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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오 난감

by 윤영진 posted Mar 29,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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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질 나쁜 오디오, 잔인한 마눌님

  오디오 기기를 사용하다 보면 각각 기기의 품성이 느껴집니다.
  대체로 스피커란 것은 착한 품성을 갖고 있습니다. 물론 착하다고 모두 소리가 잘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원래 만들어진 능력이나 음질 그대로 자신이 갖고 있는 역량을 늘 최선을 다해 내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나쁜 음 신호가 들어오면 그대로, 좋은 음 신호가 들어오면 역시 그대로 자신이 가진 한도 내에서 최선을 다합니다. 그러면서 미안해하는 느낌이 전달됩니다. “주인님, 죄송합니다. 제가 능력이 부족해서 이 정도뿐 소리를 내지 못합니다.”라고…
  나름대로 비용도 많이 지불하여 오랫동안 튜닝을 한 메인 스피커와 비교해서 정말 허름한 스피커가 하나 있습니다. 중고 거래장터에 내 놓으면 2만 원쯤 받을 지 의심스러운 4인치 밀폐형 스피커입니다. 유닛을 떼어서 살펴보니 ‘MADE IN MEXICO'라고 되어 있는 페라이트제입니다. 만듬새도 진짜 허름합니다.
  그런데 이 스피커를 격에 맞게 허름한 앰프를 물리면 잘 모르는데, 나름대로 공을 들여 좋은 소리를 다듬은 앰프로 물리면 깜짝 놀랄 만큼 괜찮은 소리를 내 줍니다. 그러면서 스피커의 고마움이 전달됩니다. “주인님, 저 같은 천한 스피커에 이렇게 좋은 앰프를 물려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제 한 목숨 다 바친다는 심정으로 열심히 울어보겠습니다.”라고…

  물론 모든 스피커들이 그런 것은 아닙니다. 소위 말해서 스피커에도 ‘귀족’으로 자부하는 놈들이 있습니다. 이것들은 앰프들처럼 먼저 나서서 성깔을 부리는 식의 천박한 품성은 아니지만, 거만함과 게으름과 오만함으로 사람의 속을 뒤집어 놓습니다. “그래, 나를 이렇게 홀대해 봐라! 내가 제 소리를 내주나 보자…”라고 아예 “배를 째라!” 라며 누워버립니다.
  부미 베이스란 것을 내면서 방귀를 붕붕 끼고 있으면, 통 안에다 주인도 비싸서 덮어보지 못한 고급 양털 솜으로 내의를 입혀주고, 지가 무슨 세계적인 육상선수라도 되는 양 비싼 스파이크 슈즈를 신겨 주고, 역시 주인은 비싸서 사다 누워보지도 못하는 ‘돌침대’ 베이스를 깔아주고 해야 겨우 방귀 끼는 것을 멈춥니다.
  갑자기 쉬고 갈라는 목소리를 면도날 유리창 긁는 소리를 질러서, “아이고 왜 그러십니까?” 라며 달래보면, 요즘 기름기 있는 식사를 못해서 목소리가 갈라진다고 앙탈을 부립니다. “혹시 스피커 선이 마음에 안 드십니까? 순은선 비싼 것이 새로 나왔는데 그걸로 바꿔드릴까요? 아니면 요새 육식도 제대로 못 해드렸는데 WE 오일 콘덴서 같은 걸로 드셔 보실까요?”  식으로 살살 달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해결되는 것은 그래도 편한 상황입니다. 원래 스피커와 앰프가 사이가 나쁘지 않습니까. “나 같은 귀한 몸에 저런 천박한 앰프를 물려서 모독을 하다니! 격을 좀 맞춰주세요!”라고 히스테리를 부릴 때는 참 난감합니다.
  이런 말 듣고 참을 앰프도 없습니다. “왜? 내가 뭐가 어때서? 너는 외국에서 시집왔다고 어디 금테 둘렀냐? 그래 나 족보도 없는 자작 앰프야! 그렇지만 내 치마 들춰보고 얘기해! 내 배속에 진짜 금테 두른 것 안 보이니? 이게 WE 저항에 콘덴서고, 이게 파트리지 트랜스야! 내가 이런 말 안하려고 했는데, 니 통 그거 진짜 영국산 맞아? 주인이 업자한테 속아서 국산 통을 속아서 샀다는 설이 있는데, 너 그러면 결국 족보 사기 아니야? 어쩐지 내가 열심히 저역을 뿜어줘도 방귀나 끼고 붕붕대는 것이 의심스러웠다.” 식으로 다투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앰프란 것들은 성깔이 상당히 거칩니다. 부품 하나만 안 좋은 것을 써도 금방 신경질을 부리면서 불퉁거리며 나쁜 소리를 냅니다. 비싸고 좋은 고전 진공관을 쓰다가 중국산이라도 바꿔 꼽으면, “아니? 내가 얼마나 귀한 몸인데 이런 관을 씁니까? 한번 누가 이기나 해볼까요?” 하면서 이상한 소리를 내 줍니다.
  전압이 조금 높으면, “아 몸도 부실한데 이렇게 뜨겁게 하면 어떻게 해요?” 하면서 열을 내거나 노이즈를 뿜습니다. 커플링 콘덴서라도 망가지면, “이거 빨리 젠센 같은 고급 신품으로 안 갈아줄 겁니까? 어디 한번 내가 자해해서 연기라도 펄펄 뿜는 꼴을 볼래요?” 하면서 성깔을 부립니다.
  결국 이런 다툼에 누가 이기겠습니까? 싹싹 빌면서 항복하고 해달라는 대로 돈 처발라서 온도 맞춰주고, 전압 맞춰주고, 때 묻은 접점 청소해 주고, 하나라도 더 비싸고 고급 부품으로 계속 갈아주고 해야 마침내 좋은 소리를 내기 시작합니다.

  겨우 앰프와 스피커를 달래고, 상처 입은 마음을 담배와 술 한 잔으로 위로하며 음악이라도 제대로 한 곡 들으려고 하면 드디어 최고의 악마적인 신경질로 무장한 녀석이 잔인한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칩니다.
  “어이! 주인장 요즘 앰프나 스피커 같은 3류 건달들하고 놀다보니, 나는 눈에도 안 들어오나 봅니다? 내가 요즘 달거리 하는 거 알아요 몰라요?”
  “ 으-악!!!!  아니 왜 그러십니까? 어디 몸이 불편하신가요?”
  바로 LP플레이어란 분이십니다.

  이 분이 히스테리를 부리게 되면 정말 대책이 없습니다. 속은 정말 벤댕이 내장 정도로 작으시고, 신경질은 포노 바늘 끝처럼 날카롭습니다.
  이 분 앞에서는 발걸음도 조심해야 하고, 잘못하다가 몸이라도 툭 치는 날에는 치도곤을 당합니다. 방에 습도가 좀 높다고 비명을 지르지 않나, 바늘에 먼저 좀 묻었다고 괴성을 지르지 않나… 특히 레코드 표면에 이물질이라도 있으면 갑자기 몸을 훽 틀어서 공중으로 튀어 오르며 음악당을 뛰쳐나가버리기도 합니다.
  청중이 자리에 얌전히 앉아있는데, 연주가가 갑자기 음악당을 나가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그래도 참고 다시 달래서 모셔와야지요.
  어쩌다 감기라도 들면, “험-험-” 하면서 어찌 그리 작은 몸에서 그렇게 큰 신음 소리를 내시는지… 여기에 놀란 스피커가 “주인님! 제 좀 어떻게 해 주세요! 이러다 우리 귀한 우퍼 코일 나가겠어요!”라고 하소연을 합니다.
  하나 달래 놓으면 하나가 삐지고…

  겨우 달래서 기진맥진 음악 몇 곡 듣다가 지쳐서, 거실에 앉아 차라도 홀짝거리고 있으면, 마지막 관문이 다가옵니다. 바로 마눌님입니다.
  “에고- 오디오에 쏟을 정성의 1/10만 내게 쏟았어도 내가 당신 없고 다니지. 그 얼굴 보니, 그렇게 돈 쳐 바르고 고상하게 음악 즐기신 흡족한 표정은 아니구만…”

  ‘휘니쉬 블로’라고 하나요? 결국 마눌님의 빈정거림 한 방에 마지막 인내의 끈이 끊어집니다. 주머니에 몇 푼 챙겨 넣고 슬리퍼 끌고 집을 나섭니다.

  “옆 집 김소장하고 대포 한잔 하고 올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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