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이란 것의 표출은 steady 하지 않습니다.
식었다 끓었다.....
한동안 '無爲'를 향유하는 여유를 느끼다가도
불연듯 끓어오르는 욕망에 흔들리기도 합니다.
욕망이 낮은 곳에 고여있어서 드러나지 않는다면,
아마 무언가에 휘잡혀있거나 몰입해 있는 때일 겁니다.
욕망은 사람의 심적 여유와 약간의 허무감을 양식으로
비온 뒤 죽순 자라듯이 불쑥 솟아 오릅니다.
요즘 그렇게 욕망의 등밀기에 앞으로 고꾸라질 듯이 걸었습니다.
.........
어제 저녁에 와이프와 '위대한 침묵'이라는 다큐멘터리를 같이 감상했습니다.
한동안 아이들 크고 나서는 크리스마스 이브라는 것이
주는 압박감이나 별다른 의미가 없었습니다.
부부 모두 기독교와는 거리도 있고....
두 아들이 모두 제각각 개인의 시간과 공간을 차지한 이후
부부가 함께 할 일 찾기도 마땅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이 '위대한 침묵'이라는 다큐멘터리를 함께
크리스마스 이브에 감상하자는 데 서로 동의하는 일은
아주 짧은 시간만 필요했습니다.
제 처는 꾸준히 수행하고 있는 참선 수행의 관점에서,
저는 "소리"에 대한 관심에서....
저도 방송영상물 제작관련해서 25년 넘게 밥을 빌어먹다 보니
영화나 영상물을 감상하는데 있어서
나도 모르게 직업적 관점이 개입하게 되고
대상의 완성도나 작품성 등에 대해서도 남들보다
좀 더 까다로운 티를 내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이 다큐멘터리는 그런 제게 있어서 좀 충격이었습니다.
제작 여건도 나빴고, 1인 제작을 모두 수행한 감독도
아마추어적인 면이 있어서
속되게 말하는 완성도는 낮았습니다.
그러나 완성도나 기술적인 면을 까다롭게 따지고 들만한
여지가 전혀 없었습니다.
자연을 보면서 "인공적 잣대"로 재단을 하는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보통은 아무리 "대상을 객관적으로 기록한다."는 다큐멘터리라고 해도
객관이라는 수단을 매우 주관적으로 활용할 뿐입니다.
모든 다큐멘터리는 찍히는 "지적 대상(주로 인물)"이 자신이
영상으로 녹화된다는 것에 피동적으로 반응을 합니다.
놈음된 소리들 역시 "녹음이 된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그런데 이 '위대한 침묵'에서는 그런 일반적인 틀이 거의 깨져 있습니다.
그냥, 수도사들 눈에 보이지 않는 몰래카메라 같은 것이
1년 4계절 동안 그들 곁에 유령처럼 머물며 듣고 본 것이
기록된 듯 합니다.
물론 제작감독이 그런 "완전에 가까운 객관적 기록"을 컨셒트로
삼았을 것 같은 추론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이런 결과를 낳은 것은 오히려
활영허가를 19년만에 내주면서까지
아주 까다로운 "촬영 조건들"을 엄격하게 요구한 수도원 측의
"규제와 제한"이 작용한 것입니다.
절대로 수도사들의 수도생활에 개입하거나 방해하지 않으면서
조명장비도 일체 불허하고 촬영을 하라는 요구였습니다.
그 결과, 이 다큐멘터리는 "위대한 침묵"이 아닌,
"위대한 소리"로 거꾸로 태어났습니다.
위대한 역설이라고나 할지.....
"녹음이 된다."는 '전제'가 없는, 수많은 날 것 그대로의 소리가
영화 상영 내내 들려옵니다.
상영 시간 내내 거의 규칙적으로 듣게 되는 종소리를 축으로....
옷 스치는 소리,
그릇 달그락 거리는 소리,
빗물이 지붕과 바닥을 두드리는 소리,
수도사들의 옷자락 스치는 소리,
새소리와 나뭇가지 바람에 흔들리며 내는 소리,
회랑을 걷는 수도사들의 발소리,
웅얼거리는 기도소리,
삐걱거리는 오래된 마룻장 소리,
그레고리안 성가를 부르는 수도사들의 울림 그득한 소리,
식사 후 수도사가 씻어서 새워놓은 알미늄 그릇이 흔들리며 내는 소리,
방목한 소의 목에서 들리는 워낭소리....
"위대한 침묵"이라는 표제의 "침묵"이라는 단어가
심어놓았던 그릇된 나의 선입관념은 와르르 일순간에 무너지고
거의 두 시간 반의 시간 동안
저는 "소리의 성찬'을 즐겼습니다.
아- 저는....
누군가 타인을 향해 들어달라고 애타게 외치는
목적성 소리에만 익숙했었습니다.
인간이 듣건 안듣건 관심도 욕구도 없이
생성되어 들리는 온갖 소리의, 이 처절한 순수함......
이 세상은 "인간이 인간을 위해 만든 소리"를 모두 제거하면
그것이 바로 위대한 침묵이 되고,
그 위대한 침묵이 바로 가장 위대한 소리가 된다는 역설을
깊이 느꼈습니다.
요즘 들어 갑자기 과도하게 용출되던 오디오 기기에 대한
욕망이 갑자기 덧없게 느껴집니다.
이미 제 주위에도 자연의 가장 아름다운 음악들이
어떤 인위적인 장치를 거치지 않고 들리고 있었습니다.
다만, 제가 그것을 못 느끼고 있었을 뿐입니다.
식었다 끓었다.....
한동안 '無爲'를 향유하는 여유를 느끼다가도
불연듯 끓어오르는 욕망에 흔들리기도 합니다.
욕망이 낮은 곳에 고여있어서 드러나지 않는다면,
아마 무언가에 휘잡혀있거나 몰입해 있는 때일 겁니다.
욕망은 사람의 심적 여유와 약간의 허무감을 양식으로
비온 뒤 죽순 자라듯이 불쑥 솟아 오릅니다.
요즘 그렇게 욕망의 등밀기에 앞으로 고꾸라질 듯이 걸었습니다.
.........
어제 저녁에 와이프와 '위대한 침묵'이라는 다큐멘터리를 같이 감상했습니다.
한동안 아이들 크고 나서는 크리스마스 이브라는 것이
주는 압박감이나 별다른 의미가 없었습니다.
부부 모두 기독교와는 거리도 있고....
두 아들이 모두 제각각 개인의 시간과 공간을 차지한 이후
부부가 함께 할 일 찾기도 마땅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이 '위대한 침묵'이라는 다큐멘터리를 함께
크리스마스 이브에 감상하자는 데 서로 동의하는 일은
아주 짧은 시간만 필요했습니다.
제 처는 꾸준히 수행하고 있는 참선 수행의 관점에서,
저는 "소리"에 대한 관심에서....
저도 방송영상물 제작관련해서 25년 넘게 밥을 빌어먹다 보니
영화나 영상물을 감상하는데 있어서
나도 모르게 직업적 관점이 개입하게 되고
대상의 완성도나 작품성 등에 대해서도 남들보다
좀 더 까다로운 티를 내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이 다큐멘터리는 그런 제게 있어서 좀 충격이었습니다.
제작 여건도 나빴고, 1인 제작을 모두 수행한 감독도
아마추어적인 면이 있어서
속되게 말하는 완성도는 낮았습니다.
그러나 완성도나 기술적인 면을 까다롭게 따지고 들만한
여지가 전혀 없었습니다.
자연을 보면서 "인공적 잣대"로 재단을 하는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보통은 아무리 "대상을 객관적으로 기록한다."는 다큐멘터리라고 해도
객관이라는 수단을 매우 주관적으로 활용할 뿐입니다.
모든 다큐멘터리는 찍히는 "지적 대상(주로 인물)"이 자신이
영상으로 녹화된다는 것에 피동적으로 반응을 합니다.
놈음된 소리들 역시 "녹음이 된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그런데 이 '위대한 침묵'에서는 그런 일반적인 틀이 거의 깨져 있습니다.
그냥, 수도사들 눈에 보이지 않는 몰래카메라 같은 것이
1년 4계절 동안 그들 곁에 유령처럼 머물며 듣고 본 것이
기록된 듯 합니다.
물론 제작감독이 그런 "완전에 가까운 객관적 기록"을 컨셒트로
삼았을 것 같은 추론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이런 결과를 낳은 것은 오히려
활영허가를 19년만에 내주면서까지
아주 까다로운 "촬영 조건들"을 엄격하게 요구한 수도원 측의
"규제와 제한"이 작용한 것입니다.
절대로 수도사들의 수도생활에 개입하거나 방해하지 않으면서
조명장비도 일체 불허하고 촬영을 하라는 요구였습니다.
그 결과, 이 다큐멘터리는 "위대한 침묵"이 아닌,
"위대한 소리"로 거꾸로 태어났습니다.
위대한 역설이라고나 할지.....
"녹음이 된다."는 '전제'가 없는, 수많은 날 것 그대로의 소리가
영화 상영 내내 들려옵니다.
상영 시간 내내 거의 규칙적으로 듣게 되는 종소리를 축으로....
옷 스치는 소리,
그릇 달그락 거리는 소리,
빗물이 지붕과 바닥을 두드리는 소리,
수도사들의 옷자락 스치는 소리,
새소리와 나뭇가지 바람에 흔들리며 내는 소리,
회랑을 걷는 수도사들의 발소리,
웅얼거리는 기도소리,
삐걱거리는 오래된 마룻장 소리,
그레고리안 성가를 부르는 수도사들의 울림 그득한 소리,
식사 후 수도사가 씻어서 새워놓은 알미늄 그릇이 흔들리며 내는 소리,
방목한 소의 목에서 들리는 워낭소리....
"위대한 침묵"이라는 표제의 "침묵"이라는 단어가
심어놓았던 그릇된 나의 선입관념은 와르르 일순간에 무너지고
거의 두 시간 반의 시간 동안
저는 "소리의 성찬'을 즐겼습니다.
아- 저는....
누군가 타인을 향해 들어달라고 애타게 외치는
목적성 소리에만 익숙했었습니다.
인간이 듣건 안듣건 관심도 욕구도 없이
생성되어 들리는 온갖 소리의, 이 처절한 순수함......
이 세상은 "인간이 인간을 위해 만든 소리"를 모두 제거하면
그것이 바로 위대한 침묵이 되고,
그 위대한 침묵이 바로 가장 위대한 소리가 된다는 역설을
깊이 느꼈습니다.
요즘 들어 갑자기 과도하게 용출되던 오디오 기기에 대한
욕망이 갑자기 덧없게 느껴집니다.
이미 제 주위에도 자연의 가장 아름다운 음악들이
어떤 인위적인 장치를 거치지 않고 들리고 있었습니다.
다만, 제가 그것을 못 느끼고 있었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