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언제나 국가의 총력전이라고 하지요. 그 전쟁을 승리하는 것도, 억지하는 것도 또한 국가의 역량이고 지도자의 능력이라고 역사가들이 늘 강조하는 부분입니다.
43년도 새해가 밝아오자 미국은 조기에 전쟁을 종결하고자 국가의 모든 역량을 동원하는 느낌이 옵니다. 맨하튼 프로젝트의 조기성과 구축과 거양, 남태평양에서의 일본해군 세력 격퇴 등이 국가 총역량사업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요
반대로 일본은 미군의 공격을 제지하고 반격의 기회를 엿보며 그 실마리를 찾고자 백방으로 노력하고 머리를 짜내던 중 야마모도는 솔로몬제도 부근 해역에서 미군과의 최후의 대해전을 계획하고 극비에 전방시찰을 나갑니다.
** 야마모도를 사살하라. *** 극비 암호명 "펠리컨 XXXXX"(기억이?)
당시의 무전기(레이더와 결합된 제품이 많다고 함)는 요즘의 시각에서 보면 애들 장난감 수준으로 그 정확도도 떨어지고 오차범위가 측정치 보다 큰 경우가 많다고 하니 일종의 참고자료에 영감을 더하여 운용하였다고는 하나 그래도 많은 정보를 수집하다 보면 그 중에는 금싸라기 정보를 얻는 경우가 있었으며, 무전기의 성능이 미약하므로 다량의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감청 장소를 섬마다 조밀하게 배치하고, B29등 폭격기도 고공에서 무선 감청을 위해 동원하였다고 하니 무전기와 레이더의 수준을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참고로 동경 상공에서 폭격하고 중국으로 귀대하게 되어있는 제임스 둘리틀 폭격기중 일부는 엉뚱한 곳으로 날아간 사실로 미루어 그때의 레이더와 방향탐지기의 성능을 짐작할 수 있을 것임)
당시의 일부 무전기나 레이더, 앰프에는 300B를 전압안정관, 증폭관 등이나 심지어 정류관이 있었는 데도 정류관으로 사용하였다고 하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아마 이 관을 직선성, 안정성이 좋은 만능관으로 알고 회로에 사용한 듯합니다. 하기야 최근까지 NASA에서 전압안정관으로 사용(다른 좋은 전압안정관들도 많은데 왜 하필 300B를 사용했는지)했다는 것이 이상하며, 의문입니다 - 요즘 시각에서 보면 너무나도 아깝고 애석한 짓을 ---- 다만, 미군장교에게 물어보아도 비밀사항인지 코멘트를 거부하는 것으로 보아 뭐가 있는 지
--오래전에 이러한 믿음 때문인지 일본의 모 진공관 연구가 S씨가 발표한 회로를 보면 초단관, 드라이브관, 출력관, 정류관을 모두 300B로 사용한 것을 보고 실소를 자아냈던 일이 있습니다. (누구 혹시 들어본 사람이 있으면 총평이라도 좀 해주세요)
- 그런데 이 실험 정신만은 좀 생각해봐야 할 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은 오타꾸(주-집에서 틀어박혀 한가지 일에만 집중적으로 실험하고 공부하여 전문가 이상으로 된 사람) 정신이 있어서 그런지 노벨상 수상자가 엄청나게 많은 데 일부 한국인은 지는 해보지도 않고 왜 남을 비판만 해서 그런지, 아니면 남이 해놓은 것을 베껴서 그런지 한명도 없는 현실에 마음이 착잡합니다 -- 오래전 일본잡지 기사에서 마란츠7 프리에 대한 실험에서 반파정류가 더 좋다는 등, 셀렌정류가 다이오드정류보다 음악성에 더 좋다는 등의 발표기사를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다만, 미국은 암호해독의 천재 조세프 로시포르 중령(주-동명이인이 여러명 되는 것으로 보아 당시 엄청난 보안과 극비에 부쳐진 인물인 것 같음)이 모든 정보를 수집 분석하여 일본의 야마모도 제독이 솔로몬제도 부근 해상을 순찰한다는 극비정보를 해독 분석하여 미해군 최고사령부에 보고합니다. 43년04월18일 아침 09시 35분 운명의 그시간, 록히드사에서 제조한 P38 라이트닝 편대가 구름 속에서 숨죽이고 기다리고 있다가 갑자기 나타나 다른 비행기는 제쳐두고 3번째 야마모도가 탄 비행기 만을 집중적으로 공격, 일본기들의 강력한 반격저항에도 불구하고 야마모도의 비행기는 1차 폭발을 일으킨 후 밀림으로 추락합니다. -- 해군제독이 비행기의 공격으로 인해서 추락사망한 사실이 너무나 아이러니 합니다. 이를 의식해서 인지 일본해군사령부는 처음에는 야마모도의 죽음과 그 죽음의 경위에 대해서 극비에 부쳤다고 합니다
야마모도의 죽음을 통보받은 일왕은 이제 전쟁은 졌다고 땅을 치며 통곡했고 얼마나 애틋하게 생각했으면 6월5일 국장으로 장례식을 치룹니다.(해군 함장 스즈끼등 당시 남양해군지휘부의 장군이 다수 할복 자살 하였다고 전함) -- 인과 응보이며 고소한 거지 우리 독립투사와 애국 영웅이 죽임 당하셨을 때 한민족의 울분이 어떠 했겠어. 안중근 장군님이 사형 당하셨을 때의 한민족의 울분이 어떠 했겠어, 아직도 너희들의 만행 때문에 시신을 찾지도 못하는 한민족의 심정을 헤아려 보기나 한거냐, 히로히도 넌 그냥 죽은 것만 해도 한민족이 많이 봐 준거지
그때 일본해군지휘부는 미해군에게 뭔가 이상한 장비가 있는 것 같다고 추측 하였다고 함. 그도 그럴 것이 야마모도의 전방시찰은 극비사항이고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이 열손가락이내에 들었다고 하니 로시포르 중령이 얼마나 천재인지를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랄까 - 전쟁에서 승리할려면 이런 숨은 영웅이 나타나야
45년 8월 티니안 섬 등에서 출발한 B29의 단2발 원자탄에 의해 우리민족의 염원인 조국의 독립을 위해 수많은 독립투사와 애국지사가 목숨을 바치셨고 감옥에서 옥고를 치루며 숨져가셨던 그 잔혹한 일제의 침략과 압박으로부터 해방, 그리고 미주리 전함에서 항복문서 조인 우리민족의 최대 원수 스탈린의 야욕과 그 사주를 받은 김일성의 남침으로 인한 6.25전쟁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기왕 원자탄을 떨어뜨릴 거면 참모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5월에 썼다면, 그러면 미군의 사상자도 줄어들었고, 소련군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으므로 한반도의 소련 진주는 없었을 것을, B29를 동원하여 50년 11월 만주를 대대적으로 폭격하여 중공군을 차단하자는 맥아더의 건의를 묵살하지 않았다면, 한반도는 민주주의 국가로 통일되지 않았을 까 -- 나는 미국에 가본적이 없지만 미국대통령중에 트루만을 가장 저주하고 또 우리민족에게 잘못했다고 평가합니다 (약소국인 남의 나라 운명이 강대국의 책상머리에서 결정된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애통한 순간인 것을 - 지금도 북핵해결을 위해 우리가 주도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 국민이 절실하고 심각하게 느껴야 하는 데)
아직도 빨지산(빠르티잔의 일본식 발음)이 사람을 죽인다고 두타산쪽 깊은 산속에는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 큰 산 너머에서 빨지산이 총격전 끝에 잡혔다는 소문을 들으며 종달새가 하늘 높이 울어대던 5월에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십리나 떨어진 국민학교에 갔다오던 우리는 미군 헬리콥터가 요란하게 언덕위에 내리자 누구나 할 것 없이 동시에 보리밭을 가로질러 뛰어서 구경을 갑니다
번쩍거리는 헬리콥터 전등, 짐을 내리는 미군, 철조망을 치는 미군, 선물을 나누어주는 미군, 하나라도 더 받으려는 국민학생들, 언덕위에 앉아서 미군이 준 과자와 통조림을 먹는 아이들, 그 처음 맛보는 환상적인 맛 -- 지금도 고향의 그 언덕이나 강가를 지날때면 나도 모르게 자꾸만 자꾸만 눈물이 납니다.
처음에는 군부대내로는 들어오지 못하게 했으나 우리와 차츰 친하게 지내고 7월초(아마 미국 독립기념일인 듯)에는 부대내로 들어오게 하여 온갖 선물도 주고 구경도 시켜주었으며, 부대앞 눈을 장갑도 끼지 않고(장갑은 부자들이나 끼는 호사스런 것 이였음) 맨손을 호호불며 치우자 커다란 장갑을 주면서 웃던 미군들, 우리가 군화를 정성껏 잘 닦아주자 과자와 함께 폐 고철과 쓰던 진공관도 나누어 주었는 데 이 부대는 안테나가 여럿 서있었으며 통신지휘소 겸 수리소였는 지 진공관을 자주 주었으며 우리는 이것을 고물상에 가져가면 작은 진공관은 엿 1개 큰 진공관은 엿 2개를 쳐주어서 맛있게 바꾸어 먹었는 데 먼 훗날 그 사실을 미군통신장교에게 이야기 했더니 그 중에는 300B도 포함되어 있을 가능성이 아주 많다고 -- 아이고 내 300B야
*** 민주주의 국가에서 자유토론은 언제나 할 수 있고 또 많은 자유토론 속에서 인생과 심오한 철학과 경험을 얻을 수 있다고 봅니다. 다른사람의 생각이 본인과 다르다고 해서 비판하거나 형편없는 사람으로 몰아세워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칼 맑스의 자본론을 자꾸 읽어보면 공산주의의 허구성이 나타납니다, 어설프게 공부한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고 왜 공산주의가 지상천국이고 제일좋다고 선전하며 종주국이라고 자부하던 소련과 그 위성국이 몰락하면서 자유시장경제 국가를 지향하는 이유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얼마전 6.25전쟁당시 인민군 정찰국장(우리의 대령 계급인 듯)으로 전쟁 발발 3일 만에 부산까지 피난민으로 위장하여 잠입한 후 군, 관, 민의 정보동향을 파악한 후 2달이면 적화통일이 가능 하다고 김일성에게 보고했던 Y씨가 권력에서 숙청, 소련으로 망명한 후 한국을 방문하여 당시의 남침을 사죄하며 대한민국에게 용서를 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참으로 마음이 무겁고 착잡했습니다