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신문기사에 경북 의성에서 일평생 파지 주으면서 살아 오신 할아버지가 ...마지막 남은 돈 500만원을 의성 시청에 맡기시고 하늘 나라로 가셨다는 기사를 읽었다.
경상도 북부지방에는 의외로 순박한 분들이 많이 분포되어 있다.
농사 땅은 좁고 척박하고 ,산이 많아서 기근이 심하게 들면 명석한 사람들은 쌀밥 먹을 수 있는 들 넓은 지방으로 이사를 가지만
순박한 사람들은 죽으나 사나 선대 산소를 지키면서 안태 고향에서 일평생 살다가 가시는 분들이 많은데...
그런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사용하는 언어도 거의 변하지 않는다.
필자도 도시에 산 날이 더 길지만 어릴적 배운 고향 사투리를 하나도 버리지 못하고 그대로 산다.
하여 우리나라 국문학적 측면에서 본다면 경북 산골 지방에 사시는 분들의 순수 우리 언어들을 보호하는 가장 공이 큰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다.
타 지방에서 명석하지 못하거나 , 융통성이 없거나 , 혹은 배반의 정서가 없는 순진한 사람을 때로는
"바보"
라는 단어로 함축하는데...경북 지방에는 순박한 바보라는 의미에서 사용 되는 언어가 제법 있다.
"쪼데기"
"모지래기"
"서푼이"
"쑥맥이"
"등신"
"허꺼씨더"
"멘자구"
"터구"
"팔푼이"
"두데발이"..............................
하나같이 주옥같은 우리 언어들인데...근자에는 길거리 간판 마져 오만 외래어로 쳐바르더니 이젠 사는 아파트 이름도 해석은 고사하고 외우기 힘든 정도의 외국어로 쳐바르는 속알머리없는 세상이 된 나라다.
더욱 한심한 것은 주옥 같은 순수 우리 사투리 쓰면 ...
'말조심 하라"
는 이들이 있으니 5천년간 우리 조상들이 실제로 사용 해왔던 정겨운 단어들이 자리 잡을 곳이 없어져서 전점 죽어가는 세월이다.
저는 개인적으로 경북 산골 짜기는 우리
"언어의 보물 창고"
로 보는 사람인데...속알머리 없는 이들은 우리 사투리를 비속어 정도로 취급하고 자기만 성인군자인냥 그저 중국이나 아님 외국 좋은 말만 골라서 남을 가르치려는 사람들이 유트부에도 넘치는 나라다.
위에 언급한 " 쪼데기" 나 "터구" 하는 우리 언어 단어들은 서양 유모어나 개그 보다 역사가 깊고 상대를 비방하려는 단어라기보다 상대를 해학적으로 돌려서 표현하는 일종의
"우수개 단어" 들인데..비속어 취급을 하다니!
암튼 세월이 사소한 일에도 격한 욕단어가 쉽게 사용되고 이젠 6촌이 누군지도 모르다가 서로 자기 몫 차지하려고 조상 땅 소송 재판에서야 겨우 알게되고 부모가 멀쩡하게 살아 있는데도 형제간의 상속 단돈 100만원이라도 더 챙기려고 소송 재판 하고 형수 재수 가릴 것 없이
국어 사전에 없는 육두문자 욕을 하는 각박한 세월인대..
선듯 남을 위하여 거금 500만원을 의성 시청에 내 놓으신 순박한 어르신의 기사를 이 아침에 읽고
거피 한잔 마시면서 소전에 또 다른 우리 고향 마을 순박한 분 이야기를 넌 픽션을 적어 봅니다.
우리 고향 이웃이요 친척 형님이 80이 지나서 읍내 병원애가서
"어르신은 우째 오셨닛겨?"
의사가 물으니
''내사 돈이 없으니 일평생 병원 신세 한번 진적이 없는데 ....지난 초봄 부터 자꾸 머리가 아프니더!"
혹여 병원 진료비가 많이 나 올까 걱정 스럽게 돈 없다는 이야기를 먼저 들고 나 온 분은 우리 옆집에 사시고 우리 친척 형님이시기도 하다.
머리가 깨질듯이 아프다하니 그래서 태어나 처음으로 엑스레이를 찍었고
결과가 놀랍게도 친척 형님 뇌속에는 인민군 총알이 하나 박혀 있었다.
그제야
"지가 의성 전투에 끌려 갔다가..따발총 소리가 난리 칠 때,깜박 기절을 한적이 있니더만...머리 속에 총알이 들어가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니더!"
긴박하게 총탄세례를 피아간 주고 받다가 졸도를 하고 그 다음날 깨어 났고 두상에 피가 말라 붙은 자국만 있어서
병원 후송은 생각치도 못했다고 한다.
천운으로 총알이 뼈를 통과 한 이후에 솜털처럼 안착되어 뇌혈관을 다치치 아니한 ..기적 같은 일로 본인 자신도 총알이 뇌속에 든 줄도 모르고 일평생 덕안골 논밭에서 땅파먹고 사시다가 기력이 떨어지니 그재야 인민군 총알이 밤잠을 설치게 한 것이다.
그런 일이 일어나자...친구들이 국가 보상 운운 하자
친적 형님은
"정식 군대도 아니고 그냥 낙동강 전투에 잠깐 갔다 온 거로 ...정부보고 돈 달라하마 될 순가! 까짓거 이것도 내 운인데 뭐 "
한마디로 거절하셨다.
그래서 그래도 형님은 당연히 국군 묘지에 안장 되셔야 합니다. 하여도
"나는 죽으마 할마이 옆으로 가지 그 까짓거 국립묘지는 갈 마음도 없네 본데 그런 소리 하지 말게...거절 하셨다.
총알 이야기가 안동 방송에 나왔고 지금것 의료보험 혜택도 받지 못한 사연이 나와도 형님은 고향에 묻히지 그딴 국립묘지는 안간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설명 했다.
"형님 살메골 고구마 밭에 묘 쓰시는 것보다야 국립묘지가 훨씬 좋은 곳잇씨더..땅에 묻는 것도 아이고 비들기 집같이 최신식 아파트 형식으로 지어서 그 안에 형님 형수님 뼈 모시는데..말이 국군 묘지이지 캠핑을 해도 될 정도로 언가이 공원을 잘 꾸며 놓았우요 ..
더군더나 묘지 주변에는 잡초니 꽃이니 전부 정부에서 관리 해주니더..만약 형님 살뫼골에 묻히시면 아이들이 그 먼 서울서 안동 골띠까지 일년에 몇번씩 와야하고, 잡초 뽑아야하고 올 때마다 기름값도 비싼데..형님이 국군 묘지로 가면 서울서 가까워 자식들이 가기 편하고 자동차 기름 값도안드는데..굳이 살뫼골에 왜 갈라카시닛겨!"
자식들이 용인 국군 묘지는 서울서 가까워 성묘 때 딱히 기름값도 안들고 풀도 안 내려도 된다고 하자...그제야 승낙을 하셨고
인민군 총알 덕분에 마지막은 공로가 인정되어서 형수님 묘도 파묘하여 두분 같이 국군 묘지에 안장이 되었고 나도 마지막 길을 바래다 드리고 서울로 돌아왔다.
세월이 어찌 된셈인지..갑자기 국가 유공자가 여기저기 많아지고 너도 나도 독립 유공자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조그마한 이유만 있으면 국가보고 돈 달라고 떼쓰고 안되면 길바닥에 드러 높고 하는데....
우리 옆집 사셨고 우리 친척 형님은 되시는 그분이야 그야 말로
한창나이에 학도병으로 끌려가서 인민군 총알을 하나 머리 속에 담아와서는 일평생 자신도 모르고 살았으니
당연히 국가 유공자 돨 자격이 있지만 그분이 길바락에 드러눞고 고래 고래 고함치실 분도 아니니
국가 유공자 특혜를 단 1원도
못 받은 순 쪼데기 같은 분이시지만 나는 그분을 훌륭한 애국헌신한 분으로 여긴다.
옛말에
"路上行人 口勝 碑 라 하였으니 정부는 몰라도 우리 마을 사람들은 친척 형님을 참 군인으로 기억 할 것이고
그 형님도 저세상에서 그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 하실 분으로 생각이 들어서 이만 필을 놓습니다.
2024년 12월 사람사는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