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문학사에
" 페미니즘 " 문학의 길을 처음 열었고
누구보다도 그 뜻을 이루기 위해, 모범적으로 실천했던 시인
어떤 상황에서도 쉽게 절망하지 않는 강한 의지와
생명에 대한 끝없는 사랑을 노래했던 여자.
자신의 작품 세계를 위해
작가가 그리도 좋아했고 즐겨찾던 지리산 등반 급류에
43세의 아까운 나이로
생을 마감했던 한 시인의 詩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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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 편지 /고정희 *
무르익기를 기다리는 가을이
흑룡강 기슭까지 굽이치는 날
무르익을 수 없는 내 사랑 허망하여
그대에게 가는 길 끊어버렸습니다.
그러나 마음 속에 길이 있어
마음의 길은 끊지 못했습니다.
황홀하게 초지일관 무르익은 가을이
수미산 산자락에 기립해 있는 날
황홀할 수 없는 내 사랑 노여워
그대 향한 열린 문 닫아 버렸습니다.
그러나 마음 속에 문이 있어
마음의 문은 닫지 못했습니다.
작별하는 가을의 뒷모습이
수묵색 눈물비에 젖어 있는 날
작별할 수 없는 내 사랑 서러워
그대에게 뻗은 가지 잘라 버렸습니다.
그러나 마음 속에 무성한 가지 있어
마음의 가지는 자르지 못했습니다.
길을 끊고 문을 닫아도
문을 닫고 가지를 잘라도
저녁 강물로 당도하는 그대여
그리움에 재갈을 물리고
움트는 생각에 바윗돌 눌러도
풀밭 한 벌판으로 흔들리는 그대여
그 위에 해와 달 멈출 수 없으매
나는 다시 길 하나 내야하나 봅니다
나는 다시 문 하나 열어야하나 봅니다.
◆ 상한 영혼을 위하여 /고정희 ◆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 둥 잘리어도 새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뿌리 없이 흔들리는 부평초 잎이라도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이 세상 어디서나 개울은 흐르고
이 세상 어디서나 등불은 켜지듯
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가랴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
고통과 설움의 땅 훨훨 지나서
뿌리 깊은 벌판에 서자
두 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듯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
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니라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 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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