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기

새벽, 공포의 시운전

by 윤영진 posted Apr 03,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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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술 약속도 미루고 일찍 귀가해서 휴대전화 두 대 모두 치워놓고
이를 악물었습니다.
LCR이큐와 부탁받아 만들고 있는 트랜스아웃 프리 중에서 일단 하나라도 끝을 내겠다고...

정전압 전원부 완성한 것이 새벽 1시 쯤.....
(좀 좋은 섀시 주문해 놨는데 이거 기다리다가 하세월이라 4만원짜리 허점 섀시에
그냥 작업해 버렸습니다.)

수차에 걸쳐서 전원부와 증폭부 모두 오배선 확인,
이상 없음을 누차 확인해도 불안감은 여전.....
(초보의 설움. 오배선 체크를 어디 어디를 테스트해서 확인한다는 논리적인
메뉴얼도 잘 모름....ㅠㅠ)

히터 전압, B전압 모두 아주 낮게 걸어서 일단 전원 투입!

초보 자작자가 이런 첫경험을 앞두고 느끼는 공포심은 일종의 전율입니다.

혹시 불꽃놀이나 하지 않을까?
콘덴서가 폭발하지 않을까?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지 않을까?
비싼 트랜스나 코일 태워먹는 건 아닐까?
휴즈 나가는 정도는 일단 패스.....

스위치를 넣고 5-7초쯤 걸려서 차츰 B전압이 목표치까지 오를 동안
다행히 아무런 증상이 없습니다.

이 때의 기분은.....

첫 아이를 낳을 때 병실 앞에서 처음 아기를 보면서
혹시 기형은 아닐지, 손가락 발가락 숫자는 모두 맞는지....등을
살펴보는 심정하고 비슷합니다.

그런데 한 쪽 채널에서 전류가 너무 흐르면서 B전압이 반 밖에 안 나오고
당연히 캐소드 바이어스 전압도 안 나오고
플레이트 쵸크가 뜨뜻해지는 겁니다.

스위치 내리고 원인을 찾는데
아무리 뒤지고 궁리하고 헤매도 알 수가 없습니다.
1시간 반을 애꿎은 담배만 불태우며 찾고 찾다가
마침내 부근의 배선을 전부 분리했습니다.

추측이나 분석으로 범인을 특정해서 잡는 것이 안 될 때는
일단 용의자 전원을 구속해서 하나씩 무혐의자를 석방하면서
최종 용의자를 추리는 것이 마지막 해결책입니다.

역시! 이 방법을 쓰자 5분 만에 범인을 찾았습니다.
한 쪽 아웃트랜스 1차가 어딘가 그라운드에 쇼트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쇼트된 위치를 못 찾겠습니다......ㅠㅠ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아웃트랜스를 섀시에서 분리했습니다.
그러는 와중에......
아웃트랜스 케이스를 섀시에 나사로 깍 조이면서
1차 배선재가 섀시와 케이스의 사이에 조금 끼워진 채 조여진 걸 발견했습니다.

도로 바닥에 깔린 동물의 사체처럼 눌려서 내부 선재가 섀시와 쇼트된 것입니다.

다시 담배 한 발 장착.....
스스로 자아비판과 궁시렁 욕을 주절거리며......


어이가 없기도 하고, 이런 "바보같은 조립 과정의 실수"를 한 것이 화도 났습니다.
오배선 방지 등에 심혈을 기울이다 보니 의외로 그 쪽에서는 완벽했는데
섀시 조립이라는 단순 작업에서 큰 실수가......

어쨌든 다음 날로 미루거나 하지 않고 당일 문제를 해결했으니 다행입니다.

다시 배선 연결 등 정리 작업 마치고
정상 전압을 인가해서 각 부분 전압 체크를 했습니다.
설계 목표 전압 각 부분 모두 오차 범위 3% 내에 듭니다.
B전압 가변 저항을 살살 돌려서 설계 전압도 다 맞췄습니다.

모든 주요 부위 전압의 좌우 편차도 -1% 수준에서 일치합니다.

부품 선별, 저항 선별, 배선 대칭 등 공을 들인 결과라 잠시 그동안의 스트레스가 풀렸습니다.

새벽 3시 넘어서인데 고민이 되었습니다.
이상 없는 완성을 확인했으니 그냥 잘 것인지 일단 소리를 낼 것인지.....

에라- 기왕 고생한 거 소리라도 내고 자자....

좁디 좁은 방구석에 연장과 부품, 재떨이.....온간 잡동사니가
발 디딜 틈도 없이 어질러져 있는데,
까치발로 다니며 포노 재생을 위해 기기 연결을 했습니다.

전원 넣고 전압 안정화자 역시나 험이 좀 뜹니다.
프리 볼륨을 9시 이상 올리면 험이 상당히 뜨기 시작합니다.

애초에 험이 안 뜰거라는 기대는 안 했고,
우려했던 것보다는 험 레벨이 낮아서 오히려 안심되었습니다.
현재 작업해 놓은 것은 그라운드 어스 배선에 신경을 쓴 외에는 별다른
험 방지 대책은 거의 없이 해 놓은 것이니.....

그리고 지금 나는 험의 원인도 대개 알고 있고.....

다만, LCR이큐라는 것이 험에 지독할 정도로 민감하다는 건 확실합니다.
NFB형 포노이큐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공포스러울 정도로.....

험은 나중에 날 밝으면 시간 두고 줄이기로 하고
일단 집에 딱 한 장 뿐인 비틀즈의 LP를 골랐습니다.

"Long and winding Road...."

이 곡이 그동안 몇 달 동안 작업한 고생길을 가장 자위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에.....

다행히 RIAA 커브도 그다지 문제없게 들립니다.
정밀 측정과 교정은 나중에 해봐야겠지만, 청감상 전 대역 평탄합니다.
인덕터 코일이 좋은 코어에 정밀한 스펙으로 제작된 덕인가 봅니다.

저역이 좀 빠지는 것은 플레이트 쵸크 아직 홍콩에서 안 와서
인덕턴스 모자란 임시품으로 대충 해 놓은 탓이고.....

음질?

그냥 후집니다.
한 20-30만원짜리 허접한 포노이큐 정도입니다.

아마 앞으로 몇 달 간 이 "음질"이란 걸 제 궤도에 올리기 위해서
튜닝과 보정을 해 나가야 하겠지요.

여기에 에이징이라는 시간의 마법도 필요하고
.........

갑자기 방문이 열리고,
마눌님이 눈 비비고 서서 히스테리를 부립니다.

"새벽 4시에 음악 듣는 것이 제대로 정신 있는 사람이 할 짓이냐?
어휴- 이 담배 연기좀 봐----  거실에서 자! 안방 문 잠글거야!.....ㅆㄲㅃㅌ....."

고 한바탕 훈계를 하고 내려갑니다.
겹자음 많이 섞인 궁시렁은 대개 욕입니다.^^


아- 그래도 기분은 하늘을 나를 것 같습니다.
전기나 전자니 하나도 모르는 저 같은 초보 자작가가
무리인 줄 알면서 LCR이큐를 드디어 만들었다는 것이 뿌듯합니다.

시운전 하면서 휴즈 하나 안 끊어지고 정상 동작하는 것도 신기하고.....

이제 주말에 밀린 트랜스아웃 프리 완성해야겠습니다.
한 * * 님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테니......
다행히 이 작업은 이미 4번 째 같은 작업을 하는 거라 속도나 완성도에 있어서
별 격정은 안 되네요.

두 개 작업 이번 주 말에 다 마치고,
그 다음 주에 다시 낚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