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의 느낌에 대하여.
각종 음향 재생 기기로 듣고 느끼는 소리의 음질에 대하여 얘기해 보고자 한다.
음질은 보통 무시되기 일쑤이지만 그래도 감상이라는 거대한 명제에 대입하면 그리 가볍게 넘길 문제가 아니다.
예로서 아무리 싼 라면을 먹는다고 해서 그냥 싼 맛에 생각 없이 먹을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싼 라면도 맛 없으면 안 먹는다.
세상에 맛없는 라면을 돈 내고 먹을 이가 몇이나 있을까?
그렇다. 아무리 싸도 맛이 없으면 꽝인 것이다.
우리가 듣는 음악도 마찬가지 아닐까 싶다.
아무리 공짜로 듣는 음악도 듣기 편하고 음질이 좋아야 자꾸 듣는 거지, 음질이 거지같으면 누가 듣겠는가 말이다.
무료 스트리밍 서비스가 넘쳐 나는 지금은 손가락질 몇 번이면 전 세계 최신 음악을 아무 거리낌 없이 맘껏 감상할 수 있다.
이 얼마나 좋은 환경이고 좋은 세상이냔 말이다.
과거 음악 한 곡 들을랴면 판 사랴, 테프 사랴, 좋은 오디오 찾아 삼만 리...
그러나 지금은 손바닥 보다 작은 손 안의 오디오에서 얼마나 멋진 소리가 나는지 다들 알게다.
그런데 이렇게 매일 접하는 좋은 소리에도 질을 따지며 듣겠다면 얘기가 많이 달라진다.
그냥 울려 나오는 소리 말고 나만의 소리를 듣고 잪다면 또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할게다.
쉬운 얘기로 음질 보정하는 일반적인 장치로 이큐라는 게 있고 일반 앰프에도 톤 조절 장치가 있다.
그런데 이 장치를 갖고 무수한 억측도 많고 논란도 많다.
라면 얘기로 다시 비유하자면, 처음 나왔던 ‘삼양라면’은 그전까지 있었던 국수나 기타 면류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먹거리였다.
비교불가의 맛에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곧이어 다른 차원의 라면 세계가 열리며 수많은 다른 맛을 선보였다.
하나같이 맛이 새롭고 먹을수록 자꾸 입에 당긴다.
음악도 이럴 수 있다.
들을수록 자꾸 귀가 당기고 들을수록 더 듣고픈 거 말이다.
일반적인 감상 방법으로 수년을 즐기다 보면 우연이든 필연이든 한 번 쯤은 다른 기기나 남의 장소에 가서 다른 음악을 듣는다거나 같은 음악을 다른 기기로 재생된 것을 감상하게 된다.
그냥 감상만 하면 무슨 문제가 있을까만, 다소 몇몇의 유저에게는 그렇지만도 않다.
그 한 번의 청음이 문제의 발단이 되기도 하니 말이다.
그 다른 한 번의 청음이 만약 자신의 귀에 엥겼다가는 실로 감당 못할 문제가 발생하고야 만다.
첫 번째 문제의 발단은 일단 자신의 오디오에 대한 사랑 내지는 환상이 일순간에 삭으러 지고 만다.
여태 잘 듣던 소리가 갑자기 왠 후져빠진 개나발통 진동으로 느껴지니 말이다.
당장 때려치우고 다른 기기에 목을 맨다.
이렇게 다른 소리에 귀가 열리면 지금까지의 자신의 소리에 대한 자부심이 무너지며 무주공산의 심정이 된다.
그러니 다시 기기 찾아 삼만리를 헤매는 꼴이 되고 만다.
그걸 부정하고 싶은 마음이 한가득인 걸 잘 안다.
이게 얼마짜린데...
이걸 구하느라 그 얼마나 수고했던가 싶기도 하고...
그간의 돈이며 시간이 아까워서 라도 쉽게 포기하기 어렵다는 걸 잘 안다.
그래도 아닌 건 아니지 않던가?
아닌 걸 끝까지 부정한다고 달라질 게 있냔 말이다.
역시 아닌 건 아니다가 맞다.
소리 재생엔 두 가지 재생 방법이 있다.
하나는 음원 그 자체만 확장해 듣는 방법이 있다.
여기서 잠시 음원 자체를 살펴보자.
일반적인 가수의 목소리나 악기 연주자의 독집 앨범을 보면, 집중되는 음원의 중심은 중음이다.
대체로 중음 대역이 사람 목소리를 기준한 주파수이고, 대부분의 악기 소리가 이 대역에 속한다.
특별히 높은 대역의 금속성 소리나 낮은 음역대의 베이스 소리를 빼고 말이다.
일반적인 녹음 방식에서도 중음 대역을 중심으로 집중해서 음원을 제작한다.
그래서 일반 오디오 기기에서는 이 대역을 잘 재생하도록 제작한다.
모든 대중적인 음향기기가 다 그렇게 제작된다.
특히 진공관 앰프는 이 대역을 충실히 재생한다고 알려져 있어 많은 이들이 자작을 더불어 하며 즐기고 있다.
이는 중음 대역을 충실히 재생하면 된다는 의미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그 점이 끝이다.
그런데 이 같은 기기로 즐기다 보면 필연코 발생하는 문제가 다른 기기나 다른 종류의 소리 청취로 인한 느낌의 발생이다.
이 문제를 그냥 아무 일없는 상관없는 문제로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게 문제다.
여기서 문제의 발단은 재생 기기와의 상성이 문제의 발단이다.
앰프와 스피커의 상성 문제는 상상 그 이상이다.
각기 다른 경로와 이유로 생산된 이 물건들은 각종 변수로 말미암아 셀 수 없는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이렇게 무작위로 생산된 소리가 자신의 기기와 다른 소릴 듣게 되는 원인이 되는 것이다.
그것도 뭐 그렇게 문제이랴 여기면 그대로 넘길 수도 있다.
그런데 음질의 방향이 조금 선을 넘긴다면 이게 또 겉잡을 수 없게 된다는 게 문제다.
사실 소리 생성(기록이나 저장) 원리나 재생 원리를 들여다보면 간단하기 그지없다.
스피커 원리도 간단한 게 사실이다.
그런데 콘지의 재질이나 울림통 같은 것에 빗대어 음질을 논하기 시작하니 끝도 없이 이어지는 것이다.
기기가 사용되어지는 주변 환경이나 보관 상태에 따른 노후되는 과정도 이에 한몫 한다.
그래서 음질 논쟁은 한편 부질없는 짓이기도 하다.
기기의 음원 재생 부위를 자세히 들여다 본 사람이라면 이 말이 뜻하는 게 뭔지 알거라 생각한다.
일정 수준의 재생 음질은 사실 우열을 구분하기 쉽지 않다.
이는 몇몇 블라인드 테스트를 거친 증명된 바이기도 하거니와 측정값으로도 알 수 있다.
미세한 차이야 있을 수 있겠으나 기계적인 수치 차이를 음질의 우열구분 수단으로 삼는다는 것은 우스운 얘기다.
그런데 한 가지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다.
현장에서 들었던 감동을 그대로 자신만의 공간으로 가져오고픈 열망이야 이해한다.
그것을 재현하고자 갖은 수단을 다하는 과정이 눈물겨울 정도지만 도를 넘는 것들이 너무나 많아 안타깝기도 한 게 사실이다.
안타까운 것이야 나만 모른척 하면 그만이나 이게 퍼지고 퍼져 이젠 정석으로 여겨지니 문제란 거다.
굳이 표현하자면 길을 두고 뫼로 간다고나 할까?
고행을 자처하는 게 나아보여 그런 것인지, 고행 자체를 몰라 그런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이 글을 쓰면서도 당장 다른 나의 방법을 알려 널리 쓰이게 하고픈 데...
이걸 또 살짝 흔들어 자신의 것이라고, 원래부터 자신의 것이었다고 떠들어 대는 꼴이 싫어 망설이게 된다.
성량이 풍부한 이가 진성으로 내는 소리 울림과 성량이 부족한 이가 입에 나팔 모양의 관을 대고 내는 소리가 같다고 할 수 있을까?
이는 소리 자체를 들어 보면 당장 알 수 있으나 놀랍게도 이런 차이를 그저 무시하고 듣는 게 관행이 되어 버린 현실이 놀랍다는 거다.
음악을 한동안 즐기고 나면 뜻하지 않게 종종 이런 경험을 한다.
현장에서는 악기 소리가 골고루 울려 퍼지니 연주자나 노래를 하는 가수의 발성이 모두 어우러진 소리가 들린다.
그런데 음반을 녹음하는 과정을 보면 녹음 기술자의 청력 수준으로 녹음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청력이란 게 문제의 발단이다.
앞서 말했듯 중음이 강조된, 이제는 거의 일반화 된 데이터 방식으로 녹음이 된다.
이 음원을 가지고 다시 오디오 기기로 재생을 하면, 그 기기 자체도 또 중음을 잘 재생하도록 제작하여 재생하니...
현장에서 들었던 모든 소리가 어우러진 환상적인 음이 다소 치우친 음으로 변신하여 우리 귀에 들리고 만다.
이 소리를 가지고 우리가 좋네 마네를 평하고 있다.
웃기고 자빠지지 않았나...?
그러면서 역시 음악은 현장 청음이 최고라고 한다.
기술적인 한계를 말하기 전에 우선 기획단계에서 이 점을 다시 짚어야 한다고 본다.
가수의 목소리가 강조된 그런 방식...
중음을 강조하게 제작된 그런 방식...
이런 것들로 익숙하게 된 귀를 가지고 현장을 가서 들으니 좋을 수 밖에 없을 것이고 일칭 못 듣던 소리를 듣게 되는 것이지...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그 못 듣던 소리를 찾게 마련이 되고 만다.
그러나 이미 음원 녹음 과정에서 일부 사라지고 기기 제작과정에서 재생이 안? 되게 만들어진 기기를 갖고 재생을 하니...
소리가 제대로 나올리 만무하거니와 그 소리가 딴 소리인걸 알면서도 모른 척, 그냥 팔자려니 하며 듣고들 있으니...
현장 원음을 재생 목적으로 만들었다나...
원음이다라고 떠드는 그 소리가 진짜 원음이냐는 거다.
지금 이 말이 무슨 얘기인지 인지 못하고 읽는 분도 많으리라 생각한다.
그래서 안타깝기가 그지없다.
시간이 허락지 않아 다음에 또 이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