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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자가증식

by 윤영진 posted Apr 30,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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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텍 게시판에 적합한 글이 아니라 망설였는데,
이규영님 글에서 느낀 점이 있고
최근 제가 스스로의 욕망의 늪에서 허우적 거리는 것이
힘든 차에 통하는 면도 있어서 올리니,
알텍 동호인분들께서 용서해 주십시오.


[욕망의 무한 자가증식]

국민학교 2학년 때부터 꾸준히
“재생음악”을 즐겼지만 제대로 오디오를 취미로
여긴 것은 30년 조금 넘습니다.

진공관앰프란 것은 1970년대 후반
조금 접하다가 멀어졌고,
다시 듣게 된 것은 1980년대 말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노후된 진공관앰프 사용하면서
앰프 휴즈조차 제 손으로 갈지 못해서 무거운 앰프를 들고
동네 전파사를 다니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겨우 땜질이 손에 익으면서 오래된 노후 기기
기초적인 오버홀이라도 하게 되니
슬슬 ‘自作’에 대한 호기심과 욕망이 생겨서
첫 작업으로 2A3 싱글앰프를 만든 것이
한 10년 전쯤일 것 같습니다.

5극관 7C7을 초단에 하나만 써서 드라이브하는
간단한 회로였습니다.

그동안 사용하던 기성품 앰프들과 장단점이 있지만
처음 작업이었던지라 완성도도 떨어지고
만족감도 낮아서 그 이후 한동안 멀어졌습니다.

그다음에는 스피커를 개조하거나 자작한다고
몇 년간 난리를 치다가 시들해졌습니다.

그러다가 오디오력이 늘면서 전체 시스템에서
“프리앰프”의 중요성이 느껴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에 흡족한 기성품을
못 찾다가 혹한 것이 “트랜스포머 결합방식”의 프리앰프였습니다.

바로 이 트랜스포머 결합 프리앰프에 대한 관심이
무지랭이 인문예술학도인 저를 땜질의 늪으로 이끌었습니다.

그렇게 한 5년 동안 하다 보니
프리앰프 한 5대, 파워앰프 한 10대....
그리고 마지막으로 LCR 이큐까지 만들었습니다.

물론 지금까지 만든 것들이 흡족한 수준은 없습니다.
만들면서 더 나아지기도 하고 못해지기도 하고....

그런데 문제는 이 “무언가를 내 손으로 만든다.”는 행위가
상당히 재미있어서 ‘중독성’을 가진다는 점입니다.

모든 인간, 특히 남자들은 유전적 본능 속에
‘도구’를 만들어 사용할 때의 쾌감이 작동되는
메카니즘이 있는 듯합니다.

특히 상대적으로 ‘파워앰프’의 수량이 많습니다.

아마 프리앰프는,
다양한 시도보다는 제대로 하나를 만들어서
오랜 시간 공을 들여서 ‘CUT & TRY’로
튜닝을 할 필요성이 강한 듯 하고,

파워앰프는 다양한 출력관과 회로로
여러 가지 다르게 만들어 즐기는 쾌감이 강한 차이로 여깁니다.

그러다 보니 지금도 집에 쌓아놓은 쓰레기 더미를 보면,
뭣뭣을 만들겠다고 구해놓은 섀시, 트랜스포머, 진공관이
대충 따져도 한 20 대 정도는 만들만큼 쌓여있습니다.

다행히 LCR이큐는 더 이상 만들 계획이 없습니다.
1호기가 대단한 완성도를 가져서 그런 것이 아니고
부품 준비와 제작 모두 너무 힘들어서
웬만하면 1호기의 트랜스포머나 부품을 엎그레이드하고
시정수를 조정해가며 튜닝하는 정도에 그치려 하기 때문입니다.

라인 프리앰프도 별 다른 관이나 회로로 새로 만들 생각은 없습니다.
이 것 역시 한 두 대 더 만들 준비는 해 놓았지만,
어디까지나 보다 좋은 섀시에 외관을 멋지게 하거나
그동안 ‘연습작품’에는 아끼던 고급 트랜스포머를
사용하는 수준에서 계획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파워앰프입니다.

포노이큐나 라인앰프는 어느 범위 이내에서
정해진 주파수 재생 특성과 ‘게인’이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파워앰프에서는
- 출력의 차이
- 구동방식의 차이
- 출력관의 차이
등에서 더 다양한 재미가 있습니다.

특히 “출력관”에 따른 다양성의 재미가
사람을 가만 두지 못합니다.

그동안 파워앰프용으로 모아 둔 직열출력관만 해도
향후 10년 내에 다 만들지 못할 정도입니다.

2A3, 210, 245, 300B… 등의 미국관 계열도 다 셀 수 없이
쌓여있고,

RS241, E406N, PX4, PX25, RE604, RS242, Da, AD1, S6, LK4110… 등등의 유럽관도 재고 정리를 해야 알 수 있을 정도로 모아놨습니다.

초단 전압증폭관, 드라이브관은 그보다 더 다양하고 많이…

인풋, 인터스테이지, 출력 트랜스포머, 전원트랜스포머, 쵸크…
도 평생 다 쓰지 못할 만큼 모아놨습니다.

그런데…

미리 만든다고 준비한 것들이 몇 년 째
쳐박혀서 놀고 있는데
다시 다른 걸 만든다고 또 사 모으는 겁니다.

최근에는 PP5/400 싱글앰프 한 대 만든다고
모든 부품을 다 준비해 놨습니다.

헌데, 이 작업엔 들어가지도 못한 상태에서
또 갑자기 송신관 앰프 만든다고
덜컥 RV258을 한 조 사고 말았습니다.


왜 이런 현상이 자꾸 확대되는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동안 유관 부품과 관을 자꾸 모으다 보니,
“조합의 편의성”이 기하급수적으로 는 점입니다.

즉, RV258 의 구매를 결정할 때도
갖고 있는 부품 리스트와 연동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아! RV258을 구동할 때 필요한 적절한 초단관, 드라이브관이
이미 있지! 인터스테이지 트랜스포머도 있고, 저항이나
캐파시터도 있고, 출력 트랜스포머와 쵸크도 있고…
전원트랜스포머와 섀시만 있으면 되는구나!”

이렇게 머릿속에서 구상이 되니까
당장 만들 일도 없고, 필요도 없고, 만들 시간도 없는 걸
스스로 잘 알면서 구매 결정을 해버린 것입니다.

어떤 앰프를 하나 만든다고 할 때
이를 위해 필요한 부품의 대다수를 새로 장만해야 한다면
쉬 포기하게 됩니다.

“그걸 언제 준비해! 지금 모든 부품 다 준비해 놓고도
시작 못한 프로젝트가 몇 개인데… ”

식으로…

그런데 워낙 부품을 오랜 동안 쌓아놓다 보니
한두 가지만 추가 준비하면 만들 수 있는
앰프의 조합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버렸습니다.

그러곤 머릿속에서만 제작계획을 제 멋대로 구성해서
충동적으로 출력관을 산겁니다.

이건 확실히 “욕망의 무한 증식모델”입니다.

즉,
A를 위한 필요로 B를 샀는데,
B가 A만을 위해서 기능하지 않고,
B 스스로 또 다른 C의 필요를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A, B, C가 모아지면
이게 다시 ‘A+B', 'A+C', 'B+C', 'A+B+C'로 조합이 늘면서
각각이 다시 D, E, F를 요구합니다.

즉, 모아진 무생물체들(기기와 부품)이
자가증식력을 갖게 되어 스스로 번식으로 하는 겁니다.

이젠, 스스로 멈출 가능성은 적습니다.

가장 확실한 방법은…

- 실직하거나 파산한다.

- 와이프가 나의 무리한 부채를 알아챈다.

- 집에 불이 나서 모아 놓은 기기와 부품을 태운다.

- 법정스님의 ‘무소유’를 10회 이상 숙독하고
1년 이상 ‘참선 수양’을 한다.

- 뭔가 훨씬 재미있고 중독성이 강한 것에 빠진다.
(도박이나 골프나, 황홀한 애인이나… )

그러나 무엇 하나 쉬운 것이 없네요…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