집에 가져가면 형에게 빼긴다면서 다 먹을 때까지 학교에 남기도 했으니 말이다..
미련하고 한심한 놈들..
배급을 준 며칠 후 정말 오랫만에 독새대가리도 학교에 나왔다.
그리고 지난 그 일도 잊고 친구들과 잘 어울려 장난도 쳤다.
그날은 교실 창밖로는 장대같은 소낙비가 오늘 같이 내리고 있었다.
마지막 수업시간을 마치고 선생님은 독새대가리 O석이를 따로 불러셨다 .
그리고 교탁 밑에서 불룩한 누런 세멘트 종이 봉지를 독새대가리에게 주셨다.
우리들은 금방 그것이 O석이 몫의 우유가루란 걸 알았고 우리에게 준 것보다 양이 많다는 것
도 눈치챘다.
독새대가리는 우유봉지를 받아 제자리로 가서 앉는 시간과 복도가 없는 교실에서
바로 통하는 운동장으로 선생님은 우산을 펼치고 나가시는 시간이 거의 같았다.
곧 바로 교실안이 술렁거렸고 0석이가 앉아 있는 근처의 책걸상이 흔들리더니 0석이 주위
로 수많은 애들이 모였다.
독새대가리를 겹겹으로 둘러 싸며 수많은 손들이 0석이의 우유봉지를 향했다.
요즈음 유명 연예인에게 싸인 받는 거와 같은 형상이었다.
때가 끼어 쌔까맣고 꼬질 꼬질한 조그만한 손, 손, 손, 손...
좀 나누어달라고 하는 것이다.
0석이는 모두에게 나누어 주기는 턱없이 모자라고, 누구에게는 주고 누구에게는 안준다면
그것도 어렵고, 집으로 가져가기는 더더욱 틀렸다.
그렇다고 한 숟깔이라도 제입에 털어 넣지도 못하게 되었다.
나라면 그 상항에서 어떻게 행동 했을까?
친구들의 손을 밀치고 책상 설합에 넣어면 그만이고, 친구들에게 약간 욕을 먹더라도
집에 있는 동생들과 나누어 먹어도 될 것을...
그러나 <독새대가리 O석>이는 아무 말없이 멍하니 앉아 있기만 하더니 두눈에 눈물이
천천히 고이기 시작했다.
입술도 깨물었다.
눈물이 책상 위로 떨어지기도 전에 O석이가 벌떡 일어 서더니 창가로 가서
우유가루 봉지를 비오는 운동장을 향해 힘껏 던졌다.
.............아무 소리도 없는 침묵이 흘렀다..................
왜 O석이는 이런 행동까지 했을까?
지금도 영원한 의문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장대 같은 빗줄기에 우유가루 봉지가 터지고 하얀 물방울들이 사방으로 튀면서
큰 원을 그리는가 싶더니 잠시 후....
거대한 하얀 江을 만들며 긴 뱀 같이 꿈틀거리며 낮은 곳으로 더 낮은 곳으로, 그리고
멀리, 멀리 흘러가고 있었다.
O석이는 자기 자리에 가서 얼굴을 묻고 훌쩍이고 ...그리고 우리들은 서로 얼굴만 쳐다보고
아무 말이 없었다.
쥐죽은 듯 조용하니 가건물 교실 루삥 지붕에서 나는 빗소리는 더욱 크게 들렸다.
우리들은 각자 제자리에 가서 묵묵히 책보따리를 싸서 집에 갈 준비를 했다.
아마 그날 제일 마지막에 교실을 나간 애가 O석이 일 것이다.
얼마나 아까웠을까?
그리고 친구들에 대한 서운함.
이 사건으로 우리들 어린 가슴에도 무었인가 치밀어 올랐다.
후회...아이들은 모두 가슴에 돌덩이 하나씩을 안은 것이다..
"독새대가리 O석"이는 다음날,
또 그 다음날,
또 그 다다음날도....
그리고 .......
50년이 지난 오늘날 까지도 그는 우리들 앞에 나타 나지 않는다.
그를 꼭 한번 만나고 싶다.
해병대 입대해서 월남전에서 죽었다. 외국이민 갔다.
여러 풍문이 있지만 "독새 대가리" 의 소식은 영영 우리들은 들어 보지 못했다..
지금도 내머리 속에는 그 때의 하얀강(白江)은 흐르고. 가슴 속에는 작은 돌덩이가 아직도 자리 잡고 있다....
2005년 비오는 여름 오후...............
처음으로 글을 쓰서 올려봅니다.
내가 언제고 한번은 써 보리라는 어릴 때 "추억의 한편"입니다.
정말 글쓰기는 그림 그리기 보다 훨씬 어렵군요.. 유치한 글이라고 탓하지 말아 주세요^^
독수리 타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