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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책임

by 윤영진 posted Dec 25,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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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희망을 잃은 다음에야 사랑의 본질을 정확히 알게 된다."

어느 고전에서 읽은 귀절인데 작가와 책명은 잊은 그 귀절이 다시 생각납니다.

전에 LP가 3천장 쯤 있다가 처분하고 10여 년을 별로 LP를 듣지 않고 지냈습니다.
지금은 한 500장 정도 남아 있는데, 소위 말하는 클래식 명반도 조금 있고
대부분 그렇고 그런 재즈나 잡동사니들이 대부분입니다.

최근 "손맛'이 그리워서 다시 LP를 듣겠다고
턴테이블 들여다 고치고 튜닝하고 LCR이큐 만든다고 부품 사 모으느라 난리를
치고 있습니다.
지난 주에는 미국에서 원하던 판 골라 사서
100수십장 쯤
지금 비행기로 공수되고 있는 판도 있고....

프리시전 파이델리티 C4 회로의 진공관 포노 이큐를 거쳐서
트랜스프리 인풋에 임피던스 맞추려고 진공관 버퍼를 써 듣고 있는데
그다지 별 불만은 없습니다.
포노이큐의 게인이 좀 낮아서 불편하기는 하지만....

바늘은 기네스북 세계 최저가 MC바늘(오디오테크니카) 10만원짜리를 주로 쓰고,
100만원 쯤 되는 바늘은 클래식 명반 들을 때 가끔 바꿔 쓰고
250만원짜리 바늘은 아예 안 쓰고 그냥 모셔만 놓고 있습니다.
청음용이 아니라 "관상용"인 셈이지요.
1천 시간 정도를 수명으로 보면 1시간에 2,500원 정도 감가상각으로
지불해야 쓸 수 있는 바늘입니다...ㅎㅎㅎ

어제 밤에도 LP판을 뒤적거리며 전에 좋아했던 판을 찾아서 들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며 발견한 것이
전부터 좋아하던 음반일수록 상태가 안 좋은 것입니다.

물론 많이 자주 듣다보니 그럴 수 밖에 없지만
자연적인 마모 수준이 아니라,
판 위에 뭔가 무거운 것을 떨어뜨려서 왕창 흠집을 낸 것도 많고
깨지거나 긁히거나 휘거나, 뭔가 지저분한 것(커피 업지른 것?)이 늘러붙어 있거나.....

결국 내가 가장 좋아했던(사랑했던) 것일수록
다치고 더럽혀지고 망가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랑은 이처럼 대상에게 상처를 줍니다.

곡도 좋고, 음질도 좋은 음반인데, 웬 사정인지 거의 듣지 않아서
이런 판도 있었나? 하면서 꺼내 본 음반은 예외없이
먼지나 노이즈 하나 없이 깨끗합니다.

이런 음반은 내게서 사랑을 받지 못한 이유로 이처럼 깨끗하게
원형을 유지한 셈입니다.

부엌으로 차 한잔 타려고 내려왔다가 무심히 식탁에서
책 읽고 있는 와이프를 쳐다보았습니다.

처음 만난 이후 사랑을 쏟을 때는 나도 모르게 많은 상처를 줬겠구나 하는
회한이 밀려오고....
언제부터인가 사랑의 감정이 식은 후에는 그 상처 위로
딱지가 앉아서 아물었겠구나 하는 자기합리화도 생각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애인으로 시작했는데
이제는 주방 아주머니와 청소부, 세탁부가 되도록 방치한 여자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과연 사랑을 빙자한 상처와
무관심에 따른 지루한 보존, 그 어느 것이 대상을 온전히 위하는 것일까 하는
번민이 들었습니다.

그러다가 눈이 마주친 와이프한테
"싱거운 사람, 왜 쳐다 보느냐?"고 핀잔 먹고
그냥 찻잔 들고 내 방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레오나르드 코헨의 음반을 걸어서 Partisan 에 맞춰서 바늘을 내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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