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P-윤용균
(A) 윤용균
1. 내 곁에 있어주오
2. 나만이 걸었네
3. 그 사람은
4. 나의 연인
5. 봄은 오더니
(B) 신중현 & The Men
- 거짓말이야
최초의 시각장애인 가수 이용복의 선배 윤용균
시각장애인 가수 윤용균의 이름을 기억할 대중은 거의 없을 것이다. 시각장애인 가수라 하면 이용복 정도는 기억할 것이다. 사실 윤용균은 이용복보다 앞서 한국 최초의 시각장애인 가수로 기록되었을 수도 있었다.
인천 출신인 윤용균은 3살 때 실명한 후천적 시각장애인이다. 부모님이 일보러 나간 뒤 혼자 집안에 남은 윤용균은 찬장에 있는 통조림을 꺼내어 먹었다가 탈이 났다. 3개월 동안 계속되는 설사로 인해 여러 약을 복용했지만 영양섭취가 힘들어 결국 영양실조에 걸려 실명하고 말았다.
서울맹학교 시절 합창단과 사중창단 활동을 하면서 기타, 피아노, 가야금 등 다양한 악기를 습득한 그는 10대 청소년 시절부터 음악에 재능과 열의를 보였다. 이용복의 서울맹학교 2년 선배인 그는 ‘켁터스(Cactus)’ 즉 선인장이라는 의미의 스쿨 밴드를 결성해 주도했다.
맹학교 재학당시 미국으로 봉사 공연활동을 떠났던 그는 현지에서 7인치 싱글 바이닐 한 장을 발표했었다. 한국 시각장애인 사중창단(The Korean Blind Quartet)이란 그룹명으로 제작된 그의 데뷔음반은 정식 유통이 되지 않은 비공식 발매인지라 최근 음반의 존재가 발견되기 전까지 국내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희귀음반이다.
연기된 공식 데뷔음반 발표 기회
서울맹학교 졸업을 앞둔 윤용균은 정식 가수로 데뷔하고 싶은 꿈을 품었다. 1969년 4월 주목받는 작곡가로 급부상한 신중현의 서울 사무실로 찾아갔다. 그의 노래를 들은 신중현은 음악성을 발견해 창법 지도를 해주었지만 데뷔의 길은 쉽게 열리질 않았다.
1970년 2월 서울맹학교를 졸업한 윤용균은 서울 중구 북창동에 위치한 지 다방을 비롯한 서울 시내의 다방과 살롱 무대에서 가수가 아닌 무명 피아니스트로 음악 활동을 시작했다. 1971년 2월 천신만고 끝에 솔로가수로 데뷔음반을 취입할 기회가 찾아왔다.
원래 맹학교 중창단에서 베이스 파트를 맡았던 저음의 윤용균은 신중현의 지도와 맹렬한 연습과정을 통해 고음 창법을 소화해냈다. 신중현은 당시 언론 인터뷰에서 “성량이 풍부하고 보이스 컬러도 좋아 열심히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겠다.”고 그를 평가했다.
시각장애인 가수라는 이유로 취입일정은 설명도 없이 미뤄졌다.
결국 3년이 지난 1972년 2월이 되어서야 윤용균은 신중현의 곡을 받아 정식 녹음에 들어갔다. 세션은 기타 신중현, 베이스 이태현, 드럼 문영배, 키보드 김기표, 오보에, 테너 색소폰 손학래로 구성된 신중현밴드 더 맨이 맡았다.
윤용균은 신중현이 창작한 신곡 <내 곁에 있어주오>, <나의 연인>, <봄은 오더니> 3곡을 녹음했다. 음반 발표에 앞서 1972년 5월 KBS 라디오「오후의 로터리」에 출연한 그는 청취자들의 반응을 보기 위해 취입한 노래들을 미리 불러보았다.
호소력 있는 목소리가 방송을 타면서 좋은 반응을 접한 그는 주간경향과 선데이서울에 ‘제2의 맹인 가수’로 소개되며 주목받았다. 하지만 시각장애인 가수의 음반 흥행에 자신감이 없었던 제작사가 발매를 연기하면서 그의 공식 데뷔는 또다시 발목이 잡혔다.
신중현 사단의 전설적인 시각 장애인 가수 윤용균의 데뷔 앨범
속절없이 1년이 흐른 1973년에 윤용균은 이미 녹음했던 3곡에다 신곡 <그 사람은>,<나만이 걸었네>를 추가 녹음했다. 독집을 내기엔 곡이 모자라자 신중현과 더 맨은 부족한 곡수를 채우기 위해 B면 전체를 당시로서는 대중가요 사상 가장 긴 곡으로 채웠다.
우여곡절 끝에 윤용균과 신중현과 더 맨의 스플릿 앨범이 세상에 나왔다. 앨범 커버의 앞면은 윤용균의 사진으로, 뒷면은 신중현의 사진으로 꾸며졌다. 앨범 수록곡은 총 6곡에 불과하다. 앞면에는 윤용균이 노래한 신중현의 창작곡 5곡이, 뒷면은 신중현과 더 맨의 <거짓말이야>를 수록했다.
윤용균은 앨범 발표 이후 시각장애인 가수란 이유로 몇몇 언론에 소개되는 관심을 받으며 <내 곁에 있어주오>가 라디오를 중심으로 약간의 히트 조짐을 보였다. 하지만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편견 탓에 실력만큼 조명을 받지 못해 그의 활동을 지속되질 못했다.
23분에 가까운 앨범의 백미 <거짓말이야>
이 앨범의 화두는 뒷면을 가득 채운 신중현과 더 맨이 노래하고 연주한 <거짓말이야>이다. 김추자가 이미 히트시켰던 이 앨범의 수록 버전은 신중현 사이키델릭의 정수가 담긴 22분 53초의 환상적인 음악 여정을 듣는 이에게 제공한다.
신중현의 보컬로 시작하는 이 곡은 빠른 속도로 치고 나가는 현란한 키보드와 신중현의 기타 애드리드가 끝없이 이어진다. 곡을 시작한 지 7분쯤 되면 이국적인 분위기로 접어들며, 10분이 임박할 무렵 느리고 묵직한 베이스와 리드 기타의 향연이 시작된다.
이후 지루할 만큼 반복적인 리듬이 계속되다 15분에 접어들면, 곡은 환각적인 분위기로 접어든다. 무려 18분 30초가 넘어서야 이 노래가 <거짓말이야>임을 알게 하는 본래의 멜로디로 되돌아간다. 이후 다시 풀어지듯 몰입하는 환각적인 엔딩으로 곡이 끝난다.
당대 가요계의 관례를 깬 선구적 실험
2003년 재발매된 LP도 희귀해진 이 앨범은 18년 만에 두 번째 재발매가 성사되었다. 2000년대 초반 이 LP의 초반은 한 인터넷 경매 사이트에서 200만 원이 넘는 고가에 낙찰되어 수집가들 사이에 뜨거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1973년에 발표된 이 음반은 당시로서는 대중음악계의 관례를 깬 실험을 담은 선구적인 앨범이었다. 당시는 보통 히트곡의 요건으로 ‘3분’을 넘기지 말아야 미덕인 시절이었다. 3분을 넘기면 방송에 소개할 수 없는 것이 일종의 관례였기 때문이다. 관례를 깨는 것은 일종의 혁명이고 실험이다.
취입할 곡이 부족한 현실이 연출한 비정상적인 결과이지만 당시로는 대중가요 사상 최장 곡을 수록했다는 사실은 이 앨범에 특별한 가치를 부여한다. 또한 신중현사단의 전설적인 시각장애인 가수 윤용균의 유일 음반이라는 사실도 오랫동안 수집가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출중한 음악적 재능을 지녔던 윤용균은 사회적 편견 탓에 가수로서 대성하지 못했고, 평생 안마사로 살다 쓸쓸하게 세상을 떠난 비운의 가수로 남았다. - 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 한국대중가요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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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컬러 음반은 제작 공정상 색상의 차이나, 얼룩이 있을 수 있습니다.
2. 재생에 지장이 없는 미세한 스크레치가 있을 수 있읍니다.
3. 음반의 튀는 현상은 음반 불량이 아닌 톤암과 침압의 무게 중심이 맞지 않아 생기는 현상입니다.
4. 조절 기능이 있는 턴테이블을 사용하거나 무게 중심을 바늘 쪽으로 조정함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